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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남태식 작품해설/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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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식 작품해설|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는, 혹은 그 경계에서
진순애|문학평론가
남태식의 시들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의 색채를 띠고 있다. 하나는 근원에 대한 모색을 위한 혹은 근원을 향한 무의식적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대한 의식적 세계이다. 근원을 향한 무의식적 세계에는 시,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다시 부르다」, 「무덤과 새와 꽃이 있는 상투적 풍경」, 「오월, 신록」, 「따로 노는 잎들」, 「처서」 등이 해당하고, 현재에 대한 의식적 세계에는 시, 「권權을 포기하다」가 해당한다. 그런데 「권權을 포기하다」는 남태식 자신의 권權을 포기하는 일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서 자화상에 대한 의식적 세계의 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식적 세계의 시에 해당한다. 시의 소재가 어떠하든 그리고 시적 대상에 대한 시적 자아의 태도가 어떠하든 결국은 무의식적 세계와 의식적 세계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남태식의 시는 두 가지의 색채, 곧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거나’,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세상에 대한 ‘의식과 무의식’의 태도는 남태식만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두 가지 태도에 속하리라. 흔히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분열된 존재로 일컬어지는 현대의 우리들은 가면의 ‘나’와 ‘나’의 본질에 속하는 ‘자아’라는 이중적 구조의 존재들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시는 이와 같은 이중적 구조의 경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비롯되는 시는, 그러므로 온전히 무의식의 세계에 속한다거나 온전히 의식의 세계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다. 현대시는 양자를 기웃거리며 넘나드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현대 개인의 의식의 경계에서 탄생하므로, 대부분의 현대시는 불안과 욕망의 정조를 기저로 한다. 남태식 시도 이와 같은 현대적 정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그 상실을 채우기 위한 무의식적 욕망의 존재이자, 부정적인 사회를 향하여서는 부정의 태도를 취하는 의식적 존재이다.
가령, 「오월, 신록」은 원형의 5월을 탐미하는 탐미적 태도에 국한한 시가 아니라, 상실의 자아가 오월의 신록을 대립적으로 대면하면서 오월의 신록에 침잠한다.
자본의 속도 좇아 앞으로만 달리던 시간들 겨우 건너뛰니, 언젠가 내 아랫도리 설레게 하던 그대 푸른 손짓 어느 새 짙네 궂은 비 밤새 토악질하던 다음 날 산으로 갔네 겹겹으로 껴입었던 구름 한 겹씩 던지며, 차차 알몸 드러내는 하늘 가운데에서 불끈 햇살 쏟아졌네 자본의 무게 버팅기느라 깊은 관계 가지지 못한 날들 이어지고, 그 넓은 오지랖 벅차 애써 잊은 다산의 꿈 까마득한데, 저출산 모르는 그대, 부드러운 혀 내밀어 햇살 핥으며 몸 파르르르 떨었네 깊고 은밀한 곳까지 그대 온 몸 다 들이민 골짜기도 함께 화르르르 떨었네
-「오월, 신록」 전문
“저출산 모르는 그대”인 ‘오월의 신록’은 “자본의 무게 버팅기느라 깊은 관계 가지지 못한 나”와 대립의 관계에 있다. ‘나’의 의식의 세계인 자본의 세계는 ‘나’를 억압하는 세계라서, 그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앞으로만 달리던 시간”의 세계였다. 자본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앞으로만 달리던 의식의 시간이면서 또한 그 억압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앞으로만 달리던 시간이기도 한 것이 “자본의 속도 좇아 앞으로만 달리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속도 좇아 앞으로만 달리던 시간과는 다르게, ‘오월의 신록’은 “언젠가 내 아랫도리 설레게 하던 푸른 손짓”의 세계로 ‘나’의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다. 의식의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식의 ‘나’는 무의식적으로 ‘오월의 신록’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근원 세계와 무의식적으로 관계를 갖는 시적 자아이면서, 이는 또한 현대인의 무의식 세계로도 확장된다. 의식의 자본과 무의식의 신록의 경계에 선 자아는 자본의 자화상을 벗어나 근원의 신록과 무의식적으로 결합한다. ‘내’가 의식적으로 오월의 신록과 결합한 것이 아니라, 오월의 신록이 ‘나’의 무의식을 견인하여 결합하게 한 것이다. 다산을 상징하는 신록의 계절이 불임의 저출산 시대에 근원적인 생생력으로 작용하여 ‘나’의 무의식을 환기하여 결합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오월의 신록’이 주는 가시적 견인력과는 다르게 어둠의 겨울잠인 비가시적 견인력이 ‘의식적 나’의 무의식을 견인하기도 한다. “여름 가을 겨울 가고 봄 오도록/입 잠근 나무 처음처럼 그저 꿋꿋했고/오래 깨지 않는 깊은 겨울잠 들어서야/마침내 잎들 다시 한 통속 되었다”(「따로 노는 잎들」에서)고 시적 자아는 근원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모색한다. “단출해진 나무에 걸친 무지개 뒷마당에는/미처 겨울 오기도 전에/장미 가시에 찢어진 잎들”이 겨울잠 속에 녹아내리는 자연의 근원성을 무의식적으로 모색하게 한다. ‘나’의 무의식을 유인하는 자연의 견인력이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무의식의 근원으로 기울어지는 ‘나’의 의식의 경사이다.
「무덤과 새와 꽃이 있는 상투적 풍경」도 ‘무덤과 새와 꽃’에 대하여 근원적인 탐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된 ‘무덤과 새와 꽃’에 대하여 상투적 풍경이라고 풍자하는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의식이 무의식으로 경사되어 근원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과 무관한 의식적인 ‘나’를 ‘한 사내’로 객관화하여 ‘무덤과 새와 꽃’이 하나 된 근원의 풍경이 아니라 상투적 풍경이라고 풍자한다.
한 사내가 돌아서고 있다
돌아서는 사내 뒤편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누웠다
예나 지금이나 무덤은 그저
무덤덤하다
사내 따라 한 여자가 돌아서고 있다
새는 목이 쉬고 꽃은 색이 바래니
늦가을인 듯하다
새의 목청 갈라졌으나 새되고
꽃의 대 말랐으나 꼿꼿하다
무덤 앞에 한 아이가 서 있다
새는 목소리 가볍고 꽃은 입술 방긋거리니
초봄인 듯하다
무덤과 아이와 새와 꽃과 봄
모두 여전하다
무덤 안에 들까 돌아설까
멀찍이 숨어서 나는 홀로 겨루는데
언뜻 본 그 아이 얼굴
그저 무덤덤하다
무덤 같다
-「무덤과 새와 꽃이 있는 상투적 풍경」 전문
‘무덤과 새와 꽃’은 원래는 ‘상투적 풍경’이 아니었다. 원래는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듯이 ‘무덤과 새와 꽃’도 하나였다. 그러나 원형의 시간이 변하여 ‘나’의 느낌도 변하였으므로, 원형의 신성한 풍경도 ‘상투적 풍경’으로 변하였다는 남태식의 풍자적 전언이다. 원형적으로는 하나였던 삶과 죽음, 그리고 무덤과 새와 꽃이었으나, 이와 같은 원형적 풍경이 자본의 시대에는 ‘상투적 풍경’으로 일탈하였다고 남태식은 무표정한 태도로 장치하여 자본 시대의 인간을 풍자한다. “한 사내가 돌아서고 있다/돌아서는 사내 뒤편에/무덤 하나 덩그러니 누웠다/예나 지금이나 무덤은 그저/무덤덤하다”고 무표정한 어조로 ‘시적 자아’를 포함한 자본 시대의 인간상을 풍자한다. 궁극적으로는 원형의 시간이 변하였으므로, 의식의 세계도 무의식의 세계도 원형과는 다르게 상투적으로 변하였다는 남태식의 전언이다.
그러나 상투적으로 변한 것은 ‘무덤과 새와 꽃’이 있는 자연 풍경이 아닐 것이다. 자연은 지금, 자본의 시대에도 원형처럼 봄마다 그리고 새해마다 우주창조를 반복한다. 우주는 자본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 삶의 근원이다. 단지 자연이었던 인간이 자본의 인간으로 일탈하여 ‘상투적’인 풍경이 되고 있는, 곧 변화된 현실이다. 그러므로 「무덤과 새와 꽃이 있는 상투적 풍경」이 은유하는 것은 ‘무덤과 새와 꽃’이 하나로 있는 자연 풍경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탈한 자본 시대의 인간의 풍경이다. 즉 자연과 하나였던 인간의 ‘살아있는 풍경’이 오래된 자본의 시대에 ‘죽어버린’ ‘상투적 풍경’으로 일탈했다는 남태식의 풍자적 전언이다.
반듯하게 잘 깎은 푸른 무덤 앞에서 죽은 이를 위한 예 갖추고 일어섰을 때 그 뱀 문득 내게로 와 내 벗은 발등 입술로 닦았다 아 그 날의 신선함이여 발등 타고 아랫도리까지 단숨에 올라 불끈 솟던 전율이여 뱀 다시 내게로 왔을 때 페이지 가득 슬픈 전설 주저리주저리 달고 있었다
그 뱀 이끌고 나는 슬픈 전설의 유목 떠났다 유목 생활은 메마르고 거칠기만 했던가 때때로 그 뱀 미모사 향기 가득 한 꽃 머리에 인 6월의 신부 앞세우고 슬픈 전설의 페이지 벗어나 내게로 왔다 아 그 날의 황홀이여 야성의 화관이여 여인이여 순결한 이미지여 슬픈 전설은 월계관과 가시 없는 면류관 양 손에 들고 의기양양 유목의 길 앞장섰다
미처 손등 다 까지고 발등 다 부르트기 전에 우물이 있는 잘 깎인 푸른 풀밭 만났다 나는 드디어 오랜 유목 생활 끝내고 천막을 쳤다 아 그 날의 환호성이여 하늘의 축복이여 힘차게 울리던 박수소리여 푸른 풀밭 한없이 푸르고 그 속 알 수 없이 깊은 우물에서는 끝없이 샘솟는 소리 들렸다 나는 곧 그 뱀 잊었다
그리고 십년,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은 변하지 않고 우물만 말랐다 귀 너무 얇은 푸른 안개와 입술 너무 두꺼운 붉은 안개만 겹겹으로 쌓여 푸른 풀만 말랐다 우물에도 있는 길은 자주 안개에 가려 하늘까지 닿지 않고 땅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끌어올린 두레박엔 마침내 텅 텅 빈 바람소리와 안개만 수북하게 담겨 나와 흐릿하게 보이던 길마저 잃었다
지금은 울증鬱症의 시간, 아, 뱀, 그 뱀은 어디로 갔는가, 뱀이여, 우리가 함께 맞은 조증燥症의 시간은 이미 지나고 울증의 시간 다가왔다 짐 다 내려놓은 빈 들판으로 가리니 잊은 뱀이여 나오라 마른 풀밭 마른 우물 다 버리고 나와서 날카로운 이빨 한껏 드러내고 입 벌려다오 내 그대의 입속으로 들어가 고래 뱃속에 든 요나처럼 슬픈 전설의 오랜 유목 다시 떠나리라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다시 부르다」 전문
이제는 슬픈 전설이나 다름없지만, ‘전설의 그 뱀’이 상징하는 것은 원시적 근원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세계는 현대 우리들의 근원이자 우리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세계이므로, 결국 위 시는 근원을 향한 남태식의 무의식을 은유한다. 단지 ‘전설의 그 뱀’이 아니라 ‘슬픈 전설’이라고 수식된 전설의 세계는 자본 시대의 남태식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슬픔이리라. ‘신선한 전율과 슬픈 전설’, ‘야성의 화관과 슬픈 전설’, ‘환호성의 축복과 슬픈 전설’ 등으로 근원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가 대립되면서 ‘전설의 슬픔’을 강화하고 있다. 근원의 세계는 유목으로 떠돌던 삶이 있던 세계이고, 자본의 시대는 그와 같은 유목으로 떠돌던 삶이 슬픈 전설이 되어버렸다는 위 시에서처럼 과거와 현재의 대립적 구조가 남태식 시의 지속적인 견인력으로 작용한다.
현재의 의식적인 자아는 슬퍼하는 자아이고, 슬퍼하는 까닭은 유목의 푸른 풀밭도 샘솟던 우물도 다 말라버린 현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능적인 뱀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던 유목의 삶은 본능적이어서 거칠었으나, 불임으로 ‘저출산’하며 푸른 풀밭도 샘솟던 우물도 다 말라버린 자본의 시대에서는 오히려 재생되어야 하는 생명의 삶이기 때문이다. “잊은 뱀이여 나오라 마른 풀밭 마른 우물 다 버리고 나와서 날카로운 이빨 한껏 드러내고 입 벌려다오 내 그대의 입속으로 들어가 고래 뱃속에 든 요나처럼 슬픈 전설의 오랜 유목 다시 떠나리라”고 슬픈 자아는 슬픈 전설의 주역이 되리라고 다짐한다.
그런데 ‘슬픈’ 까닭이 자본의 문명 시대에 잃어버린 본능적 유목의 삶 때문인지, 아니면 본능적 유목의 삶이 자본 시대의 문명적 자의식 속에 ‘슬픈 삶’으로 투영된 까닭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양자를 아우르는 ‘슬픔’의 까닭이 더 타당해 보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것 또한 변해가는 존재로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는 원형대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설은 원형으로 반추되든 아니든 ‘슬픈’ 전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전설에 대한 남태식의 슬픔은 그의 슬픔이자 우리의 슬픔으로 확장된다.
이와 같은 근원에 대한 원형적 그리움을 동반한 시적 자아는 그 그리운 세계를 현재화할 수 없는 목마름에 그리움을 펴지 못하고 접는 쪽을 선택한다. 접어버린 그리움 뒤에 남은 것은 생명이 메말라 버린 현재를 보다 강력히 질타하는 일이라는 남태식의 시선을 다음의 시가 말한다.
이중국적 가졌다가 한 국적 버렸다는 유학 앞둔 친구 아들 소식 듣다 문득, 뼈 한두 개 쯤 빠져야 바로 서는 그들만의 나라 생각했다 때로 한두 개 뼈 빼서도 바로 서지 않으면, 너 뼈 못 추릴지 알아 악다구니에 추릴 뼈 위하여 몇 개 쯤 더 빼놓던, 뼈 빠진 자리 살 차곡차곡 짜이면 네 뼈 바로 섰구나 그 나라 가더니 이제 사람 되었구나 소리 듣던, 두셋만 모이면 뼈 자리 짜였던 살 다 나가고 바람 숭숭 들어도 서로 짐짓 모른 체 빠진 뼈 몇 개 슬금 뒤로 감추며 온갖 미사여구로 너스레 떨며, 뼈 자리 가득 찬 바람 빼 때때로 특권의 나라 파쇼의 일상적 나팔수로, 뼈 바로 서야 나라 바로 선다 거름 지고서라도 장에 가야 한다 흉흉, 한 소문 온 세상에 퍼뜨리는 그들만의 나라 백성들을 생각했다 시민권 영주권 포기하고 새 백성 자원해 졸지에 영웅 되는 얼굴 보다 문득, 광대뼈 하회탈로 굳어 엄숙한 표정 좀체 못 지어 고문관 된 그들만의 나라 또 다른 한 백성 생각했다
-「권權을 포기하다」 전문
‘권權을 포기하다’라는 말은 과거적이어서 매우 낯설게 다가오나, 언뜻 보면 ‘국권國權을 포기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보인다. 그러나 ‘권’ 혹은 ‘권리權利’에 해당하는 ‘권’은 국권의 ‘권’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권’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뼈 한두 개쯤 빠져야 바로 서는 그들만의 나라”의 뼈도 있고, “한두 개 뼈 빼서도 바로 서지 않으면, 너 뼈 못 추릴지 알아”의 뼈도 있다. 또한 “추릴 뼈 위하여 몇 개 쯤 더 빼놓던, 뼈 빠진 자리 살 차곡차곡 짜이면 네 뼈 바로 섰구나”의 뼈도 있고, “두셋만 모이면 뼈 자리 짜였던 살 다 나가고 바람 숭숭 들어도”의 뼈도 있다. 뿐만 아니라, “빠진 뼈 몇 개 슬금 뒤로 감추며 온갖 미사여구로 너스레 떨며, 뼈 자리 가득 찬 바람 빼”의 뼈도 있고, “뼈 바로 서야 나라 바로 선다”의 뼈, 그리고 “광대뼈 하회탈로 굳어 엄숙한 표정”의 뼈도 있다.
이상의 뼈들은 먼저, 미국의 수입 쇠고기에 섞인 뼈를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의 갈비뼈에 해당하는 뼈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의 갈비뼈뿐만 아니라, 사람의 형체를 버티게 하는 모든 뼈를 의미하기도 하며, ‘뼈 빠지게 일하다’를 의미하는 뼈이기도 하고, 사람의 됨됨이를 은유하는 ‘뼈대’ 혹은 ‘줏대’를 의미하는 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늙은이의 늙어버린 뼈를 의미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국권을 의미하는 뼈이기도 하다. 특히 ‘하회탈의 광대뼈’는 지난한 삶을 사는 민중의 삶을 은유하기도 한다. 뼈가 제대로 서 있으면 국권도 제대로 서 있고, 사람도 제대로 서 있으며, 삶도 제대로 살게 된다고 세상을 향해 남태식은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을 세운다.
세상에 대한 남태식의 이와 같은 풍자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그의 시가 취하고자 한 시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월, 신록」이나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다시 부르다」 등에서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세계와 결합하여 세상을 풍자하기 위한 우회로를 걸었다면, 「권權을 포기하다」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세상을 향해 풍자의 시선을 집약하고 있다. 비록 풍자가 그리고 시인의 전언이 시보다 앞 설 때에는 시어의 압축성이 벗어나 시적 긴장력이 상실되기도 하지만, 의도적인 풍자를 통해서 시인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적 긴장력의 상실이 그 대가로 지불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진순애
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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