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6호 신작시/김태형
페이지 정보

본문
김태형
개싸움
누군가 목에 묶어놓은 은빛 철사줄
살갗을 찢고 목덜미를 파고들어
싯누렇게 고름이 썩어들고 구더기 스는 동안
마른 침을 삼킬 때마다
어쩌다 한 입 상한 빵조각을 씹을 때마다
아프게 조여드는 이까짓 한 가닥 가는 줄 때문에
그저 한 마리 더러운 개가 되었을 뿐이다
먹다 남긴 썩은 갈치토막이 잔뼈를 드러내고
곰삭은 홍어 한 점에 누런 쉰 김치쪼가리
숭숭 썰어놓은 삶은 돼지비계
축 늘어진 혀는 그러나 늘 기름져 있다
바늘 돋친 까칠까칠한 말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밤새 백태 낀 구렁이가 한 마리 기어들고
또 어떤 날은 남의 말을 잘라먹고 사는 개구리가 고개를 내밀 때
캄캄한 바닥 같은 입 속에서 맨드라미가 까끌까끌 피어난다
텅 빈 위장 속으로 뭔가를 집어삼킨다는 게
그래도 고통스럽다면
미안하지만 당신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없다
저물녘이면 골목마다 쌓인 쓰레기봉투를 차지하기 위해서
함께 어슬렁거리기에는 이곳이 너무 좁다
그래도 달려들 테면 어서 이 썩은 목덜미를 깨물어다오
이까짓 한 가닥 철사줄을 물어뜯어다오 끊어다오
그렇지 않으면 삼킬 수도 없는
네 목의 고통스런 철사줄을 내가 먼저 끊어주겠다
빗방울 걸음
언덕 위 교문 사이 초등학생들이 몰려나오는 길을 지나칠 때
나는 문득 내 걸음과 마주친다
오래 전 이사를 할 때마다 점점 멀어지던 학교
몇 정거장을 걸어가고 골목으로 빠져 언덕을 넘어가던 길
내 걸음에 비로소 내가 올라앉던 걸음
한참을 걷다보면 걸음은 까불지 않는다
시냇물을 따라가는 걸음이 아니다
이슬 젖은 들꽃을 밟으며 가는 걸음도 아니다
십리를 걸어 다녔다는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왜 굳이 빗방울 걸음이라고 내 걸음과 마주치는지
그건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둥그렇게 파문을 그리지만 가벼운 걸음
고무줄 끊듯 출렁이는 걸음
노란 장화를 신은 철벅거리는 걸음
내 빗방울 걸음을 이야기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비 내리는 날 아침 혼자 청소하던 작은 걸음
저도 모르게 제 걸음걸이를 빗방울 걸음이라고 부르게 되는 순간
아 이게 그 빗방울 걸음이구나 하고 알 수 있는 그런 걸음
멀리서 걸어오는 것만 봐도 나라는 걸 알겠다던 내 걸음
김태형
1970년 서울 출생. 1992년《현대시세계》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 이전글26호 신작시/김영산 08.03.01
- 다음글26호 신작시/김경훈 0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