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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젊은시인 집중조명/남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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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91회 작성일 08-03-01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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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식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다시 부르다




반듯하게 잘 깎은 푸른 무덤 앞에서 죽은 이를 위한 예 갖추고 일어섰을 때 그 뱀 문득 내게로 와 내 벗은 발등 입술로 닦았다 아 그 날의 신선함이여 발등 타고 아랫도리까지 단숨에 올라 불끈 솟던 전율이여 뱀 다시 내게로 왔을 때 페이지 가득 슬픈 전설 주저리주저리 달고 있었다

그 뱀 이끌고 나는 슬픈 전설의 유목 떠났다 유목 생활은 메마르고 거칠기만 했던가 때때로 그 뱀 미모사 향기 가득 한 꽃 머리에 인 6월의 신부 앞세우고 슬픈 전설의 페이지 벗어나 내게로 왔다 아 그 날의 황홀이여 야성의 화관이여 여인이여 순결한 이미지여 슬픈 전설은 월계관과 가시 없는 면류관 양 손에 들고 의기양양 유목의 길 앞장섰다 

미처 손등 다 까지고 발등 다 부르트기 전에 우물이 있는 잘 깎인 푸른 풀밭 만났다 나는 드디어 오랜 유목 생활 끝내고 천막을 쳤다 아 그 날의 환호성이여 하늘의 축복이여 힘차게 울리던 박수소리여 푸른 풀밭 한없이 푸르고 그 속 알 수 없이 깊은 우물에서는 끝없이 샘솟는 소리 들렸다 나는 곧 그 뱀 잊었다

그리고 십 년,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은 변하지 않고 우물만 말랐다 귀 너무 얇은 푸른 안개와 입술 너무 두꺼운 붉은 안개만 겹겹으로 쌓여 푸른 풀만 말랐다 우물에도 있는 길은 자주 안개에 가려 하늘까
지 닿지 않고 땅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끌어올린 두레박엔 마침내 텅 텅 빈 바람소리와 안개만 수북하게 담겨 나와 흐릿하게 보이던 길마저 잃었다

지금은 울증鬱症의 시간, 아, 뱀, 그 뱀은 어디로 갔는가, 뱀이여, 우리가 함께 맞은 조증燥症의 시간은 이미 지나고 울증의 시간 다가왔다 짐 다 내려놓은 빈 들판으로 가리니 잊은 뱀이여 나오라 마른 풀밭 마른 우물 다 버리고 나와서 날카로운 이빨 한껏 드러내고 입 벌려다오 내 그대의 입속으로 들어가 고래 뱃속에 든 요나처럼 슬픈 전설의 오랜 유목 다시 떠나리라

* 1~2연의 ‘슬픈 전설, 미모사 향기, 꽃, 6월의 신부, 화관, 여인’ 등의 이미지는 천경자의 그림에서 빌림.





무덤과 새와 꽃이 있는 상투적 풍경


한 사내가 돌아서고 있다
돌아서는 사내 뒤편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누웠다
예나 지금이나 무덤은 그저 
무덤덤하다

사내 따라 한 여자가 돌아서고 있다
새는 목이 쉬고 꽃은 색이 바래니 
늦가을인 듯하다
새의 목청 갈라졌으나 새되고 
꽃의 대 말랐으나 꼿꼿하다

무덤 앞에 한 아이가 서 있다
새는 목소리 가볍고 꽃은 입술 방긋거리니
초봄인 듯하다
무덤과 아이와 새와 꽃과 봄 
모두 여전하다

무덤 안에 들까 돌아설까 
멀찍이 숨어서 나는 홀로 겨루는데
언뜻 본 그 아이 얼굴 
그저 무덤덤하다 
무덤 같다





오월, 신록


자본의 속도 좇아 앞으로만 달리던 시간들 겨우 건너뛰니, 언젠가 내 아랫도리 설레게 하던 그대 푸른 손짓 어느새 짙네 궂은 비 밤새 토악질하던 다음 날 산으로 갔네 겹겹으로 껴입었던 구름 한 겹씩 던지며, 차차 알몸 드러내는 하늘 가운데에서 불끈 햇살 쏟아졌네 자본의 무게 버팅기느라 깊은 관계 가지지 못한 날들 이어지고, 그 넓은 오지랖 벅차 애써 잊은 다산의 꿈 까마득한데, 저출산 모르는 그대, 부드러운 혀 내밀어 햇살 핥으며 몸 파르르르 떨었네 깊고 은밀한 곳까지 그대 온 몸 다 들이민 골짜기도 함께 화르르르 떨었네





따로 노는 잎들 
- 2006 여름, 포항


그 해 여름 나무 잃고 떠도는 잎들
이른 추위 밀고 섰던가 
붉은 수건으로 얼굴 가리고
출퇴근 거리 가로막거나 가로다녔다 

가다서다 가다서다 구르는 잎들
여름 내내 흘낏흘낏 굴러갔지만 
눈알 좀체 뜨끈뜨끈 달아오르지 않았고
핏줄 조마조마 불끈 솟지 않았다

그늘 포기한 나무
때마다 가지들 뚝 뚝 분질러 치웠고
남은 가지에 듬성듬성 달린 잎들
바람 불기도 전에 일제히 고개 돌렸다
뒷하늘엔 반역동적인 구름 유유히 흘렀다

잎들과 잎들 사이로 말 많은 토끼
내 안에 황금알 낳는 거위 있다 
가시 많은 장미 흔들어 무지개 만들며 
촐랑촐랑 뒤뚱뒤뚱 거리 휘저었다 

그 토끼 구린내만은 확실해서 
미처 가을 오기도 전에
황금내 마신 잎들 누렇게 부황 들었다
잊혀질 때면 이따금 멀리서 개 짖었고
입덧만 심한 토끼 자주 개처럼 짖었다

여름 내내 나무 묵묵부답했으나
뿌리 없는 꺾꽂이 가지들 세우고
헤쳐모여 한 노회하게 낡아가는 잎들
귀도 밝아라 나무의 이야기 주워 섬겼다

단출해진 나무에 걸친 무지개 뒷마당에는
미처 겨울 오기도 전에
장미 가시에 찢어진 잎들 널브러졌다

여름 가을 겨울 가고 봄 오도록
입 잠근 나무 처음처럼 그저 꿋꿋했고
오래 깨지 않는 깊은 겨울잠 들어서야
마침내 잎들 다시 한통속 되었다






권權을 포기하다


이중국적 가졌다가 한 국적 버렸다는 유학 앞둔 친구 아들 소식 듣다 문득, 뼈 한두 개 쯤 빠져야 바로 서는 그들만의 나라 생각했다 때로 한두 개 뼈 빼서도 바로 서지 않으면, 너 뼈 못 추릴지 알아 악다구니에 추릴 뼈 위하여 몇 개 쯤 더 빼놓던, 뼈 빠진 자리 살 차곡차곡 짜이면 네 뼈 바로 섰구나 그 나라 가더니 이제 사람 되었구나 소리 듣던, 두셋만 모이면 뼈 자리 짜였던 살 다 나가고 바람 숭숭 들어도 서로 짐짓 모른 체 빠진 뼈 몇 개 슬금 뒤로 감추며 온갖 미사여구로 너스레 떨며, 뼈 자리 가득 찬 바람 빼 때때로 특권의 나라 파쇼의 일상적 나팔수로, 뼈 바로 서야 나라 바로 선다 거름 지고서라도 장에 가야 한다 흉흉, 한 소문 온 세상에 퍼뜨리는 그들만의 나라 백성들을 생각했다 시민권 영주권 포기하고 새 백성 자원해 졸지에 영웅 되는 얼굴 보다 문득, 광대뼈 하회탈로 굳어 엄숙한 표정 좀체 못 지어 고문관 된 그들만의 나라 또 다른 한 백성 생각했다





처서


산이 성큼성큼 내려온다

삼십년 전 산을 벗 삼은
내 아비의 나이는
지금의 내 나이 마흔 일곱

더위도 때 되어
그만 저 온 곳으로 돌아가건만
가야 할 곳 잊은 채
여전 앞만 보며 허둥거리는
슬픈 중년아

백魄은 땅으로 가도
혼魂은 하늘로 떠났으리

이십년 전 먼저 간
친구의 무덤 찾아 예 갖추자고
말 모으는 친구들아
죽은 이를 위한 새삼스런 예우에
나는 그저 무심이다

아비와 친구는 산을 내려와
오래 전 이미
내게로 다시 왔다

성큼성큼
산이 다가온다
내 가야 할 산이 
몇 자나 가깝다





시작노트

안개는 산에서 내리고 바다에서 오르고 강에서 핀다. 안개는 뱀처럼 기어 골목골목으로 스며들어 온 동네 휩쓴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흐르는 안개 물러가지 않는다. 물러서기는커녕 내 몸속까지 들어와 살림 차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눈 뜨고 안개의 얼굴 두드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에 안개 섞고 비빈 안개의 밥 먹는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문 열고 안개의 길 떠난다. 안개는 성큼성큼 앞서서 간다. 안개의 뒤 따른다. 어느 사이 안개 사라진다. 사라졌다가 어느 사이 또 허둥대는 내 뒤에 다가와 가볍게 등 떠민다.
안개와의 동거는 즐겁다. 아늑하게 아름답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베개 배고 안개의 이불 덮고 안개의 잠잔다. 안개의 잠 속에서 꾸는 안개의 꿈은 달다. 안개의 꿈속에서 안개의 시 쓴다. 안개 향한 시 쓴다. 
안개의 시는 달다. 안개와 나는 찰떡궁합이다. 안개 속에서 밤새 헐떡이며 무기 벼린다. 아침이 되면 무기는 곧 안개 속으로 스며든다. 안개 속으로 스며든 무기는 힘을 잃는다. 무기는 곧 안개가 된다. 내가 벼린 무기는 좀체 무기가 되지 못한다.
안개의 칼날은 날카롭다. 안개의 몽둥이는 무지하다. 애써 잡고 있으려 하면 안개의 칼날에 손 베인다. 안개의 몽둥이에 가슴 멍든다. 안개와의 동거 달아도 안개 돌아서면 스스럼없이 떠나보낸다. 그리고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산모퉁이 돌아 바다 건너 강물 거슬러 또 다른 안개 내게로 기어온다. 



남태식
2000년《세기문학》 2003년《리토피아》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추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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