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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특집/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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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22회 작성일 08-03-01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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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예술과‘돈'의 사회사
 아버지 부정과 ‘돈’-장정일, 「실내극」, 「해바라기」
김영희|연극평론가



1. 우아한 세계만 있을 뿐
굳이 주말이 아니더라도 백화점을 메우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세상으로 향한 창문이 사라진 그 곳에는 우리의 시선을 정신없이 이리 저리 끌며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상품이 있다. 내 눈에 들어온 상품은 특별한 후광을 받으며 순간 빛을 발한다. 그것은 당장 지갑을 얇게 하거나 한 달 뒤 카드결제대금으로 내 마음을 긴장시키겠지만, 그 순간은 아무 것도 문제 되지 않으리. 펄떡이는 욕망과 달콤한 상상과 그리고 ‘우아한 세계’만 있을 뿐!
현대 소비사회에서 돈은 평등과는 거리가 멀어 누군가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진 것 같고, 또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듯하다. 하지만 돈은 자기 증식하는 욕망처럼 늘 끊임없이 채워 넣어도 모자라는 점에선 모두에게 공평하다. 그러나 어찌 이 사실이 위로가 될까? 우리가 돈에 대한 갈증을 느끼더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는 것은 왠지 체면을 깎는 일처럼 느껴져 혼자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에 영 힘이 빠질 그 때, 이 세상은 더 이상 달콤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욕망에 자유롭지 못한 이상 누구든지 돈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멋진 몸매의 여자가 터질 듯한 쇼핑백을 들고 화려한 변신을 하는 광고는 그대로 우리의 의식 속에 침투하여 내 삶을 초라하게 만든다. 이는 기본적인 의식주만을 겨우 해결하는 삶이 아닌 더 멋지고 우아한 삶에 대한 욕망과 결핍의 확인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다. 돈으로 우리 몸은 훨씬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건강해질 수도 있다. 분위기 있는 찻집을 찾아 돈을 지불하고 먹는 동안 잠시 우리는 교양 있는 중산층이 된 듯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처럼 현대인에게 있어 돈은 행복의 문을 여는 필수조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 아닌 만큼 ‘돈’은,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그대로 사나운 권력이 된다.
한편, 국가 사이에 일어나는 돈의 권력은 폭력적이다. 지금까지도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한미 자유 무역 협정은 단순히 무역의 발생과 그 이익의 의미를 넘어서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폭력적인 힘의 행사이다. 또한 그들은 다국적 기업을 통해 세계를 우아하게 하나로 평정하고 싶어 한다. 무기가 아니라 자본의 힘으로 세상은 흡수 통합된다. “스타벅스, 맥도날드, 버거킹, 피자 헛, 티지아이 프라이 데이스, 하얏트, 메리어트 등은 세계 어느 곳에나 있어서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잊게 해 주는 곳, 그래서 나조차도 표준화된 인물인 것처럼 그럴 듯한 착각을 하게 하는 곳”(박주영 「백수생활백서」, 31쪽)이란 말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생활양식에 침투하여, 어느 새 우리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당당한 세계시민으로서 중요한 축을 그으며 그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며, 그들처럼 정해진 메뉴얼대로 웃고 떠들며 행복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자본은 지불수단으로써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표준화의 기능적 권력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며 우리 삶과 정신을 평균적인 세계로 봉합하고 억압한다.

2.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물과 ‘돈’의 의미’
이런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극작가가 장정일이다. 장정일은 여러 장르에 걸쳐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문제적으로 드러낸 작가이지만, 특히 희곡분야에서 그의 특징은 도드라진다. 이미 알려진 대로 장정일은 ‘아버지’에 부정적인 태도를 작품 속에 줄곧 드러낸 작가이다. 이는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때 아버지는, 실제 작가의 아버지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문학 속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통념화된 질서와 권위 그리고 폭력, 또한 인간성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들이 ‘아버지’ 이름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학교로, 군대로, 제도로, 그리고 ‘돈’이란 이름으로 작품 속에서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 중에서 ‘돈’은 장정일 희곡 전체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품 전면에 나타나 있진 않지만, 등장인물의 의식세계를 드러내고 작가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극적 전략으로 은밀하게 숨어있다. 따라서 장정일 희곡에 나타나는 ‘돈의’ 양상과 의미를 살펴보는 일은 ‘아버지’ 부정으로서 그의 희곡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의 희곡 중 등단작품인 「실내극」(1987)과 마지막 작품인 「해바라기」(1996)는 특히 ‘돈’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서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돈’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실내극」의 첫 장면에서 어머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우아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단조로운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곧, 아들이 등장한다. 2년 만에 감옥에서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가 맞이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2년 만에 만난 모자의 상봉치곤 너무도 일상적이고 밋밋하다. 마치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가족을 맞이하는 풍경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한편으로는 권태롭다. 그러다 먹을 것이나 생활비가 떨어지면 아들은 도둑질을 하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다. 극의 후반부에 이르면 어머니 또한 아들만 도둑질을 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도 도둑질을 하고 감옥에 들어간다.

아들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다) 지내시기는 어땠어요?
어머니 (활기에 차서) 괜찮더구나. 그런데 너는 그렇지가 못했던 모양이구나.(소파에 앉는다)
아들   (어머니에게 담배를 건네주고, 칵테일을 만든다.)
       전…… 모든 게 어렵고…… 힘들었어요……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죠....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 나갈 종류가 못 되나 봐요…… 정말이지 정상이 아니었어요.

(중략)

어머니 그래 그건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었어.
아들   (비틀거리며 술병을 가지러 간다) 그런데 여긴 엉망진창이에요. 사는 게 이렇게 힘드는 건지 처음 느꼈어요…… (술을 병째 마신다) 그리고 왜 그토록 불안한지.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고.(26-27쪽)

감옥은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위험한 죄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두는 곳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위험과 불안함에서 벗어나 삶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모자에게 세상은 오히려 위험한 곳이고 권태와 결핍의 공간이다. 바로 이들에게 ‘세상’은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감옥이며, ‘감옥’은 안전지대이다. 아들을 대신해 도둑질을 하고 감옥에 들어간 어머니는 세상에서 누리지 못했던 자유와 황홀감을 감옥에서 반평생을 보낸 나비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경험한다. 반면, 어머니가 감옥에서 해방감을 누리는 동안 아들은 세상이 주는 불안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모자를 통해 드러나는 전도된 가치는 분명 독자에게는 낯선 인식이다. 하지만 폭력과 테러가 멀리 있지 않고  가난과 굶주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돌이켜 본다면, 이 세상은 결코 안전하고 살만한 곳이 못된다. 이처럼 이 세상을 혼돈과 불안으로 인식하는 어머니와 아들은 “앞으로 지어야 할 죄가 두”렵다는 이유로 감옥 가기를 열망한다. 그들이 세상에 남아 짓게 될지도 모르는 죄는 세상과 불협하는 데서 오는 죄이거나 평범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내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그들에게 감옥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세상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오히려 신성한 노동의 연장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머니 아니, 얘야! 다 살려고 하는 일인데 누가 나쁘다고 하겠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쁜 일이란다.(23쪽)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이 옳다는 어머니의 말. 이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기독교적 엄숙주의와 위배되고 사회적 질서와 배척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상식과도 모순 된다. 하지만 도둑질을 해서 가져온 돈으로 이들 모자가 하는 일이란 겨우 쇼핑을 하고 새로 옷을 구입하고 멋진 술과 맛있는 담배를 사 들이는 일이다. 아들은 멋진 여자, 그러나 곧 자기를 떠날 여자와 연애에만 탐닉한다. 적어도 생활비가 떨어져 다시 도둑질을 하기 전까진 그들 모자는 일체의 노동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섹스에 몰두한다. 이는 신성한 노동과 그에 다른 대가로서 돈, 그리고 조화로운 지출과 저축이라는 상식적인 경제 개념에서도 벗어난다.
그러나 이들 모자는 돈에 집착하지 않으니 축적할 필요도 없고 그에 따른 불필요한 갈등도 없다. 필요한 돈은 세상이라는 금고에서 잠시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돈에 대해 이토록 태평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낯선 일이다. 이는 돈의 축적으로 새로운 권력을 꿈꾸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에 벗어난다. 도둑질이라는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구한 돈으로 그저 쇼핑하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는 일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규정한 죄의식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돈’이 권력이 된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가 더 문제적인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돈은 가치 척도를 넘어 그 자체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이다. 어느 재벌의 재산이 9천 억을 넘는다는 기사에 우리는 잠시 무력해질 것이고, 문인들 열 명 중 네 명은 연소득 100만 원도 안 돼 글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렵다는 내용에서는, 문학이고 예술이고 뭐, 돈이 최고지, 할지도 모른다. 이제 돈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는 그 사람의 사회적 능력과 위치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죽음과 섹스와 더불어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돈’은 이제 새로운 계급이 되어 우리를 억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죄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그들은 감옥 가기에 필요한 도둑질에서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곧, 이들 모자의 일탈은 돈이 잔인한 권력이 된 부조리한 사회를 오히려 경박하고 삐딱하게 홀겨 봄으로써 세상에서 느끼는 불안함을 무화하고 자신의 고통을 구원하고자 함에 의미가 있다.
곧, 상식과 욕망에서 벗어난 이들 모자가 꿈꾸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로운 세상과 곧 생활비가 떨어져 다시 도둑질을 해야 하는 결핍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새로운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결국 세상과 소통하기를 거부한 모자는 훔치는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자유와 소통을 꿈꾼다.
그런데 「실내극」에서 권력화 되어버린 ‘돈’을 부정하고자 하는 태도는 아버지 부정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는 결코 결말에 이르는 동안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아버지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는 근친상간적인 모자의 관계를 통해서 더욱 잘 나타난다. 바로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를 긍정하는 작가의 가치관이 반복 재생산된 것이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출소한 아들이 죽은 어머니를 그리며 기도하는 장면 중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로 바꾸는 주기도문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결국 「실내극」에 나타나는 ‘돈’에 대한 기존 가치의 전복과 질서의 붕괴는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되는 아버지 부정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해바라기」에서 김인은 헨리 밀러의 작품을 각색하는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인 작품을 쓰고 싶어 하지만, 쓸 수가 없다. 포르노 작품을 각색하는 일에 지치고 상처받은 김인은 제작자로부터 받은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각색을 해야 한다. 삼녀는 작가 지망생인 어린 소녀다. 글쓰기 능력과 수준으로 말하자면 김인과 비교할 수 없는 초보자다. 삼녀가 김인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가 작가라는 이유다. 하지만 김인은 삼녀를 두려워한다. 삼녀는 늘 가슴에 습작 공책을 안고 다니는데, 이는 김인의 노트북이나 타자기와 대비되는 상징이다. 김인은 삼녀가 서툴지만 필기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여 창작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부러워한다. 과연 돈에 쫓겨 허덕이며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작업을 하는 김인이 두려워 할만하다.
실제 그는 그가 각색하는 헨리 밀러 소설 일부 중에 나오는 문장처럼,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용기와 완전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꿈꾼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는, “그것은 단순하고, 거기에는 돈도 없고 재산도 없고 법률도 없고 경찰도 없고, 정부도 사형 집행인도 감옥도 학교도 없”는 세계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는 세계의 실체는 무엇일까? 돈과 재산이 필요없는 세계는 탐욕이 사라진 세계이며, 법률과 경찰이 필요없으니 평화를 꿈꿀 수 있지는 않을까? 표준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을 배출하는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난다면 훨씬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을 소망할 수 있진 않을지, 혹은 국가라는 권력으로 질서유지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는다면, 좀 더 인간의 존엄함은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바로 그곳! 그곳은 감옥이 필요없는 세상일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폭력적인 제도가 만든 모호한 경계에서 허덕이지 않고 참자유를 꿈꾸는 것이 가능한 곳이 아닐런지. 
그러나 「해바라기」에서 김인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그가 꿈꾸는 세계와 멀다. 무엇보다 김인은 원고료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글을 고통으로 써내려가야 한다. 아니 각색해야 한다. 글을 쓴다는 작업은 문장을 통하여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다. 하지만 김인은 포로노 소설을 각색 작업 과정에서는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문장을 통한 세상과 소통하기에서 단절감을 경험해야 한다. ‘돈’을 받고 억지로 글을 써야 하는 그의 글쓰기는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일일 뿐이다. ‘돈’의 논리로 만나는 세계는 불모와 파괴의 세계일 뿐이다. 글쓰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각색 작업을 그만두고 싶지만 ‘채찍’을 중요한 소품으로 들고 나오는 제작자 오유희에게 돈을 받아 써버렸으니, 그럴 수 없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글쓰기를 시도하지만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에 글을 쓸 수가 없다. 마침내 김인은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그를 찾아오는 많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모두 죽여 마당에 파묻어버리는 엽기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각색의 글쓰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바라기>라는 창작 희곡을 쓴다. 화재 조사를 하러 집으로 온 사람들이 창문의 커튼을 걷자 창문 밖으로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 있다. 김인이 죽인 여자들이 거름이 되어 핀 해바라기는 유독 붉다. 창밖에서 죽은 여자가 거름이 되어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는 동안 김인은 자신의 창작 희곡 <해바라기>를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김인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고양이 울음이 아닙니다. 저 노래는 해바라기에서 나옵니다. 저 해바라기 꽃 속에서 수천 수만의 흰옷 입은 어머니가 걸어나옵니다. 그들은 둥글게 손잡고 춤추며 노래합니다. 나는 그 속으로 끌리듯 걸어갑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달의 중력이 파도를 끌어당기듯이 나는 작은 물방울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칩니다. 성스런 여자들의 둥근 원은 잠시 나의 진격에 한 모서리가 찌그러집니다, 그러나 달이 그러하듯이 흰색의 둥근 원은 쉽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초생달처럼 깨어져 나갔던 누이는 붉게 불타는 혀로 나를 삼키고서 더 큰 만월을 짓습니다. 고양이에게 찢겨진 생쥐처럼 나는 그녀의 피와 살이 되어 그녀와 함께 둥글어집니다. 나는 저 달의 아이…… 저 달의 정부, 달의 죄수입니다.

“달의 중력이 파도를 끌어당기듯이” 김인이 “작은 물방울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는 경험은, 나와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고 확산되는 동일성의 경지이다. 그 연결은 지상에서는 성스러운 여자들의 둥근 원무와 천상에서는 둥글고 꽉 찬 만월로 이어진다. 바로 달과 해바라기와 원무가 보여주는 세계는 조화와 충만의 세계다. 그의 손은 경찰관의 수갑으로 자유를 구속당하지만, 이미 그는, 그가 꿈꾸었던 세계의 한자락을 창문 밖으로 붉게 피어난 해바라기꽃과 자신이 쓴 <해바라기>를 통해 본다. 이는 앞서 꿈꾸었던 세계로서, 더 이상 법률과 감옥이 필요하지 않은 세계, ‘돈’도 재산도 그리하여 어떤 폭압적인 권력도 없는 참자유의 세계가 붉게 그리고 활짝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해바라기>에서 김인은 ‘돈’ 때문에 자신을 소외시키고 세상과 소통하는 글쓰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마침내 <해바라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3.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의 어긋남.
행위의 문학으로서 희곡은 등장인물의 행위를 통해 주제가 선명해진다. 특히 반복되는 행위는 주제를 드러내는 중요한 극적 전략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실내극」과 「해바라기」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것은 ‘채우는’ 행위란 점이 주목된다. 먼저 「실내극」을 보자.

어머니와 아들 퇴장, 곧 두 사람은 번갈아 무대를 들락거리면서 티브이, 전축, 가구, 식료품 등을 안고 온다. 최소한의 소도구만으로 꾸며진 무대가 금세 꽉 찬다.(28쪽)

「실내극」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물건을 훔치는 행위, 그것만으로는 전통적인 극의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극적 공간인 세상에서 물건을 훔쳐 무대 공간으로 나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소도구만으로 꾸며진 무대가 금세 꽉’ 찰 때까지, 무대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머니와 아 아들이 물건을 훔쳐 나르는 일밖에 없다. 여기에 빼앗는 자와 뺏기는 자의 극렬한 대립과 치열한 갈등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치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무대가 의자로 꽉 채워지는 장면설정과 비슷하다.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에서 등장인물은 의자에 결코 앉지 못하듯이, 「실내극」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그들이 훔쳐온 물건을 소비하지 못하고 그저 쌓고 채우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모자가 감옥에 가기 위해 반복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우선 해석할 수 있지만, 무대를 꽉 채운 물건과 그것이 주는 이미지에서 다른 의미를 연상할 수 있는데, 바로 현대인들의 욕망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곧, 현대 소비 사회에서 인간은 생명과 생활유지에 필요해서 상품을 원하기보다는 그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끊임없이 상품을 원한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광고 사회이다. 한 순간이라도 멀리하기 어려운 광고는 현대인의 욕망을 더욱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몇 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는 대형 할인점은 우리의 밤과 낮을 바꾸어 놓고, 우리 동네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백화점은 철저하게 계산한 동선으로 우리의 쇼핑을 돕는다. 아니 쇼핑이 우리를 이끈다. 이제 할인점과 백화점은 단순히 상거래가 일어나는 장소를 넘어 현대인에게 사교의 장소인 동시에 소위 현대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한 정보를 얻는 원천이 된다. 이제 상품을 사고 나르는 행위에서 안정감을 찾는 현대인은 하루라도 돈을 쓰지 않거나 쇼핑을 하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힌 듯하고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벗어난 듯한 불안감을 느낄 정도가 됐다. 
「실내극」에서 어머니와 아들 또한 이런 비어있는 현재에 사로 잡혀 있다. 훔친 돈으로 비어있는 냉장고 안을 채우고 술과 담배를 찾고 여자를 구한다. 훔치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무대 가득히 물건이 쌓여 그들의 존재는 무대 위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은 ‘쫓기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그들은 그런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물건을 훔쳐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속된다. 따라서 모자가 세상의 물건을 훔쳐 무대로 가져오는 것은 욕망과 결핍의 결과로 볼 수 있는 한편 ‘돈’이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게 된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다.
「해바라기」에서 김인을 찾는 모든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먹을 것을 가지고 온다. “예컨대 여기자, 출판사 여직원, 소녀 팬은 그의 집 냉장고를 가득 채워줄 쇼핑봉지를 안고 오며, 우유 아줌마는 우유 상자들, 그리고 어머니는 밀감을 치마폭에 잔뜩 싸안고 온다.” 또한 그 여자들은 냉장고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두는 것을 잊지 않는 대신 그 여자들은  ‘몸’을 통해 김인과 소통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름’이 없으니 여자들은 정체성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김인과 소통도 어렵다.

김인   호텔 앞에는 커다란 백화점이 있었어…… 바겐세일을 한다고 백화점은 장사진이었어…… 나는 여자를 그 백화점 문 앞에 눕히고 외쳤어…… 체중계 사려, 체중계 사려…… <중략> 그래서 사람들이 앞다투어 자신이 들고 있던 물건을 얼굴 없는 여자의 몸에 올려놓았고, 그녀는 정확히 그것들의 무게를 맞추었어…… <중략> 그런데 갑자기 벤츠의 뒷문이 열리고 이제는 너무 멀어 진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저울 여자가 내게 이렇게 소리쳤어……50……40……30……20……10……5……3……1……0 너는 곧 제로가 될 거야, 하고.(376쪽)

악몽을 꾸고 일어난 김인은 꿈속에서 만난 체중계 여자에 대해 소녀팬에게 말한다. 자신의 몸에 사람을 얹어두고 정확하게 몸무게를 알아맞히는 얼굴 없는 여자 이야기다. 현실에서 김인을 찾은 여자들은 꿈속의 여자가 ‘얼굴’이 없듯이 ‘이름’이 없는 여자들이다. 이는 작품 속에서 김인을 찾는 여자들이 개성이나 인격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와 단순히 냉장고에 채워놓는 기능만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냉장고는 물건을 신선하게 오랫동안 보존하는 물건이라는 소박한 의미를 넘어서 있다. 신선하게 유지해야 하는 물건의 양에 따라서 냉장고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욕망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큰 냉장고와 그 속에 꽉 찬 음식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을 준다. 여자들의 방문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김인의 냉장고도 늘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름 없는 여자와 소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작가의 글을 각색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한, 김인은 스스로가 ‘빈 껍데기’란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와도 자신과도 소통할 수 없는 김인은 무중력의 인물일 뿐이다. 바로 그는 얼굴 없는 여자 체중계의 계수에 의하면, 곧 제로가 될 정신적 공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인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의 허무한 경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남의 글을 각색하는 허무한 글쓰기가 아닌 고통이 따르지만 스스로 충만한 글쓰기를 원한다.

      김인이 노트북을 챙겨 삼녀에게 준다.

김인   자, 내 노트북엔 비밀이 없어…… 그 안의 것들은 디스켓에 복사가 다 되어 있으니 이걸 가져.
삼녀   정말 이러시면…….
김인   공짜가 싫거든 삼녀도 나에게 무엇인가 주면 되지?
삼녀   제가 가진 것 중에 선생님이 필요로 하시는 게 뭐 있을까요?
김인   있지. 네 등 뒤에 숨긴 바로 그것 말이야.
삼녀   이 노트말인가요? 이건 너무 보잘 것 없어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선생님의 노트북과 바꾸겠어요.
김인   (노트의 표지를 열고)무지개라……. 삼녀가 쓰고 있는 작품의 제목인 모양이지?(389쪽)

노트북은 다섯 손가락에 골고루 힘을 주고 썼다 지우다를 반복해서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듯 자판을 두드리고, 언제 어디서나 삭제와 편집과 고쳐쓰기가 자유롭다.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복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원본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 이는 <무지개>를 제목으로 하고 있는 삼녀의 습작노트의 의미와 다르다. 삼녀의 습작노트는 영혼이 담긴 것으로 각색의 글쓰기를 하는 김인에게는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보도록 하는 불편하고도 두려운 오브제이다. 노트북으로 원고를 쓰는 김인은 삼녀의 습작노트와 그의 노트를 바꾼다. 노트를 손에 넣게 된 김인은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화해를 시도한다. 원고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글이 아닌, ‘얼굴’과 ‘이름’이 있는 글을 강렬히 원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원고료, 가득 채운 냉장고, 노트북으로 연상되는 김인의 물질적 풍요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삼녀의 습작노트 앞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한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작가는 아니지만, 늘 고양이 울음소리를 두려워하며 악몽에 시달려야 하고 그럴수록 여러 여자와 함께 성도착적이고 가학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평정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의 어긋남을 바로 잡는 가운데,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적인 행복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그 지점에서 김인은 미친 듯이 <해바라기>를 창작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제작자 오유희로 상징되는 세상은 ‘돈’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강요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물건을 가지고 찾아오는 여자를 죽이고 매장하는 혼돈스런 과정에서 창의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매장하지 않는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그는 각색이 아닌 자신의 작품 <해바라기>를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살인이란 죄목으로 감옥으로 가는 일만 남았겠지만, 아마도 「실내극」의 어머니와 아들이 만날 수 있었던 자유를, 그 곳 감옥에서  비로소 체험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름과 얼굴을 가지지 못하고 암흑같은 세상에서 눈뜨고 사는 것보다는 얼굴과 이름을 죽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좁은 감옥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는 그곳에서 고양이 울음소리에 시달리지 않고, 얼굴 없는 여자 꿈도 꾸지 않은 채 달콤한 잠에 빠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돈은 그곳에서 최소한 횡포로 작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김영희
부산대․부경대 강사. 대표 논문으로 1970년대 한국연극의 실험성 연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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