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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소시집/정미소/바라보며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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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소시집/정미소/바라보며 외 4편
정미소
바라보며
미술관 야외 조각전시장에 소낙비 다녀가고
민달팽이 한 마리 초록 물감 풀어
소서小暑의 화폭을 붓질하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응시하는 작품 곁에서
조금 전에 돌아 본 제1전시실의 ‘젊은 모색 전’을 더듬으니
머릿속이 하얗네
서른의 작가는 컴퓨터 속 상상의 바다를 활보하며
근시와 원시를 불러들여
세대 간 소통의 물길을 연다는 중심 키워드를 읽지 못하네
철 밥통 직장을 그만두고 방안에서
컴퓨터프로그램 개발에 열 올리는 미혼의 아들과
다투는 횟수가 늘었네
낮에는 숨었다 밤이 되면 컴퓨터 자판을 달그락거리는
올빼미 둥지가 된 집
단절된 소통의 간극이 가상의 첨탑에 깃발을 다는
비만을 뒤로하며
내달린 미술관에 해 기울고
후끈 달아오른 지열이 초록 화폭에 더듬이를 비비는
아들과 나 마주본 적 언제였지?
저울 꽃
두타산 중턱의 오래된 암자에는
어머니의 무릎관절이 놓아버린 꽃이
인편에 실려
이름표를 달고 자라고 있다
하늘문 계단을 오르는 아찔한 계단을 등 떠밀며
꽃을 보고 오너라
신도증 속에서 꺼내주시는
꽃 번호가 땀에 젖어 꾀죄죄하다
법당 안, 만개한 꽃밭을 두리번거리며
무릎걸음으로
연잎을 헤치며 탱화의 골짜기를 넘느라
목덜미가 당긴다
가난한 어머니가 사시사철
손금 닳도록 빌어도 모자란 기도가
신중단 부처님 곁에서 일가를 이루어
소원성취 촛불에 피고 있다
용돈을 저울질한 손이 부끄럽다.
붉은 입
오월의 줄장미가 허술한 별장 담을 넘어
넝쿨마다 새빨간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다
밀실파티로 몸집을 불린 분리수거장까지
마약 같은 손으로 무심한 귀를 유혹한다
이른 봄부터 진딧물 번진 쌍둥이 별자리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다 졸도한 골목
썩은 부엽토가 밀어올린 장미의 계절에
꽃은 없고 붉은 입이 여는 말에 중독되어
다급한 앰뷸런스가 봄을 지혈하며 달리는
별장 담에 기대어 먹빛 하늘을 쳐다본다
한바탕 우레비 다녀가면 무지개가 뜰까?
비 기다리며 맑은 꽃을 기다리는 봄이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문 비단가리비처럼
─어린이집 조리사구함
시니어클럽에 오신 은발의 김춘자 할머니가 영양죽을 만든다
입을 꼭 다문 가리비 손질이 바다 속
골 깊은 물무늬를 세게, 혹은 여리게
숟가락 하나로 관자에 웅크린 속살을 단숨에 불러내어
천일염 한 큰 술, 하늬바람 두 큰 술, 넣어 볶는다
펄벅의 대지를 건너온 희디 흰 알곡이 탱탱 불은 몸 부비며
믹서기 속에서 회오리바람 일으켜 가리비 찰진 바다에
눈사태로 뛰어들면
신명 난 파도가 곰 솥 그득히 물새 울음 풀어
은발의 능숙한 손이 나무주걱으로 힘주어 젓는다
뽀얗게 끓어오르는 죽이 난기류를 타고 넘칠 때
유속을 줄이며 그녀의 입을 해감한다
어머니 없이 여럿 동생을 키운 손등이 입가에서 구불거린다
언젠가 여동생이 밤늦게 전화를 걸어 와
권정생 작 ‘몽실언니’를 보고 언니 생각 나서 울었다는 말 떠올라
은발의 손 꼭 잡으며 아가들 잘 먹여 키우자고 약속한다.
가을의 농성장
은행나무가 바람이 조금만 건드려도
나뭇잎을 툭 떨어뜨린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호텔 ‘몽블랑’ 입간판 너머
알곡교회의 젖은 층계 위에 눕는다
눅눅한 걸음이 길가 마대자루에 가득 담긴
나뭇잎 자루를 보며
쌀알 같은 생각 여러 개를 주워
새 애인을 산다
호텔의 침대가 쿨렁거리며
딸 아들 구별 말고 애국하자고 한다
산 입에 친 거미줄이 비문증까지 거두어간
살맛 나는 세상
알몸의 은행나무에 구름빵이 열리고
하늘바다에서 물고기 떼가 몰려 와
허기진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농성장으로 가는 피켓을 베고 눕는다
정리해고는 십자가에 앉은 새가 물고 간다.
●시작메모
무덥고 힘든 계절을 건너왔다. 계절은 흙수저의 삶에 늘 힘이 들었지만, 올 봄처럼 꽃을 꽃으로 느끼지 못하고 희망을 희망으로 번식시키지 못한 채 절망의 여름 숲에 들었다. 여름 숲에 누워 우후죽순 피어나는 소인배의 독버섯을 키웠다. 나도 모르게 조상 탓을 하거나 부모님 원망을 하며, 디지털 미디어가 전하는 뉴스에 마비되어 농성장으로 가는 피켓을 들었다. 입추로 시작한 가을은 가진 자의 횡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귀한 말이 거짓으로 얼룩 져 제 자식만 알고 제 배만 불리는 검은 거래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흑수저도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의 계절이기를 바란다.
*정미소 2011년 《문학과창작》으로 시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벼락의 꼬리』. 막비시동인. 아라문학 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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