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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손창기/키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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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손창기/키질 외 1편
손창기
키질
어머니가 하는 말은
키질로 피어나서 먼지가 일렁이는
헛간의 어두움 속에 있다
도무지 흐릿하여 걸어놓은 망태기처럼
걸러낼 수가 없다
바쁜데 왜 내려 왔느냐!
자식 키우느라 돈 없는데 에미 줄 돈 어디 있냐!
비싼 괴기는 뭣하러 사왔느냐!
그런데,
쇠절구에 깨를 빻으면서 엉덩이를
들썩인다, 프라이팬에선 햇살이 볶인다
달궈진 마당은
쏟아 붓는 소나기를 마구 튕긴다
곡식을 까부르는 팔과 다리는 리듬을 탄다
몸 전체가 내는 언어의 표정이랄까
날려가는 검불은 어머니 말씀,
키 속의 알곡은 숨은 뜻
그 사이 팽팽히 줄을 당겨놓을 줄 아는
빨강 뒤에 오는 파랑을
사냥꾼에게 동굴이란 그림사원寺院인지도 몰라
빛과 어둠이 만나는 순간,
바위벽에 손바닥을 대고
하늘의 노을빛을 끌어다가 찍었을 거야
동굴 떠나기 전, 손의 둘레를 그려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몰라
그대를 만져보고 싶어 손바닥만 남았는지 몰라
4만 년 전, 마로스 동굴은
바위벽이 편지였는지도 몰라
노을과 어스름이 만나는 순간, 파랑이 몰려올 때
박쥐가 동굴을 떠나 이 소식 전했을 거야
새벽녘 박쥐가 돌아올 때, 사냥꾼은
세상 밖으로 나아갔을 거야, 여전히 손바닥은
빨강색의 윤곽 안에 있으니,
전하고 싶은 말들 가두고 있었을 거야
누구든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빨강 뒤에 오는 파랑을,
그대가 내 손바닥에 포개질 때
말들과 온기가 고스란히 합쳐지듯
*손창기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달팽이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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