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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신작단편/해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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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158회 작성일 08-03-01 01:44

본문

|신작단편|
마른 꽃을 불에 던져 넣었다
해이수



벡스는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크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준! 정면을 맞추면 어떡해. 블랙 볼의 왼 쪽 절반을 맞추라니까!”
호흡을 가다듬고 큐 스틱을 가늠했다. 블랙 볼의 왼 쪽 절반을 맞춰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팔에 무리한 힘이 들어갔고 무엇보다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집중하려할 수록 큐볼과 큐칩 사이로 잡념이 자꾸만 끼어들었다.
“젠장, 볼 깨지겠네! 왜 그렇게 세게 쳐. 천천히 부드럽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벡스는 난감하다는 듯 긴 팔을 허공에 휘둘러댔다. 더는 못 보고 있겠는지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게서 큐 스틱을 뺏어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치는 것을 잘 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더니, 당구대의 원 포인트 지점에 블랙 볼과 큐볼을 일직선으로 마주 놓았다. 큐 스틱을 지지하는 브릿지의 모양이며 산뜻한 간격의 스탠스가 한눈에 보아도 안정된 폼이었다.
벡스가 끊어 친 큐볼은 자로 잰 듯 세 군데의 쿠션을 순식간에 터치하고는 빠른 속도로 날아가 블랙 볼의 왼쪽 절반을 정확하게 때렸다. 마치 한 치의 오차 없이 극도로 훈련된 생명체 같았다. 가격 당한 블랙 볼은 백 쿠션의 탄성에 튕겨 나오더니 쪼르르 굴러가 맞은 편 코너 포켓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묵직한 당구알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을 타고 내려갔다. 완벽했다. 
“봤지? 어렵게 생각 말고 다시 해 봐.”
벡스는 내게 다시 큐 스틱을 건넸다. 벌써 일곱 번째였다. 나는 받아든 스틱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걸쳐 쓰고는 클럽의 출입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내게 너무 어려운 것이 벡스에겐 너무 쉬웠다. 유독 그 위치의 공을 내가 처리 못하는 이유를 벡스는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댔다. 벡스의 그런 태도는 당연했다. 나조차도 왜 그 위치의 공을 못 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위치의 공을 대할 때마다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지 나 역시 의문이었다.
클럽 <스테어웨이 투 더 헤븐(stairway to the heaven)>의 오십 개가 넘는 철제 계단이 쿵탕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레 뒤따라왔다.
“이봐, 화난 거야? 동양인 쫌생이 양반.”
어느 새 쫓아내려온 벡스가 계단 중간에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는 팔꿈치로 그의 가슴께를 쿡 찍었다. 솔직히 기분이 언짢긴 했던 것이다. 벡스는 우웁, 하는 과장된 신음과 함께 눈을 뒤집어까며 ‘젠장, 나 한 칼 먹었다구!’ 를 외치더니 연기라도 하듯 가슴을 움켜쥐고는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우리는 일부러 철제 계단이 부서져라 쿵탕거리며 뛰어내려와 빌딩의 현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햇살이 눈부신지 벡스는 쌍꺼풀 진 한 쪽 눈을 일그러뜨리며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녀석의 구겨진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 우리는 클럽 앞에 주차된 구형 포드 자동차에 올라탔다.
한낮의 킹스 스트릿(King's Street)은 그야말로 한산했다. 몇 무리의 관광객들이 양털 방석이나 부메랑, 오팔 등을 판매하는 면세점 주위에 듬성듬성 모여 있었다. 주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총총히 돌아가는 직장인들마저 보였다. 시드니의 여느 거리와 별다를 바가 없는 이곳을 누가 호주 최고의 우범지대라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해가 떨어지면 킹스 스트릿은 환락의 장소로 돌변한다. 빼곡히 늘어선 클럽은 색색의 네온으로 어지럽게 명멸하고 거리는 술렁대기 시작한다. 스트립쇼의 호객꾼들은 일렬로 도열하여 몇 개 국어를 구사하며 행인들의 소매를 붙잡기 일쑤다. ‘컴온, 홧 어 팬타스틱 쇼우!’, ‘아저씨, 한국사람? 여기 여자들 죽여줘!’, ‘섹쿠시나 이이꼬가 이마스요!’……
해괴한 섹스기구들이 요상한 조명과 함께 쇼 윈도우에 내걸릴 무렵이면 마리화나 연기를 뿜어대며 배회하는 짙은 화장의 창녀들, 팔짱을 낀 채 밀려드는 게이와 레즈비언들, 부나비처럼 날아드는 세계 각지의 배낭 여행객들로 거리는 온통 북적댄다. 발 디딜 틈 없는 댄스홀에서는 락 음악에 맞춰 마약에 취한 남녀들이 살갗을 맞댄 채 는적거린다.
킹스 스트릿의 낮과 밤은 그야말로 완벽한 야누스의 얼굴이다. 번화가 앞으로는 경찰 순찰차가 의례적으로 맴돌지만, 뒷골목에서는 무기 밀매와 사기도박, 마약 거래가 암암리에 성행하는 소돔과 고모라. 호주인들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버림받은 구역, 그 거리에 지금 벡스와 내가 있는 것이다.
“내일이 결전의 날이니 오늘은 좀 쉬어야지. 뭐할까? ‘티 서비스(tea service)’나 받으러 갈까?”
윌리암 스트릿을 거의 빠져나올 무렵 벡스는 큰 소리로 말하며 음흉한 표정으로 윙크를 보냈다. 카 스테레오에서 레게음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관둬. 대낮부터 무슨.”
“그럼, 니가 좋아하는 숯불 갈비 먹으러 갈까? 간만에 소주도 한 잔 하고…… 아, 운전 때문에 그건 안 되겠다.”
녀석은 여전히 레게 리듬에 맞춰 머리와 어깨를 깐죽거렸다. 
“나 피곤해. 어디 가서 좀 쉬었으면 좋겠어.”
“오케이! 그럼 내가 멋진 곳으로 데려다주지.”
벡스는 호기롭게 외치며 자동차의 핸들을 틀었다.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녀석은 호들갑스레 머리를 흔들어대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검고 두툼한 입술에 싸인 하얀 이빨과 붉은 혀가 순간순간 드러났다. 장단에 맞춰 얼굴을 찌푸리며 장난스레 높은 음을 따라가는 녀석을 보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노스 시드니(North Sydney)에 있는

테이프 칼리지(TAFE College, 기술 전문대학)의 아이․티 코스(Information Technology)이 학기를 다닐 무렵, 나는 유학생활에 몹시 지쳐있었다. 경제적 궁핍은 몸과 마음을 쉽게 병들게 했다. 능숙치 못한 언어도 문제였지만 호주 학생에 비해 열 배가 비싼 등록금 통지서를 받을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 지경이었다.
파트타임 일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수업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극도의 긴장과 노력이 끊임없이 요구됐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견딜만했던 집에서의 송금은 차츰 그 액수가 줄어들었다. 2006년 새 달력을 걸어놓고 얼마 지나지 않자 학비 대신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휴학을 하고 돌아오면 어떻겠냐는 간곡한 부탁의 내용이었다.
처음 ‘영어꿈’ 을 꾼 것도 그 즈음이었다. 유학생들은 꿈에서 영어로 대화를 하거나 영어로 잠꼬대를 하면 현지어에 익숙해진 것으로 보고 주위에 자랑을 하곤 했다. 나는 이 년 가까운 유학생활 중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 날은 꿈속에서 빨리 돌아오라며 호통 치는 부모님께 대들며 딱 한 마디의 영어를 했었다. 그 꿈을 꾼 뒤 자랑은커녕 나는 오랫동안 우울했었다. 불손하게도 내가 내뱉은 말은 ‘fuck you!’였다.   
이국에 있는 스물 한 살짜리의 내 눈에도 한국의 경제상황은 몹시 나빠 보였다. 금융시장 불안이나 부동산 가격폭등, 노사정의 합의 문제를 포함한 경기침체 소식은 이곳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맘먹고 구해서 읽은 한국 신문에서 ‘이유 없이 쉬는 남자 100만 명 넘었다’는 기사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극심한 청년 실업률 문제와 가중되면서 한국 유학생들이 갖고 있던 성냥불 같은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가끔 어울려 술잔을 부딪치던 얼굴들이 속속 사라져갔다. 윤기 있고 도도하던 여학생들은 어이없는 놈들과 붙어살거나 느지막이 업소로 등교를 했다. 국내 명문대 졸업자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석 박사 학위를 딴 수재들도 구직난에 허덕이는 마당에 전문대에 해당하는 이곳을 졸업한들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나는 새벽마다 도심 속 고층건물의 카페트 위를 캥거루처럼 뛰어다니며 그런 혹독한 절망감을 진공청소기로 빨아올리곤 했다.
사 개월 전, 그날 새벽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를 하러 건물 뒤편의 쪽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헤이, 하는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열쇠를 꽂고 쪽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곳은 새벽이면 일회용 주사기가 발끝에 채일 만큼 지저분한 도심의 뒷골목이었다. 곧이어 플리즈! 하며, 어색하고도 다급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도와줘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사람이라기보다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어둠 속에 길게 드러누워 고통스레 뒤척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몇 걸음을 떼다가 자리에 멈춰 섰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몹시 힘들게 손을 뻗으며 어색한 한국어로 다시 한 번 신음했다.
“좀 도와줘!”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더 내디뎠을 때 플라스틱 주사기가 신발 밑에서 으스러졌다. 심장이 몹시 뛰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젊고 건장한 체구의 흑인 남자였다. 어쩌면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 내 몸을 휩싸 안고는 목에 칼을 들이댈지도 몰랐다. 마약에서 맛보는 황홀감에 비한다면 그들에게 이 정도는 범죄라기보다 간단한 재스츄어에 불과했다. 이때, 허공에 떠있던 그의 손이 길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나는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흑인 남자는 힘없이 널브러진 채 겨우 한 쪽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안아 올려 건물 벽에 등을 기대이게 앉혔다. 알콜과 피비린내가 섞인 역한 냄새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어디서 흠씬 두들겨 맞았는지 한 쪽 눈두덩이 찢어져 부어있었고 피딱지가 엉겨 붙은 입술은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괜찮냐는 나의 물음에 그가 영어로 중얼거렸다.
“젠장, 무척이나 빨리 도와주는군.”
내가 물을 좀 마시겠냐고 묻자 그는 눈을 감은 채 그저 숨만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어 그에게 물을 먹였다. ‘도와달라’ 는 한국말은 어디서 몇 마디 주워들은 게 분명했다.  
“담배 가진 거 있어?”
물을 마시자 약간 정신을 차린 듯 그가 물었다. 나는 부어오른 그의 입술에 담배 한 개비를 끼우고 불을 붙여줬다. 그는 몇 모금인가를 연거푸 빨아대더니 갑자기 퉤 하고 담배를 뱉어냈다.
“이런, 썅, 입안이 죄다 찢어져서 담배 맛이 지랄 같군.”
그의 돌연한 행동에 나는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일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젠 되도록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가 크악, 소리를 내며 목에서 피 섞인 가래를 끌어올려 길바닥에 내뱉더니 혼잣말로 지껄였다.
“이런 젠장, 아시안 놈들은 이 새벽에도 바쁘다니까.”
고맙다는 인사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순간 나는 다시 긴장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할 필요는 없고 죽을 만큼 바쁘지 않으면 좀 일으켜 주지 그래?”
나는 다시 자리에 쪼그려 앉아 그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190 센티미터 쯤 되는 거구였다. 옷이 흙투성이인 그를 세워두고 나는 일방적으로 작별인사를 한 뒤 건물의 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 가서 흑인 사내의 커다란 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몇 번이나 제 힘으로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번번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오른 쪽 발목을 심하게 다친 듯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흑인 남자의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택시가 다니는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그를 택시에 태운 뒤 이십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쥐어줬다. 내가 마음이 착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흑인 사내가 한 쪽 다리로 위태위태하게 몸을 지탱하며 가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했을 때, 내 주머니에는 위크리 트레인 티켓과 이십 달러짜리 한 장뿐이었다. 그는 택시 유리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붓지 않은 한 쪽 눈으로 나를 보며 짧게 말했다.
“혹시 다음에 보면 벡스라고 부르라구.”
내 이름을 미처 말하기도 전에 택시는 출발하고 말았다.  
한 달이 훨씬 지난 아침, 그 거리에서 나는 건장한 흑인 사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다 낫지 않았는지 그는 플라스터 캐스트를 발목에 감은 채 목발을 짚고 절뚝거렸었다.
벡스는 남아프리카 출신이었다. 탄자니아와 모잠비크 국경해안지대가 자신의 고향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치아와 손발톱만 빼고는 모든 것이 검었다. 나이는 스물두 살로 한 때 씨티레일 세큐리티를 했다는 이력 외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였다. 아니, 너무 많은 종류의 일을 해서 뭘 하는지 모른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친해진 후, 그날 새벽 내가 한국인인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벡스는 예전에 코리안 룸메이트와 생활했다면서 새벽에 일하는 동양인은 십중팔구 코리안이라고 낄낄거렸다. 한술 더 떠서 녀석은 자기가 외우는 몇 마디의 한국어도 자랑스레 떠들어댔는데, ‘사랑해’, ‘자자’, ‘빨아줘’ 따위였다. 나는 녀석의 지껄임에 함께 낄낄대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그랬다. 시드니 구석구석의 변기통 앞에, 카펫 바닥에 혹은 타일을 깔거나 데모도를 치며 새벽부터 땀을 뻘뻘 흘리는 까만 머리들은 대부분 코리안이었다. 그런 하급 단순노동으로 연명하는 이민자들이 못 견디게 싫었지만, 나 역시 그들을 욕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벡스를 따라 포켓볼 판으로 뛰어든 건 겜블이 유혹적이었다기보다 그들의 전철을 도무지 피할 길이 없는 스스로에 대한 염오에서였다. 

차를 몰고 온 곳은

벡스가 살고 있는 싸구려 원룸 유닛이었다. 몸뚱이가 50센트 짜리만한 바퀴벌레가 붕붕 날아다니는 곳이었다. 
“어때, 끝내주지? 편히 쉬라구. 내일 멋진 게임을 치러야 하니까. 원한다면 오늘 뜨거운 밤을 보내고 가도 좋아.”
“그만 떠들어, 벡스. 너 때문에 더 피곤해.”
나는 낡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벡스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병 꺼내더니 한 병을 내게 휙 던졌다. 
“옛다, 동양인 양반. 피곤하면 자네가 좋아하는 링겔이나 한 병 진하게 꼽으라구!”
날아온 차가운 술병이 손안에 착 감겨들어왔다. VB(Victoria Bitter) 맥주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맥주를 ‘링겔’ 이라 불렀는데 녀석도 이 표현을 재미있어 했다.
“준, 이번 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벡스는 선반에 놓여있던 마른 꽃 한 다발을 들고 와 내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얼굴을 꽃다발에 깊이 파묻었다. 그가 숨을 깊이 들이쉬자 마른 꽃 몇 송이가 바스러지며 탁자 위로 떨어졌다. 나는 졸린 목소리로 벡스에게 말했다.
“넌 지금 바퀴벌레 알을 이백 개쯤 들이마셨어.”
“차라리 나를 바퀴벌레라 부르라구.”
“그건 시드니 사람들 다 아는 거니까 재미없지. 어이, 얼간이,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뭐든지.”
“넌 왜 게임 전마다 꼭 그 꽃냄새를 맡는 거지?”
“용기를 주니까, 이 꽃은. 너도 한 번 맡아봐..”
벡스가 여전히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대답했다.
“이미 맡아봤어. 아무런 냄새도 안 나더군.”
“준, 이 꽃은 코로 맡으면 아무런 냄새가 없어. 귀로 맡아야 해.”
녀석이 얼굴을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귀로?”
“그래, 얼굴을 묻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태양의 두근거림이 들리지.”
“태양의 두근거림? 쳇, 또 어설픈 시인 흉내를 내고 있군. 집어치우라구.”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켰다. 쌉쌀한 기운이 혀를 적시며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녀석은 가끔 마리화나를 몇 대 진하게 피운 후나 엑스터시를 몇 알 삼키고 나서 혹은 주사를 한 방 맞고 난 뒤면 시인인 척 애매모호한 말을 지껄여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말짱한 데도 헛소리를 시작하려고 했다. 벡스는 왜 자기 말을 믿지 못하냐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조그만 해바라기처럼 생긴 꽃으로 눈길을 돌렸다.
“너 그 꽃 이름은 알기나 한 거야?”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리를 떨며 건성으로 물었다. 벡스는 당연하다는 듯 알아듣지 못할 단어 하나를 말했다. 두세 번 말했지만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할 발음이었다.
“벡스, 내가 니네 나라말 모른다고 사기 치는 거 아니지?”
“믿어. 이번엔 진짜라구. 영어로 굳이 말하자면, 이 꽃의 이름은 ‘천둥의 심장(the heart of thunder)’이야."
“천둥의 심장이라?”
“의역하면 ‘용사의 심장’이 돼. 우리 부족에서는 가장 용사다운 용사의 심장소리를 천둥소리로 묘사하거든. 이 꽃은 태양빛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더욱 더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일 줄 아는 성질을 지녔어.”
“아쭈, 얼간이, 오늘은 제법인데? 너 나 모르게 벌써 몇 알 삼켰지?”
“아냐, 준.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라구!”
벡스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그 긴 팔을 허공에 붕붕 휘둘러댔다.
“알았어, 알았다구. 그런데 생긴 것에 비해 의미가 좀 굉장한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삐져나왔다.
“맞아, 굉장하지. 이 꽃은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꽃이 아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하는 나의 눈빛에 녀석은 자세를 갖추더니 목을 축이려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켰다. 우리 부족 어쩌구 저쩌구하는 녀석의 헛소리에 또 말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신중한 분위기로 봐서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부족의 성인식이 있어. 용감한 전사로 태어나기 위해 옛날부터 내려온 통과의례지. 삼 개월 동안이나 계속 돼.”
“삼 개월씩이나?”
“그래, 삼 개월. 열일곱 쯤 되면 우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환희의 숲’으로 가거든. 거기는 진짜 밀림 중의 밀림이야. 레오파드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 용사들도 오줌을 찔금 지리는 곳이라구. 거기서 두 달 정도는 함께 움막을 짓고 사냥을 하면서 공동생활을 해. 그러면서 체력단련도 하고 생활과 전투에 필요한 갖가지 요령들을 익히는 거야.”
“야, 그럼 우리나라 군대 훈련소하고 비슷한 거다.”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런데 다른 게 하나 있어. 두 달이 지나면 부족 어른들은 우리에게 음식을 되도록 적게 먹이고 밤낮 쉼 없이 일주일간 춤을 추게 만들어. 일주일간 춤만 춘다고 상상해봐. 거의 맛이 간다구. 게다가 칠 일째 되는 아침 야자열매로 만든 독주를 몇 사발씩 들이키게 하지.”
“어, 우리도 ‘사발식’이라고 해서 그 비슷한 게 있어. 이거 점점 재밌어지는데! 그 다음엔?”
“그 다음에 어른들은 우리를 숲의 한 가운데 버려두고 나와. 아무리 튼튼한 놈들이라도 그 때쯤엔 정신을 잃게 돼…….”
나는 VB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벡스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듣는 도중 머릿속에는 언젠가 TV에서 본 아프리카 원시종족의 독특한 춤동작과 둥둥거리는 북소리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그건 뭐랄까. 일종의 가혹한 극기훈련이랄까. 어쨌든 참가한 놈들은 그 때부터 뛰어야해. 숲의 길섶마다 뱃속의 모든 것을 토해내며 계속 달리는 거야. 안 뛰면 죽는 거야. 그래서 죽기살기로 열흘 씩 연명하면서 계속 뛰어야 해.”
“열흘씩이나? 그야말로 지옥의 레이스네?”
“맞아, 지옥의 레이스! 그렇게 달리다가 ‘환희의 숲’ 가장 마지막 지점에 이르면 바로 ‘태양의 동굴’이 나오거든. 아주 긴 터널 같은 거야. 그 어두운 굴속을 벗어나면 말이야 바로 이 꽃이 들판 가득 눈부시게 피어있다구.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오직 그곳에만 이 꽃이 피어있는 거야. 다른 데는 없는 거라구.”
나는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꽃밭에 들어선 순간 청년들은 우리 부족신의 숨결을 느끼게 되는 거야. 자신이 용감한 전사로 다시 태어났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지. 이해가 가?”
“어, 그러면 가장 중요한 순간을 이 꽃과 함께 하는 거네?”
벡스는 몹시 흥이 났는지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지! 부족 성인남자들은 일생의 가장 황홀한 한 순간을 그 때 경험한다고 하니까. 이 꽃을 한 아름 꺾어들고 처음 마을로 돌아온 자가 가장 용기 있는 자의 칭호를 얻는 거야.”
녀석은 스스로 이야기에 취해 엄지손가락을 내 앞에 힘껏 내밀었다. 나 역시 이야기가 뜻밖에 흥미로워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 그럼 벡스, 너도 이 꽃을 가진 걸 보면 용기 있는 전사였겠구나?”
그런데 순간, 녀석의 검은 얼굴빛이 붉어졌다. 할 말을 잃은 듯 머뭇거리던 벡스는 내 앞에 내민 엄지손가락을 천천히 접어들이더니 소파 위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맥주병을 집어 단숨에 들이켰다.
“왜 그래, 용사?”
녀석은 갑자기 풀이 죽어있었다.
“벡스, 왜 그래? 난 정말 네가 용기 있는 전사라는 게 자랑스러워서 그런 거라구.”
“사실 나는 그 의례에 참가한 적이 없어. 이건 우리 형 꽃이야. 내가 이곳으로 건너올 때 형 몰래 가져온 거야.”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내가 좀 미안스러웠다. 형 몰래 훔쳐왔다는 말을 듣자 차라리 묻지 말 걸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의례에 참가하지 않았어?”
“나는 탄자니아로 나와 공부를 하고 있었거든. 그 의례가 시작될 때마다 학교에서 경시대회를 치르거나 큰 시험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마을에 돌아가지 않았어. 좀 미개해 보이기도 하구…….”
“미개하다고? 넌 족장의 아들이잖아? 족장 아들이 그런 말을 해도 돼?”
내가 나무라듯 묻자, 벡스는 한동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웠어. 스무날 가까이 야생음식으로 연명하면서 독충, 맹수들과 사투를 벌이며 정글을 일등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 형들 모두 일등으로 통과했거든…… 숲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한 친구들도 많이 봤지.”
벡스는 고개를 숙인 채 술병만 만지작거렸다. 그를 알고 난 후 이토록 침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준, 있잖아. 사실 나는 무조건 피했던 거야. 그런데, 다른 세상에 나와서 겁을 먹거나 약해질 때마다 후회되더라. 그 의례를 정면으로 치르지 않아서인지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 겁쟁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 그래서 이번에 고향 돌아가면 늦었지만 꼭 의례에 참석할 거야. 정말이야, 이번에 고향에 돌아가면 꼭…….”
녀석이 눈을 들어 나를 보자 우리는 꽤 오랫동안 눈이 마주쳤다. 맥주 탓인지 이야기 탓인지 몰라도 어느새 나도 그도 얼굴이 홧홧해져 있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벡스에게 말했다.
“창피할 필요 없어. 니가 의례에 참석하면, 아마 역대로 꽃을 가장 먼저 꺾는 용사의 기록을 세울 거야. 난 그렇게 믿어.”
“고마워, 준…… 그래서 말인데 이번 게임은 무조건 이겨야 해. 그래야 너는 졸업을 할 수 있고, 나는 고향으로 갈 수 있다구.”
게임 얘기가 나오자 불편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VB맥주 두 병을 꺼내 한 병을 벡스에게 주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마셨다.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 날아올라 밖으로 나가려던 바퀴벌레가 창문에 부딪치더니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 바닥에서 손을 씻는 마지막 게임이라서 그런지 아무래도 판돈이 큰 것 같아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준, 너 말이야. 너는 그것보다 어려운 위치의 볼은 잘 치면서 왜 그 위치의 볼은 유독 못 치는 거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벡스는 원 포인트 지점에서 마주 본 블랙 볼과 큐볼에 대해 잊고 있었다는 듯 다시 물었다. 녀석의 솔직한 얘기를 들은 후라 나도 더는 숨길 수는 없었다.
“그건…… 일종의 콤플렉스야.”
“콤플렉스?”
“음, 굳이 말하자면 위치에 대한 콤플렉스.”
‘위치에 대한 콤플렉스?’ 벡스는 한 번 중얼거리고는 뭐 그런 게 다 있냐는 듯 피식, 하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피곤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 어쨌든 내일 게임에선 똑같은 실수하면 안 돼. 난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어. 같이 갈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벡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노란 꽃무더기를 가슴에 안아 올려서 얼굴을 깊이 파묻어 보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 섭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원 포인트 지점에서 마주 본 블랙 볼과 큐볼을 대할 때마다 섭이 떠올랐다. 섭이 떠오르면 여지없이 큐칩과 큐볼의 좁은 틈으로 이년 전 가을 어느 날의 장면들이 뛰어들면서 머릿속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곤 했던 것이다.

이년 전 그날 낮에

섭과 나는 한국기원 대국실에 있었다. 프로기사 입단을 위한 연구생 AB조의 자체 리그전이 있던 날이었다. 일 년에 두 명, 리그전 우승자 한 명과 그동안 성적이 가장 좋은 한 명만이 프로에 입단할 수 있었다. 소위 ‘바둑계의 사관학교’ 라 불리는 한국기원 연구생의 신분은 만 18세 이하까지였다. 섭과 나는 나이제한 막바지에 몰려 있었고,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나이 어린 후배들이 치고 올라와 프로에 입단하여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을 우린 애써 무심한 척 지켜봐야 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나는 바둑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바둑’ 이라는 단어를 빼면 사람들과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하나밖에 모르는 바둑을 잘 두지 못했다. 그러나 섭은 달랐다. 승률의 기복이 커서 성적은 별로 좋지 못했지만, 중요 대국 때마다 놀라운 투지와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곤 해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곤 했다. 평상시 잘 두다가도 대회장에 나가서 스포트라이트만 받으면 주눅이 들어 패착을 연발하는 여느 연구생들과는 달리 녀석은 유난히 큰 대회에 강했고 우승 경험까지 있었다. 사범님들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섭을 ‘괴물’이라 불렀다.
자체 리그전 당일, 섭은 관계자들의 예상을 전부 뒤엎어버리며 관심의 초점이 됐다. 녀석은 미리 점찍어 놓은 우승 후보자들을 하나씩 물리치며 리그전의 최종결승에 진출했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섭을 ‘괴물’이 아니라 ‘거물’로 바꿔 불렀다. 애당초 초반에서 탈락한 나는 섭의 선전에 덩달아 흥분했고 대국을 지켜보며 녀석의 편에 서서 응원했다.
판수를 거듭 승리하는 동안 섭은 그 나이까지 축적한 노련미와 실전 감각을 회복하며 놀라운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섭과 결승에서 맞붙은 상대는 어린 나이에 일찍 이름난 프로 고수의 숙생으로 들어가 개인 사사를 받아온 기대주였다. 같은 연구생 신분이어도 생활환경이나 수업방식에서는 다소간의 격차가 있었다. 결승대국은 그야말로 마지막 끝내기까지 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박빙의 승부였다.   
그날 밤, 섭과 나는 기원에서 나와 포켓볼을 치러갔다. 게임비와 맥주 값을 내기로 하고 3판 2승으로 치러졌는데, 막판까지 가게 되었다. 게임 방식은 ‘피프틴(15)볼’ 로 가장 쉽고 대중적인 것이었다. 한 쪽이 공 일곱 개를 먼저 포켓에 넣고, 블랙 볼을 처리하면 승자가 되는 룰. 그러니까 블랙 볼을 마지막으로 넣는 건 게임의 마침표를 찍는 셈이었다. 
결승전에서 공 일곱 개를 먼저 넣은 건 내 쪽이었다. 그런데 나는 마지막 남은 블랙 볼을 처리하지 못했다. 긴장한 탓인지 타점이 흔들려서 블랙 볼은 원 포인트 지점에서 쿠션과 검지 한 마디의 간격을 둔 채 멈춰버렸다.
당구대 위에는 큐볼 하나, 섭의 공 하나, 블랙 볼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섭이 자신의 마지막 표적구를 능숙하게 포켓에 넣자마자 큐볼은 굴러가더니 반대편 원 포인트 지점에서 블랙 볼을 마주한 채 정지했다. 넓은 직사각형 당구대의 상변 두 지점에 검은 공과 흰 공이 마주보는 상황이었다. 흔하게 출현하는 위치의 공은 아니었다.  
그러자 섭은 스틱을 브릿지에 끼운 채 꼿꼿이 서서 당구대의 어딘가를 아주 오랫동안 응시했다. 마치 태엽이 모두 풀려나가 정지해버린 인형 같았다. 더욱이 녀석의 표정은 너무나 급작스런 통증으로 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망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야, 지금 뭐 해? 괜히 시간 겐세이하지 말고 빨리 끝내라니까!”
나는 섭이 충분히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혹시나 실수를 바라는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쳤다. 바둑은 몰라도 포켓볼만큼은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외침에 잠에서 깬 듯한 그가 허리를 구부리고 스틱을 가늠하며 힘 조절을 했다. 
결국 섭의 큐가 신중하게 큐볼을 밀어내자, 큐볼은 블랙 볼에 부딪쳤다. 녀석은 볼의 두께와 각도, 스핀, 타점이후 볼의 진행 방향까지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블랙 볼은 백 쿠션에 맞고 튀어나와 맞은 편 코너 포켓 쪽으로 향했지만 끝내 구멍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힘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당구장을 나와서 우리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고등학생을 받아주는 술집을 우리는 열군데도 넘게 알고 있었다.
“너는 왜 좌상귀에서 ‘너구리 배붙임’ 을 했지? ‘2의 1에 묘수 있다’ 는 기리(棋理)는 너도 잘 알잖아. 그 지점에 치중했어야지. 그래서 패로 버텨야 했다구.”
술이 몸속에서 돌자 나는 시비를 걸듯 녀석의 결승대국에 대한 관전평을 꺼냈다. 우리는 각자 천 씨씨를 넘게 마시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불안한 미래의 예감이 그와 나 사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제 다시 프로에 입단하려면 전국 아마추어 대회를 통해야 했다. 이력이 붙을 대로 붙은 아마 고수들이 포진해 있고, 연구생 출신 선배들마저 줄서 있는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것마저 안 된다면…… 섭도 나와 같은 상상을 했을까. 바둑 교실에서 사범 노릇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방내기’ 나 두다가 시간을 축내는 일, 아니면 운 좋게 돈을 모아 도시 변두리의 삼 층쯤에 기원을 차렸다가 서서히 망하는 절망적인 시나리오를.
“답답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뭐라 대답 좀 해봐. 코앞에서 우승을 놓쳤는데 할 말이 있을 거 아냐? ‘2의 1’ 을 생각 못 했을 리는 없잖아?”
침울한 분위기가 싫어서 나는 다시 한 번 시비를 걸 듯 물었다.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나는……�2의 1에 두고 싶지 않았어……. 패로 버티기에는 형국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무엇보다 나는…….”
섭은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느릿느릿 대꾸했다. 그나마 이어지던 말도 거기서 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녀석의 어눌한 말투가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뭐? 말을 끝까지 해!”
섭은 테이블에서 고개를 들어 성난 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작게 말했다.
“무엇보다 나는…… ‘2의 1’ 을 좋아하지 않아.”
나는 마시던 맥주잔을 유리 테이블이 깨지도록 내려놨다.
“미친놈, 뭐? ‘2의 1’ 을 좋아하지 않는다구? 이 자식아, 네가 어떻게 그딴 말을 할 수 있어! 넌 단 한 수의 패착에 이제까지의 모든 걸 망쳐버렸다구. 형세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불가능한 건 절대 아니었어. 굉장히 미세한 계가였다구. 만약에 그 끝내기에서 패로 버텼다면 사범님 말씀대로 반집승이었단 말이야! 패로 버텼더라면 넌…….”
“그만!”
내 말을 자르며 섭은 잔을 들더니 오백 씨씨를 단숨에 마시기 시작했다. 연약한 그의 목울대가 위 아래로 출렁이는 것을 보는 동안, 내 안에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패로 버텼더라면 넌 프로가 될 수 있었어!’ 라는 말이 여러 번 끓어올랐다. 녀석은 잔을 끝까지 비우자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 해. 나는 이제 버티는 것 따위는 지겨워.”
섭은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기원과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학 입학도 프로 입단도 좌절된 상태에서 등교를 한다는 자체가 사실 무의미했다. 나 역시 며칠은 학교를 결석하고 습관처럼 기원에 들러 뒷머리만 긁적대며 슬쩍 빠져나오는 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 
섭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 건 보름 쯤 지나서였다. 그가 세 들어 살던 집 뒷산 나뭇가지에 목을 맨 채 죽어있는 것을 한 주민이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은 학교와 기원에 연락을 했으며, 학교와 기원, 경찰 쪽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내게 통보를 해왔다. 
시체의 경직상태 등으로 미루어 섭이 목을 맨 건 십일 전으로 추정됐다. 그의 시체가 땅으로 끌어내려졌을 때엔 이미 두 눈알이 새에게 파 먹힌 뒤였다고 했다. 방 한 가운데 놓인 바둑판 위에는 두 줄짜리의 유서가 놓여 있었다고도 했다.
     싸움은 계속 된다. 그것이 아프다.
섭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떠맡게 되었다. 시신은 이미 부패해 있었으나 경찰 쪽에서도 연락이 닿을 만한 친인척을 찾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섭은 열아홉 해의 삶을 통틀어 나와 가장 접촉이 많은 사이였지만, 나는 그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경찰이 제일 친한 친구인 나를 지목하여 그에 신상에 관해 묻기 전만 해도, 나는 그를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족 관계라든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하다못해 전화를 걸어본 적도 없어서 번호도 몰랐고, 그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도 미처 따져 본 적도 없었다. 우린 그저 학교와 기원에서 매일 마주쳤고 만나면 마주 앉아 종일 바둑판이나 들여다보다가 간혹 당구를 치러 다녔던 것이다. 섭이 죽고 나서야 나의 제일 친했던 친구가 그였다는 사실을 나는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화장을 하던 날, 아버지는 내 부탁대로 서울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차로 달려 어느 강의 유역에 내려주었다. 나는 섭의 유해를 강에 뿌렸다.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다만 계속 같은 말만 떠올랐을 뿐이었다.
     섭, 듣고 있니? 네가 그날 단 한 수를 제대로 두었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흐르는 강물 위에 국화 꽃다발을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바둑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파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취기가 돌았다. 비워진 맥주병이 어느덧 세 병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 ‘천둥의 심장’ 을 선반의 원래 자리에 갖다 두었다. 벡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꽃이 이전과는 달라 보였고 다루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벡스의 방에서는 시끄러운 레게음악이 흘러나왔다. 녀석의 방문을 열자 볼륨을 최대한 높인 카세트 플레이어의 노랫소리가 고막을 치고 들어왔다. 게다가 풀이 타는 독한 냄새에 코와 목이 매캐할 지경이었다. 안이 캄캄해서 나는 벽의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켰다. 방 안에는 연기가 꽉 차 있었다. 
“벡스, 너 뭐하는 거야?”
나는 카세트 플레이어의 스위치를 끄고 창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녀석은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일회용 주사기와 고무 밴드, 마리화나 파이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내가 고함을 한 번 더 치고 나서야 녀석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더욱이 벡스의 목소리는 느릿느릿 풀려있었다.
“지금 누가 나의 행복 추구권을 박탈한 거지?”
“닥쳐, 이 약쟁이 자식, 이 버릇 여전히 못 고쳤군.”
“오호, 나는 누구라고. 안녕, 바른생활 사나이?”
“너, 이거 언제 또 샀어? 니가 인마, 이러고도 비행기 티켓 값이 없어서 고향에 못 간다는 말이 나와? 이딴 거 살 돈 아꼈으면 넌 벌써 고향에 몇 번은 갔다 왔어!”
나는 어느새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준, 난 자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방금 고향에 있었어. 자네가 시끄럽게 굴지만 않았어도 어릴 때 발가벗고 놀던 여자애들하고 걸판지게 춤판을 벌이려 했다구.”
“집어치워. 이 약쟁이 자식아!”
나의 고함에 녀석이 눈을 좀 더 크게 뜨더니 침대에서 몸을 약간 일으켰다.
“그럼, 결전을 앞둔 이 마당에 나보고 티 서비스나 받고 허구한 날 백마들 밑구멍이나 쑤시란 말이야. 그건 안 될 말씀이지. 그 불쌍한 여자들의 입술을 그렇게 부르트게 할 순 없지.”
티 서비스(tea service)란 시드니 창녀들이 해주는 오랄 섹스를 가리켰다. 그녀들은 성교 직전 뜨거운 홍차를 마셨다. 입안을 따뜻하게 데운 다음 성기를 오랫동안 애무해주곤 했다. 언젠가 벡스는 홍차가 구강소독에도 아주 그만이라고 덧붙였었다.
“가상하군. 그 여자들 생각해서 몸이나 축내는 약질이나 하시구.”
“이런, 쯧쯧쯧, 바른생활 사나이. 마약이 뭔지 모르시는구만.”
녀석은 다시 축 늘어지며 태연스레 혀를 차더니 오히려 나를 놀려댔다.
“마약이 뭐긴 뭐야. 나쁜 거지!”
화가 나서 일단 소리는 쳤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나쁜 거라. 나쁜 거라. 오호, 오호……”
벡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면서 팔을 천천히 뻗어 침대 옆에 있는 마리화나 파이프를 집어들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우리 딱한 동양인 신사께서 이해하시려나? 어떤 예가 좋을까?”
벡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리화나 풀뭉치를 팥알만큼 뜯어내 파이프에 꾹꾹 쟁여 넣었다. 언성을 높이는 나와는 달리 녀석의 목소리는 낮고 느릿느릿하고 끈적끈적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약이 이미 온 신경에 퍼져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지도 모르고 있음에 분명했다.
“이젠 네 목소리 듣기도 싫어.”
“아니, 아니, 오늘은 설명을 꼭 해 드려야겠어. 뭐가 좋을까?”
녀석은 성냥을 당겨 불을 붙이고는 파이프의 흡입구에 입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흐흡, 소리와 함께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파이프 안에서 돌돌돌 물이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몽창몽창 피어올랐다. 벡스는 천식환자처럼 큰 쇳소리를 내며 그 연기를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게슴츠레한 녀석의 검은 눈꺼풀이 한동안 미세하게 바르르 떨렸다.
“옳지, 이제야 떠올랐어. 이게 좋겠군. 자네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구.”
“난 행복했던 순간 없어.”
“어허, 그래도 조금이라도 행복했던 순간이 한 번쯤은 있었을 거 아닌가?”
나는 녀석의 설교가 듣기 싫어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좋아, 떠올렸다고 쳐.”
“옳지. 자네 그 순간에 곱하기 1,000을 하라구. 그게 바로 이 약을 하는 기분이니까.”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녀석은 나를 보며 게슴츠레한 눈을 찡긋하더니 흡입구에 입을 들이대고는 황홀하고 아까운 듯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풀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내 콧속까지 독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어때, 자네도 한 방 맞겠나? 마침 내일 게임도 있으니까 오늘은 내가 자네한테 인심 한 번 쓰지. 자네도 긴장될 게 아닌가?”
벡스는 팔을 천천히 뻗어 침대 옆의 서랍을 열더니 더듬더듬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마음이 약간 들썩대기 시작했다. ‘가장 기뻤던 순간에 곱하기 천’ 을 한 기분이라면 오늘처럼 불안하고 울적한 날 한 번 맛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녀석의 검은 손가락이 흐물거리며 주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리자 고개를 쳐들려던 호기심이 싹 가시고 말았다.
“좋아. 그렇게 기분이 뿅간단 말이지. 그런데 중독이라도 되면 나보고 어떻게 감당하라는 거지? 넌 내가 약쟁이가 되기를 몸살 나도록 바라는 놈이지? 맞지?”
뭔가 작정한 듯한 내 말투에 녀석이 비실비실 웃으며 놀려댔다.
“허허, 중독이야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구. 넌 너무 생각이 많아.”
“너 정말 이렇게 살 거야? 고향만 가면 모든 게 끝이야? 뭐, 인생의 희망이 있을 거 아냐?”
“호, 희망이라? 자네 방금 인생의 희망이라 했나?”
녀석은 마치 듣지 못할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휘파람을 가늘게 불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빈정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준, 자네는 아무래도 인생 공부 더 해야겠어. 희망, 그 자체가 바로 유혹이라구. 조심해. 그런 유혹은 마약보다 더 치명적이니까. 암, 암, 차라리 마약이 훨씬 낫지. 아직도 그걸 모르다니. 자네 내 친구 맞나?”
또 지난번처럼 녀석의 말재간에 참패를 당할 판이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를 집어 들어 녀석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좋아, 약쟁이, 진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지.”
“이봐, 자꾸 기분 잡치게 겁주지 말라구. 니 잔소리 때문에 지금 나누기가 되고 있어.”
“알았어. 이 대답만 해주면 니가 주사바늘을 똥구멍에 꽂고 살아도 난 찍소리 안 할 거야. 아마 너는 이번에도 기똥찬 대답을 내게 줄 수 있을 거 같아.”
“자꾸 제로로 가고 있어. 빨리 묻고 내 방에서 꺼져줬으면 좋겠어.”
녀석도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차가왔다. 나도 더 이상 이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약을 못 구할 때 기분은 어떻지?”
벡스는 그 검은 눈동자로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 마디를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장 비참한 순간 곱하기 1,000.”
“완벽하군.”
나는 주사기를 열린 창밖으로 내던져버리고는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방을 나왔다.

눈을 떴을 때

벡스는 오른 쪽 발목에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고 있었다.
“준, 깼니? 어서 일어나. 준비해야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였고 거실의 소파 위였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서 공기가 쌀쌀했다. 어제 녀석의 방을 나온 이후 늦게까지 혼자 술을 마시다가 곯아떨어졌는데, 이불이 덮여있는 것을 보니 간밤에 녀석이 챙겨준 모양이었다. 지난밤 약에 취해 느물느물하고 흐릿했던 벡스는 어느덧 건장한 청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확실히 꺼칠해 보였다.
“컨디션 괜찮나, 술고래 양반? 빨리 샤워부터 하라구.”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지만 심한 건 아니었다. 파스 냄새가 지독했다.
“벡스, 너 발목 아직도 안 나았구나?”
“생각보다 꽤 오래 가는걸. 수술한지 사 개월이 지났는데도 오늘처럼 날씨가 안 좋은 날엔 몹시 저려.”
발목 위에 지네 한 마리가 붙어있는 듯 한 뼘 가량 꿰맨 수술자국이 보였다. 그곳에 쇠토막을 넣었다고 녀석은 말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길 만큼 벡스는 나보다 달리기를 더 잘했다. 벡스는 오른 발을 들어 바닥에 몇 번 쿵쿵 찧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빗줄기가 더 굵어져 있었다. 한기가 몰려들며 배가 몹시 고파왔다. 나가서 뭐라도 먹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말을 꺼내려는 참에 벡스는 어느새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어 테이블 위에 차려놓았다. 한 때 샌드위치 주방에서 일주일 일하다 잘린 경력 치고 녀석은 솜씨가 좋았다. 
“뚜쟁이치고는 샌드위치 하나는 일품이야.”
나는 허겁지겁 베어 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래, 맛있을 거야. 어제 똥구멍에 맞다 남은 뽕을 좀 탔거든.”
녀석과 나는 지난 밤 언제 다퉜냐는 듯 얼굴을 맞대고 낄낄거리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는 내 접시에 있는 두 조각을 얼른 해치운 뒤, 녀석이 한 입 베어 물어서 이빨자국이 남아있는 것까지 뺏어먹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따끈한 커피를 마시자 속이 든든하고 훈훈했다. 
“자, 이젠 슬슬 나가실까.”
내가 접시와 컵을 싱크대에 넣자 벡스가 큐 스틱 가방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리고 먼저 성큼성큼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내 큐 스틱 백을 들고 그의 뒤를 따르다가 다시 되돌아와 선반의 마른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준, 그건 왜?”
“용기를 주잖아, 이 꽃은.”
밖으로 나가자 빗줄기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먹구름이 많이 끼어서 주위가 어두웠다. 우리는 유닛 앞에 주차시킨 낡은 자동차로 뛰어가 올라탔다. 빗방울이 차창에 검은 얼룩을 만들며 들이쳤다. 벡스는 자동차 핸들의 락(lock)을 풀어내느라 키를 꽂은 채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삼십 센티 자보다 훨씬 굵고 긴 철판이 핸들 한복판에 가로질러진 채 순순히 풀리지 않았다.
“젠장, 더럽게 빡빡한 게 미친년 거시기에 꽉 물린 기분이야.”
“이런 고물차를 누가 훔쳐간다고 락을 채워놓고 그래?”
“이 똥차도 오늘로 굿바이야. 흡!”
순간, 락이 풀리자 벡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씽긋 웃었다. 시동을 걸자 동시에 레게음악이 카 스테레오에서 터져 나왔다. 와이퍼가 작동되며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벡스, 이번에도 부르스 왕한테 돈 빌릴 거야?”
“그 돼지 말고 누가 있겠어.”
“그 중국인 돼지 놈은 왠지 재수 없어. 지독한 고리대금업자 녀석!”
“클럽에서는 그런 소리 함부로 말라구. 그래도 그 돼지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으면 나는 지금 지팡이 신세였을 거야. 물론 이제껏 번 돈을 몽땅 갖다 바쳤지만.”
“이봐, 도대체 이번엔 얼마짜리지? 꽤 큰 거 같은데.”
“넌 신경 꺼. 어쨌든 이번만 이기면, 넌 새벽마다 똥통 안 닦아도 돼. 나도 여기서 밑바닥 잡일 따위에 넌덜머리가 나. 판이 끝나면 곧바로 비행기 티켓부터 끊을 거야. 이건 너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게임이기도 해.”
마지막 남은 학기의 수업료를 납부하려면 오천 달러 정도가 필요했다. 방세와 생활비는 일을 해서 충당한다 해도 현재 가진 돈으로 수업료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번엔 내 티켓 값 빼고 전부 너 줄 테니까 공부나 열심히 하라구.”
“왕복티켓으로 끊을 거지?”
“아니, 편도. 졸업하면 우리 고향에 놀러오는 거 잊지 말고. 내가 잘 달리는 흑마로만 골라서 붙여줄 테니까.”
벡스는 운전을 하며 윙크를 찡긋 보내왔다. 녀석의 말을 듣자 며칠 남지 않은 수업료 마감일에 대한 걱정과 게임을 앞둔 두려움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가족조차 도와줄 수 없는 학비문제를 염려해주는 녀석의 마음에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벡스, 너는 왜 내게 잘해주는 거지?”
“갑자기 왜 이러시나, 동양인 쫌생이 양반.”
“아냐, 대답해 줘, 용사.”
녀석은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용기 있는 전사에겐 갚아야 할 게 두 가지가 있지.”
“그게 뭔데?”
“은혜와 원수. 이번 게임은 둘을 동시에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거든. 오늘은 내 발목을 되돌려 받을 거야.”
순간, 나는 스위치를 눌러 카 스테레오의 음악을 껐다. 그리고 벡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오늘 우리랑 붙을 놈이 누구지?”
벡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제스츄어를 하고는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차는 어느덧 킹스 스트릿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벡스가 운전하는 핸들을 길가로 급히 꺾어버렸다. 인도로 돌진하던 차가 날카로운 마찰음을 튀어올리며 급정거했다. 놀란 행인들의 욕설과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쭌! 왜 이래! 이 자식이 미쳤어!”
“난 빠질래.”
나는 단호히 말하며 차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빼냈다. 벡스의 억센 손아귀가 빠르게 나의 팔을 감아쥐고는 거칠게 차안으로 끌어들였다.
“너, 왜 이래? 미쳤어?”
“미친놈은 너야! 제정신이 아니라구. 오늘 붙을 놈이 띠앙 맞지? 대답해봐!”
나는 녀석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는 차문 밖으로 발을 빼며 일어섰다. 벡스는 운전석에서 몸을 날려 뒤에서 내 허리벨트를 움켜쥐고는 강제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를 시트에 주저앉히며 자신의 몸으로 내리눌렀다. 나는 녀석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벡스는 두꺼운 입술을 내 코앞까지 바싹 들이대며 소리쳤다.
“맞아! 띠앙과 한 판 붙는 거야. 그게 어때서? 무서워?”
“띠앙은 위험해, 멍청한 놈아!”
내가 사력을 다해 손아귀로 녀석의 목줄기를 밀쳐내자 벡스는 내 팔목을 비틀며 제지했다. 내가 녀석의 옆구리에 주먹을 한 방 먹이자 벡스는 웈, 하는 신음을 내뱉더니 이마로 내 머리를 들이박았다. 건장한 녀석이 있는 힘껏 내리 누르는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열려진 차문으로 빗줄기가 계속 들이쳤다. 벡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 얼굴에 대고 악을 썼다.
“그만 두기엔 너무 늦었어! 어차피 한 번은 정면승부를 걸어야 해, 한 번은!”
“정면승부는 너나 실컷 해. 이 깜둥이 새꺄!”
내가 맞서 악을 쓰자 녀석은 눈을 부릅뜨며 손가락으로 차의 앞 유리를 가리켰다.
“저 와이퍼 좀 봐. 옘병할, 저 와이퍼처럼 살 거야! 저렇게 왔다갔다 바닥이나 닦으며 살 거냐구! 그러다 개 쫓기듯 니네 나라로 쫓겨나고 싶어!”
와이퍼가 쉴 새 없이 허리를 꺾어가며 앞 유리창에 들러붙는 빗방울을 훔쳐내고 있었다. 인간 와이퍼로 살다가 유학 생활을 마감하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그러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차갑게 들이치는 빗줄기에 한 쪽 옷이 젖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든 몇몇 구경꾼들이 허리를 숙여 호기심어린 얼굴로 차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나는 힘을 주어 신경질적으로 녀석의 몸을 확 밀쳐냈다. 녀석이 운전석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팔을 뻗어 자동차문이 부서져라 세게 닫았다. 벡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엑셀을 밟더니 도로를 향해 우악스럽게 핸들을 돌렸다.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마른 꽃, 아니 ‘천둥의 심장’ 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꽃다발을 주워들어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코로도 귀로도 아무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다. 속력을 낸 차는 금방 클럽의 건물 앞에 닿았다.
“벡스, 이건 만약인데 말이야. 만약에…… 만약에…… 지면 어떡하지?”
벡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손바닥을 들어 턱 밑을 쓸어내리는 모션을 취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만약에 있을 최후의 상황에 대비한 우리끼리의 사인이었다. 게임에서 지면 무조건 튀는 수밖에 없었다.
“준, 잘 들어. 게임은 분명 삼사십 분 안에 끝나. 잘 보낸 몇 십 분이 막 보낸 몇 천 시간보다 나을 수 있어.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올라가자. 중국 돼지 놈 목 빠지겠어.”
벡스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큐 스틱 백을 챙겨들고 클럽 <스테어웨이 투 더 헤븐>의 철 계단을 통통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올라간 뒤에도 나는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비를 맞은 채 서성댔다. 도저히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학비가 없어 눈앞에 둔 졸업을 못하고 불법체류자로 낙인 찍혀 한국으로 쫓겨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한국에서 기다리는 건 군대의 징집영장밖에 없었다.
클럽 현관에 들어섰을 때, 나선형으로 꼬인 철제계단을 올려다봤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자 내 그림자가 보였다. 현관 천장의 조명을 받아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길 밖으로 빠져나와 비에 젖고 있었다. 큐 스틱 백의 그림자도 길게 늘어져 마치 투창을 든 전사 같았다.
‘그래, 싸움은 이미 시작된 거지!’
나는 다짐하듯 중얼거리고는 <스테어웨이 투 더 헤븐>의 철계단을 힘차게 밟고 올라갔다.

클럽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벡스는 구석 테이블에서 부르스 왕과 마주앉아 마지막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부르스 왕 옆에 앉은 검은 선글라스의 사내가 나를 보자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알은 척을 했다. 벡스는 배당금을 높이려는지 부르스 왕을 열심히 설득하며 중간 중간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근래 들어 소리 소문 없이 중소규모 물주들의 베팅이 포켓볼 쪽으로 몰려들면서 판돈이 점점 커지는 눈치였다. 경마를 비롯한 다른 레이스 경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배팅 판독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50%라는 비교적 높은 확률 때문이었다. 권투나 다른 격투 종목과 달리 쉽게 자주 판을 벌일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부르스 왕은 이들의 돈을 끌어 모아 굴리는 큰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게이머 관리 및 게임장소 또한 그 쪽에서 선정했는데, 요즘 사고예방 차원에서 전문 게임장 중심으로 경찰이 깔렸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불과 사흘 전에 장소를 변경하기까지 했다. 어제 벡스와 나는 분위기를 파악할 겸 클럽으로 현지답사를 나왔던 것이다. 부르스 왕의 비서인 검은 선글라스가 푸른색 돈 가방을 벡스에게 넘겨주는 모습이 보였다. 배당금 협상이 완전히 채결된 모양이었다.
클럽 안쪽에 따로 마련된 게임장으로 들어서니 띠앙은 빨간 남방의 사내와 연습구를 치는 중이었다. 녀석은 나를 보자 구레나룻을 갉작거리던 검지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맞잡는 악수가 아니라 마치 총구를 가슴에 들이대는 모션이었다. 나는 띠앙의 검지를 슬쩍 잡았다가 뱀 꼬리를 만진 듯한 오싹함에 손을 서둘러 털어냈다. 한 쪽 입 꼬리를 슬쩍 비틀어 올리는 녀석의 얇은 입술과 번들거리는 노란 눈알 속에는 께름칙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띠앙은 베트남인이었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웠지만, 160센티가 겨우 넘는 키에 까무잡잡하고 깡말라서 인상이 교활해 보였다. 이 바닥의 일부 베트남인들은 돈에 관한 악랄하고 잔인한 속성으로 악명을 떨쳤다. 사업이민이나 투자이민, 혹은 기술이민처럼 경제력과 교육조건을 갖추고 이민을 시작하는 부류와 달리 이들은 자신의 목숨만 겨우 조각배에 얹고 바다를 건너온 보트피플로 무작정 이 땅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였다. 아무런 기반이 없는 이들이 가장 쉽게 발을 들이는 곳은 불법의 영역이었다. 이 일대의 마약 암거래 운송책의 대개가 레바논인과 베트남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띠앙은 근래 이민자가 밀집한 카브라마타(Cabramatta)를 거점으로 이 바닥에서 대가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새끼 살모사였다. 벡스와 나의 인연이 맺어진 것도 사실 이 새끼 살모사 덕택이었다. 그건 오해라며 실실 웃으며 발뺌하지만, 킹스 스트릿의 내기 당구판에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벡스에게 그는 사주를 내려 린치를 가했던 것이다.
게임장으로 들어온 벡스가 푸른색 돈 가방을 한 쪽 구석에 내려놓자, 빨간 남방의 사내가 그 옆에 자기 팀의 돈 가방을 갖다놓았다. 벡스와 빨간 남방은 상대편 가방을 열어 돈을 확인했다. 벡스가 부르스 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부르스 왕은 볼을 실룩대며 검은 선글라스에게 짧게 속닥거리더니 뒤뚱뒤뚱 클럽 밖으로 나갔다. 중국인 돼지 녀석은 돈만 좋아했지 언제나 게임엔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곧 게임 방식이 결정됐다. 오판 삼승으로 ‘피프틴(15)볼’ 에서 라인 볼(띠공)과 플레인 볼(알공)을 나눠 넣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큰돈이 걸릴수록 오히려 게임방식은 단순했다. 판이 커질수록 겜블러의 목적은 게임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돈에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고 적은 노동으로 ‘한탕’하는 게 도박의 속성이었다.
동전의 앞뒷면으로 공격의 선후가 가려졌다. 벡스가 ‘헤드’ 를 선택하자 띠앙은 자연스레  ‘테일’ 을 갖게 되었다. 빨간 남방이 50센트 은화를 손가락으로 튕겨 올리자 동전은 공중에서 맴돌다가 당구대의 붉은색 벨벳 위에 떨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나는 소리 내어 나이스를 외쳤다.
벡스가 큐 스틱으로 있는 힘껏 퍼팅을 하자 로테이션 볼은 대나무 쪼개지는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초구에 무려 다섯 개의 볼이 흩어져 포켓 속으로 들어갔다. 라인 볼 셋에 플레인 볼 두 개였다.
일반 스틱의 무게가 평균 500그램 내외인데 반해 벡스의 초구 큐대는 밀도 높은 단풍나무로 제작된 630그램 짜리였다. 거기에 장신인 벡스의 힘이 더해져 녀석이 초구를 칠 때는 당구알들이 모두 깨져버릴 것 같았다. 어지간한 팀들은 그 기세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띠앙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연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벡스와 나는 오 분을 조금 넘기고 첫 판을 따냈다. 실전에서 이렇게 빨리 게임을 끝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둘째 판은 십 분이 지났을 때, 공을 모조리 집어넣었다. 벡스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베팅을 걸고 게임을 참관하러 온 뚱뚱한 호주인 몇 명과 검은 선글라스가 엄지를 세워 ‘썸즈 업(thumbs up)’ 을 보내왔다. 그동안 킹스 스트릿을 굴러다니며 적당히 잃어주다가 왕창 따낼 정도의 승률을 조절할 만큼 우리의 호흡은 잘 들어맞았다. 이제 한 판만 이기면 게임이 끝나서 싱거울 정도였다.
띠앙은 트라이앵글 프레임 안에서 로테이션 볼을 추리며 빨간 남방에게 베트남어로 빠르게 떠들어댔다. 작전을 바꾸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셋째 판은 띠앙에게 돌아갔다.
넷째 판을 시작할 때, 벡스는 프레임 안에서 볼을 섞으며 이번 판은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내게 속삭였다. 그러나 의외로 게임은 길고도 힘들었다. 애써 구멍 앞에 가져다놓은 공들을 띠앙은 재주 좋게 밖으로 빼냈고, 조급한 승부욕에 쫓겨서인지 벡스는 큐볼을 당구대 밖으로 날려서 오히려 상대편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결국 넷째 판도 띠앙에게 돌아갔다. 스코어는 2대 2였다. 승부는 마지막 한 판에 달려있었다.

가느다랗고 끈적끈적한 비가

게임 룸의 유리벽에 더러운 얼룩을 만들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벡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내게 자신의 가방에서 초크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큐 스틱 백에서 붉은 초크를 꺼내어 갖다 주었다. 화산재를 굳혀서 만든 고급품으로 녀석이 아주 아끼는 물건이었다. 벡스는 큐 칩에 초크를 정성스레 칠하고 그것을 건네주며 앞으로는 내가 보관하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벡스의 초크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유리벽 밖의 맞은편 건물도 빗물에 엉긴 먼지로 지저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보자 언젠가 벡스와 함께 빌딩 벽에 종일 대롱대롱 매달려 유리창을 닦던 기억이 났다. 그 때 우리들은 ‘인간 와이퍼’였다. 어깨와 목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비누칠을 하고 윈도우 블레이드로 와이핑을 해야 했다. 오줌이 마려워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 즈음에는 아랫배가 불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일이 끝나면 다리가 퉁퉁 붓고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낯설어서 몇 십 분씩 쪼그려 앉았다가 걷곤 했다. 그러나 가장 참기 어려웠던 건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벡스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뜬금없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와이퍼처럼 살긴 싫어.”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트라이앵글 프레임에 담긴 로테이션 볼을 당구대 위에 올려놓았다 열다섯 개의 당구알들이 백열등 불빛을 받아 뽀얗게 윤기를 발했다.
띠앙은 초구에 볼의 집합을 분산시키며 라인 볼 하나, 플레인 볼 두 개를 넣었다. 결승을 빨리 이겨서 돈 가방을 챙기고 싶은 우리의 성급한 마음을 읽었는지 띠앙은 의도적으로 한 스텝 천천히 신중하고 정확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띠앙은 연이어 플레인 볼 세 개를 더 넣은 후에야 기회를 벡스에게 넘겨줬다. 벨벳 위에는 띠앙 팀의 플레인 볼이 두 개, 우리 팀의 라인 볼이 여섯 개, 그리고 블랙 볼이 남았다.
벡스는 조금 전에 초크칠을 하고도 내게 다시 초크를 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정성들여 초크를 먹이면서 그는 머릿속으로 볼의 위치에 걸 맞는 판을 짜는 것처럼 보였다. 단순히 공을 집어넣느냐 못 넣느냐에 집중하는 건 초보들의 세계였다. 프로 게이머는 표적구를 포켓에 넣은 뒤의 볼의 흐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다시 말해, 큐볼을 어떤 방향과 순서로 이동시킬 지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길까지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머릿속의 아웃라인을 벨벳 위에 오차 없이 실현시켜야 프로라 할만 했다. 
초크를 건네받은 내가 큐칩에 초크를 먹이려하자 벡스는 낮게 말했다.
“넌 할 필요 없어.”
나는 게임 룸 한 쪽에 마련된 미니 바로 걸어가 바텐더에게 얼음을 넣은 콜라 한 잔을 주문했다. 목을 축이며 돌아왔을 때, 상황은 점점 딴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벡스는 어느새 공 두 개를 처리한 뒤 스틱을 브릿지에 걸고 조준하는 중이었다. 곧 급소를 노리는 노련한 사냥꾼의 작살처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매끄럽게 뽑아내는 스트로크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큐볼이 표적구를 때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튀어 오르면서 표적구는 낚싯줄에 묶인 듯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타점이후 큐볼의 진행방향이 내가 머릿속으로 찍어둔 최상의 지점으로 정확하게 이동한다는 점이었다. 무서우리만치 신중하고 밀도 있는 운영이었다. 벡스는 그렇게 네 개를 추가로 연속해서 성공시켰다. 녀석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의 플레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파트너인 나조차도 질투심에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띠앙이 왜 푼돈 내기나 하는 약쟁이, 벡스에게 사주를 내려 린치를 가했는지 짐작이 갈만 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라인 볼에 벡스의 큐가 맞춰졌다. 띠앙은 냉정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잔뜩 독이 오른 눈동자는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벡스가 친 큐볼은 붉은 벨벳 위를 자로 잰 듯 굴러가 마지막 표적구까지 끝내 해치우고 말았다. 나는 어느새 관객들과 함께 띄엄띄엄 박수를 쳤다. 그 어떤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완벽에 도달했을 때 불러일으키는 탄성과 놀라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블랙 볼만 넣으면 게임은 오버였다. 그러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남아있는 상대편 플레인 볼 두 개 중 하나가 블랙 볼과 큐볼 사이를 가로막아 진로를 방해하는 형국이었다. 쓰리 쿠션의 진행방향에도 상대편의 나머지 공 하나가 버젓이 길을 막고 있었다. 게임규칙상 큐볼은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공을 건드려서는 안됐다. 
벡스는 스틱을 세워 범퍼로 바닥을 퉁기며 몹시 난감해 했다. 당구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허리를 굽혀 길을 찾아봐도 마땅치 않는지 굵은 곱슬 머리카락을 벅벅 긁어댔다. 설령 길을 겨우 찾아서 블랙 볼을 맞춘다 해도 성공하지 못하면 상대편에게 돌아갈 절호의 기회를 벡스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방법이 최선일까. 비록 상대팀이지만 띠앙과 빨간 남방 역시 이런 국면에선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심각해하는 눈치였다. 내 판단엔 일단 디펜스를 하고 손을 빼는 수밖에 없었다. 쿠션을 이용해 블랙 볼을 맞춘 다음, 상대방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지점까지 큐볼을 이동시켜 마지막 기회를 엿보는 것이 내가 간신히 끌어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 방법 또한 생각처럼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윽고 벡스는 브릿지에 스틱을 걸었다. 그는 의외로 높은 허리 자세를 취하더니 큐의 범퍼 부위를 쳐들었다. 그리고 각도를 가늠한 뒤 대범하게 퍼트를 밀어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고난도의 방법을 시도한 것이었다.
힘껏 내리 찍은 큐의 스트로크로 인해 큐볼은 갑자기 대포알처럼 공중으로 쏘아 올려졌다. 트릭 샷에서나 볼 법한 점프 볼이었다. 공중에 떠오른 큐볼은 매끈한 포물선을 그리며 진로를 방해하던 상대방 공을 뛰어넘었다. 순간, 주변에서 와! 하는 감탄사가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곧 테이블 위로 안전하게 내려앉은 큐볼은 빠른 속도로 굴러가 딱, 하는 마찰음을 일으키며 블랙 볼과 부딪쳤다. 
게임 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큐볼과 블랙 볼이 맞닿는 그 극미한 찰나의 타점에 집약됐다. 벡스의 대범한 시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그 지점에서 불꽃이 점멸한 듯한 착각에 휩싸인 나는 엑셀런트! 를 외치며 두 팔을 힘차게 쭉 뻗었다. 당구알이 레일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런데 포켓 안으로 들어간 건 그만 블랙 볼이 아니라 큐볼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벡스가 큐볼을 집어넣다니…… 환호성은 곧장 맥 빠진 신음으로 변했다. 참관인 중 누군가는 미처 삼키지 못한 음료수를 콜록거리며 밖으로 모조리 쏟아내기까지 했다. 벡스는 큐로 바닥을 내리 찍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전까지 얼굴이 흙빛으로 굳어있던 띠앙은 어느덧 과장된 포즈로 허리를 뒤로 젖히고 술취한 뱀처럼 걀걀대며 웃어댔다.
빨간 남방은 서브 죤에서의 어드벤테이지를 얻어 남은 플레인 볼들을 쉽게 처리했다. 결국 블랙 볼 하나만이 테이블 위에 남았다. 녀석이 마지막 볼까지 처리한다면, 벡스의 말대로 나는 초크칠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 그렇게 되면…….
“헤이, 늑장 부리지 말고 빨리 치라구!”
나는 점점 짙어지는 패배감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큐볼과 블랙 볼의 위치는 그야말로 애매해서 놈들에게도 난처한 과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띠앙은 정신없이 손가락으로 테이블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빨간 남방에게 길을 코치했다. 그래도 빨간 남방은 자신이 없는지 한동안 큐만 조준하다가 마음을 먹은 듯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췄다. 게임이 끝날 지도 몰랐다. 나는 심장이 덜컹거리고 발가락 끝에서부터 굼실굼실 다리를 타고 오르는 긴장감 탓에 오줌보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윽고 퍼트가 튕겨져 나갔다. 큐볼과 블랙 볼이 부딪치는 소리가 딱! 하고 튀어 오르더니 두 개의 공은 당구대 위를 여러 바퀴 맴돌았다. 벡스의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게임장의 공기를 갈랐다. 블랙 볼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원 포인트 지점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초크를 꺼내 큐칩에 먹이며 조금 전 띠앙의 걀걀대는 웃음을 흉내 냈다. 
그런데 여전히 붉은 벨벳 위를 느릿느릿 굴러가던 큐볼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장난이라도 치듯 원 포인트 지점에서 블랙 볼과 마주한 채 멈춰버리고 말았다. 웃음의 꼬리가 식기도 전에 나는 딛고 선 땅이 출렁대는 당혹감에 한 쪽 무릎이 털썩 꺾였다. 원 포인트 지점에서 마주 본 블랙 볼과 큐볼이 중력을 잃고 눈높이까지 둥실 떠올랐다. 모든 시간과 움직임이 일시 정지된 상태로 지속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을 외면하며 나는 브릿지에 스틱을 걸었다. 그리고 묵직한 퍼트를 손으로 단단히 감아쥐었다. 단 한 큐, 이 단 한 큐에 너무 많은 것이 걸려있었다. 공식은 간단했다. 큐볼로 블랙 볼의 왼 쪽 절반을 맞추기만 하면 됐다.
쿠션을 계산하고 타점과 두께를 조절하다가 표적구를 건너다 본 순간, 나는 갑자기 숨이 멎는 듯 했다. 당구대 위에 있는 블랙 볼의 위치가 바둑판의 ‘2의 1’ 지점과 같다는 걸 불현듯 나도 모르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자 큐볼과 큐칩 사이의 좁은 틈으로 예기치 않은 상념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아, 그렇다면 섭이 네 녀석도 그날 당구대에서 ‘2의 1’ 을 보았던 것일까. 나뭇가지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두고 바람이 불 때마다 쓸쓸히 흔들렸을 나의 친구. 싸움은 계속 돼. 그것이 아파. 섭, 미안해. 고백할게 있어. 사실은 나도 ‘2의 1’ 을 좋아하지 않아. 거긴 늘 패싸움이 일어나 끝까지 버텨내야만 하는 곳이지. 버티는 건 언제나 두려워. 왜 치명적인 콤플렉스는 항상 절체절명의 순간에 드러나는 걸까. 섭, 지금 보고 있니…….
나는 큐볼과 큐칩 사이의 간격을 조이며 결정 큐를 날렸다. 쓰리 쿠션을 터치한 큐볼은 블랙 볼의 왼쪽 절반에 정확히 가서 닿았다. 블랙 볼은 백 쿠션에 부딪치더니 탄성에 의해 튕겨 나왔다.
“팬타스틱, 준! 게임 오버!”
볼의 방향을 미리 읽은 벡스가 환호성을 질렀다. 붉은 벨벳을 가르며 맞은 편 코너 포켓 방향으로 정확히 굴러가던 블랙 볼은 조금씩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구멍 앞에서 끝내 멈춰서고 말았다. 일어나 박수를 치려던 몇몇 참관인들이 안타깝게 팔을 휘두르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건 거짓말이야!
나는 목청이 찢어지도록 외치고 싶었다. 섭이 마지막으로 치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나와 벡스의 눈이 허공의 어디선가 아프게 부딪쳤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벡스는 나를 보며 손바닥으로 턱 밑을 쓰윽 쓸어내렸다. 띠앙이 한 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볼을 치기 위해 다가갔다. 그 사인을 받자마자 심장이 느닷없이 갈비뼈를 부수고 뛰쳐나올 정도로 요란하게 뛰어댔다. 낡은 동전을 핥은 것처럼 쓰디 쓴 침이 마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띠앙이 블랙 볼을 구멍 안에 넣는 찰나, 나는 스틱을 휘둘러 빨간 남방의 가슴팍을 부서져라 내리찍었다. 그다음 잽싸게 푸른색 돈 가방을 집어 들고 게임장의 출입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쳐나갔다. 화들짝 놀라 성급히 달려드는 검은 선글라스의 얼굴을 큐대의 퍼트로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선글라스의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녀석이 핑그르르 몸을 돌리며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곳곳에서 어두운 물살처럼 고함소리가 튀어 오르고 탁자가 나뒹굴었다. 언뜻 뒤돌아보았을 때 벡스는 띠앙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클럽의 철제 계단을 나는 미친 듯이 뛰어내려와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옮겨 앉아 벡스가 어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벡스는 좀처럼 빨리 내려오지 않았다. 이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흑인과 동양인이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클럽의 누군가 신고를 한 게 분명했다. 이와 동시에 철계단이 쿵쾅거리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나선형의 계단을 벡스가 정신없이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삼사 미터 뒤에서는 띠앙과 빨간 남방이 벡스를 쫓고 있었다. 
“벡스, 빨리!”
그때 나는 보았다. 점점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드는 사이렌 소리에 먹먹해지면서도 나는 보았다. 벡스는 계단을 십여 개쯤 남겨두고 힘차게 점프했다. 공중으로 떠오른 몸은 빠르게 하강했다. 그러나 그가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두 다리 중 오른 쪽 발목이 총탄에 맞은 듯 맥없이 꺾여버렸다. 벡스는 중심을 잃고 한 쪽으로 급하게 무너져 내렸다.
나는 핸들 락을 손에 쥐고 차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또 보았다. 막 절뚝거리며 일어나는 벡스의 가슴팍에 뒤쫓아온 띠앙의 단검이 꽂히는 광경, 외마디 비명과 함께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한 채 정지된 벡스의 눈동자,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제라늄 꽃잎처럼 화리릭 공중으로 솟구치는 벡스의 붉은 핏방울을…… 그 장면들은 숨을 한 번씩 들이쉴 때마다 끊어진 듯 단속적으로 정지되더니 곧 정신없이 빨라지다가 이내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이어서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사방에서 튀어 오르고 건물 뒤로 쥐새끼처럼 날렵하게 몸을 감추는 두 명의 사내가 보였다.
“벡스!”
나는 달려가 벡스를 안아 올렸다. 녀석의 모가지가 뒤로 젖혀진 채 힘없이 좌우로 건들거렸다.
“벡스! 눈 떠!”
나의 고함 소리에 녀석은 하얀 이를 간신히 드러내고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모든 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고통스레 숨을 몰아 쉴 때마다 왼 쪽 가슴께에 박힌 단검 사이로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나 역시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녀석의 가슴에 박힌 단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나는 그저 땀에 흠뻑 젖은 녀석의 굵은 곱슬 머리카락만 쓰다듬었다. 피는 내 옷으로 옮아 번지며 바닥으로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어느새 기도를 타고 역류한 핏덩이를 갑자기 토해내며 벡스는 입술을 달삭거렸다.
“이런, 젠장…… 준, 들려?”
“말하지 마!”
“내 심장 소리… 들리냐구…….”
말끝에 녀석은 울컥 한 덩이의 피를 또 토해냈다.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천둥소리 같아, 벡스.'그러나 내 대답은 끝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피칠갑이 된 녀석의 입술을 손으로 훔쳐 주자 핏덩이가 손에 접착제처럼 들러붙었다. 벡스는 조그맣게 큭큭대며 웃다가는 눈을 감아버렸다.
“엠블란스! 제발, 빨리! 엠블란스를 불러줘!”
경찰차에서 내려 달려온 백인 폴리스 맨을 향해 나는 소리쳤다. 그들은 들은 척도 안하며 내 팔뚝을 우악스레 잡아 비틀고는 벡스에게서 나를 강제로 떼어냈다. 그 바람에 벡스의 몸이 젖은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내가 항의하며 일어서려 하자 십자봉이 등판으로 내리꽂혔다. 숨이 콱 막히고 신경이 오그라들며 힘이 쫙 빠져나갔다. 다시 움직이려하자 이번에는 십자봉이 어깨를 후려갈겼다. 왼쪽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오며 무릎을 꿇은 채 엎어지고 말았다. 수갑을 채우려 내 손목을 잡아 빼는 폴리스 맨을 나는 순식간에 밀쳐내 넘어뜨리고는 몇 미터 앞에 주차된 자동차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멈춰, 이 개자식! 멈춰!”
폴리스들의 고함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차 앞에 멈춰 서자 꽃다발은 흙투성이 시트 바닥에서 푸른색 가방 아래 깔려 짓눌려 있었다. 차문이 열려있는 구형 포드 안으로 나는 허리를 굽혀 ‘천둥의 심장’ 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합류한 대여섯 명의 폴리스들이 서너 걸음 앞에서 권총을 겨누고 쉼 없이 똑같은 말을 귀가 먹을 듯 외쳐댔다. 어지러웠다. 안전장치를 풀고 노리쇠를 장전하는 금속성이 다발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마른 꽃다발을 들고 벡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여전히 총구를 겨냥한 폴리스들이 멈춰 서라는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 치자 구경꾼들도 뒤로 물러났다. 나의 깜둥이 얼간이 시인 친구는 얼굴을 클럽, <스테어웨이 투 더 헤븐(stairway to the heaven)>의 철계단을 향한 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의 가슴은 온통 붉게 물들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향해 마른 꽃다발을 던져 넣었다.



해이수
2000년《현대문학》중편 부문으로 등단. 2004년 제8회 심훈문학상 수상. 작품집『캥거루가 있는 사막』
추천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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