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6호 신작단편/방현희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단편|
드빌 초콜릿, 그 남자의 손목시계/
방현희
그 자가 나타났다. 나는 얼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역시 베이커리 앞에서 손목시계를 눈높이까지 올려 들여다보았다. 맞춤 두 시. 그는 언제나 정확했다. 그는 내가 있는 수도약국 쪽으로 곧장 내려왔다. 까딱까딱, 고개를 정확히 오십 분에 맞춰 끄덕이는 바람에 그는 언제나 정시 십분 전을 가리키는 것 같다. 무심코 보면 오른쪽 다리까지 저는 것 같지만 그건 심하게 까딱이는 고개 탓이 컸다. 그는 수도약국 앞에 이르자 다시 한번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몸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좌측으로 돌면서 몸을 너무 많이 틀었나, 그의 몸이 오른편으로 기우뚱하면서 발이 삐끗하는 순간 나는 얼른 달려가 부축하려고 팔을 내밀었다. 아차, 이런 순간에 이런 동정심이라니, 싶어 다시 보니 발을 삔 것도 몸이 기우뚱한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정확하게 몸을 돌리면서 고개까지 까딱이느라 내 쪽에서 보기에 움직임의 각도가 지나치게 컸을 뿐이었다.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굳센 동작으로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수도약국을 지나 모퉁이에서 몸을 휙 돌렸다. 재빠른 그 행동을 보자 무거운 코트 속에서 후끈 열기가 느껴졌다. 코트 깃을 열고 열기를 식힐 겨를도 없이 재빨리 달려가 그가 군악대처럼 발을 돌린 지점에 무슨 표시라도 있나 살펴보았다. 그가 지나가고 내가 달려가는 사이, 벌써 네다섯 명의 행인이 밟고 간 그곳은 부근이 다 그렇듯이 아귀 맞지 않는 검은 보도블럭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 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시계를 힐끗 살펴보니 정확히 오 분 이십팔 초. 안국역 방향 골목 끝에서 수도약국까지, 사흘 연속 입은 후줄근한 점퍼에 경추 경련을 일으키는 자치곤 빠른 걸음이었다.
나는 가게들을 따라 몸을 바짝 웅크리고 따라붙었다. 마지막 겨울해인가. 등줄기가 뜨거울 정도로 햇빛이 내리쬐었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가죽 자켓은 쉽게 눈에 띄는 탓에 재미없게도 고등학생 때 입었던 재색 더플코트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는 벽을 더듬고 한 손으로는 더플코트의 단추를 풀며 그를 쫓았다. 일 미터 육십오 남짓한 키에 삐쩍 마른 몸피, 왼손은 언제나 주머니 속에 넣고 오른손을 힘차게 흔드는 그를 따라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서 잠시 잠깐 한눈이라도 팔게 되면 그날은 그를 영영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물론 뒤를 쫓은 것도 네 번째쯤 되고 보니 나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걸음으로 일정하게 걷고 있었지만 방향전환을 할 때는 매복에 능한 첩자처럼 순식간에 몸을 감추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세 번이나 뒤를 밟았지만 매번 이 골목에서 그를 놓친 것이다. 오늘은 나도 머리를 좀 써서 미리 수도약국 앞에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고 그게 맞아 떨어져 그는 바로 내 코앞에서 획 커브를 돌았다.
그는 일정한 간격으로 까딱까딱 고개를 까딱거리며, 팔을 절도 있게 흔들며 삼 분 가량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너무 바짝 따라붙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방향전환이 빠르니 조금만 거리를 둬도 놓치기 십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순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차, 또 놓치는구나 싶어 황급히 그가 사라진 곳으로 뛰었다. 표구사 옆으로 아주 작은 골목이 보였다. 그리로 숨어들어간 게 분명했다. 그 골목은 또 몇 보 앞에서 꺾여있었다. 나는 거기까지 황급히 뒤따라가 행여나 싶어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들이밀어봤지만 이미 그 골목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흔적이 증발한 곳에서 그의 흔적을 낚아챘다. 흠, 그가 숨은 곳을 알았어.
나는 오늘 알아낸 만큼을 어머니에게 전해줄 것이다. 어머니의 멍든 얼굴을 감싸쥐고 가능한 한 조그맣게.
“들어보세요, 어머니. 오늘 드디어 그가 어디를 가는지 알아냈어요. 수도약국 뒤로만 가면 귀신같이 사라지곤 했잖아요. 표구사들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 많은 표구사 틈에서 감쪽같이 없어지는 게 이상했죠. 그 근방은 작은 골목들이 얽혀 있어서 잘 쫒아가야 해요. 오늘도 바짝 따라 붙었는데 좌로 돌고 우로 돌더니 금세 사라져버렸더라구요. 하지만, 전 알아챘어요. 누군가 금방 밀고 들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작은 문을 발견했던 거죠. 창문 하나 안 달려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지만, 시치미를 떼도 그렇죠, 아무리, 내가 모르겠어요. 그가 그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없어졌는데요. 작은 팻말에는 ‘보스’라고 적혀 있었어요.”
어머니는 퍼렇게 멍든 광대뼈를 내 손아귀 속에 숨기려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퍼런 멍을 들여다보며 그 멍을 만든 자를 향해 가슴을 벼릴 것이다. 그 자가 억지로 잡아끄느라 손목을 잡아 비트는 통에 몇 번이나 다친 손목으로 어머니는 얼굴을 가리려 하겠지. 나는 얘기를 들려주는 동안 냄비조차 들지 못하는 어머니의 오른손 엄지 인대만큼만 그 자의 인대를 비틀어놓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겠지. 그 자의 행적을 들려주고 나면 가여운 눈두덩에 고운 분홍빛으로 메이크업을 해줄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어머니, 기다리세요. 내가 어머니를 도와줄 거예요.
나는 ‘보스’앞에서 입술을 쭉 빼물고 어깨를 살짝 추슬렀다. 앞에서 어정거리다가 들키면 모든 게 허사지 싶어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일은 바로 이 골목 앞에서 시작하는 거야. 그 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겠지. 그런데 저 작은 문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지? 골목을 빠져나오며 다시 한 번 힐긋 돌아보았지만 문 양쪽 벽은 창문 하나 매달리지 않은 노출 콘크리트였다. 작은 카페 같은 한쪽짜리 나무문을 지켜볼 만한 곳을 재빨리 살펴보았지만 불행히도 그 좁은 골목엔 떠들썩한 가게도,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염탐을 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분명 틈새는 있는 법. 보스, 보스라.
십 분 이십 초 남짓.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해서부터의 시간이다. 그 자를 쫓기 시작하면서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그 자처럼 시계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전철역에서 막 빠져나올 때라든지, 골목을 바꿀 때든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이랄지, 그렇게 하잘 데 없는 일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손목을 높이 들어올리고서. 그가 시계를 볼 때마다 나도 반사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가 이토록 또박또박 시간을 맞추며 제 할 일을 정확히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래로 처진 입을 꾹 다물어 입 주위에 고집스러운 작은 주머니를 만들고 정면과 시계만을 주시하는 그의 눈을 가끔 보게 되면 그 지나친 엄숙함이 역겨워지곤 했다. 그는 저 엄숙한 얼굴로 무슨 짓을 하며 사는 걸까.
베이비 블루에는 녀석들이 일찍이도 출근하여 서빙하는 여자애를 꿰차고 앉아 있었다. 그 중 주방을 보는 녀석에게는 미행할 때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말을 해놓은 터였다. 녀석은 벌써부터 신이 나서 언제쯤 그 일을 맡게 될지 만날 때마다 졸라댔다. 하지만 정작 나는 녀석의 지나친 오지랖이 부담스러워 녀석을 택한 것이 잘 된 일인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녀석을 본체만체하기도 했다. 오늘도 내게 따라붙는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바로 들어가 남아 있는 몰트위스키에 소다수를 따랐다. 일렁이며 소다수와 섞이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이 지독히 차갑게 타올랐다. 다시 한 잔을 만들어 녀석 옆으로 갔다. 엉덩이를 걸치며 나지막하게 한마디 질렀다.
“보스로 들어가더군.”
녀석은 금세 반색을 했다.
“보스라구? 으흠, 수상쩍은 냄새가 풍기는데.”
어깨를 추스르며 제법 무게를 잡던 녀석이 내 술잔을 훔쳐보았다. 나는 어림없는 수작 말라는 표정으로 술잔을 움켜쥐었다. 영업전에 마신 것을 알면 마담이 한소리 하겠지만 나만한 바텐더를 구할 수가 없으니 그녀도 어쩔 수는 없었다. 하이랜드 싱글몰트는 정말 일급이야. 달지 않은데 달콤한 향이 감기거든. 녀석의 군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아랑곳없이 다시 한 입 마신다. 영업이 끝난 뒤 컴컴한 바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이걸 마시면 오크통 속에서 웅크린 채 석탄의 열기를 쬐는 보리알이 된 듯했다. 그건 이상하게도 그 자에게 죽도록 맞고 숨어들어간 벽장의 습한 기운과도 비슷했다. 엄마의 울음소리는 가라앉았다 높아지며 벽장문에 끼쳐오고 나는 숨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곤 했다. 몇 년 동안 처박아 둔 이불솜과 마른 홍합과 새우, 그리고 깡통 분유의 냄새. 벽장 안에는 언제나 남양 분유가 남아 있었다. 눈물을 훔치며 알미늄 바닥을 긁어 분유를 먹고 있으면 엄마가 기신기신 벽장문을 열었다. 그럴 때 엄마는 다리 하나쯤 절룩이거나 나를 끌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갈비뼈가 부서져 있었다. 엄마는 왜 도망가지 않을까, 날 데리고 도망가버리면 맞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작고 작은 보리알이 되어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며 뜨거운 것도 모르고 석탄에 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내일은 어떻게 뒤를 밟을 거야?”
주방 녀석도 맛을 다루는 직업인인지라 혀끝이 유달리 민감해서 내가 만들어준 술맛에 이미 영혼을 뺏긴 상태였다. 반도 안 남은 내 잔을 기웃거리며 영업이 끝날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한다. 내일부터는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두 시 삼십 분 전에 수도약국에서 만나자. 나는 녀석의 환심을 사는 말도 덧붙인다. 영업만 끝나면 맛있는 술을 한 잔 마실 수 있을 거야. 계획은 잘도 진행되어갔다. 녀석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에 있을 우리의 성찬을 위해 최고급 치즈를 맨 먼저 떼어놓으려. 나도 천천히 일어나 바를 정돈한다.
자정 즈음, 그녀가 왔다. 그녀는 수요일과 금요일 밤에는 일이 없거나 있어도 일찍 끝나거나 하는 모양이었다. 꼭 그 시간에 왔다. 그녀는 바의 끝자리 커다란 양초가 타오르는 곳에 앉았다. 망설임 없이 발렌타인 12년산 같은 위스키를 찾는 자들에게는 시키는 대로 가져다줄 뿐이지만 바텐더에게 좋은 술을 청하는 보기 드문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몰트위스키를 권한다. 지난 달 말, 그녀는 처음 그 자리에 앉으며 술 이름이라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이 무슨 술이 있죠? 라고 물었다. 메뉴판은 읽지도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술의 세계를 알려준다는 것은 너무 짜릿한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새로 글렌피딕을 꺼냈다. 그녀에게 피트의 풍부한 훈향을 맡게 하고 싶었다. 그녀 또한 오크통 속에 웅크린 기분이 될지 모른다. 사슴이 있는 계곡, 이름 또한 짜릿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작은 오크통 속이라도 견딜 만 할 것이다. 나는 일부러 가슴 앞에서 삼각형의 긴 병을 안아 쥐고 천천히 은박지를 벗기고 뚜껑을 돌려 딴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끔 그녀와 눈을 맞춘다. 그녀도 가끔씩 눈으로 웃어준다. 술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면서 한 입에 털어넣고 단숨에 꿀꺽 삼키지 못하도록 주의를 준다. 잠시 입 안 가득 물고 있어봐요. 점막으로 향이 스며드는 시간을 기다려줘요. 코로 향기를 내뿜는 시간도 있어야 해요. 이런 시간, 오래 끌고 싶다.
주방에서 녀석이 고개를 힐끔 내밀고 눈짓을 했다. 마담은 조금 전 홀에 나타나 금고를 비워갔다. 홀에서 서빙하는 녀석과 여자애도 마담과 함께 퇴근해버렸다. 이제 구석자리에서 속삭이는 커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주방 녀석이 조르륵 썰린 치즈접시를 들고 그녀 옆에 걸터앉자 나는 얼음덩어리를 꺼냈다. 제빙기에서 찍어낸 똑같은 모양의 각얼음을 내 소중한 친구들에게 대접할 수는 없었다.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송곳으로 찍어 거칠게 부쉈다. 송곳으로 얼음을 내리찍을 때마다 나는 휘파람을 분다. 누군가를 찍고 싶은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녀가 있을 때는 그래서 다행이다. 얼음조각이 튀었는지 그녀가 얼굴을 닦으며 웃었다. 저렇게 내 앞에서 웃지 않는가. 그녀의 짧고 높은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얼음 조각을 그녀 가슴에 넣고 싶었다. 벌어진 앞섶에 정확히 던져 넣을 수 있는데. 하지만 이 신성한 시간에 웬 망녕이냐, 싶어 계면쩍은 웃음으로 속셈을 숨겼다.
가장 투명한 온 더 락 잔에 거칠게 조각난 얼음을 넣고 글렌피딕을 따랐다. 거친 얼음을 타고 내려가는 호박색 액체가 양초의 불빛으로 더욱 붉었다. 술이 흐르면서 얼음을 타다닥 터트렸다. 얼음계곡으로 황금빛 술이 흘러 불길이 홍수처럼 계곡으로 흘러내리던 만화영화 ‘밤비’가 떠올랐다. 얼음이 미세하게 터지는 소리와 나무가 불에 타면서 갈라지는 소리가 혼선을 빚었다. 나는 그녀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밤비’봤어요? 그럼요, 어렸을 때 맨날 봤던 걸요. 나는 얼굴 근육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그녀도 밤비를 좋아했구나. 나는 그녀를 향해 미간을 다 펴고 함박 웃어주었다. 그랬구나, 나도 매일 밤비를 봤어요. 난 마지막 장면을 자꾸 돌려봤어요. 그녀가 뭘 그럴 거까지 있었냐는 듯이 물었다.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장면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자꾸 돌려봤어요. 산에 불이 났잖아요. 근데 아빠 사슴이 아기 사슴을 부르느라 우짖는 거 같은데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그게 난 이상했어요. 그녀가 그게 뭐 이상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나는 반문했다.
불길이 타오르는 산을 치달아 내려오는 사슴들은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나 양이라면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울 텐데 도대체 사슴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두려운 눈을 높이 쳐들고 입만 벌릴 뿐이었다. 아기 사슴은 아무리 뛰어봐도 아빠 사슴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불길이 꼭대기로 치솟지 않고 계곡으로 사슴들을 뒤쫓아내려왔다. 목소리가 없는 아빠 사슴이 답답해서 발을 굴렀다. 목소리가 없어 아기 사슴을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불러주기도 했다. 아기 사슴을 불 속에 남겨둔 것은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지, 비정해서가 아니었다. 아빠라면 당연히 아기를 부를 것이므로. 사슴 울음소리 대신 숲이 불타는 소리만 방안을 가득 메웠다. 타다닥 빠지직, 쿵. 그녀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행복한 공감대는 물 건너갔다. 어설픈 내 말재주가 답답했다. 아빠 사슴은 당연히 아기 사슴을 구해줘야 하잖아요. 근데 그 아빠 사슴은 결국 혼자 살아남아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자 살아남아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요. 다시 사랑을 하고 아기를 낳고. 물론 마지막은 나의 해석이었다. 그것 밖에는 달리 이유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주방 녀석이 내 말을 끊고 얇게 썰린 사과에 치즈를 한 조각 얹어서 그녀에게 건네주며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하던 말을 접고 납작한 접시에 꼬냑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나서 시가를 넣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굴리다가 녀석의 수작을 보았다. 녀석이 알아듣도록 일부러 피식 웃고는 시가를 그녀와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한 번 맛보면 절대 잊지 못할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입을 쭉 내밀고 양초 심지에서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본 녀석의 눈이 순간 초점을 잃었다. 나는 녀석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안다. 그래서 나도 한 입 빨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 하늘을 날던 하얀 새가 와사사 얼음처럼 부서져 사방으로 날리는 장면이다. 눈알이 사방으로 부서져 흩어지느라 안저가 묵직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녀석도 눈알이 해체되는 쾌락을 누리고 있을 것이었다. 쾌감은 그 자를 뒤쫓고 무엇인가 무서운 일을 계획하고, 하는 그런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눈알도 부서졌겠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일 게다.
“그 작자를 왜 뒤쫓는 거지?”
꼬냑에 젖은 시가를 물고 녀석이 물었다. 결국 녀석이 물었다.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기 위해 다시 한 입 쭉 빨아들였다. 머릿속이 수만 조각으로 갈라져 흩뿌려지더니 한 점 한 점 붉은 벨벳 위로 떨어져내렸다. 향기란 차원이 다른 세계에 속한 것임이 분명했다. 앞뒷말을 계산하고 후환을 두려워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몸 어디선가 시키는 대로 간신히 입을 열어 연기를 내뿜으며 그 연기 끝에 몇 마디를 딸려 내보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
지켜야 할 사람. 내 입에서 나온 말일까. 내가 뱉은 내 말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내 대답을 어떻게 새겨들었는지 녀석이 시가를 힘 있게 빨아들이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그가 누구이며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짐작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그 자의 뒤를 밟고 난 뒤에는? 그 자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는? 그 자의 정체쯤이야 모른다한들 아무 상관없으면서, 하려는 일을 그만 둘 생각도 아니면서, 무엇 때문에 며칠 동안 그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 시가를 빨아들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둥 마는 둥, 아니 서둘러 생각을 지우고 그녀에게 연거푸 잔을 내밀었다. 내가 잔을 내밀면 그녀는 내 눈을 먼저 들여다본 뒤 잔을 부딪쳤다. 가끔 그녀와 나는 서로 부딪친 잔을 오래도록 떼지 않기도 했다. 셋이서 피워댄 시가로 향긋한 연기가 온몸에 배어들었다. 생각이 없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주변이 점점 좁혀 들어오고 어두워지는 게 아늑한 벽장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대개는 벽장 아래층에 기어들어가 웅크리고 있곤 했지만 간혹 어머니의 비명이 높아지면 나는 벽장 이층으로 올라가 이불더미 속에 꽁꽁 숨어버리곤 했다. 눅눅한 이불이 살갗에 둘둘 말리면 웬일인지 죄책감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어머니를 구해낼 힘도 없는 어린 녀석, 퀴퀴한 이불냄새에 숨이 막혀버릴 듯했지만 얼굴만 내밀고 남양분유를 한 숟가락씩 떠먹으며 입천장에 엉겨붙는 분유덩어리를 떼어내느라 신경 쓰다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어느 결엔지 그녀는 내 배 위에 엎드려 있었다. 내 얼굴은 반쯤 그녀 얼굴에 덮여 있었다. 입에는 머리카락을 한줌이나 물고 있었다. 주변이 아주 적막했다. 내 몸을 물컹하고 묵직하게 짓누르는 몸이 더없이 좋았다. 머리카락쯤이야 밤새도록 물고 있어도 괜찮을 듯 했지만 상황이 궁금해서 머리를 홰홰 저어 뱉어내고 고개를 한껏 뻗어 주위를 둘러보니 주방 녀석도 남아 있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로 서랍이 쭉 삐져나온 게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서랍을 밀어 닫았다. 깊이가 얕은 서랍이었다. 얼음송곳이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천천히 일어났다. 남은 글렌피딕을 넘어지지 않도록 가방에 달린 사이드포켓에 넣었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겨드랑이를 바짝 당겨 안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는데도 그녀는 계단 벽에 어깨를 자꾸 부딪쳤다. 나는 그녀 대신 내 손등이 부딪치도록 어깨를 감싸안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벽에 내 손등이 부딪칠 때마다 그녀가 무척 아까워졌다. 어깨를 더욱 힘주어 감싸 안았다. 이 정도로 아껴주는 것, 충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해줄 것도 없었다. 골목에 나부끼던 허연 바람이 우리 얼굴에 끼쳤다. 그녀가 눈가를 찌푸렸고 나는 그녀 얼굴에 앉은 먼지를 후, 불어주었다. 택시에 태울 때 그녀는 바로 문을 닫지 않고 내 눈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나는 주춤거리다가 그녀 귀에 대고 말했다. 그녀와 잠을 자기에는 그녀가 너무 아까웠다.
“잘 들어가요, 난 며칠 있으면 군대 가요.”
“술을 가져왔으면 냉장고에 넣어둬야 할 거 아냐. 미적지근한 걸 먹으란 말이냐.”
잠결에 그 자가 내 가방에서 글렌피딕을 꺼내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습관적으로 묵직한 발길을 날리는 것도 알았다. 그 자도 내 술맛에 길들여졌다. 술을 처음 가져오기 시작했을 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바이지만 지금 나는 그를 계속 길들이고 싶어 한다. 내가 떠나고 난 뒤에도 박스 속의 술을 뒤지도록. 나는 안다. 그 자가 내 책상 밑 라면박스 안을 먼저 뒤졌다는 것을, 그곳이 비어 있자 가방을 뒤진 것을. 어머니에게 얼큰한 찌개를 끓이라고 하고 아침 반주로 글렌피딕을 털어넣겠지. 잠이 덜 깼지만 찌개와 위스키를 놓고 입맛 다시는 밉상이 그려졌다. 찌개에 몰트위스키라니, 나는 그의 천박한 취향을 비웃는다. 어머니의 누렇게 멍이 내린 광대뼈 위로는 흰 머리칼이 흐트러져있겠지. 그렇게라도 얼굴을 가린 채로 고춧가루를 풀고 파를 썰어넣고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겠지. 왜 어머니는 소금이나 고춧가루 대신 비소 같은 걸 타지 않는 걸까. 나는 다시 잠을 이루려 애를 쓴다. 그 자가 아침부터 어머니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용케 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늘 썬더호크를 차고 나갔다. 그가 현관에서 신발을 꿰며 시계를 볼 때 아침 햇살이 시계뚜껑의 스틸을 날카롭게 비췄다. 마침 잠이 덜 깬 채 비칠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다가 나는 그 자가 눈높이로 손목시계를 치켜드는 것을 보았다. 미군용 특수시계를 차고 나가는 걸 보니 오늘도 어깨에 힘 좀 들어가겠는 걸. 그는 그 시계를 도대체 무슨 용도로 쓰는 것일까.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어린애들이 새로운 장난감으로 이짓저짓을 해보는, 그런 것뿐일까, 아님,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밤, 어두운 베란다 앞에 서 있는 그 자의 손목에서 강한 오렌지 빛 섬광이 유리창을 뚫고 멀리 뻗어나가는 걸 보았는데 금방 돌아선 손목엔 스틸 뚜껑이 덮인 커다란 시계가 있을 뿐이었다. 파란 빛을 발하는가하면 오렌지 빛을 쏘아보내기도 하는, 뚜껑 달린 시계는 처음 보았던 터라 호기심이 당기는 걸 이기지 못하고 성큼 다가가 그 썬더호크에 손을 댔다가 불쑥 나타난 적군이라도 만난 양 다짜고짜 때려눕히는 그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말았다. 그 뒤로도 안방 벽에 달린 금고문이 열렸을 때 슬쩍 훔쳐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자는 아침 인사 삼아 발길질을 날렸다. 그래도 그렇게 훔쳐본 덕분에 그것 말고도 몇 개의 특수 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서인지 금고 안을 제대로 볼 기회가 왔다.
고등학교 일 학년을 막 마친 설날 아침이었다. 그 자는 뜻밖에도 아침 일찍 어디론가 출타를 했다. 지난 밤새 안방에서 흘러나오던 울음소리에 잠을 설친 나는 새벽같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수상한 울음소리를 그 전에도 잠결에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귀를 기울인 것이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무슨 상황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어 머리가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훌쩍이고 있었고 그 자는 짜증을 내면서도 어머니를 달래는 것 같았다. 뛰쳐들어가 어머니를 구해낼까.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항상 그랬듯이 실컷 얻어맞고 맞고 있는 어머니마저 더 얻어맞는 일이 벌어질 게 뻔한 일이어서 망설이며 귀만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훌쩍임과 달래는 소리의 얽힘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어서 마침내 내 귀와 머리통은 각각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침이 되어 어질어질한 몸으로도 그 자가 없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울다 지쳤을 어머니를 위로하러 들어갔다.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어머니의 빈 옆자리를 들추고 들어가려다가 삐긋이 열린 금고를 보았다.
금고 안에는 여섯 개의 작은 고리가 줄줄이 달려있고 그 중 네 개의 고리에 각각 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고리 위에는 작은 표가 붙어 있었지만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찬찬히 읽어나갔다. 하지만 겨우 한 개를 읽었을 때 어머니가 깬 것 같아 얼른 문을 닫아야 했다. 네 개의 시계는 모두 다 다이얼이 아주 컸고 테두리며 색깔이며 두텁고 독특했다. 문자판이 분홍색으로 된 것도 있었다는 것은 기억했다. 첫 번째 표에는 아마도 시계의 이름인 듯 브라이틀링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생소한 이름을 기억하느라 그 밑에 적힌 숫자와 설명과 낯선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뒤채는 소리를 듣고 나는 재빨리 어머니 곁에 들어가 누웠다. 어머니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목을 늘여빼서 어머니 얼굴을 살펴보고 맞거나 운 것 같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마음을 놓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뒤에 눈꺼풀은 금고를 향해 들쳐졌지만 다발로 비쳐들어온 햇살이 나와 금고 사이에 먼지만 잔뜩 피워올렸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잊어버렸을 정도로 나는 그 금고가 궁금했다. 시계의 이름을 검색하고 수소문한 결과 파일럿 용 특수시계라는 것을 알아냈다. 기압과 고도를 측정할 수 있는 계기판이 달린, 즉 항공기를 운항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찰 필요가 없는 시계란 말이었다. 하지만 파일럿은커녕 국내선 비행기 한 번 제대로 타보지 못했을 사람이 왜 그런 특수시계를 저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껏 그것은 풀지 못했다.
나는 머리를 감는 어머니 등 뒤로 다가갔다. 따듯한 물로 머리를 헹궈주고 벽에 걸린 타올을 찾아 더듬거리는 어머니 대신 내가 타올을 들어 머리를 털어준 다음 어머니를 변기 위에 앉히고 드라이어로 말려주었다. 웬만큼 마른 머리카락에 에센스를 발라 거울 앞에서 모양을 다듬어주었다. 어머니는 아무 표정도 없이 멍든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다 됐어요, 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퍼머가 풀린 머리카락을 끌어내려 얼굴을 가렸다. 머리카락이 힘없이 눈두덩 위로 축 늘어졌다. 나는 욕실에서 나오는 어머니에게 돈을 쥐어주었다. 어머니, 미장원에 다녀오세요. 군대에 갔다 오면 미용기술을 배워서 퍼머도 해주고 마사지도 해주고 싶었다. 어머니는 거실에 있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앞으로 내렸다 위로 올렸다 하며 매만지다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에 꽃자주색 점퍼 깃을 여미며 나왔다. 점퍼 깃 안으로 뽀얗고 보드라운 쇄골 아래께가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구두를 신는 어머니의 목에 잔주름이 잡힌 연보라색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온 것이다. 어머니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고 살며시 웃음 지으며 등을 돌렸다. 예쁘게 하고 오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자에게 군소리 듣지 않을 정도로만 예쁘게 하기를, 내심 걱정했다. 퍼머를 하고 물을 들였다고, 사내라도 받을 거냐고, 어쩌면 오늘 저녁 그 자가 발길을 날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맞을 때 맞더라도 기어코 퍼머를 하고 물을 들이겠지. 그런 것에라도 고집을 부리겠지. 저녁 나절 어머니가 전화하지 않기를 바랐다. 기신기신 전화기로 기어가 금방 죽어가는 소리로 울어대지 않기를 현관을 나서는 어머니 뒤에 대고 빌었다.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오늘 밤 그 자가 집을 비우고 어머니와 단 둘이 평화로운 밤을 보내는 거였다. 군대 가기 겨우 이틀 전이 아닌가. 내게도 마지막으로 평화로운 밤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 자가 일어나 나간 뒤라야 나는 어머니 품에 기어들어가 다시 잠을 자곤 했다. 그건 아무 일 없는 밤을 보낸 아침이라는 표시였다. 얼마 되지 않는 그 평화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나는 어머니 가슴에 바짝 붙곤 했다. 그러면 남양분유 냄새가 났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온갖 긴장이 누그러졌다. 어머니와 나만 있는 세상,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세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타는 산에 아기 사슴을 두고 내려오는 아비 사슴은 필요 없는, 세상.
나는 주방 녀석에게 전화를 걸며 집을 나섰다. 녀석은 약속을 잊지 않았다. 삼십 분이 되기도 전에 수도약국 사거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다. 저렇게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녀석을 믿을 수 있을까, 나는 츱츱거리며 녀석의 어깨를 내리 눌렀다. 표시 내지 좀 말아, 눈에 띈단 말이야. 네가 눈에 띄면 내가 들키게 되어 있어. 나는 녀석의 어깨마저 옹송그려지도록 시범을 보이며 재게 발을 놀렸다. 표구사 사이에서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보스 앞까지 걸었다.
“보스에 들어가 자리를 만들어놓고 앉아서 내가 연락하면 막 들어온 자가 누구를 만나고 무슨 짓을 하는지 자세히 살펴봐. 나누는 대화까지 엿듣도록 해.”
녀석은 두 손가락을 붙여서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이고는 보스로 들어갔다. 보스의 검은 문이 한참동안 흔들거렸다. 바로 저 거야. 저 흔들림이 그 자가 저기로 들어갔었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리 잡았어. 입구가 보이고 바도 한눈에 들어와. 아주 작은 곳이라 살피기에는 좋은 것 같아. 근데 혼자 앉아있는 게 영 어색한 분위기인데, 호프를 마시는 곳도 아니고 말야.”
그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니, 이건 큰 실수다.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서빙하는 녀석을 불러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 자가 나타나기 꼭 팔 분 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넌 자꾸 시계를 보며 전화를 하는 척 해. 나중에는 약속이 어긋난 듯이 전화에 대고 화를 내고. 십 분쯤 뒤에 맥주 한 병 시켜서 먹고 있어.”
나는 표구사 맞은 편 가게 사이에 서서 수도약국 쪽을 지켜보았다.
“나타났다. 쥐색 점퍼에 머리를 심하게 까딱이는 사람이야. 지금 막, 지금. 그래, 보스 앞에 도착했을 거야.”
나는 가게 사이의 틈으로 더욱 몸을 들이밀었다. 다행히 그는 내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확한 걸음걸이로 발길을 틀었다. 그가 차고 다니는 시계처럼 정확하고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와 팔놀림, 고개의 까딱임들을 보면 자기 하는 일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아주 긍정적인 기분이 되었다. 다행히 그 기분이 오래 가지 않도록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냅다 어떻게 된 거냐고 제법 목청을 높이며 맥주 한 잔 하고 있다, 빨리 와라, 연기하느라 애쓰더니 전화가 툭 끊겼다. 아마도 그 자가 무언가 수상한 일을 하는 게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표구사 앞 골목에 검은 승용차가 섰다. 나는 시야를 가리는 자동차 때문에 쌍심지를 돋우며 신경질을 냈다. 자동차 뒤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골목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이런, 자동차에 가려 머리통만 보였다. 여자는 가슴께까지, 잘하면 허리도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키가 컸다. 남자는 바로 그 자였다. 그 자가 여자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여자는 승용차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차가 떠나고 그 자가 익선동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시와 오초 전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고장 난 초침처럼 고개를 일정하게 까딱이면서 그는 흐트러짐 없이 걸었다. 사윈 겨울 햇빛 한 줄기가 그의 야윈 어깨를 따라갔다. 털이 다 빠져 바랜 겨울 점퍼가 햇살 탓에 더욱 바래보였다. 어찌보면 측은하기도 했다. 측은한 마음을 지우려고 내 어깨를 으쓱했다. 내 어깨에 올라앉았던 먼지나 머리카락 나부랭이, 그의 어깨인 것처럼 털어냈다. 누를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솟구치는 분노나 증오만이 무서운 일을 저지르게 하는 건 아니다. 오래 차곡차곡 쌓인 분노는 오래 찬찬히 세워진 계획으로 맞바꿔질 수 있다.
뒤따라 나온 주방 녀석과 나는 다시 그 자를 좇기 시작했다. 봤어? 비엠더블유 745야. 근데 저 자가 맞아? 전혀 고개를 까딱이지 않던데? 네가 말해준 바로 그 시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잘못 짚을 뻔했어. 차림새와 달리 목소리도 아주 중후하던데. 마담이나 젊은 여자나 거의 깜빡 죽는 시늉이더라구. 그냥 그래보는 게 아니구, 아주 조심스럽게 맞이하고 대접하더라구.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비엠더블유 앞에서의 그 자의 행동거지가 떠올랐다. 아차, 나도 순간적으로 못 알아볼 뻔 했지. 여자를 앞세우고 골목을 나와 자동차 앞에 설 때까지 그 자는 전혀 고개를 까딱이지 않았다. 눈빛마저 달라보였던 것을 깨달았다. 눈두덩이 푹 꺼지고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언제나 풀려 있던 눈. 먼 빛으로도 그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잘 따라붙었는데도 그 자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역시 나는 그 자보다 굼뜨다. 서른 살이나 어린 놈이 둘이나 따라붙었지만 그의 강단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녀석이 보스 안에서의 일을 자세히 말했다. 남자가 들어오자 마담은 자세를 다시 고치고 아주 정중하게 그를 맞았어. 그 남자가 맞나 싶어서 더 자세히 지켜보았지. 그 자는 들어가자마자 한 잔도 하지 않고 상체를 바 위로 기울인 채 굵고 나직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채근하듯 말했다. 마담은 여전히 정중하고 단정하게 귀담아 들으며 네네, 대답했다. 잠시 뒤에 안쪽에서 눈에 확 띄게 아름다운 여자가 나와 그와 얘기를 나눴다. 세 명 모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지극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듯싶었다. 남자는 중대한 무슨 일인가를 지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은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어, 라고 강조했다. 나도 지켜보았기 때문에 녀석의 말에 동의했다. 기품 있는 그 여자에게 한동안 눈을 붙박느라 그를 소홀히 했을 정도였으니까. 자동차에 오르기 전 하얀 블라우스와 단아하고 우아한 검은 투피스 차림의 여자는 적절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여자와 함께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자가 마담에게 하는 말은 조금 크게 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었어. 오메가 드빌 초콜렛으로 달라고 해야 돼, 오메가 드빌 초콜렛. 꼭이야. 300개 한정판으로 발매된 시계 말이야. 이 여자는 그만한 가치는 있으니까.”
“뭐라고? 시계라고?”
나는 녀석의 말을 자르고 고함치듯 되물었다.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여기 문자로 찍어놓았어. 오메가는 비싼 시계잖아, 그렇지?”
녀석은 내내 펼쳐져 있던 핸드폰을 내밀어 보관함에 저장 중인 문자메시지를 보여주었다. 급했던 듯 ‘드빌 초렛’이라고 적혀 있었다. 녀석을 쓰긴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즉 이런 엽렵함을 눈여겨보았더랬다. 혹시 잊을지 모르니 제대로 찍어서 내 핸드폰으로 보내라고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바쁜 걸음걸이로 보아 다음 행선지가 있어 보였는데 다음 코스는 어디인 걸까. 나는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기생관광으로 유명한 거리답게 한국 전통 민요 학원, 한울림 풍물터, 모란 한복, 선녀보살 점집들이 거리 중간 중간 박혀 있었다. 풍물 가게 진열장에는 장고며 북이며 부채 같은 것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한복집에는 여염집 여자는 결코 입지 않을 스팡클이 많이 달린 분홍색 당의와 한복이 진열되어 있었다. 언뜻 가게 안쪽으로 웬 여자가 보였다. 나는 당의와 한복 틈새로 낯익은 여자를 보았다. 분명 그녀였다. 아, 나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요상한 한복을 앞가슴에 대고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춰보고 있었다. 살갗이 비치는 분홍 의상을 입고 장고를 둘러멘 그녀가 장고채로 한번 텅 치는 모습이 눈앞으로 후딱 지나갔다. 그녀가 이쪽으로 몸을 틀자 나는 엉겁결에 주방 녀석 뒤로 비켰다. 그래서 주방 녀석도 보고 말았다. 이렇게 좁은 바닥이라니. 저 여자, 저 여자. 녀석은 손가락질까지 했다. 나는 얼른 녀석의 팔을 나꿔채 억지로 몇 걸음 떼었다. 빨리 군대 가야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입영통지서야 이미 나온 것이고, 이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는데. 군대를 가면 어떤 삶은 종지부를 찍고 어떤 삶은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틀 남은 시간으로는 군대 전의 삶을 정리하기도 짧을 텐데.
그녀를 익선동의 골목에서 본 것이, 그 자가 웬 아름다운 여자를 비엠더블유에 태운 것만큼이나 놀라게 했다. 나는 그냥 발길이 옮겨지는 대로 익선동 골목을 가로질렀다. 작은 상점에 물건을 대는 봉고가 등 뒤에서 빵빵거렸다. 그녀가 모란 한복에서 분홍색 스팡클 달린 조잡한 당의를 입어본다는 것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메가 드빌 초콜렛과 분홍 당의가 번갈아가면서 나를 어질거리게 만들었다.
저 년이 노래 하나는 잘해요. 기생년이었으니, 말해 뭣해. 하여간 세상 쓸모 있는 년들이 없어. 설거지하면서 무시로, 무시로, 부르는 어머니 등 뒤에 누워서 방바닥을 두들겨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듣고 있던 그 자가 갑자기 이 년이, 어디서 궁둥이를! 하고 냅다 목침을 던졌다. 나는 때를 보아 벽장 속으로 숨으려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노래를 잘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생이어서가 아니고 그저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자장가도 잘 불렀다.
술에 찌든 년을 겨우 살려서 데려다놨더니 이제 서방질을 해? 그 자가 어머니의 배를 질렀다. 어머니가 폭 고꾸라졌다. 주인집 남자와 웃으며 얘기했다는 이유였다. 엄마는 자꾸 올라가는 월세를 얼마라도 깎아보려고 웃어주었을 뿐이다. 나는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숨어서 중얼거렸다. 엄마한테서는 술 냄새가 나지 않아요. 분유냄새가 난단 말예요. 술 냄새가 나는 건 그 자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가 벽장문을 열지 않아 조심조심 나와보니 어머니는 방바닥에 엎어진 채 치마가 피로 흠씬 젖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치마를 벗겨 양동이에 빨았다. 양동이를 네 번이나 비워내도 핏물은 여간해서 빠지지 않았고 마른 다음에도 핏자국은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치마를 들고 간 길을 따라 핏줄기가 이어져 있었다. 내 동생은 그렇게 없어졌다.
녀석과 나는 베이비블루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녀석마저 평소처럼 게임룸을 기웃거리거나 하지 않고 내 곁에서 거의 나와 같은 걸음걸이로 있는 듯 없는 듯 걸었다. 베이비블루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았다. 입구에서 맡아지는 젖은 카펫의 냄새부터 그대로였다. 아마 내가 군대에 가도 이곳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녀는 내가 없어도 규칙적으로 이곳을 찾을까. 그녀는 술에 취해 이 계단을 오르며 또 어깨를 부딪칠까. 내가 아껴줄 수도 없을 텐데. 나는 젖은 카펫에 터벅터벅 발을 내던지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메가 드빌 초콜렛, 브라이틀링 그리고 썬더호크. 그들 사이의 연관성은 글렌피딕과 맥칼란과 글렌고인이 하이랜드 싱글 몰트인 것만큼이나 유사했다. 그걸 요구했단 말이지. 그렇다면 브라이틀링도 썬더호크도 요구한 것이란 말일 테지. 값비싼 여자와 값비싼 시계. 예상보다 더 좋지 않았다. 금고 안에는 그런 시계가 그것 말고도 더 있을 거란 말이지. 하긴 그것 말고 아주 이전에 받은 대통령 하사품도 있었다. 그 대통령 하사품이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왔는지 진실을 알 길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집안이 뒤집어졌던 일은 또렷이 기억한다. 기껏해야 동네 아저씨들 청와대에 탐방객으로 우우 몰려갔을 때 받았겠지만 그는 대통령님을 직접 뵙고 대통령님이 직접 손목에 채워줬다고 시계 찬 어깨에 힘을 잔뜩 주었다. 요즘도 간혹 보지만 그런 시계란 전혀 특색도 없이 그저 다이얼 한가운데 대통령 하사품이란 마크가 찍혀 있을 뿐이다. 그런 건 대학교나 회사 같은 데서 로고를 새겨 돌리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청와대를 방문하고 나가기 직전에 직위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한 뭉치 들고 와서 하나씩 건네주었을 시계. 그런데 장식장에 잘 모셔놨던 그 시계를 엄마가 떨어뜨려 유리를 그만 깨뜨린 일이 있었다. 이게 어떤 건데, 너 같은 년이 손을 대, 대통령님이 주신 것을……. 엄마는 딱 그 시계 꼴로 얼굴이 깨지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그 시계들이 어떤 경로로 그의 손에 들어왔는지 사실대로 말하기 곤란할 때는 되도록 에둘러가야 한다. 그러려면 눈치 채이지 않도록 어머니의 주의를 빼앗을 뭔가가 필요하다. 화장을 해주며 말할까. 브로커라는 걸 아느냐느니, 비싼 여자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느니, 고급 콜걸들을 소개시켜주고 겨우 받느니 시계였다느니, 그런 말은 행여라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어머니의 과거를 기억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게다가 나는 군대에 갈 게 아닌가. 어머니는 당분간 나 없이 그를 견뎌야 한다. 어머니, 똑바로 누워 보세요. 마사지 해줄게요. 어머니의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똑바로 눕힌 다음 크림을 듬뿍 바르고 이마에서 콧잔등, 양 뺨, 그리고 턱을 한껏 보드랍게 문지른다. 뺨은 나선형을 그리며 관자놀이로 올라가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광대뼈는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직 부서지지는 않았다. 손가락에 힘을 빼고 광대뼈를 문지른다. 보스라고 말했었죠. 거기에 주류를 대주고 일할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그러나봐요. 일종의 인력 소개죠. 물론 술도 사람도 여러 군데에 대주는 것이죠. 아아, 자꾸 고개가 돌아가네. 자주 붓는 눈두덩과 광대뼈는 지그시 누르며 지압을 해준다. 처음에는 민망한지 잡아끄는 손을 뿌리치더니 이젠 내 마사지를 즐길 정도가 되었다. 엄마는 원래 피부가 아주 좋은 편에 속하는 여자였다. 얼굴이 얼룩덜룩하게 붉긴 하지만 그건 하도 맞고 울어대서 그런 것이고 지금도 목덜미며 앞가슴 살은 뽀얗고 보드랍다. 게다가 냄새도 좋다. 아직도 남양분유 냄새가 나니까. 마사지를 끝내면서 어려운 얘기도 마치면 될 것이다.
어머니에게 할 말을 대략 그려놓고 나서 녀석에게 보답도 할 겸 위스키를 선물했다. 한 병을 비워갈 무렵 우리는 어두컴컴한 바 아래에 어깨를 붙이고 쭈그려앉아 바야흐로 오크통 속의 보리알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독 이 자리를 좋아하는 건 바로, 단 한 번도 햇빛과 신선한 바람이 닿아본 적이 없는 지하 중에서도 지하, 마치 좁디좁은 오크통 속 같기 때문이다. 그 비좁은 통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서로 비비적대며 시간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는 이 아래에서는 술을 마시면 고스란히 내 술이 된다. 나와 어머니의 과거도 미래도, 쉬지 않고 똑딱이는 그 자의 시계도 잊을 수 있다. 나는 술을 입안 그득 물었다. 목울대가 꽉 조여오도록 단숨에 삼켜버렸다. 누군가 아무리 위스키와 남양분유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해도 한입 가득 넘겼을 때 목이 메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너 그거 알어? 위스키에 비소를 타면 맛이 훨씬 강해진다는 거. 색깔도 향기도 더 좋아진단다. 목구멍은 당근 더 짜릿하겠지.”
“정말이야?”
“내가 언젠가 죽는다면 좋아하는 술을 마시며 죽을 거야. 비소를 넣은 술을 내 책상 아래에 숨겨두었어. 그걸 마시며 술에 취하고 독에 취해 죽을 거야. 내 가장 좋은 술을 그날을 위해 남겨두었어. 그건 글렌피딕 30년산이야.”
누가 죽어도 죽는 것이다. 사슴의 계곡으로 불이 쫓아와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 사슴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불에 타 죽고 말지. 죽기 전에는 불이 쫓아오거나 술에 취해 있거나, 주변이 어수선하거나, 여튼 혼란스러운 편이 나을 거야. 생각이 깨끗이 정리되고 주변마저 고요하다면 어떻게 죽을 맛이 나겠어. 술을 좋아해서 흰소리로라도 술에 취해 죽는 것이 행복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비소를 탄 위스키를 권할 생각이야, 나는 중얼거린다. 아기 사슴을 불타는 산에 두고 내려온 아비 사슴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슴이라고 해두자. 녀석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영업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이로써 알리바이는 완성됐다. 녀석에게 할 말을 다 했으니 녀석은 그만 일어나도 좋다. 양배추도 다듬어 썰고, 마카로니도 데쳐놓고, 하몽도 충분한지 확인해야겠지. 녀석이 내게 따뜻한 크림 스프나 한 그릇 가져다주면 좋을 텐데.
나는 영업 개시 시간을 넘기며 술을 마셨다. 마담은 입영하기 이틀 전의 나를 쫓아냈다. 하루만 더 참아주면 좋을 텐데. 그러면 그녀를 보고 갈 수 있는데. 나는 마담에게 부탁했다. 남은 월급 대신 글렌피딕 30년산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마담은 그동안 영업을 잘 해준 것을 봐서 술을 몇 병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나는 비소를 탄 글렌피딕을 책상 아래 라면 박스에 넣었다. 그는 내가 술을 꼬불쳐두는 장소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그의 비밀을 알아냈다. 나는 금고를 억지로 열었다. 비밀번호도 모르고 열쇠도 없으므로 드릴로 구멍을 뚫어버렸다. 내가 이만큼 큰 뒤로는 함부로 때리지도 않더라만, 만약 때린다면 하루 정도는 고분고분 맞아줄 수도 있다. 내가 없을 때 엄마를 때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의 금고를 열었다. 썬더호크 자리는 비어 있었다. 맞아, 그 자가 아침에 차고 나갔지. ‘썬더호크’라고 쓰인 표에는 1996년 육군 참모 총장 이한수라고 쓰여 있었다. 하하, 이한수라. 대통령님은 아니군. 나는 사열하는 고위 장성처럼 턱을 끌어당기고 아래턱에 힘을 주어 입을 꾹 다물어 보았다. 아하, 그러고 보니 그 자가 불알친구라도 되는 양 자주 입에 올리던 육군 참모 총장이로구나. 다부진 가슴팍을 내밀며 한 음 한 음 반듯하게 발음하던 육, 군, 참, 모, 총, 장. 시계와 여자를 맞바꾼 사이였군. 다음엔 브라이틀링을 꺼내 손목에 찼다. 표딱지는 그저 한 번 쓱 훑어보았다. 1999년 대한항공 수석 기장 박병모. 허허, 이 자는 또 누구야. 오랜 비행을 끝내고 땅을 디딘 것이 너무 기쁜 나머지 허탈한 표정을 짓는 파일럿처럼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걷다가 문득 초연한 미소로 하늘을 쳐다보는 흉내도 냈다. 하늘에서 내린 그 파일럿은 땅의 여자를 품으러 갔단 말이지, 허허. 파일럿을 걸어놓고 다시 썬토를 찼다. 시커멓게 탄 얼굴로 고글을 밀어올리며 안나푸르나 정상에 태극기를 꽂는 흉내도 내보았다.
나는 네 개의 시계를 제자리에 걸어놓았다. 그 자가 전장에서 오렌지빛 섬광을 쏘아 긴급한 연락을 주고 받는 병사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 걸까. 수백 명의 목숨을 하늘에 띄워놓고 고도와 기압을 체크하는 비행사의 심정을 알고서 친구인 냥 하는 걸까. 파일럿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고는 브라이틀링을 받고 고위 장성에게서는 썬더호크를 받고, 흥, 이번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부자인가보지. 청와대 앞에 죽 늘어선 후줄근한 옷차림의 소시민들이 찍은 사진을 천정 아래에 걸어두고 그 앞에서 바로 그 자세를 취해보이며 험험, 헛기침을 하던 동네 할아버지가 기억났다.
파일럿의 시계를 차면 하늘을 장악한 기분이 들 테고, 미군용 특수시계를 차면 치열한 전장에서 아주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성싶겠지. 극지 등반용 시계를 차면 자신이 악천후와 악조건을 능히 이겨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한정판으로 발매된 고가의 오메가 시계를 차면 그만한 부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바로 그들과 같은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들이 아버지, 그 자의 막무가내 발길질 뒤에서 힘을 보태주고 있었단 말인가. 설사 그 자신 파일럿이면, 육군 참모 총장이면 어머니와 내게 발길을 날려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중대사라도 치르는 듯하던 그 자의 엄숙한 표정과 걸음걸이, 중후한 음성, 절도 있는 동작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차라리 돈을 받아올 것이지. 엄마의 화장품 값이나 제대로 대줄 것이지. 멍든 얼굴 제대로 가리게. 나는 아버지의 금고를 박살내고, 그러나 시계들은 그대로 두고 미장원으로 가 머리를 깎았다. 머리카락이 듬뿍 잘려나갈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둔 분노가 뚝뚝 떨어져나갔다. 폭발하는 분노만이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쌓인 분노는 스스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래 억누른 사람은 뚝뚝 떨어져 나가는 분노를 보며 가뿐한 마음으로 끔찍한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쉬는 날인지 일하는 날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한가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우리 소월길 걸어요. 그녀는 깜짝 놀랐다. 군대 간다고 했잖아요. 네, 맞아요. 내일 떠나요. 가기 전에 꼭 함께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우리 소월길 걸어요. 지난 가을 이 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어요. 바람도 없는데 갑자기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햇빛이 역광으로 비쳐, 커다란 나무가 마치 큰 울음을 터트린 것 같았다. 그날 아마도 흔히 겪던 고달픈 일을 막 겪고 난 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서운 일을 계획하고 난 바로 뒤였을 것이다.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은행잎을 태어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우뚝 서서 하늘을 하얗게 뒤덮는 은행잎들을 바라보았다.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나뭇잎을 바람이 부추겼다. 하양 은행잎들은 푸른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그것들을 캠코더에 담고 싶었어요. 근데 캠코더가 없어서 못했죠. 하양 은행잎을 찍고 싶었어요. 내가 처음 본 은행잎의 영혼, 아니면 흔적을요.
나와 그녀는 날빛이 이우는 거리를 캠코더 파인더로 샅샅이 훑었다. 겨울의 끝 무렵, 아직 봄물이 오르기 전 나무에 이파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파인더 가장자리에 무언가 날아다니는 것이 잡혔다. 나는 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들어가 잔뜩 부푼 비닐봉지였다. 겨울빛도 다 사윈 저녁거리에 허연 비닐봉지가 붕붕 날아다니며 나무 둥치를 돌고 길바닥을 스쳐 날다가 담벼락에 가 부딪쳤다. 포그르, 바람이 빠져 바닥에 널브러졌던 비닐봉지가 다시 바람을 받아 수면으로 오르는 해파리처럼 붕붕 떠올랐다. 나는 캠코더로 비닐봉지를 따라갔고 그녀는 봉지를 따라 뛰어다니며 웃었다. 비닐봉지라. 은행잎도 풍선도 아닌, 쓰레기에 불과한 비닐봉지를 따라가며 웃는 그녀라니.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비닐봉지도 분홍 당의를 입고 춤을 출 그녀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비닐봉지를 따라갔다. 소월길을 내려와 번잡한 거리에 이르러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을 때 비닐봉지는 용케 깨금질을 하듯 퐁퐁퐁 뛰어 자동차 사이를 건넜다. 우리의 캠코더는 비닐봉지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계속 따라갔다.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죽은 누군가는 이처럼 가벼운 영혼이 되어 퐁퐁 날아다닐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때까지.
방현희
2001년《동서문학》신인상. 소설집 바빌론 특급우편.
추천21
- 이전글26호 신작단편/해이수 08.03.01
- 다음글26호 특집/김영희 0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