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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박몽구/슈베르트를 들으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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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박몽구/슈베르트를 들으며 외 1편
박몽구
슈베르트를 들으며
협재 해수욕장이 바라다보이는
무인카페에서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를 듣는 동안
몇 번이고 덮친 파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
퇴직한 교장 아버지에게
더 이상 기댈 등은 남아 있지 않아도
청춘의 상처인 매독과 밤이슬
무릎 위 깨진 기타 하나밖에 없어도
서른 한 살의 팡세를
가로막을 벽은 어디에도 없다
음악은 가장 깊고 푸른 가난이 잉태하는 것이라고
밤을 새워 오선지를 메워 나간다
제주 바다 매서운 바위에 찢긴 파도
상처의 깊은 곳까지 다 만져
흉내낼 수 없는 선율을 이루듯
음악은 깊고 푸른 상처
저 안쪽에서
꾸밈없는 소리를 건지는 것이라고
무인카페에 훤히 비치는 달빛 져다 부린다
첫눈을 딛듯
처녀의 파도 속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 들어간다
북아현동, 자귀나무 그늘
이른 봄부터 여름이 익기까지 달린 끝에
북아현동 추계 학교에서 종강을 맞았다
종강 날인데도 책 만들기 교재를
절반도 떼지 못한 것 같다
채 펼치지 못한 페이지들
흑인 가수의 입술처럼 두텁게 남아 있다
문득 창밖으로 눈 돌리니
산 정수리까지 작은 꼬막처럼 엎으러져 있던
판잣집들, 키 작은 루핑집들, 반지하 닭장집…
까까머리처럼 걷어내고 올라가는 재개발 아파트
책 한 권 끝내기 이렇게 버거운데
어느새 하늘 꼭대기 만질 듯
쑥쑥 올라가고 있다
화산이 터진 것도 아니고
시지프스의 바위가 올려진 것도 아닌데
북아현동 산동네 뒷산의 키
하루가 다르게 부쩍 자라고 있다
한 학기 내내 만지작거리느라
뒤가 너덜너덜해진 책들
제품집 미싱공들 길고 추운 밤 견디게 해주던
라면집, 씩씩 김 내뿜는 코끼리 만두가게
어두운 그림자에 가두며
쑥쑥 키를 높이고 있다
그렇게 작은 것들,
토박이들의 구차한 살림을
빠른 걸음으로 뭉개가지만
차가운 아파트가 아무리 큰 아가리 벌려도
삼키지 못하는 것이 있다
문득 초여름 더위를 한 걸음 물리면서 핀
자귀나무 떨기 같은 꽃 한 송이
맑은 향기 한 줌
마지막 수업중인 강의실로 건넨다
아무리 차가운 벽이 가로막아도
끝내 타고 넘어
그리운 사람에게 귀띔해줄 게 있다고
아파트 벽 넘어 산동네로 온 몸 부비벼
느긋하게 번져가고 있다
*박몽구 1977년 월간 《대화》로 등단. 시집 『수종사 무료찻집』, 『칼국수 이어폰』, 『황학동 키드의 환생』 등. 한국크리스찬문학상 대상 수상. 계간 《시와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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