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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집중조명/임재정/상투적 연애 감정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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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집중조명/임재정/상투적 연애 감정 외 4편
임재정
상투적 연애 감정
경찰서를 나서자 비로소 배가 고팠다
근처 간장게장집에서 무릎을 맞대고 뒤늦은 점심
왠지 등딱지는 금기 같아, 군침이 돈다는 거야? 뒤로 엉덩이를 뺀 인간의 어정쩡한 직립을 흉보며, 게딱지를 시비한다 진술서를 써야 할 것 같다니까
넙죽 무른 속을 드러내고 뒤집힌 게
연애가 그래, 입에서 튕겨진 밥알이 여전히 밥알일 때까지지
비린내가 터진다 한들 박차고 일어서기가 쉽지 않은
창 밖의 순찰차 경광등이 긴 혀로 유리창을 핥고 간다
선택한 지팡이가 손잡이 뿐이라면?
실내가 어두울수록 너는 불편하게 환해지드라
질문이 많으면 지는 거야
언제 게걸음 배우러 바다나 가자
이거 청탁이야 청혼이야?
오금이 저려 세 번 네 번
앉은 자세를 바꿔도 여전히 경찰서 근처
비키니와 꼬리뼈의 관계가 궁금할 뿐이야
일곱 번째 얼굴
무면증이로군요, 얼굴이 지워지는 증세죠
어떤 병명도 등뒤 깊은 동굴을 방으로 쓴다
오늘 낮의 일이다 새까만 맨발로 허공을 걷다 돌아오면
방과 거실, 주방 지나 베란다, 이번 생은 창문을 현관으로 쓰는 구조다
빈방 밸브를 잠그려고 싱크대 밑을 더듬던 배관공에겐
지은 집만큼의 보일러 연통들이 머리에 꽂혀 있겠지
그래 사소한 소름이 불꽃으로 일어사리라는 믿음, 쓸데없이 예민한 나의 센서가 연소시키는 상상의 세계
얼굴도 없이 둥근 모서리가 수백 자루의 칼을 꺼내들 듯 무던한 당신이 내던진 접시처럼 불시에 바닥의 생은 사방으로 소스라치지
넌 미끄러운 게 매력적이야, 오늘의 나는 가변적이며 위험하다
등을 웅크리고서야 손가락의 채송화 한 송이를 꺼낼 만큼 도덕적이다
둥근 것들을 이해해, 매번 다른 칸에서 깨어나고 싶은 감정이지
에일리언처럼 나는 몇 번의 변태로 과거와 헤어질 수도 있다
횡격막 안
카페인이 종이컵에 담겨 떠다니고 붉은 꽃들이 관로를 따라 꾸르륵대며 흘러다니고
치골 사이 거뭇하게, 안쪽으로 자란 털북숭이 꼬리도 보인다
선생님, 제 병명은 제가 잘 알아요
등받이 깊이 공적인 자세로 앉으신
나와 의사이자 병명이신 분
처용아재 이야기
어른 넷 아이 셋, 합하면 여섯
산이 두 팔 벌려 안은 우묵한 마을
강낭콩 덩굴에 꼬투리 열리듯 드문드문 인가
마을 사람들 중 처용아재만 잎 뒤에 꽃으로 숨었다가 콩 꼬투리이었다가 내게는 아재였다가 동무였다가 그런 이웃인데
삼봉 그림자가 숟가락질 하는 저녁밥상엔 순하디 순한 지붕이 고봉으로 그냥 한 술
그런 사이로 사나흘에 한 번이지요
불이야!
놀란 고라니가 되어 고래고래
내 동무 처용아재가 날뛰는 저물녘
우로 동네 목청 중에 제일 실팍한 처용아재 목청은 누가 들어도 천둥소리라지요
불이야! 불꽃이 옮겨 붙어 훨훨
강낭콩 덩굴처럼 뭉게뭉게 구름까지 닿지요
칠푼이 내 친구 처용이 뛰면요
처용아 이눔아 휜 바지랑대 같은 처용엄니 뒤따라 휘적대구요
아이구 이눔아 이 잡눔아 눔아 눔아 눔아
함께 불러줄 목청 너덧 개는 그냥 얻어 쓰는 메아리 지천 산골짝인데요
처용이 뒤쫓는 오늘 노을은
처용엄니 눈시울에서 덜컥 더 붉고요
온 몸뚱이 그대로 눈망울 하나인 처용은 잘도 속아서 내 동문데요
청솔가지 꺾어 휘저으며 불 끈답시고 노을 속 까마득 언덕으로 뜁니다
삼봉 뒤덮은 벌건 불꽃은 누가 봐도 참 근사한 소꿉
남은 풍경마저 털어 한 술 숟가락을 뜨는 삼봉에겐
처용도 나도 밥공기에 엉긴 밥풀들인데요
금홍의 프롤로그
1.
소녀 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 속 좀 봐
무명옷을 기운 바늘쌈지에 꽂힌 햇볕 말이야
2.
처마가 없는 집은 둥근 방을 뒤집어 바깥으로 부풀고
웅크린 여자가 몸을 일으킨
골무로 떠민 평생의 바늘귀는 삼천 삼백
거기 꿰었던 핏줄을 바느질 하며
금홍아- 땀땀 성기는 눈 코 입
금홍아-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댓돌이
금홍아- 처마가 들어 올려지고
울타리가 생긴다 얘, 금홍아-
3.
차양이 솟은 상가
소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운다 광목 소매 자락으로 훔친 눈물이 얼룩으로 앉고 나비로 난다 모여든 사람들이 춤추는 상여를 뒤따르며 노래한다
떠올랐다 가라앉으며 꽃 섬이 도는 산모롱이는 영영 저쪽 너머인데, 소녀는 개울 타고 물 따라 간다하고 나비는 꽃 섬에 홀려 북산을 간다 하고
현생과 피안을 안팎으로 그러쥔 물방울 속 풀썩, 가라앉는 집
소녀를 끌고 안방에 들어
바르르, 떨다가 여인의 치맛자락에 앉는다, 나비
2월 30일
새벽이 온통 하나의 귀로 곤두선다
목덜미를 쓸다보면 바깥에 부쩍 예민해져서
여자의 젖은 단화가 현관에서 끙끙 앓고
골목으로 난 유리창이 부황 뜬 자리처럼 부푼다
귓속의 골목을 목구멍에 물어다 놓고 왈가왈부 중인 개와
꿈인데도 신발을 더듬는 여자의 등에
가만히 손을 흔들어 나를 달랜다, 출근을 하는지
다섯 시 십칠 분, 십여 분 후면
버스와 묵례를 나눈 여자가 의자와 한 쌍인 창백한 얼굴들을 헤아릴 것이다
대걸레를 밀며 건물의 구석구석을 헤매면서도, 아무렴
가끔 대답을 원하는 가혹한 꿈과 여자의 잠꼬대
벽의 전자시계가 깜박이고 가는 초 단위의 슬픔
진열된 통닭처럼 부끄러운 날개를 달고
서류더미 속을 뛰어다닌다 그리고
여자가 뒷모습으로 대걸레를 밀며 지나갔는데
글쎄 그토록 입구를 찾지 못하던 잠 속이었다
몸이 빠져나간 여자의 옷이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있다
침대 스프링이 일제히 키들거린다 쉰여섯
거울을 보면 등뒤가 너무 헐벗은
삼월이다, 오늘은
시론/이상하게 작은 나의 시론
1.
눈꺼풀의 무게가 십분의 일쯤으로 줄어드는 시간을 아침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사람들이다. 물론 아침과 눈꺼풀의 오묘하고 이상한 관계를 모든 사람들이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들의 눈은 저마다 다른 곳을 보고 다른 감정을 말하며 이렇게 덧붙이기도 한다. 오직 눈빛만으로. ‘어느 날, 우린 모두 한 곳에서 발견될 거야.’
주변을 잘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127배는 더 많은 것들이 오묘하고 이상한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를 간섭한다. 가령 시간과 날씨가, 혹은 지구와 해가, 붉은머리오목눈이가 품은 뻐꾸기 알의 둥글기와, 그날 막차에서 내리지 않은 당신의 어떤 자세가 우리를 타인으로 만들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말을 잊고 눈빛을 버리고 이제껏 알던 얼굴들을 지워버린다. 그럴 때 우린 마치 암시처럼 한 문장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어느 날, 우린 모두 한 곳에서 발견될 거야.’
2.
고무줄의 힘으로 베이스캠프 Y에서 쏘아진 조약돌은 제 속력을 알지 못한다. 지구를 맴도는 달은 그저 등만 가진 둥근 몸이라서 와락 상대를 끌어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배면에 거느린 구름의 부피 따위에 반응하는 개를 본 적이 있다. 당신을 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해서 삶이 헐거워지거나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일어나자마자 눈만 겨우 비비고 슬그머니 바깥을 휘돌고 온 나에게 아내가 묻는다. “날씨 어때?” “음, 세 살 아이처럼 하염없네.” 서로 아무런 관련을 맺지 못한 앞의 문장들은 어느 날, 모두 한 방향을 위해 곤두설 수도 있다.
3.
딱히 뭐라 정의되지 않는 나를 나는 생각한다. 시간들이 몸 밖을 흐르고 숨이 그 몸을 헤집는다. 나이를 먹고 있다는 느낌과 낌새 사이사이, 담배연기가 매캐해진다. 그런 나를 견디느라 집은 벽지가 해지고 살아있다는 생각에 툭툭 돌부리가 불거진다. 불편한 감정은 몇 가지의 호르몬을 쏟고 체감하기도 전에 외부로 전이 된다.
정말 내가 아는 외부=세계는 늘 내 안의 기슭 어딘가에서 와 일렁이고 부서진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반응은 참 나를 반영하고 있는가. 낯선 외부로부터 어떻게 내재적인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러운가. 세계는 내게 무엇을 묻히고 나는 마침내 그것이 되는가. 마침내 감정을 포함한 물질로서 쏟아지는가. 수상한 의문들이 문득문득 나를 독차지할 때 나는 무수한 내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있을 때, 당신은 온다. 얼굴도 없이 투명한 몸과 더러 얼굴은 있으나 텅 빈 표정으로, 당신은 온다. 카오스처럼 검게, 하얗게 타오르며. 마주한 당신과 몇 번은 비껴가다가,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는 가장 가엾은 나를 마주 앉히게 된다. 자유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의무감으로, 의무감보다는 조금 더 즐거운 내가 되어서 마침내 나는 비로소 완벽한 내가 된다. 그때의 나를 누군가 보았다면 나는 아마 충분히 일그러진 존재였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그대로 하나의 변별적 세계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느끼는 것 위에 나의 일부를 내던짐으로써 얻어낸 세계 말이다. 오로지 나만 기거하며 나만이 주무를 수 있는, 애초의 나인 ‘반죽’이 한 덩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물리적인 산물이며 감정을 품고 부풀어 오르고 구울 수 있으며 취식이 가능한 물질이자 존재다.
4.
‘어느 날, 우린 모두 한 곳에서 발견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모두들.
5.
우리가 가 닿고자 하는 ‘한 곳’은 이른 새벽 횃대에 올라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울타리를 일으켜 세우는 닭을 만날 때도 생겨난다. 닭은 새인가? 라는 질문은 몹시 1차적이지만 질문으로 성립되고, 닭과 태양이 어떤 식으로 내밀한 관계인지를 묻는 질문 역시 낮은 목소리지만 계림의 신화들이 품은 함의 때문에라도 질문으로 성립된다.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이미 누군가 던져놓은 질문들을 떠올리게도 된다. 어떤 기미에 한없이 가렵던 겨드랑이와 아브락사스, 이카루스가 그것들이다.
이 몇 가지의 널뛰기들은 사실 가로지른 하나의 막대로 지상과 대별되는 횃대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 수평의 지렛대는 완벽히 지상과 수평을 이루지만 날개 달린 것들을 불러 앉히는 것만으로 온 몸의 탄성을 한 입에 물고 떠는 당겨진 활이 된다. 격발은, 그러니까 한 개인의 내부와 맞닥뜨린 세계의 표정이 일으키는 간섭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지 세계 자체의 어떤 요철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안에서 발원하지만 밖에서 온 것이며 마침내 바깥의 이름을 가질 것이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다만 지상에 수평의 막대를 거는 일, 그곳을 어떤 성소나 다른 차원으로의 환승 장소로 깨달아버리는 일.
나라는 일종의 늪이 부디 자신을 발효시키며 부글거리기를. 수평의 횃대처럼 그러하기를.
6.
“이봐요 임재정 씨, 쓸데없이 시 쓰지 마시고요, 그래서 날씨가 어떤데?”
살아남기 위해 가끔은 현실의 지배자를 끄덕여야 하며, 그러므로 결국 살아있을 것이다. 거기까지가 시일 터인데, 그럴 때의 나는 농담에 가깝다.
“응, 쾌청해.”
*임재정 2009년 <진주신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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