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4호/기행산문3/유시연/수녀원과의 인연
페이지 정보

본문
74호/기행산문3/유시연/수녀원과의 인연
유시연
수녀원과의 인연
나폴리 가는 기차
피렌체에서 나폴리 가는 고속열차는 시속 300km로 달린다. 이태리 중부에서 남부로 가기 위해서는 로마를 지나간다. 목적지는 폼페이. 오래 전부터 폼페이에 관심이 있었다. 600~700km거리인 나폴리 항구도시로 가는 기차 안, 카트를 밀고 가는 역무원에게 물을 청하며 얼마냐고 물으니 공짜라고 대답한다. 물과 주스를 청했는데 200cc물병과 주스 외에 물티슈, 사탕, 비스킷이 든 종이봉투를 준다. 기차비용 1인 112유로, 한화 15만 원, 두 사람 합해서 30만 원이다.
나폴리는 거쳐가는 도시다. 잠시 머무르려고 했으나 여행 중 만난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매치기가 성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해서 그냥 통과하기로 한다. 나폴리에서는 폼페이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봐야 한다. 뭐든 완벽한 것은 없다. 갖춰진 것도 없다.
하루 전에 체크아웃을 미리 해놓고 이른 시간에 나왔다. 열쇠를 메모지와 함께 프런트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오는데 곰팡내가 훅 끼쳐왔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다가 복도 창문 앞에 둔 빵을 본다. 아침식사용 빵이다. 일찍 퇴실하는 사람을 위해 호텔 측에서 배려를 했다. 기다란 바케트빵을 반으로 뚝 잘라 배낭에 넣어 왔다. 침대 매트리스가 탄력 있으면서도 푹신해서 잠을 잘 잤고 에어비앤비 호텔인데도 청소를 해주어서 서비스 설문이 뜨자 후하게 점수를 매겨주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이번 여정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진지한 여행자로 떠나고 싶었다. 작품의 모티프를 얻으려는 내 여정의 자유로움 틈새로 선한 인연이 된 사람들, 충동적인 행로, 우연한 만남도 어찌 보면 예비된 수순이 아니었나, 그런 의문이 든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바깥 풍경이 소박하다. 밀라노 등 상업이 발달한 북쪽과 달리 남쪽은 상대적으로 자연에 가깝게 더디게 진행되는 듯하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을 떠올렸다. 중국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단에 끼어 겨우 도착한 북경에서 황제가 여름별장에 있다는 소식은 조선 사신단에게 얼마나 큰 낙담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그의 호기심과 탐구력 지적 갈증을 충실히 채워나간다. 배로 운하를 이용하거나 건축양식, 농사짓는 수차의 모형 그림을 그려가며 기록한다. 육신의 고생과는 별개로 정신의 허기를 채운다. 고생은 고통이 아니니까.
그는 중국 관료와 필담을 나눠가며 중국 내륙 지역을 눈으로 마음으로 가슴에 담는다. 박지원의 심경을 그려보며 여행 중에 이탈리아를 여행한 괴테, 따뜻한 햇볕을 찾아 떠난 슈베르트, 캄보디아의 밀림지대를 헤매다녔던, ‘왕도’와 ‘인간의 조건’을 쓴 앙드레 말로, 타히티 섬을 사랑한 고갱… 길 위를 떠 돈 무수한 예술가를 떠올린다.
나폴리역에 내려서 나흘 후 포쟈행 기차표를 끊어놓고 다시 폼페이 가는 민자 철도 표를 끊느라 티켓박스를 찾아 헤맨다.
네덜란드 상선의 하멜은 타의로 조선에 발이 묶여 원하지 않았던 생의 도정에 놓였지만 훗날 그는 조선을 탈출하여 하멜 표류기를 남긴다. 그로 인해 은둔의 왕국 조선은 서구 유럽사회에 알려지게 된다. 하멜은 조선에서 귀화한 동족 박연을 만난다. 박연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 받고 혼인하여 자녀 둘을 둔 것으로 전해진다. 병자호란 때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네덜란드인 동족 2명을 잃고 그 후 이 땅에 고단한 육신을 묻는다. 자의 건 타의 건 낯 선 문화, 다른 문명을 체험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일생을 질러가는 특별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나는 스스로 피곤한 길 위의 노정에 올라 생의 불가해한 나날을 서성인다.
기차 창밖으로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능선 자락에서 연기가 솟는다. 에어비앤비 호텔까지 10분 거리. 택시를 물어보니 20유로, 우리 돈으로 2만 4천 원이다. 아오와 땡볕에 걸어가기로 하고 레스토랑 바에서 야끼만두보다 10배 크기의 가쪼네를 4유로에 사먹는다. 햄과 치즈, 토마토와 치즈가 각각 들어 있는 가쪼네는 화덕에 구워 불냄새가 난다.
무수한 사람들이 표류한 것처럼 나는 표류의 노정에서 충동적으로 혹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육신의 피로를 인내하며 길의 행방을 묻는다.
폼페이
고대의 시간이 멈춰 선 곳에 양귀비꽃이 붉었다. 기원 전 한가로운 정오의 휴식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자연재해는 모든 일상을 찰나의 순간에 멈춰버린다.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발견했다는 폼페이 유적은 아직 진행 중이다. 진시황의 병마총 유적도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발견했다던가. 긴 시간의 풍화에도 굳건히 서 있는 돌기둥과 아폴로 신전 주위로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진다. 아오는 사진 찍느라 부산하고 혼자 걷다가 한국인 단체 여행팀에 섞여 가이드의 설명을 청강한다. 점심 예약 시간에 쫓겨 한국팀이 서둘러 가버린 자리에 혼자 남아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다. 고대에 도시를 설계하여 세운 기획도시, 귀족의 정원과 서민들이 살았던 집터에 꽃이 피어 흔들린다. 반듯하게 닦아놓은 도로 위로 군데군데 말이 과속하지 말라고 과속방지턱 큰 돌 서너 개 박혀 있고 동선을 줄인 부엌의기역자 싱크대와 상수도와 수세식 화장실과 프레스코 벽화와 화덕과… 그 시대의 문명과 현대문명 사이에 진화된 것이라곤
시간의 수레바퀴뿐. 전 세계에서 몰려 온 단체 관광객, 가족팀, 나홀로족, 사람들의
혼잡이 유적지를 떠도는 적막을 흐트러뜨린다. 원형극장의 기둥을 떠받치는 신화속 영웅을 만난다. 공중목욕탕, 개인목욕탕에는 온탕, 냉탕이 존재하고 목욕탕 채광창 유리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고대 폼페이 시민의 삶을 기웃거린다. 그들의 사랑,
휴식, 일상을 단박에 멈추게 한 베수비오 산은 천 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오늘도 폼페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흘러내리는 화산재와 용암이 18km를 뻗어 나갔다니 나폴로만과 이웃 쏘렌토 바다마을까지 잿빛으로 덮여 혼돈이었으리. 원형경기장을 뒤로하고 폐허의 유적을 걸어나온다. 시계를 보니 4시간을 과거의 미로 속에서 헤맨 셈이다. 레스토랑 바에서 늦은 점심으로 화덕에 금방 구운, 토마토와 햄과 치즈가 들어간 가쪼네와 샐러드, 스파게티를 먹고 오후 4시에 출발하는 막차를 타고 베수비오 산으로 향한다. 화산 둘레를 둘러보고 내려오기까지 3시간 여. 호텔로 돌아오다가 까르푸 매장에 들러 요구르트와 포장된 샐러드, 소시지와 치즈, 빵을 산다. 고단한 하루였다.
쏘렌토 그리운 바다물빛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하고 쏘렌토로 가는 기차를 탔다. 폼페이에서 30여 분 걸려 도착한 쏘렌토는 바다물빛이 아름다운 해안도시다. 쏘렌토의 눈부신 햇빛과 푸른 바다를 보며 까뮈를 생각하는 오후 시간.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여고 때 음악시간에 배운 가곡이다. 번역곡인지 번안곡인지 잘 모르지만 쏘렌토에 오니 남해바다가 생각난다. 멀리 왼쪽으로 나폴리 만이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관광해양도시 쏘렌토는 절벽 위 건축물이 인상적이다. 밝은 햇볕과 열대과일들, 바나나를 사서 길거리를 걸어가며 먹는다. 물기 없이 퍽퍽하다. 수입산이다. 오렌지와 레몬, 포도는 이 지역 농산물이다. 붉은 자줏빛 오렌지 속살에 물이 가득 차서 수저로 퍼먹는다. 햇볕에 눈이 부시다. 크레타 섬을 좋아한 까뮈는 지중해의 햇빛을 사랑했다. 크레타에 오래 머물며 그는 ‘결혼’, ‘여름’ 작품을 남긴다. 뜨거운 태양, 노파를 살해하는 주인공, 이방인에서 까뮈는 인간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한다. 내가 관심 갖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보다도 인간의 삶이다. 죽음의 도시 위에 세워진 폼페이에서 활기찬 사람들의 삶을 보고, 에어 비앤비 호텔 젊은 부부의 일상을 느낀다. 어린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입구 식당 한 귀퉁이 책상과 노트북을 놓고 인터넷 예매를 체크하고 손님들을 받는 부부의 성실한 생활이 눈에 들어온다. 한 때 단내 나도록 개인과외, 대입논술, 독서논술을 가르쳤던 나는 치열한 삶을 만나면 연민과 동질감을 느낀다.
어느 도시에나 거리의 악사가 있다. 악사를 만나면 동전을 꼭 주고 간다. 사진찍기를 허락하면 동전을 추가로 주기도 한다. 호텔 담장 안 레몬나무를 사진에 담으며 오랜만에 여유를 부린다.
오래된 성당
아주 오래 전, 스페인 여행 중에 포르투갈을 잠시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저녁이었고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은 노란 나트륨 등으로 도시가 온통 오렌지색이었다. 수도 리스본에만 성당이 300여 개라던가. 그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다. 이번 여정 중에 발길 머무는 도시마다 오래된 성당이 있고, 성당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때때로 나이 든 노인이 진지한 태도로 기도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본다. 주름이 온 얼굴을 덮은 노인의 구부정한 등이 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평생을 말해주는 듯했고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오래 서서 제단을 쳐다보는 노인이 눈에 밟혀 나는 그만 그 기도를 바쳤다. 하느님, 저 노인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한번은 어떤 여인이 울면서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를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고, 또 어떤 부인은 그 표정에 간절함과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때도 나는 그 여인의 마음에 동참하여 두 손을 모은다. 하느님, 저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소서. 하느님, 저 부인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저 부인을 도와주소서. 가끔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그 사람의 원의가 무엇이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옆에서 거든다.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뒷모습만 보아도 슬픔과 아픔이 감지되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의 온 몸에서 풍겨나오는 고독의 그림자, 고통스러운 삶, 간절한 열망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또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그를 위해 기도를 바친다.
12세기나 13세기를 넘긴 건물, 대부분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 도심지 골목 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인구 오천 명 아시시에 수도원이 백 개라니. 건물 구석구석에서 수도자들이 기도하는 삶을 이어간다. 많은 성당에 사람들이 꽉 차지 않는다고 신자 수 감소니 뭐니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서구 기독교인은 태어나면 성당에서 세례 받고 죽을 때도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다. 삶과 죽음,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당과 뿌리 깊은 연관을 맺는다. 그러니까 성당은 시작과 마침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평소 생활 현장에서 충실히 살다가 부활 대축일에는 밤미사부터 낮미사까지 성당이 미어터진다. 고해소의 긴 줄은 줄어들 줄 모른다. 나는 아씨시 주교좌 성당, 성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세례 받은 성당에서 긴 줄의 행렬에 동참하여 차례를 기다려 고백성사를 보고 밤미사에는 바실리카 성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2시간 30분 간 진행된 미사의 전 과정에 동참하였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약한 존재, 유한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는 곳마다 성당 문이 열려 있고 촛불이 켜져 있어서 잠시 여독을 풀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카푸친 수도회를 찾아서
윌리엄 수사와 그의 제자 아드소. 이십대에 미셸 푸코의 저서 ‘장미의 이름’을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구조였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그의 사상과 철학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그의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영화로 상영된 장미의 이름 배경은 수도원이다. 길 위에서 만난 이태리 유학파 신부님의 소개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지오반니 로톤도를 가는 중이다.
나폴리역에서 기차로 포쟈까지 가서 포쟈에서 버스로 로톤도를 가는 일은 집중과 관찰, 눈치가 있어야 한다. 오전 9시 7분 나폴리 가리발디에서 출발, 카세르타 역에 내려 포쟈행을 타기 전 아오가 재빠르게 카푸치노 두 잔을 사온다. 기차로 3시간, 느긋하게 이태리 동부의 농촌 마을을 눈에 담는다.
표해록을 쓴 최부의 심경이 이랬을까. 나주 본가 부친의 장례를 치르러 일행 43명과 함께 제주를 떠난 최부 일행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의 강남 지역까지 밀려간 경험을 반 년이 지나 돌아온 후 성종 임금 지시로 기록한 책이 표해록이다. 중국 관리의 호송을 받으며 북경으로 압송될 때도 최부는 조선 선비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았고 중국 관료와 필담을 나누며 그들의 생활, 자연환경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소주, 항주의 운하 시설을 보는 최부의 심경은 어떠하였을지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상념에 잠긴다.
물의 도시 소주와 항주는 도심지 곳곳에 바둑판처럼 물의 길을 터놓고 있다. 소설집 ‘달의 호수’ 배경이 되는 곳이 소주, 항주, 우전 마을인데 정작 소설을 쓰고 나서 책이 나온 후에 다녀왔다.
프란치스코파 계열의 카푸친수도회. 장미의 이름 배경이 된 수도원이다. 서울에서 정선 정도의 오지라고 설명해준 길 위의 신부님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그곳을 소개한 것 같다. 조금은 단조로울 수 있음을 암시하였는데 어쩌면 내 마음속에 그런 곳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곳은 다섯 가지 상처를 받은 비오 신부가 생전에 활동을 하던 곳이다.
시골의 농촌은 포도순이 한창 윤기를 더하고 있다. 구릉지대의 너른 목초지, 밀밭과 올리브나무들, 인구밀도가 낮고 도시나 농촌에 골고루 분산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다.
산 지오반니 로톤도
이태리 동부 시골마을. 산 지오반니 로톤도까지 오는데 하루가 걸렸다. 여행 중에 만난 신부님 말을 듣고 용감하게 초행길에 나선다. 기차 두 번 갈아타고 3시간 여, 다시 시외버스로 1시간 여를 오서 농촌 풍경을 바라본다. 초록빛 넓은 목초지, 끝없이 펼쳐진 밀밭… 버스는 평야를 지나 높은 언덕을 끝없이 오른다. 버스 타기 전에 한 사람에게 행선지를 확인했더니 낯 선 이방인에게 관심을 보이며 주위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버스 안에서도 빠른 이태리어로 서너 명의 여자가 산 지오반니 로톤도에 대해 자꾸 얘기를 하거나 혀 꼬인 영어를 쓰는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소박한 인심을 느낀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시내로 나왔더니 식당마다 문이 닫혀 있다. 문 열린 중국인 식당을 갔더니 오전 11시~오후 3시, 오후 6시~밤 12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씌어 있다. 스페인의 시에스타가 기억난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인가? 낮잠 자는 풍습인데 갑자기 스페인에서 이주해온 집단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한다. 거리는 조용하다. 인적 드문 소읍 정도 규모의 거리를 걷다가 바에서 오렌지주스와 커피, 빵으로 점심을 먹는다.
저녁 6시 넘어 중국인 식당을 갔더니 일본의 초밥, 사시미, 미소된장국, 탕수육 등 퓨전요리와 찐밥 메뉴가 있다. 탕수육은 한국에서 먹던 것과 맛이 같다. 찐밥과 미소된장국, 연어샐러드를 먹고 거리에 나선다. 가로등과 상점의 불이 켜지는 저녁의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적막하던 낮의 거리, 인파로 북적이는 저녁의 거리에 어리둥절하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발길 닿는 곳마다 종탑이 있고 종이 울린다. 아씨시에서는 15분 마다 종이 울렸는데 이곳 로톤도는 시청 청사 종탑에서 30분 마다 종이 울리고 성당의 종소리도 자주 울린다.
예수의 다섯 가지 상처를 받은 카푸친수도회 비오 신부가 생전에 머무르며 많은 기적을 보여준 이곳은 그의 생전이나 사후에 순례자들이 찾아온다. 비오신부는 50년 동안 오상(다섯 가지 상처)을 안고 살다가 68년 안식에 든다. 사후 40년이 지나 그분의 관을 여니 육신이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어서 제대 뒤 지하성당 벽에 홈을 파고 유리관 안에 그의 시신을 넣어 보관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얼굴과 몸은 수도복으로 덮여 있고 가슴 위에 얹힌 손가락이 까맣게 변해 있다. 방부처리를 일체 하지 않은 상태로 죽은 후 온전한 몸을 보전하고 있는데 왜 손가락은 까맣게 변화되었을까. 어쩌면 까맣게 썩은 손가락은 그분이 인간임을 보여주는 징표이고, 온전한 얼굴과 육신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인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보며 든 의문이다. 비오신부는 성인품에 올라 수많은 신자들의 영적 존재로 남아 있지만 살아 있을 적에는 예수의 오상이 영광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처신, 그를 바라보는 형제 수사들의 시선, 몰려오는 병자와 순례자들… 얼마나 압박을 받는 입장이었을까.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삶을 제대로 못살았다고 비오신부는 고백한다. 아시시가 프란치스코성인의 도시라면 이곳은 비오신부의 도시다. 성당, 수도원, 상점, 시청, 광장, 거리, 골목의 담장, 가정집 할 것 없이 비오신부의 조각과 초상화, 사진, 부조가 있다.
이방인
이국의 농촌마을 골목을 걷는다. 산 지오반니 로톤도. 광활한 평원 끝 언덕위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내 인생에서 언제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이 있었나. 포장되지 않은 뒷골목 주택 담장 너머로 무화과 열매가 많이도 매달렸다. 개복숭아, 오렌지, 능금이 익어간다.
빨래를 가득 널어놓은 집 앞에 서서 옷가지 수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이 집은 아이들이 서넛 되겠다. 넓은 뜰에 풀잎이 헝클어져 있다. 대충 기계로 풀을 깎은 흔적이 코 끝에 비릿한 풀냄새로 풍겨온다. 어디선가 피자 굽는 냄새, 토마토소스 냄새, 치즈 녹아내리는 냄새에 된장국, 김치찌개가 간절하다.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신청했더니 메뉴를 갖다주는데 이태리어로 적혀 있다. 미국식 영어로 비프 스테이크를 시키는데 웨이터가 못알아듣고 프런트에 있는 청년을 데려온다. 어찌어찌하여 비프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엄청 크다. 그릴에 구운 쇠고기를 먹다가 결국 남겼다. 이들도 영어는 혜택받은 소수의 몫이다. 모국어를 따로 두고 그들과 서로 영어로 버벅댄다. 오래 전 독일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알아듣는 현지주민들, 이곳 시골에서도 같은 경험을 한다. 이틀동안 아시아인을 한 명도 볼 수 없는데 정선 만큼이나 먼 시골인가 보다. 도심지를 걸어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심지어 꼬마들도 쳐다본다. 지나가던 승용차 안에서 고개를 빼고 바라보던 예닐곱 살 사내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봐서 손을 흔들어준다. 꼬마가 같이 손을 흔든다. 아오와 나는 이방인이다. 인사를 하면 다들 친절한 미소로 같이 인사를 한다.
산 몬테 산탄젤로
산 몬테 산탄젤로는 산 지오반니 로톤도에서 21km 떨어진 이태리 남동부 해안에 접한 천혜의 요새다. 바다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도시, 달력에 나옴직한 예쁜 마을이다. 워낙 외딴 곳이라서 한국인에게는 낯 선 곳이다. 몬테 산탄젤로를 가는 버스 안에서 한적한 농촌의 짙푸른 초지와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 떼, 말, 소 들을 지나가며 언제 이곳을 다시 와보나, 그런 상념에 사로잡혔다. 미카엘 신부는 잊을만 하면 어디어디를 가보세요, 하고 카톡으로 소식을 전한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미카엘 신부님이 아니라면 이번 행로는 고달픈 노정에 그쳤을지 모른다.
동굴 성당은 산탄젤로의 백미다. 미카엘 대천사가 3번이나 발현했다는 그곳, 지하동굴 성당에는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미사가 이어졌으며 성체 현시를 해놓았고 또 다른 굴에서는 고백성사실 두세 곳에 불이 켜져 있다. 성체 현시를 한 제대 앞에는 투명 유리그릇에 담긴 심지가 보였고 촛불이 고요히 타고 있다. 바람도 인적도 없는 제대 앞, 소리없이 타는 촛불을 무연히 바라본다. 길 위의 나날을 보내는 사이 봄꽃이 지고 연녹빛 그늘이 깊어졌다.
감자싹은 났는지 이른 봄에 심은 감나무, 산머루, 라일락, 무화과 순은 제대로 올라왔는지 그 모든 생활의 끈을 미뤄두고 낯 선 길 위에 서 있다. 골목과 골목이 잇대어 있는 마을의 지붕에는 굴뚝이 솟아 있고 공터에서는 장이 열리는지 트럭에 가득 채소와 과일, 신발, 옷가지를 싣고 온 사람들이 노천에 진열을 하고 있다. 방울토마토, 바나나, 사과, 배, 오렌지를 들여다보다가 그냥 돌아서서 성으로 향한다. 성 안에서 바라 본 마을은 아스라한 절벽 끝에 오밀조밀 밀집되어 모여 있다. 멀리 성 밖 구릉지가 끝나는 평지에는 농작물이 자라는 게 아련하게 보였다.
낮 1시 15분 버스로 로톤도 호텔에 돌아와 낮잠을 자고 오후 4시 30분 미사를 간다. 새로 지은 지하성당 유리관 안에 모셔진 비오신부를 등 뒤에 두고 사제가 미사를 집전한다.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제 안의 그늘을 깨끗이 없애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그늘을 딛고 밝은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살아가면서 어찌 아무 고통도 없이 안락한 삶을 바라겠습니까.
어둠을 뚫고 밝은 빛을 향해 희망을 품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는 일입니다.
하느님, 지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 찬미 받으소서.
*유시연 2003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소설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오후 4시의 기억』, 『달의 호수』.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바우덕이전』, 『공녀 난아』. 에세이 공저 『꽃 진 자리에 어버이 사랑』 등. 정선아리랑문학상, 현진건문학상 수상.
- 이전글75호/권두칼럼/장종권/로또에 열광하는 시대 20.01.10
- 다음글74호/고전읽기/권순긍/금지된 사랑, 그 황홀한 고통, 『운영전』 20.01.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