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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김개미/시인의 창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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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62회 작성일 20-01-1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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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신작시/김개미/시인의 창세 외 1편


김개미


시인의 창세



태양은 천의 얼굴이나
나는 너무 뜨겁거나 찬 것에 덜 끌린다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람
속눈썹을 핥고 가는 바람
바람은 때로 내 몸속에 들어와
혈관 속에 이끼들의 시를 쓰고 간다네


나무로만 된 나의 오두막에는
창이 하나
책상만한 창 아래
내 책상이 있다네
서재이며 식탁이며 기도실인 나의 책상


나는 오전에 펜촉에 잉크를 찍어 시를 쓴다네
오후에는 오전에 쓴 시를 버리면서 신중해진다네
잉크와 기름이 한 병에 들어 있어서
글을 많이 쓰는 날은
저녁을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네


여긴 아직 법전이 도착하지 않아서
죄인이 없고
죽음은 특별하지 않아서
상복이 없네


필요한 것은
자신을 다스릴 사소한 규칙 몇 가지와
언제든 빠져들 수 있는 몽상의 능력

나는 지금 하나 남은 기름병을 들고


어제 저녁 이곳에 당도한 시인을 찾아간다네
발걸음마다 풀잎의 화음이 따라오는
이곳은 나의 창세
일부의 내가 가서
일부의 나를 기다리는





오늘이 지나면



오늘 다음이 내일이라
오늘과 내일은 너무 가까운 시간이라
내일은 오늘 같으리라 단정하는 것일 뿐
내일은 오늘과 가장 많이 다른 날일 수 있다


나는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집에 아무도 없을 수 있다
오늘 집에 있는 사람이 내일도 집에 있어도
가고 싶은 곳 혹은 가야 할 곳은 집이 아닐 수 있다


오늘 맛있게 먹은 소보로 빵이
내일은 위험한 빵일 수 있다
오늘 오후 내내 웃으며 즐겼던 보드게임이
내일은 끔찍한 것일 수 있다


오늘 했던 방식 그대로 하면
내일은 모든 것이 어긋날 수 있다
내일의 시간은 오늘의 시간과 길이부터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장르가 다르다 


사람은 사람이라면 사랑을 하고 싶다,
라는 게 오늘의 생각이라면
사람은 사람이라면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라는 게 내일의 생각일 수 있다


확신하는 한 가지는 
제일 예쁜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는 것
내일도 그 꽃은 피지 않는다는 것
내년에도 그 꽃은 내년에 핀다는 것 


갈빗대가 부러진 사람에게
재채기가 제일 무섭듯
무서운 것은 의외로 사소한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김개미 2005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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