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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리토피아 신인상 당선작(희곡)/손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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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오백년
―아라리오
손영미
등장인물
- 정재덕 : 1925년 생
- 할머니 :
- 아버지 :
- 누나 :
- 형 :
- 박달래 : 1925년 생
- 아버지 :
- 어머니 :
- 아들(세상) : 1943년 생
- 딸(하늘) : 1953년 생
- 장덕배 : 읍내의 홀아비.
달래를 사모함.
- 일본군 장교 外.
# 프롤로그(영원)
정선아라리와 한오백년의 주요 테마들로 구성된 서곡이 연주된다. 서곡 후반부에 맞물려서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면 양지바른 산자락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작은 무덤하나가 보인다. 1997년의 자막 또는 푯말이 보여진다. 멀리 배경으로는 울창한 숲과 그 사이 물줄기를 막아놓은 댐이 보인다. 재덕과 달래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아들 세상, 시를 읽는다. 그 옆에 서있는 딸 하늘, 그녀는 고운 소리로 구음을 읊는다.
세상고하나니 하늘이여, 들으소서 산천이여. 서럽게도 길고 눈물나게도 여린 인연, 이제 그 끝자락 곱게 접어 여기 뉘었나니. 한 잔 술 한 굽이 가락으로 부디 이제 영원의 시간을 취하소서. 한 날 한 시 한 마을에 숯가마댁 재덕이 김서방네 달래로 나서, 고되고 사나운 세월 그 가운데에 던져졌소. 둘 아니면 벌써 버리고도 남을 세월이었소. 그 마저 시샘을 받아 갈려져 떠 돈 세월 어찌 다 헤아리리요. 고하나니 하늘이여, 들으소서 산천이여.
오늘 여기 이 자리 서러움에 목매이고 야속함에 멍들어도, 굽이굽이 잘 돌고 고개고개 잘 넘은, 우리 부모 누우셨소. 한 날 한 시 한 곳에 나서 한 날한 시 한 곳에 누우셨소. 처음과 끝만을 함께 한 그 서글픈 한이고 무정한 세월일랑 모두 잊고, 이제 부디 영원의 시간을 취하도록,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임의 영원한 시간을 취하도록 부디 굽어 살피소서.
# 1막1장 인연
1924년. 강원도 어느 산골. 어둠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뭐요?
할머니고추다. (무대 한쪽이 밝아지면 재덕의 초가가 보이고, 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아버지가 급히 방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소리) 아이고! 임자 고생했네.
할머니(소리) 아 좀 나가있어!
아버지(소리) 어따 이놈 골격이 보통 아니구먼!
할머니(소리) 허허 얼라 첨보는 것 두 아닌데……. (재덕의 집이 조금 어두워지고, 반대쪽 무대가 밝아지면, 달래네 초가 그 앞에 역시 초조하게 담배를 물고 서성이는 달래 아버지. 아기 울음소리.)
달레부어, 뭐, 뭐여?
달레모…….
달레부(사이) 아, 뭐냐니까?
달레모(소리) 고추……가 없어요!
달레부에이, 괜한 입 하나만 늘었군! (신경질적으로 나가 버린다)
달레모(소리) 임자, 부엌에 덥혀놓은 물 좀 가져다 줘요.
노래3 : 원주 둥개둥개요
갑순(소리만, 창조로) 강원도 굽이굽이 골 깊은 태백줄기 한 날 한 시 한 마을에 해도 열고 달도 열렸네.
(무대 밝아지고, 동리 사람들이 모여든다.)
합창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네가 어디서 생겼느냐. 아버지의 뼈를 받고, 어머니의 살을 빌어 열 달 만에 나왔구나! 고이고이 잘 자라서 부모말씀 잘 듣거라. 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재덕 아버지, 강보에 쌓인 아이를 높이 들고)
아버지네 이름은 재덕이니, 네가 자라 뭐가 되나. 재주 많아 소용 없다. 덕이 있고야 재주라네. 무탈하게 잘 자라면, 이 내 소원 다하는 게지.
합창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달래모네 이름은 달래라 하자. 네가 자라 뭐가 되나. 변함 없는 저 달 보듯, 초롱초롱 저 별 보듯, 너의 배필 잘 만나면, 이 내 소원 다하는 게지.
합창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여와 남나라님께는 (충신동이) 부모님께는 (효자동이) 동기간에는 (우애동이) 일가친척 (화목동이) 친구 간에는 (유신동이) 동네방네 (인심동이)
합창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남과 여은을 주면 너를 사고,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은자동이 금자동이, (만첩청산에 보배동이.) 순지건곤에 일월동이, (둥글둥글 수박동이.)
합창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합창 아가 아가, 우지 마라! 빼앗긴 세상 온다더라! 네가 자라 걸음마 띌 때, 빼앗긴 세상 온다더라! 그 때가 아니면 나는 못 사네, 아가 아가 우지 마라. 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 1막2장 비극
1934년. 이른 아침, 아버지가 큰아들과 딸을 데리고 장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거라. 해 떨어지면 올 것이다.
할머니(두 아이에게) 아부지 옆에 꼭 붙어들 있거라. 일본 순사 옆에는 얼씬도 말고.
달래부담부턴 똑바로 다려 놔라이.
달래모먹고 살기도 힘든데, 다림질은 무신……. 언년한테 속보일라고.
달래부아니, 이게 아침부터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아버지어이 칠성이, 지금 가는가?
달래부그려, 형님. 근데 형님도 장에 가우?
아버지그려, 죽은 마누라 제사가 낼인데 뭐가 있어야지.
달래부허허 열부났수, 열부 인자 고만할 때두 된 거 아뉴? 내가 잘 빠진 과부하나 알아 봐 줄까나?
아버지나는 그만 됐네. 가세 서둘러야지. (출발한다)
달래모어이구 옆집 살면서 어쩜 저리도 다를까!
달래부아니, 이게 정말. (달래모 집안으로 도망간다. 가려는 달래부, 어린 달래가 가로막는다.) 넌 또 뭐야, 계집년이! 저리 가! (밀치고 간다. 넘어지는 달래, 재덕이 급히 와서 그녀를 일으킨다.)
장타령과 함께 장이 열렸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흥정하는 사람들, 종종 보이는 일본인들. 재덕네 일행도 물건들을 고르고 있다.
노래4 : 강원도 장타령
장꾼들얼씨구 두른다. 절씨고 두른다. 무슨 타령 섬겨볼까. 장타령으로 들어간다. 춘천이라 샘발장, 신발이 젖어 못 보고. 홍천이라 구만리장, 길이 멀어 못 봤네. 이 귀 저 귀 양귀장 나귀 많아 못보고, 한 자 두 자 삼척장, 제일 내기 못 봤네. 횡설수설 횡성장, 말썽 많아 못보고. 여자 많은 강릉장, 강짜할 내기 못 봤네. 이 통 저 통 통천장, 발통이 아파 못보고. 엉성덩성 고성장, 사람 없어 못봤네. 강 건너라 이천장, 개천이 많아 못보고. 철덕철덕 철원장, 길이 멀어 못봤네. 이 강 저 강 평강장, 강 건널 내기 못 보고. 정들었다 정선장, 미인이 많아 못봤네. 품바하고도 잘 한다. 얼씨구 두른다. 무슨 타령 들어간다. 제격타령 들어간다.
신식도로 신작로, 자동차가 제격이요. 송백수양 푸른 가지, 꾀꼬리 한 쌍 제격이요. 봉지나 봉지 꽃 봉지, 범나비 한 쌍이 제격이요. 처녀 한 쌍 늙는데, 총각 한 쌍이 제격이요. 과부 한 쌍이 늙는데, 홀애비 한 쌍이 제격이요. 처녀머리 흥 커진데, 금봉채가 제격이요. 오입쟁이 한 쌍이 제격이로다. 무슨 타령 들어가나, 장타령으로 들어간다. 갓을 쓰고 배웠는지, 점잖게 잘하고.
기름동이나 발랐는지, 미끈미끈 잘 하고. 냉수동이나 먹었는지, 시원시원 잘 하고. 뜨물통이나 먹었는지, 걸직걸직 잘 하고. 구두 신고 배웠는지, 뚜걱뚜걱 잘하고. 시전시전 배웠는지, 대문대문 잘 한다. 대문대문 잘 한다. 대문대문 잘 한다.
(노래 후반부에 멀리서 일본군 일행이 들어와서 장터를 살핀다. 달래 아버지가 안내를 한다. 재덕네를 유심히 살핀다. 장꾼들 노래 끝 부분에 일본군과 마주치면 흩어진다. 중간에 있던 그들이 흩어지면 일본군과 재덕네가 마주친다. 달래 아버지는 일본군들 뒤로 숨는다. 아버지 뒤로 숨는 재덕의 형과 누나. 고개를 끄덕이는 일본 장교, 지시를 한다. 서서히 다가가는 일본군들. 두렵게 물러서는 재덕네.)
아버지안 된다. 이놈들! (암전. 급박한 음악소리와 함께.)
노래5 : 읍내에서 사단이 났소
여자들읍내에서 사단이 났소. 사단이 났소. 우리 재덕네 사단이 났소. 사단이 났소. 어허, 저런 쳐 죽일 놈들. 어허, 이를 어찌하오.
갑수 재덕이 성 재덕이 누이 둘 다 올해 열여덟 열여섯 아녀. 꼭꼭 숨겨도 불안할 텐데, 벌건 대낮에 장터를 데리고 나왔으니.
여자들우리가 대체 무신 죄요. 죄를 져야 숨어살지. 억울하고 억울하네! 어허 이를 어찌하오.
을수 그 놈들이 재덕이 누이를 찍은 겨. 근데, 재덕 아버지하고 재덕이 성이 가만있나, 쌈이 났지. 재덕이 성은 괘씸죄로 덩달아 끌려가고, 재덕 아부진 매를 을매나 맞았는지.
여자들나라가 절단 나고, 집구석도 작살나고, 원통하고 무정한 세월 어허 이를 어찌하오. 읍내에서 사단이 났소! 우리 재덕네 사단이 났소! 사단이 났소! 이 난국을 어찌 하리! 어허 이를 어찌하오.
(달래 아버지가 정신 잃은 재덕 아버지를 업고 돌아온다. 마을 사람들 따라 왔다.)
할머니아니, 이게 뭔 일이여! 아이고 애비야, 애비야, 애들은 워딨어?
우리 애덜, 우리 애덜 워딨냐고?
달래부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라니깐. 괜히 고집부리다가 아들 하나 더 뺐기고, 자기 몸 망가 지고. 이게…….
병수 허허, 거 주둥이 한 번 염병이네. 이눔이 이게 지 앞에서 지 딸래미 잡아가는데도, 손 흔들어 줄 놈이구먼!
달래부아니, 내 얘긴 상황 판단을 빨리 해서.
정수 그렇게 상황 판단이 빨라서, 저 원수 놈들의 개 노릇을 하나?
달래부아니 뭔 말들을 그렇게 험하게들. 난 그냥 살기 위해서. (급히 도망친다.)
병수 어라 도망가네, 저놈 잡아라 저놈. (모두 쫓아간다. 무대 어두워진다.)
멀리 달이 솟았다. 마당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할머니, 무릎에 누워있는 아버지. 그 옆에 재덕의 낮고 느린 구음이 시작된다. 한탄가.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달래 아버지. 방에서 가방을 들고 나오다가 문 앞에서 달래와 달래어머니를 만난다.
달래모뭐요?
달래부(급히 입을 막으며) 아니 이게 화통을 삶아 먹었나?
달래모그게 뭐냐니까?
달래부못 본 걸루 해라, 이눔에 골짜기 지긋지긋해서 더는 못살겠다.
난 간다.
달래모간다구?
달래부흥, 이 박칠성이가 이 산골에서 촌놈들한테 욕먹으면서 살일
없지. 이 박칠성이 이대로는 안 산다.
달래모(붙잡으며) 혼자는 못가지.
달래부어쭈, 안 놔.
달래모우리두 데려가
달래부비켜 (뿌리친다.)
달래모(다시 잡으며) 혼자는 못 간다. 이 나쁜 놈아!!
달래부아니 이년이 정말. (달래 아버지의 무자비한 발길질과 욕설. 달래모 쓰러져서 고통스러운 숨소리. 그 옆에서 울고 있는 달래.)
달래모“나, 나 죽어! 내 허리 허리! (급히 재덕네 앞을 지나가는 달래부. 갑자기 누워있던 재덕 아버지가 일어난다. 달래 아버지를 막아선다. 놀라는 달래 아버지.)
할머니애 애비야.
달래부서 서 성님! 나 나도 몰랐소! 내가 어떻게 형님네 애들을.
아버지(달래 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며) 애기. 애기 어디 있어? 히히히, 내 둥개 어딨냐고? (달래 아버지의 보따리 하나를 뺏어서 안고) 내 둥개 여기 있네. 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금자둥이 은자동이.
할머니아이고 애비야, 왜 그래? 애비야, 정신 차려라. 애비야.
(조용히 떠나는 달래 아버지. 구음이 아래 노래로 발전되고 노래 중에 동리 여인들이 등장해서 쓰러진 식솔들을 챙겨준다.)
노래6 : 한탄가
갑순 서산 낙조 해떨어지고, 서늘한 바람에 달마저 기운다.
여자들에고야 지고야, 세월은 가거라.
을순 앞산 첩첩에 뒷산도 첩첩, 눈물만 흘러흘러 물길이 난다.
여자들에고야 지고야, 세월이 가거라.
갑순을순 너무 길구나 장탄이야. 한이 없구나 한탄이야. 뽑고 빼고 남은 숨 없네. 어허 나 어찌 살아가나.
여자들에고야 지고야 세월은 가거라.
# 1막3장 청춘
1941년. 숯가마 터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어엿한 청년이 된 재덕이도 보인다.
노래7 : 인제 숯가마 등치기 소리
합창 에헤라 탄이야, 에헤라 탄이야. 에헤라 탄이야, 에헤라 탄이야.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에헤라 탄이야. 오백년이 훨씬 넘는, 에헤라 탄이야. 이태조가 등극을 하야, 에헤라 탄이야. 국태민안 시화연풍, 에헤라 탄이야. 산간문화가 발달을 하야, 에헤라 탄이야. 목탄 시대가 열렸는데, 에헤라 탄이야. 넘어간다 넘어간다, 에헤라 탄이야. 우리동네 참나무는, 에헤라 탄이야. 이 나라의 보래로구나, 에헤라 탄이야. 남면어른 숯둔 골에, 에헤라 탄이야. 함씨 지씨 박씨가 살아 에헤라 탄이야. 함지박골이 생겼구나, 에헤라 탄이야. 숯을 구워 먹고나 살아, 에헤라 탄이야. 숯둔이라고 불려졌네, 에헤라 탄이야. 넘어간다 넘어간다, 에헤라 탄이야. 백탄 검탄 산적하니, 에헤라 탄이야. 너도 나도 탐을 낸다, 에헤라 탄이야. 전진 후진 들러릴 간다, 에헤라 탄이야. 여기서도 백탄이요, 에헤라 탄이야. 저기서도 백탄일세, 에헤라 탄이야. 자진가락 들어를 간다, 에헤라 탄이야. 에라 탄이야, 에라 탄이야. 에라 탄이야, 에라 탄이야. 어떤 사람 에라 탄이야, 팔자가 좋아 에라 탄이야. 고대광실 에라 탄이야, 높은 집에 에라 탄이야. 대청마루 에라 탄이야, 두루 앉아 에라 탄이야. 흥타령만 에라 탄이야, 부르는데 에라 탄이야. 숯가마 등치는 에라 탄이야, 일꾼이 됐나 에라 탄이야. 오늘 날은 에라 탄이야, 그만 하고 에라 탄이야. 내일 날이나 에라 탄이야, 다시 하세 에라 탄이야.
(일꾼들 일을 마친다. 숯가마 터가 어두워지고 반대쪽 무대가 밝아지면 나물을 캐는 동네 처녀들과 달래, 재덕이 찾아간다.)
노래8 : 양구 얼레지 타령
여자들대바우 용늪에 얼레지가 나거든, 너하고 나하고 얼레지 캐러 가자. 노랑두 대가리 뒤범벅 상투, 언제나 길러서 내낭군 삼나. 저것을 길렀다 낭군을 삼느니, 솔씨를 뿌렸다 정자를 삼자.
(웃음 소리. 다가오는 재덕. 달래만 못 본다.)
재덕 산이야 높아야 골도나 깊지. 쪼그만 여자 속이나 뭐그리 깊을 소냐.
달래 (딴 곳을 피하며) 봄철인지 가을인지 나는 몰랐더니, 뒷동산 도화춘절이 날 알려주네.
재덕 (가까이 따라가서) 얼레지 나물은 당신이 뜯고, 나는 꼴 비며 단둘이 나가자. (달래, 일어나서 주변을 보지만 재덕이 뿐이다. 잠시 눈이 맞는다. 어색해서 외면을 하는 두 사람. 암전.)
(달밤이다. 풀벌레 소리. 나무 아래 재덕과 달래가 나란히 앉아 있다.)
달래너 자꾸 내 동무들 있는데서 그러지 좀 말어.
재덕 그럼, 너두 가마터에 자꾸 기웃거리지 말어. 아자씨덜이…….
달래 아자씨덜이 모?
재덕 아녀.
달래 말해봐?
재덕 아니라니까.
달래 말해봐, 왜 말을 못한대 바보 아닌감?
재덕 뭐 바보? 어이구 참! 궁둥이만 크면 단 줄 아남.
달래 뭐여? 네가 내 궁둥일 봤남?
재덕 아자씨들 말이.
달래 말이?
재덕 (일어나며) 네가, 네가 인자 그러니까 그게 다 됐대. 이 바보야, 참말 누가 바본지 모르겠네.
달래 야가 오늘따라 왜 이런데 (돌려세우고, 바짝 다가서서.) 왜 내 얼굴은 못보고 그래, 뭐 죄진 거 있지.
재덕 더워, 저리 좀 가.
달래 그러니까 똑 바로 말을 해 보란 말이여.
재덕 좋아 말한다 말해 (사이 너무 가깝다. 달래가 시선을 피한다. 돌려 세운다) 왜 그래?
달래 너도 아까 그랬잖아?(사이, 달래를 와락 껴안는 재덕) 엄마야! (암전)
(아래 노래 중에 혼례식과 첫날밤이 진행된다.)
노래9 : 사랑가
여인들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하늘 촛불 한 쌍 불 밝혔소. 저 달 아래 불 밝혔소.
세상 정안수라 예 떠왔네! 저 별 아래 예 떠왔네!
여인들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세상 달빛 하나가 허전해도 너무 고운 우리 각시. 너무 고와 눈물 나오. 내 품 작아 눈물이 나오.
여인들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하늘 만첩청산 웃는 소리 우리 신랑 노랫소리. 그 품 안에 난 좋아도 임의 등엔 바람이 시리다.
여인들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자진 가락으로 넘어가면서 두 사람 신방으로 향한다.)
합창 아라리 둥둥, 내 사랑이라네. 우리 사랑 빛일러니, 어둠 밤길 등불이오! 아라리 둥둥, 내 사랑이라네. 우리 사랑 숲이라면, 백년만년 푸르리라. 아라리 둥둥 내 사랑이라네. 우리 사랑 물일러니 목마름에 단비라오. 아라리 둥둥, 내 사랑이라네. 우리 사랑 꿈이라면 깨지 않을 길몽이요. 둥둥둥 아라리, 둥둥 내 사랑이야.
# 1막4장 이별
한 달 뒤. 흥얼거리며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던 재덕.
재덕 (무반주) 강원도라 금강산은 들어갈수록 경치가 좋고. 우리 각시 너하고 나하고 살아갈수록 정만 드네.
(길을 잃은 일본군 수색대를 만난다.)
일본장교 어이!
재덕 나 - 아?
일본장교 길 좀 묻지.
재덕 물어 보슈?
일본장교 읍내로 가려고 하는데…….
재덕 잘못 왔소. 돌아서 가슈.
일본장교 뭣이라?
재덕 돌아가라고. 왔던 길로 돌아가란 말이오.
일본장교 얼마나?
재덕 이길 초입까지, 애초에 시작이 잘못된 길이죠.
일본장교 음……. 가자. (돌아서 간다.)
재덕 알아들었냐? 돌아가란 말이다. 이 웬수 놈들아!
(재덕의 집. 달래가 빨래를 만지고 있다. 잠시 후 그 일본군들이 온다.)
달래 어머나! 무슨 일로.
일본장교 물을 좀 마실 수 있나?
달래 잠시만……. (우물 쪽으로 나간다. 재덕 아버지가 집에서 나온다.)
아버지둥개야 둥개야, 모해에. (일본군을 본다. 순간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헛간으로 간다. 뒤에 낫을 감춰 온다. 일본군에게 다가간다. 병사 하나를 향해 낫을 내리꽂는다. 쓰러지는 병사 하나 싸움이 벌어진다. 맞아 쓰러지는 아버지 뭇매가 가해지고 포박된다. 할머니가 달려오지만 역시 맞아 쓰러지고 달래가 달려온다.)
달래 할머니, 아니 왜 할머니를 무슨 일로.
일본장교 가자.
달래 아버지, 아버지.
(매달린다. 권총을 빼서 달래의 머리에 겨누는 일본장교.)
일본장교 가자! (그들은 아버지를 데리고 떠나고.)
달래 (사이) 할머니,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엄니, 할머니 좀…….
(어머니에게 할머니를 맡기고 재덕을 찾아 산으로 뛰어간다.)
재덕아! 재덕아…….
(읍내 일본인 막사)
(책상 앞에 재덕이 초조하게 앉아 있다. 잠시 후 일본 장교가 들어온다.)
일본장교 사정은 알겠지만, 우리 병사의 상처가 너무 깊다. 풀어 줄 수 없다.
재덕 안 돼, 안 된다. 우리 아버지 풀어줘. 우리 아버지 풀어달란 말이야. (덤벼들다가 강제로 앉혀진다) 뭐든 다 하겠소. 불쌍한 우리 아버질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뭐든지 다 하겠단 말이오. 그러니 제발.
일본장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재덕 뭐요? (일본장교가 신호를 보내면 부하 하나가 재덕에게 서류와 인주를 내민다.)
일본장교 글은 읽나?
재덕 (사이) 지금 당장 내 아버지를 풀어주시오. (손도장을 찍는다.)
(쓸쓸한 남자 구음 -노래 10-이 흐르는 가운데 재덕이 다친 아버지를 업고, 고갯길을 넘어오고 있다. 아버지를 업은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다.)
재덕 아부지, 말 안 해도 지는 아버지 맘 다 아는구먼유. 지가 아부지라도 그 놈들을 가만 두진 않았을 꺼유. 잘 하셨어요. (사이)
그래두 몸 생각을 하셔야쥬,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서시면, 어이구 참! (사이) 약방 영감님 말씀이 한 달포 조신허게 약 쓰면 큰 탈은 없을 거라네요. 달래가, 아니 아부지 며느리가 알아서 다 해줄 거구만요. (사이) 워매, 눈에 뭣이 들어갔나. 자꾸 왜 이런데 (사이) 그리고 아부지 저……. 저 말예요. 저, 후 - 아녜요. 그냥 건강 하시라구요. 사람들이 실성했다고 놀려도요, 보란 듯이 아주 오래오래 사셔야 되요. 그래야 이쁜 손자도 보시고 아부지 잘 하시는 둥개야도 부르시고. (사이) 둥개둥개 둥개야, 둥 둥 둥개야……. (기다리던 달래가 뛰어온다)
달래 이제 와 아버진 괜찮으셔?
재덕 아주 괜찮지는 않아.
달래 별일 없는 거지?
재덕 그럼, 어여 가자. 아버지 목욕시켜 드려야 돼. 할머니는?
달래 좀 전에 일어나셨어. (깊은 밤, 예전의 나무 아래 나란히 앉았다.)
달래 사람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달은 참 곱네.
재덕 누가 달래 아니랄까봐?
달래 얼레……. (같이 웃는다.)
재덕 (사이) 달래야…….
달래 응?
재덕 달래야…….
달래 왜에…….
재덕 그냥 불러 봤어!
달래 (사이) 무슨 일 있었어, 아까 아부지 데리러 갔다가.
재덕 아녀, 일은 무슨 (사이) 달래야,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한오백년 -노래11- 멜로디가 흐르면서 서서히 암전.)
(새벽. 방안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재덕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고 있는 달래.)
재덕 그만 울어. 먼 길 가는데 울면서 보낼 거야?
달래 바보야, 그게 먼 길이야? 죽는 길이지.
재덕 달래 이 바보야, 죽긴 왜 죽어. 난 원통하고 분해서라도 못 죽는구먼. 난 꼭 살아서 돌아올 거여. 그래서 우리 달래도 보고, 우리 아부지도 보고, 우리 할머니도 보고, 끌려간 우리 성들도 찾고,
이쁜 우리 애들도 보고.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 저 산이 다 무너지고 물길이 끊겨도 달래는 여기 있을 거야. 여기서 죽을 때까지 재덕일 기다린다고. 나무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죽어도 원망은 말기다.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 저 고갯마루 달빛 아래야. 힘들고 집 생각나면 달을 봐. 네가 어디에 있던지. 저 달은 우리 둘이 언제나 같이 보고 있는 거구먼.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두 사람 문을 열고 나온다. 재덕 안채를 향해 절을 올린다.)
재덕 (사이) 간다. (재덕은 떠나고 달래, 엎어진다.)
노래12 : 이별가
여자들이별이야 이별이야, 임과 날과 이별이야. 인제 가면 언제 오료, 오만 한을 일러주오. 새벽서리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럭아. 이 내 몸은 청산되어 기다린다 전해다오. 이 내 정은 청산이라 변함없다 전해다오. 이별이야 이별이야, 내 사랑이 떠나는구나.
(1942년 1막이 내린다.)
# 2막1장 재회
1945년 해방 직후. 멀리 고갯마루에서 달을 보며 기원하는 달래.
노래13 정선 아라리 본조
달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앞산에 두견 울고 뒷산에 접동 울 제, 쓰라린 임 생각에 내 속이 다 타오. 담뱃불이 번득번득에 임 오시나 했더니, 그 놈의 개똥불이가 날 속였네. 동령월출 벗을 삼고 전전불매 잠 못 드니,
쓰라린 이내 심정 그 누가 알리오. 삼십 육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 꽃은, 을유년 팔월 십오일에 만발했는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잔잔한 간주가 흐르고 달레의 모습이 사라지면 해방 축하 행렬들이 지나간다.)
노래14 엮음 아라리
갑수 그 얼마나 기다렸나. 눈이 빠지고 귀가 빠지고, 두 손 두 발 다 닳아서 이리 미끈 저리 미끈. 북풍 한설 칼바람 앞에 촛불 하나 지키듯이.
갑순 우리 만백성 하나 되어 소망했네. 을유년 팔월 십오일 만세 소리가 드높다.
을수 우리 백성 어질어서 설움만 받고, 상처만 받고, 고된 세월 모진 세월 온몸으로 견딘 세월.
을순 우리 조선 백성들아, 그간 접었던 나래 펴고, 훨훨 날아 보세.
병수 강원도라 산이 많아 저 잘 살자고 빌지만 말고, 우리 백성 기운 차리고 우리나라 그 앞날에.
병순 곧게 뻗은 신작로 부국강성 이루도록 같이 빌어 보세.
합창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간주 중)
(집에서 빨래를 널고 집안일을 하는 달래와 어린 세상. 신이 난 덕배가 등장한다. 노래를 부르면 그녀를 짓궂게 쫓아다닌다. 어린 세상이도 덩달아 신이 났다.)
노래15 자진 아라리
덕배 개구리 놈이 뛰는 것은 멀리 가자는 뜻이요. 이 내 몸이 웃는 것은 정들자는 뜻일세. 우리야 연애는 솔방울 연앤지. 바람만 간시랑 불어도 똑 떨어진다. 봄철인지 가을인지 나는 몰랐더니,
뒷동산 행화춘절이 날 알려주네. 공동묘지 장승백이야 말 좀 물어 봅시다. 임 그리워 죽은 무덤이 몇 명이나 되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노래 끝에 달래가 바가지의 물을 바닥에 끼얹는다. 암전)
(달밤이다. 고갯마루에 홀로 앉은 달래 잠시 후 덕배가 조용히 다가온다.)
달래 왜 자꾸 이래요?
덕배 암시롱…….
달래 허, 정신없는 양반.
덕배해방이 되고 벌써 네 해가 지나고, 쫌 있음은 추석인데, 해방 다음해, 신랑 할머니 가고, 그 다음해 달래 어무이 가고, 끝까지 아들 기다리던 실성한 양반이 또 그 다음해에 마저 갔는데, 그리고 올해는 달래 기다리다가 속이 다 타버린 내가 갈 차례 같은데 38선이다 뭐다 이렇게 시끄럽고 복잡한 세월엔 그저 집안에 남자가 있어야 하는 건데, 저 아들한테도 인자 아버지가 있어야 할 것 아니요.
달래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요?
덕배 아니, 내 말은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런 저런 상황들을 따져 봤을 때 말이지.
달레아자씨 말씀은 고마운데요, 우리 세상이 아부진 꼭 돌아온 다네요. 아시겠어요?
덕배 그게, 그렇지가 않다고 하던데…….
달래 뭐가요?
덕배 징용 갔던 사람덜이 간혹 돌아오긴 해도, 그건 다 40년 이전
갔다가 일본에서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이라던데. 또 돌아오려면 해방되던 해에 오지, 그 뒤에 온 사람은 없다던데. 사망 통지서가 없는 건 꼭 죽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고, 시신을 못 찾았을 뿐이라네.
달래 그만해요. 아자씨 증말 몹쓸 사람이오. 앉은 자리에서 멀쩡한 사람 하날 아주 송장으로 만드네요. 벌 받소 벌 받아.
(일어서서 가려는데, 덕배가 잡는다.)
덕배 벌을 받는다? 내가? 이런 염병, 아주 지랄을 하고 있네. 그 동안 험한 꼴 안보고 살게 살펴주고 지켜 줬두만. 아주 재집 머슴으로 아나부지. 꿈 깨 이년아! 촌구석 산골에 애 딸린 과부년이 무슨……. (달래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며 돌아서 간다.)
(한오백년 테마가 -노래 16- 흐른다.) 너 조만간 내 앞에 거둬달라고 빌 때가 있을 것이다. 에라이 배은망덕한 년!
(예전에 재덕이 아버지를 업고 가던 고갯길. 울면서 달래가 걷고 있다.)
달래할머니 돌아가시면서 네 이름만 불렀고, 어무이 돌아가실 때도 너 찾아 가라고 그랬고, 아버지 정신 드시자 내 손잡고 미안하단 말만 하시다 돌아가셨는데, 너 보내고 편히 눈감은 사람, 편히 눈뜨고 있는 사람 하나도 없지.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 네가 죽었으면 내 꿈속이라도 찾겠지. 요샌 그런 생각에 잠자기도 겁이 난단 말여. 꿈속에서 난 언제나 눈을 감고 살아.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너 기다리는 날이 나 사는 날이고, 너 죽는 날이 나 죽는 날이지.
근데 요샌 자꾸 눈물만 나고, 저 달을 봐도 네 얼굴이 안 보인단
말여. 재덕아이 나 너무 무섭다.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그렇게 울면서 집에 다 왔다. 낯선 그림자가 서성인다. 놀라는 달래, 남자가 돌아선다. 재덕이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뜨겁고 서러운 포옹. 사랑가 구음 -노래 17- 과 함께 서서히 암전)
(다정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
재덕(목 뒤의 상처를 보이며) 이게 만주 일본군 부대서 도망치다가
생긴 생채기여. 곧 바로 독립군들 안 만났으면 죽은 목숨이었지.
달래 그 38선이라는 게 높은 담이 쳐진 겨?
재덕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여기랑 거기랑 생각이 달라서 그런 거여.
달래 그럼, 네가 이쪽으로 옮기면 되잖아?
재덕 그게 쉽지가 않다니까? 내가 그 쪽에서 맡은 일도 있고 말이여.
달래 내가 가면?
재덕 누가 가면 어때. 암튼 조만간에 결단이 날거야.
달래 내일 당장 돌아갈 건 아니지?
재덕 아녀 며칠 더 있어도 돼.
달래 그럼 됐어!
(달래, 재덕을 꼭 껴안는다. 암전)
# 2막2장 역설
6,25가 터졌다. 피난민들의 행렬.
노래18 : 38선에 난리 났소
합창 38선에 난리 났소. 북이다 남이다 나뉘어서 티격태격 싸우더니, 38선 동강내고 큰판대판 난리 났소.
갑수 아이고, 말도 마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날벼락이오. 날벼락. 뭘 알아야 줄을 서고, 뭐가 있어서 쌈을 하지.
합창 피난 가세! 피난 가세!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네…….
을수 피하긴 어디로 피해, 가도 가도 끝없는 게 피난길이여. 이 좁은 땅덩어리, 이미 반절 뺏기고 더 어디로 피한 단 말이여. 우덜도 싸워야 하는 겨. 아, 도망 말고 싸워야 한다니께.
합창 싸워야 한다, 피난 가자. 어허 대체 어쩌잔 말이야…….
병수 아니 해방된 지 몇 해나 됐다고 또 해방을 시켜준다? 이번에 무신 지주한테서 해방되는 거라지. 근데 해방 안 되면 다 죽인다.
어이구! 그러니 해방 무서워서 피난을 가네. 이런 참!
합창 38선에 난리 났소……. 자본 공산 나뉘어서 티격태격 싸우더니,
38선 동강내고 큰판 대판 난리 났소.…….
(피난민들 간간히 집 뒤로 다니는데, 덕배가 찾아온다.)
덕배 아니 여태 뭐하는 겨 짐도 안 싸고?
달래 짐은 왜요?
덕배 피난 안 가?
달래 안 가요.
덕배 안 가면 죽어.
달래 왜요?
덕배 지금 말장난 할 때가 아니란 말이여. 어서, 들어가서 짐 싸.
달래 짐 안 싸요.
덕배 그래? 그럼 그냥 가지 뭐. 가자.
(실랑이를 하는데 인민군 장교복을 한 재덕이 들어온다. 놀라는 덕배 총을 뽑는 재덕, 겨눈다. 주저앉는 덕배.)
달래 세상 아부지.
재덕 세상이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 가.
달래 이 사람 어쩌게?
재덕 날 봤으니 어쩔 수 없어.
덕배 제, 제발.
달래 그러면 안 돼 세상 아부지. 이 사람이 이래봬도 당신 없을 때 우리 모자 살려 준 사람이야.
재덕 …….
달래 제발.
재덕 가요. 돌아오지 말고, 날 봤다는 말도 말고.
덕배 고 고맙소. (덕배 급히 떠난다.)
(덕배가 간 것을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는 재덕……. 그 동안 달래는 쌓아 놓은 보따리들을 내 온다.)
재덕 거기 숯막은 아무도 모를 거야, 가자.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두 사람. 서서히 암전.)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이 모여서 휴전에 대해서 얘기한다.)
노래19 : 휴전이라니 말도 안 돼
합창 휴전이라니, 말도 안 돼. 잘린 허리 부여잡고 두고두고 한 만드는, 이런 휴전 말도 안 돼…….
갑수 암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어렵게 나라 찾아서, 이렇듯 허망하게
쪼갤 수는 없는 일이지. 아, 뭐 하러 싸운 겨 하나 되서 잘 살아보자고, 머리 받고 여태 싸운 거 아니냔 말이여.
합창 하나 되자고 싸움질하고 둘 나누자고 악수하고. 가엾구나, 우리 백성 미쳐버린 세월이다.
을수 백날 싸워봤자 승부 나긴 다 글렀고, 다시 화해하기도 애초에
틀린 거여. 애꿎은 목숨 그만 잡고 이쯤에서 정리해야지. 아, 언제까지 싸우고 상처만 낼 겨, 땅이 울어 이 나라 이 강산이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창 하나 되자고 싸움질하고, 둘 나누자고 악수하고, 가엾구나, 우리백성 미쳐버린 세월이다.
병수 더 늦기 전에 갈 사람들 가고, 올 사람들 와야지. 저것들 악수하고 도장 콱 찍어 불면, 저 놈의 휴전선인지 뭔지, 다시 열릴 때까지, 1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아무도 장담 못 하는 겨. 한이 많은 백성들이라 한 번 원수지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여.
합창 잘린 허리 부여잡고 두고두고 한 만들고, 가엾구나, 우리백성 미쳐버린 세월이다.
(숯막)
달래 (만삭의 몸으로 나오면서) 여보, 세상이 봤어?
재덕 아니.
달래 아침 먹고 일어선 뒤로 안 보이네. 어디 가게?
재덕 휴전이 된다니까 좀 알아봐야겠어?
달래 가는 길에 세상이도 찾아보고.
재덕 그래! (나가려는 재덕, 세상이가 뛰어온다. 여기라고 손짓한다. 그 뒤를 덕배가 따라왔다. 재덕과 마주친다. 재덕은 품안의 총으로 손이 가고, 급히 달아나는 덕배 마주보는 두 사람의 절망.)
(전선 총소리와 포소리가 요란하고 천지가 번쩍인다. 만삭의 달레와 어린 세상 짐을 진 재덕이 전선을 넘는다.)
재덕 안 되겠는데, 길이 없어. 이러다간 양쪽 총알을 다 맞겠어.
달래 여보, 어떡해!
재덕 당신, 세상이랑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길을 알아보고 올게.
달래 (가려는 재덕을 잡으며) 잠깐만
재덕 왜?
달래 재덕아!
재덕 왜에? 달래야……. (사이 -노래 20- 이별가가 흐른다. 앞 뒤 후렴만 여자들이 부르고 중간은 연주와 구음으로.)
여자들이별이야, 이별이야, 임과 날과 이별이야…….
달래 너두 알지? 우리가 같이 갈 수 없다는 거.
재덕 달래야!
달래 숯막에서 같이 지낸 3년이 너무 좋아서. 하늘님이 또 샘을 내나 부다.
재덕 우리 같이 갈 수 있어.
달래 흠 치사하지, 겨우 3년인데, 3년.
재덕 여기 꼼짝 말고 있어, 금방 데리러 올게 머리 숙이고, 알았지?
달래 재덕인 아직도 바보다. 난 다 아는데.
재덕 누가 바본지 모르겠네!
달래 나 언제나 거기서 기다릴 거야. 서둘지 말고 언제라도 몸만 성해서 돌아오면 되는 거야.
국군1 (소리) 거기 누구야?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재덕과 달래 붙잡은 손이 점점 멀어지면. 재덕,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국군들이 달래를 포위한다.)
국군2 어, 여자네.
여자들 이별이야, 이별이야, 내 사랑이 떠나는 구나…….
# 2막3장 불변
1961년. 달래의 집. 덕배가 홀로 앉아서 새끼를 꼬고 있다.
노래를 부르며 연신 집 안 눈치를 본다.
노래21 : 엮음 아라리
덕배 네 칠자나 내 팔자나 네모반듯한 왕골 방에, 샛별 같은 놋요강을 발치만큼 던져 놓고, 원앙금침 잣베개에 꽃 같은 너를 안고 잠들어 보기는 오초강산에 영 글렀으니, 엉툴멍툴 장석 자리에 깊은 정만 두자. 당신이 날 마다고 울치고 담치고 열무치고, 소금치고 오이치고 초치고 칼로 물 친 듯이 뚝 떠나가더니 평창 팔 십리 다 못가구서 왜 되돌아 왔나.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지게를 짊어진 세상이 들어온다.)
세상 어, 아자씨 오셨네.
덕배 산에 갔다 오나?
세상 예 엄니는요?
덕배 옆집 개가 온 줄 아나부지.
세상 아자씨가 단단히 잘못을 했나 봐요?
덕배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네 아버지 쫓아낸 게 내 잘못이라는데
할 말 있느냐고.
세상 그렇게 따지면야 아자씨 데리고 온 지 잘못이 더 크게요. 어디 인력으로 그리 된 건가요, 시절이 그리 만든 거지.
덕배 어이구, 이 집 아들내미 인자 다 컷구만!
세상 아자씨 아니었음 우린 빨갱이 가족이라고 여서 살지도 못하지요.
달래 (나오며) 그래 아주 대단한 신셀 졌지. 우덜 목숨 구해준 은인이 아닌감.
덕배 아이고, 뭔 말을 또 그렇게 가시를 바짝 세워서 한대요. 민망하게.
달래 여서 뭐해요? 읍내에서 무신 회합을 한담서, 안 가요?
덕배 아, 가요, 가야지. 그냥 임자 얼굴이나 함 보게 갈기라고, 이렇게 헤헤헤.
달래 임자? 오늘 애 앞에서 임자 한번 제대로 만나볼래요?
덕배 아녀, 아녀!, 지금 가는 중이라니까? 음, 세상아, 난 간다.
세상 살펴 가세요.
덕배 그려.
세상 (멀리) 또 오시구요.
달래 오긴 누가와, 죽은 빚쟁이가 온다던?
세상 엄니가 좀 심한 거 같은데, 조금 더 잘해주면 좋겠는데.
달래 어이구, 이젠 아주 말투까지 쏙 뺐네, 쏙 뺐어!
세상 지도 아부지가 돌아오길 바라는 건 똑같지요. 하지만 그보다 엄니가 웃는 얼굴로 사는 걸 더 바란단 말예요.
달래 그래서? 저눔의 홑아비를 내 신랑 삼고, 네 애비 삼자는 말이냐?
세상 아니, 내 말은.
노래22 : 한오백년
달래 네 아버지 불쌍한 사람이다.
세상 아부지 떠난 지, 벌써 8년이요. 북으로 갔어도 못 올 양반, 그 때 무사히 북으로 갔는지도 모를 일인데, 산 사람은 산 사람답게 살아야지. 허구 헌 날 이게 모냔 말이여!
달래 이놈의 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아나? 그래, 너나 잘 살아라. 너나 잘 살아!
세상 그래요, 난 잘 살거라고요. 아부지 말곤 암 것두 안 보이는 엄니 눈에 확 띠도록, 아주 보란 듯이 잘 살거구만요.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세상 (사이) 나, 가요.
달래 …….
세상 나, 서울로 갈 거요. (사이) 나 간다니까요.
달래 누가 뭐라든. (일어서서) 사내 녀석 이만큼 키워 놨으면, 인자 지 앞가림 혼자 할 때도 됐지 뭘.
세상 아부지가 서울 간데도 저러실까 몰러. (나간다.)
남자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 (후렴 중에) 여보 재덕이, 지 맘 내가 모르고 지가 내 맘 모르겠나만, 인자 우리 아들 다 컷네요. 그래 가거라. 예 있으면 너두 덩달아 속 다 타고 좋은 시절 하나 없지. 그래 가거라, 가. 지척에 둔 임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볼까나.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위 후렴에 세상이는 집을 떠난다.)
(1971년. 하늘이가 들어온다.)
하늘 오빠 편지 왔어.
달래 먼저 읽고 방에 둬.
하늘 난 봤어. 추석 때 바빠서 못 올지도 모른다네. 돈은 좀 부쳐 준데. 내 말 들어?
달래 그래.
하늘 뭘 그렇게 한데?
달래 낼이 네 아부지 생일이야.
하늘 제사가 아니고? (달래, 쳐다본다.) 아니, 그냥……. (사이) 참, 덕배 아자씨 춘천으로 이사 간다네.
달래 잘 가시라 해라. (사이) 만나면 밥 한번 자시러 오라 하고. 그 양반 하고도 참 질기고 질긴 인연인데…….
노래23 : 한오백년
하늘 (사이) 엄마도 같이 갔으면 하던데.
달래 일 없네.
하늘 (사이 일을 거들며) 내가 가도?
달래 무신 소리야?
하늘 나 춘천서 학교 다니면 대학도 보내 준 댔단 말이야. 덕배 아자씨가.
달래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 네 애비라도 된다니?
하늘 솔직히 아버지 보다 낫지 뭐. (후원으로 나간다.)
남자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 (하늘이 다시 나오면) 터진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녀.
하늘 얼굴도 못 본 아버진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래? 난 당장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좋아. 내 생각이 잘못 된 거야?
달래 그래, 한참 잘못됐다.
하늘 잘못 된 건 엄마겠지. 그 동안 아부지 말고 나나 오빠가 엄마
눈에 들어오기나 했어? 함께 살고 있는 가족보다 자기 살겠다고 혼자 떠난 사람을 더 좋아하는 엄마가 잘못돼도.
(뺨을 때리는 달래. 하늘, 뛰어 나간다. 주저앉는 달래.)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위 후렴 중에)
달래 못된 것 네 아버지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불쌍한 니들 아버지, 가엾은 내 남편 사랑하는 게 무신 큰 죄가 된다고. 살살 바람에 달빛은 밝아도 그리는 마음은 어제나 오늘…….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1981년. 세상이와 하늘이가 달래를 찾아온다. 멀리 폭파 소리와 중장비 소리.)
세상 더 늦으면 안 된데요. 댐이 워낙에 급하게 만들어지는 거라.
달래 꼭 전쟁터 같구먼…….
하늘 예, 인제 다 떠나고 달랑 우리 집 하나 남았어요.
달래 여가 다 물에 잠긴다고? 시상에 아무리 홍수가 나도 여기까지는 안찼었는데…….
세상 서울로 가서 살아도 자주 내려오면 되지요.
하늘 서울이 멀면 춘천으로 가구.
노래24 : 한오백년
달래 내야 어디든 갈 데가 없겠냐만, 여 마저 물에 잠겨 버리면
영영 갈 곳 잃게 되는 네들 아버지가 걱정이지.
세상 어머니.
달래 그래 안다 알아, 먼저 가거라. 내 곧 뒤 따르마.
하늘 빨리 와요. (하늘과 세상 보따리 몇 개를 들고 먼저 나간다.)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30해가 다 되어 가는데, 어째 이리 못 오는 거야! 자꾸 늙어서 알아보기도 힘이 드는데, 이제 집까지 물에 잠기면……. 우리 이제 어떡해요.
남자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다 뜻 붙일 고…….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달래 무심한 세월에 홀로 맞서 안 오는 임 기다리다 한만 두고 가오.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반복되는 후렴. 세상과 달래 고갯길을 걸어 떠난다. 자꾸 뒤돌아보는 달래.)
# 2막4장 갈증
1984년. 댐이 완성된 어느 날. 댐의 전망대. 물소리가 시원하다. 두터운 코트와 진한 선글라스의 재덕이 홀로 정선아라리를 부른다.
노래25 : 정선 아라리
재덕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 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내가 너무 늦었구려! 가는 세월 날 버렸소. 해 저무는 저녁노을 빈 물결만 출렁. 저 물결이 뭐라 하나 내 오라고 손짓하네. 저 하늘에 달 뜨면은 인사나 하고 따르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지나가던 세상이 다가 온다.)
세상 처음 오셨소?
재덕 예전엔 자주 왔지요.
세상 여기가 고향이신가요?
재덕 내 고향은 예가 아니고 사람이라오.
세상 아, 예…….
재덕 (사이) 저기 보이는 바위산을 뒤로 돌면 숯막이 하나 있을 건데. 이 물로 봐선 거기도 물에 잠겼겠소.
세상 예…….
재덕 또 저기 참나무 숲 왼편으로 작은 고갯길이 하나 있었지. 그 길은 이곳 사람 아니면 모른다오. 그 길옆에 달빛이 가로질러 꼭 여덟 걸음만 들어오면 빈터가 있고. 거기엔 작은 바위도 나란히 두 개가 있다우. 그래서 우린 거길 팔보돌마루라고 부르곤 했었는데…….
세상 예 이곳에 사셨던 분이라면 혹시……. (호출기가 울린다.)
아, 저희 어머님이 찾으시네요. 그럼……. (떠난다)
(잠시 뒤, 낯선 남자 둘이 들어 와, 재덕의 양쪽을 차지한다. 긴장하는 재덕 문득 몸을 돌리려 하는데……. 그들이 잡는다.)
수사관정재덕 맞죠? 같이 갑시다.
(댐 아래 휴게소. 달래가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온다.)
세상 전망대로 오시지 않구요?
달래 가봐야 속만 상하지 뭐! 지 살던 데 물에 잠겼는데 속 좋을 사람이 있든?
세상 춘천으로 가신다구요?
달래 그러지 뭐, 김서방도 잘 해주고, 서울보다는 여기 오기가 수월하잖아. 너두 바쁘고 하니까?
세상 조만간에 우리 살던 마을 뒤쪽으로 새 길이 뚫린 데요. 그럼 그 때 거기에 작은 집이라도 하나 지어 드릴게요.
달래 고맙구나.
세상 참, 혹시 팔보돌마루라고 들어보셨어요?
달래 (사이) 그걸 네가 어찌 아누?
세상 아니, 아까 전망대에서 어떤 양반이 그 얘길 하길래?
달래 누가?
세상 모르죠, 날도 더운데 중절모에 선글라스에…….
달래 (일어서며) 가, 가보자.
세상 어딜요?
달래 그 사람 있는데.
세상 아깐 안 간다더니요?
달래 (사이) 네 아버지가 왔나부다.
세상 예?
달래 팔보돌마루는 네 아버지랑 나만 아는 곳이야. 이름도 네 아버지가 붙인 거고. (세상 갑자기 뛰어 나간다. 이별가가 불려진다. 처음과 끝의 후렴만 여자들에게 불리고 중간은 구음과 연주로만 진행.)
노래26 : 이별가
여자들이별이야 이별이야, 님과 날과 이별이야…….
(전망대, 급히 세상이가 온다. 아무도 없다. 주변을 살피다 뛰어 내려간다.) (다시 휴게소. 달래 혼자 조용히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다. 허탈하게 세상이가 다가온다.)
세상(사이) 엄니 내가 죽일 눔이요.(엎드려 운다.)
달래 (부드럽게 다독이며) 엄니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네 탓이 아니다. 아직도 하늘이 그 사람을 보내 줄 준비가 안된 게지.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난 괜찮다. 만날 사람 언젠간 만나게 되고, 아직 때가 되진 않았을 뿐이야.
세상 엄니, 내 꼭 아부지 찾아서 엄니 옆에 데려다 놓을 게요. 반드시, 반드시 아버지 찾아드릴 게요.
여자들이별이야 이별이야, 내 사랑이 떠나는구나……. (암전)
소리 (암전 속에서) 성명 정재덕, 조총련 소속의 위 사람에 대한 간첩 혐의가 인정되므로 징역 15년을 선고함.
(땅 땅 땅. 이어서 철문 닫히고 잠기는 소리.)
재덕 (소리만) 달래야……. 달래야…….
# 2막5장 해후
1994년. 새로 지은 고향집. 달래, 정원 탁자에 깜박 잠들어 있다가 깬다. 이어서 전화벨 소리.
달래 예…….
세상 (소리. 한오백년 -노래27- 테마가 흐른다.)
엄니, 아버지 찾았어요. 엄니 듣고 계세요. 아버지 찾았다구요.
달래그래……..
세상 하늘이가 곧 모시러 갈 거예요. 엄니 아버지 찾았어요.
달래 그래, 그래. 암 찾았고 말고.
여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암전. 철문 열리는 소리)
소리 (어둠속에서) 0000번 면회.
(면회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달래. 주변에 하늘과 세상이 서 있다. 재덕이 천천히 면회실로 들어온다. 본다. 사이. 천천히 다가간다. 포옹. 다시 한오백년 테마가 흐른다.)
재덕 당신 말대로 난 바보야. 시간만 잡아먹어 버린 바보지. 새끼도 못 알아보고 또 10년을 버린 거여.
달래 무슨 소리. 이렇게 멀고 험한 길을 혼자서 용케 찾아온 바보는 세상에 없구먼.
재덕 (달래 얼굴을 만지며) 그 곱던 시절을 누가 다 가져갔누?
달래 우리 정이 너무 깊어 그런 거래요.
여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세상 (위 후렴 중에) 곧 특사가 있을 거랍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울음을 터뜨리고 모두가 포용한다. 암전)
노래 28 : 사랑가
여인들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간주 중 시간이 지났다. 교도소 앞에서 재덕을 기다리는 달래, 세상, 하늘. 철문 열리는 소리. 재덕이 나온다.) 촛불 한 쌍 불 밝혔소. 저 달 아래 불 밝혔소. 정안수라 예 떠왔네. 저 별 아래 예 떠왔네. 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간주 중)
세상 일단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셔야 한답니다.
하늘 당장은 아니구요. 며칠 시간을 얻어놨어요.
달래 어디로 갈까?
재덕 우리 집으로 가야지. (암전)
(옛 고갯길을 나란히 손잡고 걷는 두 사람)
여인들달빛 하나가 허전해도 너무 고운 우리 각시, 너무 고와 눈물 나오. 내 품 작아 눈물이 나오. 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간주 중. 두 사람이 누워 있는 방안이 밝아진다.) 만첩청산 웃는 소리, 우리 신랑 노랫소리, 그 품 안에 난 좋아도 임의 등엔 바람이 시리다. 둥둥 아라리 둥둥 사랑이야 내 사랑이라네.
# 에필로그(사랑)
나란히 누워 있다.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누운 두 사람의 백발과 주름진 얼굴을 부드럽게 어르듯 비추고 있다. 풀벌레소리. 한오백년 전주가 흐른다.
재덕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어.
달래 오느라 험한 꼴 본 임자가 고생했어.
재덕 (사이) 이제 다시는 안 갈 거요!
달래 누가 보내주기나 한대요.
(마주 보고 미소 짓는 두 사람.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언덕 위의 무덤이 보인다. 그 앞의 세상과 하늘, 함께 보인다.)
노래 29 : 한오백년
하늘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남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세상 청춘에 짓밟힌 애끓는 사랑, 눈물을 흘리면서 어디로 가나.
여자들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하늘 살살 바람에 달빛은 밝아도 그리는 마음은 어제나 오늘.
합창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세상 내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정든 임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
합창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졸업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 13~15기 수료
․동랑예술센타 공연미디어아트 전문가과정 연희창작/연출과정 수료.
․한국방송대학 희곡문학상 수상
․연극 <서민귀족>, <섬>, <겨울나무> 외
․창극 <명성황후>, <황진이>, <바우덕이>. 그 외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각색 및 극 연출
당선소감
풀리지 않는 인생의 매듭, 恨
한의 역사와 이념에 묶여 31년 만에 찾아온 납북 어부를 보호도 하지 않고 방치했던 이 나라. 시련과 비극의 옷자락이 운명의 끈을 놓지 않고 매달리는 안타까운 시대를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겪어왔고 아직도 그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한오백년>은 그 한의 노래를 모티브로 강원도 소리를 바탕으로 쓰인 극이다. 반세기만의 귀향, 재회 그리고 또 한 번의 이별, 그 이별을 감당할 길 없어 함께 이승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사연의 극이다. 그들은 험한 세월 속에서도 사랑의 탑을 쌓았고, 그 순애보를 극으로 엮기까지 오랜 시간 재목을 깊은 물속에 침잠시켰다. 이제 수면 위에 띄워보니 향기가 났다. 우리 민족적인 한과 인내의 노래, 그 사랑이 꽃을 피운 것이다.
처음 신인상 당선 전화를 받고 반가움에 앞서 대본을 첫 회 쓰던 순정함이 다시 두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얼마나 책상에 앉기를 미뤘던가? 기웃 기웃 책에 기대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기대고, 매체에 눈을 돌리고 생활에 쫓기고, 사회구조시스템에 좌절하고, 그 많던 시간을 방황하며 보내버린 무던히도 나를 믿지 못하고 절망한 시간들을 반성해 본다.
이제 다시“상처는 새살을 차고 나오리라”는 희망이라는 언어 하나를 가슴의 새겨본다. 모든 詩는 劇을 지향하고 모든 劇은 詩를 지향한다는[T. S. Eliot]의 말처럼 계간 리토피아의 발전을 빈다.-당선자 손영미
심사평
역사와 우리 것에 대한 관심
손영미의 작품은 신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완성도가 높다. 또한 역사에 대한 관심과 우리 전통 민요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기에 충분하다. 당장 공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라는 점에서, 손영미의 작품은 연극과 무대를 잘 아는 사람의 그것이다. 손영미가 앞으로 더욱 분발해서 현장성과 양식미를 발전시킨 극작가로 거듭 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사항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역사와, 한 부부의 만남과 이별을 대입하는 방식이 도식적이라는 점이다. 역사와 사랑의 진행이 같은 굴곡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지만, 보다 다채로운 굴곡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창의적인 사고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노래의 활용에서도 보다 긴장감을 북돋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노래극은 연극에 노래가 삽입되는 양식이라기보다는, 노래가 대사를 대체하며 연극적 이미지를 만드는 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기억하면 더욱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본심 심사위원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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