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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집중조명/반연희/작품론/모호함 속으로 미끄러지는 얼굴들―임재정의 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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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집중조명/작품론/반연희/모호함 속으로 미끄러지는 얼굴들―임재정의 시 읽기
반연희
모호함 속으로 미끄러지는 얼굴들
―임재정의 시 읽기
시를 쓰며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임재정 시인의 발랄하지만 묵직한 시를 읽다 보면 언어를 자신의 사유대로 표현하여 부리는 솜씨에 감탄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의 가면을 바꾸는 기술인 ‘변검’이 떠오른다. 행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실을 연결해두고 순식간에 감정을 잡아당겨 얼굴을 바꾼다. 실을 잡아당기는 것은 시인이기도 하고 독자이기도 하다. 시인의 첫 시집인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2018)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에 소개되는 시 다섯 편에서도 얼굴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넙죽 무른 속을 드러내고 뒤집힌 게”(「상투적 연애 감정」)가 되었다가 “새벽이 온통 하나의 귀”(「2월 30일」)로 곤두서거나 “귓속의 골목을 목구멍에 물어다 놓고 왈가왈부 중인 개”(「2월 30일」)가 되거나 “나와 의사이자 병명이신 분”(「일곱 번째 얼굴」)이 된다. “오늘의 나는 가변적이고 위험”(「일곱 번째 얼굴」)하고 “에일리언처럼 나는 몇 번의 변태로 과거와 헤어질 수도 있다”(「일곱 번째 얼굴」) 또 한 번 실을 잡아당기면 “핏줄을 바느질”(「금홍의 프롤로그」) 하는 금홍이가 되었다가 “내게는 아재였다가 동무였다가 그런 이웃”인 처용아재(「처용아재 이야기」) 가 되기도 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 있고, 깊이를 얻으며, 열려 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 (『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135쪽)
임재정의 시들에서 얼굴은 얼굴이되 얼굴이 아니며 발이나 귀와 같은 신체의 일부로 나타나기도 한다. 행간을 일부러 모호하게 흩어놓기도 하며 시인이 실재로 처한 현실과 심상의 세계 혹은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행간을 꾸리기도 한다. 행간의 골목을 돌다보면 안개 속을 걷는 듯 독자가 길을 잃기 쉽지만 이 모호함이 오히려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모호함 보다는 더 구체적인 것이 아닐까? 시 다섯 편을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경찰서를 나서자 비로소 배가 고팠다
근처 간장게장집에서 무릎을 맞대고 뒤늦은 점심
왠지 등딱지는 금기 같아, 군침이 돈다는 거야? 뒤로 엉덩이를 뺀 인간의 어정쩡한 직립을 흉보며, 게딱지를 시비한다 진술서를 써야 할 것 같다니까
넙죽 무른 속을 드러내고 뒤집힌 게
연애가 그래, 입에서 튕겨진 밥알이 여전히 밥알일 때까지지
비린내가 터진다한들 박차고 일어서기가 쉽지 않은
창밖의 순찰차 경광등이 긴 혀로 유리창을 핥고 간다
선택한 지팡이가 손잡이 뿐이라면?
실내가 어두울수록 너는 불편하게 환해지드라
질문이 많으면 지는 거야
언제 게걸음 배우러 바다나 가자
이거 청탁이야 청혼이야?
오금이 저려 세 번 네 번
앉은 자세를 바꿔도 여전히 경찰서 근처
비키니와 꼬리뼈의 관계가 궁금할 뿐이야
─「상투적 연애 감정」전문
이 시는 이어지는 나머지 4편의 시보다 구체적인 얼굴이 덜 드러나고 시의 행간 속에 숨기고 있는 것들이 많아 내용 또한 모호하다. 시의 구조는 현 상황에 대한 사실적 서술과 심리적인 서술을 행이나 연을 바꿔가며 징검다리처럼 배치해 놓고 있다. 문장들을 눈으로만 쫓아 처음 시를 읽어 나가면 경찰서 근처의 간장게장집에서 경찰서에서 나온 남녀로 보이는 듯한 두 사람이 있다. 시 본문 속 “연애”에 대한 언급과 “이거 청탁이야 청혼이야?”하는 서술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유추하게 된다. 하지만 시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 이 모든 것들이 전체를 모호하게 흐려놓는 트릭임을 알게 되고 무릎을 맞대고 앉은 것이 두 사람인지, 남녀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경찰서”의 이미지와 “등딱지”의 이미지가 “금기”라는 단어로 모두 연결되어 있고, 게 등딱지에 밥을 비벼 먹듯 상투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이 “금기”라는 단어와 만나면 더 이상 상투적이지 않게 된다. 이 시의 제목인 “상투적인 연애 감정”은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의 연애감정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제 게걸음을 배우러 바다나 가자”라는 언급에서 시적 화자는 앞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옆으로 게걸음을 하지 못해 “오금이 저려 세 번 네 번 앉은 자세를 바꿔도 여전히 경찰서 근처”이듯 삶이 늘 제자리걸음이고 녹녹하지 않다는 것이 암시되고 있다. “실내가 어두울수록 불편하게 환해지”는 대상인 “너”는 ‘누구’일까? 또는 ‘무엇’일까? 이 모호함 속에서 독자는 원하는 색깔의 얼굴을 선택하여 여러 갈래의 상상을 펼쳐 볼 수 있다.
무면증이로군요, 얼굴이 지워지는 증세죠
어떤 병명도 등 뒤 깊은 동굴을 방으로 쓴다
오늘 낮의 일이다 새까만 맨발로 허공을 걷다 돌아오면
방과 거실, 주방 지나 베란다, 이번 생은 창문을 현관으로 쓰는 구조다
빈 방 밸브를 잠그려고 싱크대 밑을 더듬던 배관공에겐
지은 집만큼의 보일러 연통들이 머리에 꽂혀 있겠지
그래 사소한 소름이 불꽃으로 일어서리라는 믿음, 쓸데없이 예민한 나의 센서가 연소시키는 상상의 세계
얼굴도 없이 둥근 모서리가 수백 자루의 칼을 꺼내들 듯 무던한 당신이 내던진 접시처럼 불시에 바닥의 생은 사방으로 소스라치지
넌 미끄러운 게 매력적이야, 오늘의 나는 가변적이며 위험하다
등을 웅크리고서야 손가락의 채송화 한 송이를 꺼낼 만큼 도덕적이다
둥근 것들을 이해해, 매번 다른 칸에서 깨어나고 싶은 감정이지
에일리언처럼 나는 몇 번의 변태로 과거와 헤어질 수도 있다
횡격막 안
카페인이 종이컵에 담겨 떠다니고 붉은 꽃들이 관로를 따라 꾸르륵대며 흘러 다니고
치골 사이 거뭇하게, 안쪽으로 자란 털북숭이 꼬리도 보인다
선생님, 제 병명은 제가 잘 알아요
등받이 깊이 공적인 자세로 앉으신
나와 의사이자 병명이신 분
─「일곱 번째 얼굴」전문
「일곱 번째 얼굴」이란 시에서 잠이 사라지는 증상인 무면증無眠症을 “얼굴이 지워지는 증세”인 무면증無面症으로 비튼다. 잠이 없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성찰을 할 겨를도 없고, 쉼 없이 스스로가 보일러 연통의 일부가 되는 일인 것이다. 시인의 생활이 녹아있는 문장들에서 고단한 삶이 보이고 자신의 존재가 소모되어감에 반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존재감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얼굴도 없이 둥근 모서리가 수백 자루의 칼을 꺼내들 듯” 삶을 흔드는 사건이 생긴다면 여러 조각으로 깨어지는 접시처럼 날카로움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시에서 깨진 접시에 베여 피가 나는 손가락을 이렇게 표현한다. “등을 웅크리고서야 손가락의 채송화 한 송이를 꺼낼 만큼 도덕적이다”고. 그리고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둥근 것들을 이해해, 매번 다른 칸에서 깨어나고 싶은 감정이지”라고. 시인은 스스로가 얼굴 없는 둥근 접시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칼날을 모두 감추고 있는 둥근 접시일 수도.
어른 넷 아이 셋, 합하면 여섯
산이 두 팔 벌려 안은 우묵한 마을
강낭콩 덩굴에 꼬투리 열리듯 드문드문 인가
마을 사람들 중 처용아재만 잎 뒤에 꽃으로 숨었다가 콩 꼬투리이었다가 내게는 아재였다가 동무였다가 그런 이웃인데
삼봉 그림자가 숟가락질 하는 저녁밥상엔 순하디 순한 지붕이 고봉으로 그냥 한 술
그런 사이로 사나흘에 한 번이지요
불이야!
놀란 고라니가 되어 고래고래
내 동무 처용아재가 날뛰는 저물녘
우로 동네 목청 중에 제일 실팍한 처용아재 목청은 누가 들어도 천둥소리라지요
불이야! 불꽃이 옮겨 붙어 훨훨
강낭콩 덩굴처럼 뭉게뭉게 구름까지 닿지요
칠푼이 내 친구 처용이 뛰면요
처용아 이눔아 휜 바지랑대 같은 처용엄니 뒤따라 휘적대구요
아이구 이눔아 이 잡눔아 눔아 눔아 눔아
함께 불러줄 목청 너덧 개는 그냥 얻어 쓰는 메아리 지천 산골짝인데요
쳐용이 뒤쫓는 오늘 노을은
처용엄니 눈시울에서 덜컥 더 붉고요
온 몸뚱이 그대로 눈망울 하나인 처용은 잘도 속아서 내 동문데요
청솔가지 꺾어 휘저으며 불 끈답시고 노을 속 까마득 언덕으로 뜁니다
삼봉 뒤덮은 벌건 불꽃은 누가 봐도 참 근사한 소꿉
남은 풍경마저 털어 한 술 숟가락을 뜨는 삼봉에겐
처용도 나도 밥공기에 엉긴 밥풀들인데요
─「처용아재 이야기」 전문
「처용아재 이야기」란 시에서 “어른 넷 아이 셋, 합하면 여섯”이란 부분이 참 재미있다. 어른은 넷이지만 아이 같은 어른이 1명 있기에 합해서 여섯이 되는 것이다. 왜 이 시에서 그려지는 인물의 이름이‘처용’이었어야만 할까? 처용설화에서 처용은 자신의 아내가 역신과 한 이불 속에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시 속의 처용아재는 “불이야” 소리치며 “불 끈답시고 노을 속 까마득 언덕”으로 뛰어다닌다. 이 시에서의 ‘불’은 전체의 흐름 속에서 모호한 상태로 작용한다. 불의 의미가 그냥 불로도 읽히고, 노을이나 단풍으로도 읽힌다. 어떤 이미지를 갖다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 처용설화에서는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 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역신으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의 방문을 피했다고 한다. 이 시에서도 처용아재는 만나기 곤란한 얼굴, 즉 어른의 모습을 한 아이이다. 우리의 삶 속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얼굴들이 많다. 이 얼굴들이 시 속의 처용아재와 겹쳐지며 이 시의 매력이 드러난다.
1.
소녀 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 속 좀 봐
무명옷을 기운 바늘쌈지에 꽂힌 햇볕 말이야
2.
처마가 없는 집은 둥근 방을 뒤집어 바깥으로 부풀고
웅크린 여자가 몸을 일으킨
골무로 떠민 평생의 바늘귀는 삼천 삼백
거기 꿰었던 핏줄을 바느질 하며
금홍아- 땀땀 성기는 눈 코 입
금홍아-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댓돌이
금홍아- 처마가 들어 올려지고
울타리가 생긴다 얘, 금홍아-
3.
차양이 솟은 상가
소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운다 광목 소매 자락으로 훔친 눈물이 얼룩으로 앉고 나비로 난다 모여든 사람들이 춤추는 상여를 뒤따르며 노래한다
떠올랐다 가라앉으며 꽃 섬이 도는 산모롱이는 영영 저쪽 너머인데, 소녀는 개울 타고 물 따라 간다하고 나비는 꽃 섬에 홀려 북산을 간다하고
현생과 피안을 안팎으로 그러쥔 물방울 속 풀썩, 가라앉는 집
소녀를 끌고 안방에 들어
바르르, 떨다가 여인의 치맛자락에 앉는다, 나비
─「금홍의 프롤로그」 전문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상의 소설 「봉별기」에 나오는 금홍이란 인물은 자주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소설에서 금홍은 이상과 삼 년을 동거했지만 평범한 부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생활을 위해 매춘을 하고 집을 나갔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다가 결국 정착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 시는 이 땅의 모든 금홍이들의 심리적 배경을 옹호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의 첫 행인 “소녀의 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 속”을 읽고 바로 떠오른 이미지는 미국의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만 레이Man Ray(1890~1976)의 사진 작품 「유리 눈물」(1932)이었다.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눈물로 나타낸다는 고정 관념을 깬 작품으로 눈물을 연출하기 위해 모델의 얼굴에 유리 눈물을 붙여서 표현했다고 한다. 만 레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한 번 쯤은 이 사진을 보았을 것이다. 인간의 눈물이 아닌 이 유리 눈물방울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 이 시에서 “소녀의 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은 뒤 따라 오는 “무명옷을 기운 바늘쌈지에 꽂힌 햇볕”에도 불구하고 유리 눈물과 같이 눈물 자체가 감정을 가져다주지 않고 거울의 역할만 하고 있다. 오히려 “바늘쌈지에 꽂힌 햇볕”으로 인하여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햇볕이 또 누군가에게는 누군가를 위하여 찔리며 무엇인가를 기워야 하는 바늘로 바뀌고 “핏줄을 바느질” 해야만 하는 지점이 생겨난다. 눈물방울이 거울이 되어 그 속에서 비춰주는 것들은 “바늘쌈지에 꽂힌 햇볕”, “처마가 없는 둥근 방”, “가라앉는 집”, “나비”이다. 얼굴이 우리의 현존을 표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 시에서의 눈물 또한 얼굴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임재정의 다른 시와 마찬가지로 이 시 또한 시의 내용과는 다르게 문장은 경쾌하게 진행된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시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경쾌함의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새벽이 온통 하나의 귀로 곤두선다
목덜미를 쓸다보면 바깥에 부쩍 예민해져서
여자의 젖은 단화가 현관에서 끙끙 앓고
골목으로 난 유리창이 부황 뜬 자리처럼 부푼다
귓속의 골목을 목구멍에 물어다 놓고 왈가왈부 중인 개와
꿈인데도 신발을 더듬는 여자의 등에
가만히 손을 흔들어 나를 달랜다, 출근을 하는지
다섯 시 십칠 분, 십여 분 후면
버스와 묵례를 나눈 여자가 의자와 한 쌍인 창백한 얼굴들을 헤아릴 것이다
대걸레를 밀며 건물의 구석구석을 헤매면서도, 아무렴
가끔 대답을 원하는 가혹한 꿈과 여자의 잠꼬대
벽의 전자시계가 깜박이고 가는 초 단위의 슬픔
진열된 통닭처럼 부끄러운 날개를 달고
서류더미 속을 뛰어 다닌다 그리고
여자가 뒷모습으로 대걸레를 밀며 지나갔는데
글쎄 그토록 입구를 찾지 못하던 잠 속이었다
─「2월 30일」 부분
“주체는 한편으로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자기애를 갖지만 동시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그것을 파괴하고자 한다. 이미지는 나이면서 동시에 이질적인 타자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의 초대』 김석/김영사 120쪽) 라캉은 거울단계이론에서 꿈에서 파편으로 나타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자기애와 불안감으로 설명한다. 「2월 30일」이란 시에서는 파편화된 자신의 이미지가 ‘귓속의 골목을 목구멍에 물어다 개’로 나타나거나 ‘의자와 한 쌍인 창백한 얼굴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꿈인데도 신발을 더듬는 여자의 등’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그토록 입구를 찾지 못하던 잠 속’이었던 것이다.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 섞여서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꿈인지 모호해지는 시이다. 잠 속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꿈일지 모른다. 이 시의 제목에서 보듯 ‘2월 30일’은 현실에서는 없는 날짜이다. 4년마다 한 번씩 오는 2월 29일과 3월 1일 사이의 꿈, 그것이 2월 30일은 아닐까? 이런 아슬아슬하고 모호한 경계들은 우리의 삶에서 늘 존재한다.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로 대체하고자하는 파괴적 본능과 불안감을 가지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꿈속에 갇혀있는지도.
“얼굴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밖에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 우리의 세계 안에서는 어떠한 지시체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존재의 현시’를 레비나스는 한마디로 ‘얼굴’이라 부른다.”(『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 강영안/문학과지성사 179쪽) 임재정의 시 5편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읽어 본 임재정의 시에서도 많은 얼굴들이 보인다. 이 얼굴들은 시인이 의도한 모호함 속으로 자주 미끄러진다. 시 속에서 등장하는 얼굴들은 자신이기도 하면서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옮겨갈 때마다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경쾌하고 발랄한 어법이지만 시의 밑바탕에는 이 세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깔려있다. 세상을 아프게 바라보지만 체념하지 않고 항상 혁명을 꿈꾸는 듯하다. 앞으로 임재정 시인이 만들어갈 시적 세계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반연희 2001년 계간 문예 《다층》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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