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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신작시/김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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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나
우주나무
만수산 오솔길에 그가 하초를 드러내놓고
서 있다. 나는 그의 밑을 밟고 지나간다
돌아온 지하방 어두운 구석에 벌레들이
불어나 있다. 식욕이 왕성한 벌레들이
아삭아삭 맛있게 먹는 주 메뉴는 욕망이 흘린
살비듬, 지하세계는 언제 어디서나 번창하고
구멍 속으로 박아 넣은 발기된 뿌리에서는
실가지들이 뻗어나 지하의 미로가 음모처럼 무성하다
그런데, 그의 하초에 굳은살이 박힌 걸 보면
몇 벌의 잠을 잔 전생 어디쯤에서 침상을 떠난 게
분명하다. 그의 지하방은 그의 뿌리지만
뿌리를 덮은 이불 한 채 걷어 채인, 노출된 생의
비의, 비탈에서 오솔길까지 뻗어 내린 나무뿌리는
울툭불툭 고대 어느 짐승의 뼈를 닮아가고 있다
아카시나무 뿌리 위에 오늘 다시 서서 문득
밟히는 예감은, 내가 가는 지상의 이 길들이
어느 거대한 나무뿌리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자 별안간, 불 켠 열매처럼 가지에 별들을 달고
나를 환하게 에워쌌다 우주나무 한 그루가
울어라 새야
구름 낀 눈을 몇 번 껌벅거리는 사이,
가물가물 앞산의 능선이 지워진다
붉은 목젖 너머는 캄캄하다
캄캄한 몸 내부에 꽂혀 있는 소나기가
흐느낌의 진동으로 뽑혀 나오는 울음항아리
눈 아래 손등이 젖고
책이 젖고 혼자 먹는 밥이 젖는
울컥울컥 쏟아져 젖게 하는 것
단단한 것들을 말랑하게 녹여 내리고
제 안의 돌을 삭여 물을 길어 올린 울음항아리
그것은 또 오래 삭여 꽉 차오른 만월의 말
말 못한 비애가 말을 하고
말 못한 두려움이 말을 하고
말 못할 사랑이 말을 하는
울컥울컥 쏟아져 말 하게 하는 그것
네 울음에서 풀려난 말이 나를 휘감는 동안,
이 세상 유일한 통용어로 오간다 너와 나는.
그래, 울어 울어라 새야!
김길나․
1995년 시집 새벽날개로 등단
․시집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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