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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영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까


가방에 넣는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칼 빅토리녹스 들어간다
겔랑 립스틱과 아이펜슬 작은 거울 들어간다
마스터카드 비자카드 백화점카드 교통카드 들어간다
오늘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까
책 한 권 들어간다 오늘은 빈 시간이 날지 모르니까
낡은 수첩 들어간다 불현듯 써야 할지 모르니까
그 남자 명함도 들어간다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까
접는 칫솔 작은 치약 작은 가위 작은 향수
돌돌 말은 팬티라이너 파란 수성펜 두 자루
동전지갑 장지갑 잘 다려진 손수건 두 장 열쇠 여섯 개
혹시 바꾸어 신을 새 스타킹 불안이 들어간다
작은 것들로 불룩해진 하루살이 2Kg 속에 내가 들어가 있다
손과 눈으로 더듬지 않아도 가방 속 작은 것들의 위치를
지폐나 수표 액수를 기억하는 불안함
한 달 생활비가 들어있다 오늘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런데 잘 잡히지 않는 요란한 핸드폰 나이와 비례하는 부스럭거림
하루 종일 사용하지 않은 피곤한 무게 내려놓는다
혹시 내일 또 필요한 불안이 밤새 불면으로 뒤치락거리고 있다



헤겔의 답


中國 천서편 列子의 기우杞憂, 또 병이 시작이다

이 사랑 끝나고 내일은 어떻게 살지?
사랑을 잃고 어떻게 살지?
뭘 하며 살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인생
마지막엔 누구랑 무슨 얘기하며 살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22층 아파트 갑자기 무너져 내리면?
맨 아래층 나는 어떻게 될까
불이 나면 들고 나가야 할 것은
통장인가 컴퓨터인가 돌 반지 한 줌 넣어 둔 베개인가
그대와 나 어디로 달아날까? 무녀도無女島를 찾아가야지
여덟 개 행성을 지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갈까?
마지막 날 그대가 나를 외면하면 어떻게 하나?
누가 먼저 사랑을 팔 것인가?
누가 먼저 목을 맬 것인가?
오늘 밤엔 수학점수 몇 점이나 맞을까?
백발이 희끗거려도 꿈꾸는 과락 점수
이 詩篇들 다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


하늘에 먹구름 없으면 하늘 아니다!
훌륭한 선생은 질문을 받지 않는다!며
종 울리기 전에 ‘프리드리히 헤겔’ 나가버리시면?

머리를 두드린다 또 병이 시작이다



이귀영․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 󰡔달리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