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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김경수/대화를 하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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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김경수/대화를 하다 외 1편
김경수
대화를 하다
그해의 그 무더웠던 여름이 사라지듯
흘러가버린 유행가가 그리워지네.
그대와 나의 대화 속에는
일상日常과 혁신革新의 대립이 예정되어 있었다.
진리는 없다고 애초에 그것은 진리가 아니었다는 논쟁이
영원한 진리는 결국 있다고 믿는다고 하였고
진리가 실패하게 되면 어떤 법칙도 믿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그대와 나의 대화는 어느 순간
산 자들의 근원적 슬픔에 관한 것으로 옮겨져 있었다.
삶이 슬픔인지 죽음이 슬픔인지는
이제 어떠한 의미도 없었다.
하늘을 날던 새가 풀밭으로 떨어지는 것도
달팽이가 연못을 벗어난 것도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무와 돌 위로 내리는 비는 자연의 감정이다.라는 구절句節을 잡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이 이제 막 피어난 꽃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산 자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듯
비워지는 것과 비우는 것을 인정할 때 아름다운 희생이 된다.
파란 하늘에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줄지어 날아가지만
산 자들은 저마다의 통증을 안고 걸어간다.
아픈 걸음도 있었고 즐거운 걸음도 있었고 슬픈 걸음도 있었지만
순간에서 순간으로 걸어가는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인정할 때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구절을 되뇌면서도 행복해진다.
따뜻한 한 순간 속에는 짧은 사랑과 기다림이 있었고
순간 속에 있는 간절한 노래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
이 세상에 영원한 진리가 있는가? 라고 묻는 순간이
무지개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포옹하는 토요일 오후
한 사내에게 허락된 시한부時限附의 시간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가고
그해의 그 무더웠던 여름이 사라지듯 유행가가 흐르고
이루지 못한 꿈들과 얼마 남겨지지 않은 시간이
사진 안에 서서 우아하게 웃는다.
한 세계가 끝나더라도 순간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온다.
편지를 보다
사랑하는 이여 그럼 안녕,
그리움이 강江이 되어 내 가슴을 적시고
적셔진 가슴이 나의 하루를 노을빛으로 물들게 하나니.
라고 편지는 시작된다.
봉인封印된 우리들의 이야기에서 은은한 빛이 나는
그 고요함의 세계에서
우리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고
돌아서 가던 당신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아야만 했고
달빛이 내 가늘고 긴 울음을 보듬어주었다.
사랑하였음으로 내 일생 중 제일 행복하였노라, 라는 문장이
사랑이 떠나 어두워진 골목길에서 걸어 나와 눈시울을 적셨다.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지만 낙화落花가 될 것을 애달파 한다.
꽃잎 속에는 우리들의 언약이 있었고 추억의 날들이 숨어 있었다.
이별이 이별에게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였고
사랑하는 이여 그럼 안녕, 그리움이 강이 되어 내 가슴을 적시고
적셔진 가슴이 나의 하루를 노을빛으로 물들게 하나니
하루 종일 당신만을 생각하던 그 지독한 사랑의 통증으로 인해
사랑에 가슴이 베인 나는 오히려 살아갈 수 있다네.
당신과 함께 걷던 숲속 오솔길에 푸른 눈빛의 인사를 던지면
당신과 함께 바라보던 꽃나무 안에도 서러운 강江이 흘렀네.
고개를 푹 숙이고 웃고 있는데 신기루 속에서 나는 없다네.
라고 편지를 끝낸다.
*김경수 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편지와 물고기』, 『산 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하얀 욕망이 눈부시다』등. 문학ㆍ문예사조 이론서 『알기 쉬운 문예사조와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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