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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소시집/김은지/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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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75회 작성일 20-01-1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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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소시집/김은지/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 외 4편


김은지


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



영국은
외로움을 관리할
전담 장관을 뽑았다고 한다


파란빛이 도는
블루투스 문양을 따라 그린다
이런 무늬는 누가 만들었을까


바쁘시죠,
내가 먼저 묻는 건
기꺼이 외로움을 선택하고 싶어서


혼자 밥을 잘 먹고
일기장을 버릴 수 있고
책에서 가붓하다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땐
메모장에 적어두었지만


오늘은 듣고 싶었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담담하게 엄마가 돌아가신 얘기를 하며
이사해야 하는 사정을 말하는데
달빛이 드리우는 방에 산다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다
 
두 시간씩 전철을 타고 와
후회를 털어놓고
요즘 듣는 노래를 물어보는 밤


켠 적 없는 블루투스가 연결되었다





뼈의 소리



삼촌은 영화배우처럼 절도 있게,
한 손으로 다른 손의 마디를 눌러
따각, 뼈 소리를 내고
조카들의 감탄에 자못 흐뭇해한 후
라면을 끓이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가 따라하려고 하면 뼈 상한다고 말렸지만
우리들이 아무리 손을 꺾어 봤자 뼈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지금은,
힐을 벗고 오른발을 돌리면 복사뼈 맞춰지는 소리, 따각
마우스를 옮기다 손을 펴면 손등의 잔뼈 부딪히는 소리, 따각
설거지를 끝내고 숨을 들이마실 때 왼쪽 날갯죽지에서,
어깨며 턱이며 물론 무릎까지
이제는 돌아누울 때 척추 자리 찾는 소리도 이따금씩 듣는다
뼈가 단단해지는 날은
영원히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 같더니
공부방에 온 꼬마 학생님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기에 달려갔다
엄지를 휘어 팔에 닿는 묘기를 보라고 난리다
나는 그러다가 뼈 상한다고 말렸지만
다들 감탄하며 따라하느라 바쁘다
시를 쓰다가 엄지를 휘어 본다
아프다





머핀



갤러리에 들어온 걸인이
머핀 하나와 방울토마토 한 움큼을 가방에 쑤셔 넣는다
손에는 김밥 서너 개를 쥐고
사람이 드문 쪽으로 간다


민트색 나무 그림을 마주하고
김밥을 우물거리다가
우물거리지 않는다


두 개째 김밥을 입에 넣은 그가 나가고
나무 그림을 그린 작가는 그가 있던 자리로 가서
자신의 그림을 본다


유명한 배우가 동행과 걷고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나도


새로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머핀은 일 인분만 가져가는
수요일 인사동의
생기





로트렉의 세로선



하얀 원피스
여인의 다문 입
아물아물한 초점과
안 좋은 소식들


남색 코트
쟌 아브릴의 다문 입
혼자 걷는 길의 수심


키스하는 연인
하늘색 이불에 붓을 뭉갠다


사랑 뒤에 무엇이 오는지
떠올라 버린 기분





매실차



자귀나무꽃
부도 정리 포스터


해금이 켜는 문 리버가 흐르고
매실차에 뜬 얼음 부딪히는 소리


벽에 붙은 포스터 파닥대는데


큰일이 일어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매실차가 팍하니 시어서
눈시울이라도 젖었으면




●시작메모

낙타의 등 모양이라는 산에서 도시의 측면을 내려다보며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옥상을 옥상이 아니라 하나의 뚜껑처럼 보일 때까지 응시했다.
“매일 한 가지씩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아침 식사 때 하면 안 될 게 뭐가 있겠느냐.”*
이런 시를 쓰기 위해서.
광화문 전광판이 자그맣게 보이는 풍경이 게임보다 더 게임 같아.
네온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러운가 하면 네온사인이란 말은 더 오래된 말 같고 형광이란 단어도 시의 제목에 놓인다면 멋스럽지 않을까? 단어들의 자리를 생각한 건 환승을 하면서였다.
너무 늦게 걷는 것도 몸에 안 좋다던데 혼자서는 더 늦게 걷는다. 갑자기 퇴직하고 갑자기 휴일을 보내려니. 조금은 예상한 일이지만.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어쨌건 오늘은 새 시를 써야지.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


*발터 뫼르스 『꿈꾸는 책들의 도시』 중에.





*김은지 2016년 《실천문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시집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독립출판 소설 『영원한 스타-괴테 72세』. 《씀》에 단편소설 「산호섬」 발표 『팟캐스터』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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