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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신작시/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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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59회 작성일 08-03-01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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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얼룩


나는 무엇인가와 조금씩 겹쳐 있다.
왼발은 아버지와, 오른 뺨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겹쳐진 부분은 언제나 들끓고, 어머니와 겹쳐진 부분은 언제나 발갛다.
숫기 없는 새끼손가락은 만주 벌판과 현해탄을 떠돌던 아버지의 바람 같은 아버지와 겹쳐져 있고
손이 닿지 않는 어깻죽지는 그 아버지의 아주 오래된 아버지의 아주 오래된 이웃이 베어 넘긴 동구 밖의 느티나무와 겹쳐져 무료와 야료(惹鬧)가 교차하는 우주적 시간만 되면 욱씬거리고
나의 오른 쪽 눈썹은 묵주 돌리는 소리와 겹쳐져 가끔 씰룩거린다.
나의 손톱은 반투명한 낮달과 겹쳐져 물 흐르는 소리를 내고
나의 목덜미는 끝내 침묵하던 그의 목덜미와, 나의 발목은 아무 것도 모르며 우기던 시절과, 나의 손목은 옆집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가르던 칼날과, 나의 목소리는 애월 앞바다의 물빛과 겹쳐져 있다.
나는 경복궁 근정전의 서북쪽 연못 같아 우산 없이 비를 만난 것처럼 언제나 다른 것과 겹쳐진다.



봄날 아침 10시, 고양이와 쥐와 생각하기와


<쥐꼬리, 사건의 발단>
배고프고 사려 깊은 고양이가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신념으로 쥐구멍 앞을 지키던 시간이 가고, 아파트 정원에 피어나는 목련 봉오리가 유지방 99%의 바닐라 아이스크림로 보이던 시간도 가고, 쥐꼬리만 한 기대도 쥐꼬리만큼 남지 않게 된 어느 날, 살생殺生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순간, 쥐방울만 한 쥐새끼와 조우한다. 쥐구멍에 참으로 오랜만에 볕드는 봄날 아침 10시 정각이었다.

<병 주고 약 줄까? 약 주고 병 줄까?>
(쥐뿔도 없는 주제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배고픈 와중에도 이 사건의 철학적 의미와 도덕적 책임과 그로 인해 파급될 정치적 효과와 대사회적 이미지와 후세에 미칠 파장과 인류, 아니 포유류에 대한 연대 의식과 종교적 상징성에 대한 사색에 빠져드는
배고프고 사려 깊은, 배고픈데다가 사려까지 깊은, 배고프니까 사려 깊은, 배고픈데도 불구하고 사려 깊은, 설마 했더니 사려 깊은, 사려 깊으니까 배가 고픈, 사려는 깊지만 배가 고픈, 사려 깊어 봤자 배만 고픈, 사려도 배가 고픈)
고양이와 쥐가 눈이 마주쳤다.

<친환경적인 결말>
오전 10시 1분 32초
쥐 죽은
시간이 쥐 죽은 듯이 흘러간다.



윤지영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물고기의 방󰡕, 평론집 󰡔서정과 환상󰡕 외. 현 서울산업대 등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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