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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특집/인천과 근대문학 100년/이현식/근대도시 인천을 드러내다―이태준의 「밤길」과 이상의 「지주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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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특집/인천과 근대문학 100년/이현식/근대도시 인천을 드러내다―이태준의 「밤길」과 이상의 「지주회시」
이현식
근대도시 인천을 드러내다
―이태준의 「밤길」과 이상의 「지주회시」
1. 개항도시 인천과 한국문학
두루 아는 바와 같이 인천은 1883년 근대적 개항을 거치면서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인천을 한국근대문학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에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특히 인천이 수도인 서울을 옆에 둔 가장 큰 항구도시라는 것이 핵심이다. 수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라는 점이 인천과 개항, 혹은 한국 근대문학을 연결시킬 때 빠트리지 말아야 할 항목이다.
수도인 서울 옆의 항구도시였기에 인천은 한국 근대사의 주요 대목에서 주연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개항이나 인천상륙작전, 산업화 시기의 대규모 산업단지의 조성, 80년대 노동운동, 인천국제공항의 개항 등과 같은 굵직한 사건부터 상대적으로 소소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인천이라는 도시가 한국근현사의 주요 무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천의 이 같은 지정학적 특징에서 말미암는다. 인천이 한국 근현대문학의 주요 작품 속에 무대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
그렇지만 인천이 이런 저런 문학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 주요 무대로 등장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핵심은 아니다. 어느 도시가 어떤 문학 작품 속에 얼마나 많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기는 시각이야 말로 소박한 소재주의의 발로이거나 배타적 지방 만능주의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주요 문학 작품 속에 특정 도시가 많이 등장했다는 것을 그 도시에 사는 사람이 자랑스러워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도시를 형상화하는 맥락과 관점, 진실성과 감동의 여부이다.
그래서 이 글은 한국문학이 그려낸 인천의 실체가 무엇인지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인천이라는 도시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를 통해 우리 문학에 대해서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즉, 문학 작품을 통해서는 인천을, 인천을 통해서는 문학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해보자는 것이 글의 취지인 셈이다. 인천을 그린 작품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그래도 논의가 덜 되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한국근대문학사에서 비중 있다고 평가 받는 작품을 뽑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태준의 단편 「밤길」과 이상의 실험적 단편 「지주회시」가 그것이다.
2. 이태준의 「밤길」에 나타난 유흥의 이면
이태준의 「밤길」은 1940년 《문장》에 발표되었다. 이태준은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근대소설사 가운데 빠트릴 수 없는 핵심 작가이고 「밤길」은 그의 주요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당대 한국문학의 대표작 속에 인천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무대는 인천 월미도의 용궁각 공사 현장이다. 월미도 용궁각은 실제로 존재했던 월미도 앞바다 위에 지어진 고급 요리집이다. 지금도 주요 포털에서 용궁각의 사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에 주목도가 높은 장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 위에 지어진 누각 형태의 요정이라 지금 봐도 신기한데 그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화제가 집중된 관광 명소였던 것이다.
소설은 뜨내기 노동자인 황서방이 서울로부터 용궁각의 공사현장에 일하러 내려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급요정인 용궁각은 주요 뼈대 공사를 모두 마치고 내부 마감공사만 남겨둔 상태였다. 장마철인 여름에 한창 마감공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비 때문에 공사는 진척되지 않고 날짜만 까먹고 있는 중에 서울 행랑살이를 하던 집 주인으로부터 전보를 받는다. 황서방은 인천역에 나가 한 손으로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장아장 걷는 다른 아이의 손을 쥔 주인으로부터 아이를 넘겨 받고는 영문 모르게 뺨을 얻어맞는다. 알고 보니 황서방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가고 젖먹이는 열이 펄펄 끓어 집주인이 아비인 황서방을 찾아 인천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젖먹이 아기는 결국 살아나지 못하고 황서방은 장맛비가 내리는 밤에 주안 공동묘지에 아기를 묻고 돌아온다. 「밤길」은 이런 황서방의 비참한 처지를 월미도 용궁각, 인천역, 주안 공동묘지 등을 배경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처연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태준이 여기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용궁각이라고 하는 호화스런 관광시설 뒤에 어려있는 민중들의 삶이다. 실제 용궁각은 1937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하니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인 1940년에는 이미 성업 중이었을 텐데 이태준은 용궁각을 소설의 소재로 삼아 근대적 유흥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민중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형상화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용궁각의 주된 고객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굳이 통계자료를 언급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돈과 권력이 있던 사람들은 서울 남대문에서 경인선 1등 칸 지정석에 앉아 기차의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구경하다가 인천역에 내려 월미도의 조탕潮湯에서 물놀이를 즐기거나 사우나를 했을 것이다. 그 중 돈이 더 많은 사람들은 용궁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창밖의 바다를 내다보았을 것이다. 1940년이면 아직 태평양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본이 기세 좋게 중일전쟁에서 중국을 한창 밀어붙이던 때였다. 괴뢰국인 만주국을 기반으로 일제는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 구축을 향해 야심차게 돌진하던 때였다. 그들에게는 희망찬 미래가 보이던 시기였겠으나 우리에게는 암담한 ‘밤길’ 같은 현실만 보이던 때였다.
「밤길」이 발표된 것은 이런 때였다. 이태준은 왜 인천의 월미도 용궁각을 소설의 소재로 삼았을까,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왜 젖먹이 아이를 눈물을 머금고 공동묘지에 급히 묻어야 하는 황서방 같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이런 점을 잘 생각해 보면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태준은 1940년 현재 조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리얼한 실체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인천은 개항을 계기로 개발의 열풍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근대적 항만이 들어서고 철도가 놓이고 무역회사도 들어섰다. 개항장 일대로 그전에는 없었던 일본식, 중국식 기와집이나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異國 풍광을 형성하였다. 항구에 가면 물건을 싣고 부리는 등의 일거리가 넘쳤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런 저런 식당이나 술집들로 도시는 왁자지껄했다. 바닷가를 면하고 있는 작은 산인 응봉산(지금의 자유공원) 위에 올라가면 서해안의 섬들과 바다가 내려다 보였고 월미도는 손에 닿을 듯이 잡히는 곳에 있었다.
그런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사우나, 수영장, 호텔, 방갈로, 식당과 카페 등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서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월미도는 완전 뜨는 핫플레이스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월미도 앞 바다 위에 떠 있던 용궁각은 조선 최고의 요정이었다. 서울에서도 인천을 구경하기 위해 앞다투어 사람들이 내려오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청관淸館 거리에서 중국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매력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흥청망청 대는 관광지의 화려함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게 좋아진 세상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당신의 삶일까,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이 당신, 아니 우리인가? 이태준은 용궁각을 통해 그 뒤에 서려있는 사람들의 생활의 실체를 보여주려 했음이 틀림없다. 우리들은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배경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실제로 몸을 써서 그것을 만들고 돌아가게 하는 실체적 주인공도 다름 아닌 우리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즉 그런 유흥지가 누구의 땀과 피 위에 서 있는 것인가를 이태준은 주목했다.
근대가 불러온 유흥의 뒤편으로 황서방 같은 사람들의 비참한 삶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젖먹이 아기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에 묘지에 묻고 돌아와야 하는 아비의 처지가 당시 식민지를 살아갔던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이태준은 인천의 용궁각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개항과 함께 근대도시로 성장해가고 있는 인천의 실체적인 모습을 「밤길」은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3. 이상의 「지주회시」와 자본주의적 삶의 실체
한국근대문학사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이상의 소설 가운데에서 「지주회시」는 「날개」와 함께 그의 주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주회시蜘蛛會豕’라는 제목은 거미가 돼지를 만난다는 뜻인데 그 의미가 벌써 난해하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는 이상의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은 1936년 조선중앙일보사에서 발간한 종합교양지인 《중앙》에 발표되었다.
「지주회시」는 「날개」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이나 우정으로 연결된 인간의 원초적 관계인 부부, 혹은 친구 사이마저도 자본주의적 상품 화폐의 교환 시스템 속에서 훼손되거나 변질되어 버린다는 것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상품 거래 관계와는 전혀 달라야 할 부부, 친구 관계마저도 자본주의적 거래 관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작가는 모더니즘 기법으로 과장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주회시」에서 등장하는 주요한 무대가 미두취인소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지주회시」에는 인천의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에 취직한 주인공의 친구 오吳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미두취인소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오를 만나러 인천에 내려오는데 이 친구의 존재가 심상치 않고 친구와의 만남 또한 흥미롭다. 「지주회시」에 등장하는 인천 에피소드는 이 소설을 이해하는 핵심 축이기도 하다.
우선 ‘미두취인소’라는 낯선 단어부터 살펴보자. 미두취인소는 오늘날의 선물거래소나 증권거래소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다만 증권이나 외환이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쌀을 비롯한 곡식이 거래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다고 실물인 곡식을 직접 거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쌀, 콩 등의 곡식을 해당 시기의 실제 작황이나 생산량과 관계없이 미리 거래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예컨대 이천군의 어느 면에 있는 논 몇 마지기의 곡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거래는 실제 작황이나 시장 동향에 따라 가격 차이를 만들어내고 상황에 따라 상당한 손해나 이익을 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싼 가격으로 산 미두가 가격이 폭등하면 상당한 이익을 거두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증권거래소나 외환선물거래소처럼 다양한 방식의 투자와 거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 미두취인소였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투자와 농업이 결합된 금융상품거래소로 이해하면 된다. 인천 미두취인소는 1896년에 문을 열어 1931년 말까지 30년 넘게 운영되다가 서울로 이전하였다.
이렇게 보면 미두취인소야 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상품시장이었다. 사람들의 물질에 대한 욕망을 매개로 매일매일 수없이 많은 거래가 이뤄지지만 정작 실체가 있는 상품은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시장인 셈이었다. 「지주회시」의 주인공 친구 오는 이런 미두취인소 주변의 금융거래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실제 미두취인소 주변에는 미두 거래나 대출 등을 알선, 대행해 주는 다양한 금융기관이 성업 중이었다. 친구인 오는 원래 미술학도였다가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인천의 금융회사에 취직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인천에 내려와 친구를 만났을 때 그림이 걸려있어야 할 벽에 푸른 줄과 붉은 줄이 어지럽게 그려진 방안지(모눈종이)가 가득 붙어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미두의 등락을 기록한 붉은 선과 푸른 선의 그래프가 벽에 가득 붙어있는 사무실의 풍경을 소설은 그렇게 묘사한 것이다. 예술가를 꿈꾸었던 친구가 금융회사에 근무할 수밖에 없는 현실 자체가 이미 아이러니컬하다. 가장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예술가 지망생이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금융거래소의 사무원이 된다는 설정이 그렇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예술가의 운명을 오라는 친구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다.
주인공은 인천에 내려와 친구 오와 함께 밤마다 바BAR로 시키시마 유곽으로 술을 마시러 다닌다. 주인공이 친구인 오를 만나러 내려오는 소설 속의 인천은 미두취인소와 금융거래소, 그리고 카페와 바, 유곽과 같은 유흥이 있는 도시였다. 실제로 인천은 그렇기도 했다. 현재 인천 신흥시장 근처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키시마 유곽은 조선 최대의 환락가였었다. 시키시마 유곽을 조선사람들은 부도유곽敷島遊廓으로 부르기도 했다.
1935년 1월 19일 <동아일보> 4면에는 “일본 내지인 유곽의 통계는 유곽 9개소에 창기 89인으로 총 등누인원 16,267인으로 그 유흥비 총액 137,118원 20전이라는 바 조선인 유곽을 합하면 등누자 약 3만에 그 유흥비 약 30만 원 가량 되리라 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일제시대에 정미소에서 일하던 여공의 하루치 임금이 많아야 80전이었으므로 1원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치면 적게 잡아도 5만원 내외 정도는 될 터인데 그렇게 보면 시키시마 유곽은 요즈음 화폐가치로 연간 약 150억이 넘는 매출을 거두고 있었던 셈이다.
모더니스트였던 이상의 눈에 인천이라는 도시는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의 화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주회시」에 등장하는 인천의 모습이 이렇게 미두취인소와 유곽으로 상징되는 것도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낮에는 눈이 벌개져서 돈을 놓고 돈을 먹는 장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저녁 때는 카페와 바BAR로, 유곽으로 돌아다니면서 욕망을 소비하는 곳이 인천이었다. 개항을 통해 근대도시가 되었으나 그 근대도시의 실체는 이런 풍경이었다. 「지주회시」는 인천을 배경으로 식민지 조선의 근대적 일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독특한 형식 실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4. 근대적 삶의 실체를 보여주는 도시, 인천
인천의 개항을 두고 오늘날에도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개항의 실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개항 때문에 근대적인 문명과 문화가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이 마냥 자랑할 거리만은 아니다. 근대적인 문명이나 문화라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좋기만 한 것인가도 차분히 따져야 할 문제이지만 설령 그게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주체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개항은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일본을 대표로 하는 외세가 자신의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해 억지로 강요한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면서 개항 도시 인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문학 작품은 그런 점에서 좋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인천은 개항과 함께 조계지가 만들어지고 일본인들의 이주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근대적 삶의 여러 양태를 보여주는 도시가 되었다. 「밤길」이나 「지주회시」라는 두 편의 소설은 인천이라는 근대 도시에서 영위되는 삶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즉, 용궁각이나 미두취인소로 대표되는 근대적 문명이라는 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혹은 그게 어떤 존재인가를 리얼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 점은 더욱 분명하게 다가갔을 것이다. 용궁각이나 미두취인소가 동시대 사람들의 피부에 훨씬 더 잘 이해되는, 혹은 더욱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개항도시라는 것은 항구를 통해 근대적 문명이 들어왔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근대적 생활, 삶의 새로운 질서로서의 근대사회의 구조가 인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더구나 우리의 경우는 식민지를 겪으면서 본격적인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겪게 되는데 서울을 옆에 둔 가장 커다란 항구도시로서 인천의 모습은 그것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무대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이 용궁각이라는 관광유흥시설이건 미두취인소와 같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금융시장이건 혹은 본격적으로 조성된 공장지대이건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성찰적 식견을 갖고 있던 작가들의 눈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인천이 한국근대문학사의 주요 장면에서 인상 깊게 등장한 것에는 그런 연원이 있다. 앞으로 미래의 한국문학을 이끌어 나갈 문인들이 인천을 다시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지 기대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현식 1997년 《문학과사회》(문학과지성사 간) 평론 등단.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관장. 저서 『문화도시로 가는 길』. 『왜 지역문화인가』, 『제도사로서의 한국 근대문학』, 『일제 파시즘 체제하의 한국근대문학비평』, 『곤혹한 비평』, 『인천담론·인천정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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