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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신작시/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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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선학동 나그네를 찾아
오른쪽은 강진 해남 길, 왼쪽은 보성 고흥 길
길은 모두 노래로 이어지고 포구에서 사라지네.
그러나 사라져선 안 될 노래 한 곡
장흥 회진항에 묵었다하니
거기 선학동 찾아가는 길 서글픈 자루 하나 짊어지네.
옛 약국과 뱃길 묻다가 마침내 그 주막에 드네.
주막 툇마루에 나앉아 막걸리 갖다놓고
관음봉 쳐다보며 한 잔
달빛 차오르면 비상 학의 밤길 위해 또 한 잔
파도도 개펄 위에다 시름 긴 소리를 던져오니
제방의 갈대와 소나무에게도 술잔을 건네겠네.
여기 달빛 속에선 흔들리는 건 모두 나그네이고
나그네는 홀로 저물어야 깊은 노랠 주고받네.
선학동의 가슴 아픈 육자배기도 되겠네.
이제 받아 넘길 이야기도 바닥나고 찻길 끊기면
난 내일 아침 왔던 길 되돌아 낯선 뱃길에 오르리.
그대여, 먼 길 동행할 보따리 같은 설움 가졌다면
그대도 여기 바닷물 적셔 저 서편 하늘에 띄워보게.
그 주막에서 나는 배웠다
할머니 어머니 울산 고모도 버스를 기다리는 곳
한 쪽에선 풍선을 팔고 붕어빵도 굽고 술도 마신다.
나는 이곳에 담배 심부름 나들면서
할아버지의 술값은 외상이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뒷방의 도리짓고땡에 아버지가 끼여 있는 것을 보았고
할머니 안부를 자주 묻던 주막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 두 살 아래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 할아버지 백으로
다른 동네 아저씨들 젓가락 두드리는 법을 오래 관찰할 수 있었고
두드리는 젓가락이 엇갈릴 땐
목청이 꼬이고, 꼬인 목청은 이내 목 비트는 멱살이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함부로 비틀지 못할 정도로 내 목도 굵어졌을 때
나는 이런 곳에서
엉덩이 큰 여자 놀리는 요령과 무릎 흰 여자 꼬드기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이런 집 앞을 계속 서성거렸을 땐
그 안에
할머니 어머니 고모가 아직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을랑이 해랑이도 문틈으로 날 노려보고 있다고
먼 옛날의 내가 현재의 내게 단단히 훈계하는 것이었다.
김영남․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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