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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신작시/손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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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섭
메일 속에서
여기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눈 내린 벌판 새 한 마리 날지 못한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톡톡 문자를 만들 뿐이다
그러나 불행이라고만 말 할 수는 없다.
내가 만든 문장이 살아서 숨쉬고
누군가에게 우표도 없이 날아가
이루지 못한 행복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선 오만 가지 일을 다 한다
상대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에게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려도
돌아오는 건 잉여의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말일지라도
잽싸게 창을 닫으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행복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누군가 잭나이프를 갈아 나를 향해 던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선 낮과 밤을 가리지 않음으로
창을 열고 슬쩍 달빛을 데려와
빈 구석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
슬며시 감추고 다니던 호주머니 속의 낱말들을 꺼내
불행과 행복에 관한 논고 같은 것이나
“사랑을 잃고 나는 우네” 라는 시 나부랭이를
콕콕 찍어서 한 줄 메모장에 옮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길․2
―청송에서 영덕 가는 길
길의 빛은,
사나이의 종아리에서 빛나는 정맥처럼 푸르다.
육자배기 한 자락 같이 끈끈한 말복 근처
옆구리를 벌떡거리며 무인칭의 사나이가 걷는다.
연대로 선 숲의 대열을 이탈한
햇살 한줄기 사나이의 등짝에서 번쩍인다.
날 세게 사나이와 눈빛을 주고받던
무반주로 춤추는 정오의 바다가 달아오른다.
푸른빛의 그 길에 北北東으로 향하는
사나이의 울음이 허공을 찍는다.
손제섭․
2001년《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그 먼 길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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