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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계간평(소설)/이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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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43회 작성일 08-03-01 01:33

본문

|계간평|<소설>

∙박형서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
∙김태용 「풀밭 위의 돼지」


궤변론자의 망상, 아웃사이더의 몽상

이정석|문학평론가


1.
건전한 상식(?)을 지닌 보통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유형의 인간들이 있다. 우선, 자신을 일상의 허위를 뚫고 들어가 진리를 직관한 자로 여기는 부류의 인간이 그렇다. 한 비평가에 의해 ‘아웃사이더’라 명명되어 유명세를 탄 이런 유의 인간은, 일상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을 속물로 치부하며 세상과 유리된 채 자신만의 몽상에 빠져들기를 즐겨 한다. 벽에 난 구멍 사이로 남의 은밀한 사생활이나 엿보는 인간을 누가 제정신 박힌 사람으로 봐줄까 싶지만, 자신을 맹인의 나라에서 홀로 눈 뜬 자라 여기며 아웃사이더는 이렇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나는 너무나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나 많이 본다.”(앙리 바르뷔스, 󰡔지옥󰡕)
보통 사람의 건전한 상식을 혼란에 빠뜨리는 또 한 부류의 인간으로 궤변론자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궤변론자로는 ‘현자(賢者)’라는 점잖은 명칭으로 불리는 소피스트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제논이야말로 궤변론의 대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상한 논리로 자명한 사실마저 의심케 만드는 ‘제논의 역설’이야말로 말 그대로 궤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궤변 탓에 뭇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끝내는 왕에게까지 미움을 사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는 왕의 귀를 물고 늘어졌다는 일화가 전하는 걸 보면, 궤변을 쏟아내던 그의 ‘이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집요하게 진리를 찾아 헤매는 아웃사이더와 진리의 가능성 자체를 희롱하는 궤변론자. 영 딴판인 듯 보이는 이 두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유별난 공통점이 하나 있는 듯하다. 그 기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식의 나라의 시민인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들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렇다면, 상반되는 두 성향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름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기는 “봉발(蓬髮)이 작소(鵲巢)를 이룬 기이한 풍모”(「권태」)의 이상(李箱)이라면 어떨까.
일상적 삶의 국외자로 남아 “권태계급”(「권태」)에 속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날개」)라고 자신을 칭할 때, 이상은 전형적인 아웃사이더다. “그럼―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라는 자문의 해답은 두 갈래 길로 갈린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瞳孔)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忙殺)할 때보다는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省察)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권태」) 반면, “교활한 옵서버”(「종생기(終生記)」)가 되어 무성한 병적 기교로 상식의 문법을 교란하며 “무슨 개수작이냐”는 뭇 독자의 비난을 자초할 때, 그는 한없이 궤변론자에 가까워진다.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위협(威脅)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촉대(燭臺)세음으로내방안에장식(裝飾)하여놓았다.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겁(怯)을내이는것만같다.나는이런얇다란예의(禮儀)를화초분(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오감도 시 제13호」)
지금까지도 묘한 매력을 잃지 않은 봉두난발(蓬頭亂髮)의 자의식으로 충만한 식민지 근대의 불행한 지식인, 이상. 그는 자기 삶에서조차 소외당한 아웃사이더이고, 세상을 향해 냉소로 얼룩진 궤변을 늘어놓으며 희열에 빠지는 궤변론자다. 정녕 그렇다면, 엄숙한 표정의 근대문학이 쇠락하고 발랄한 유희의 문학개념이 출현하고 있는 이 시대의 문학작품에서마저 그의 길지 않은 문학적 발자취가 이어지고 있다는 건, 별스럽지만은 않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2.
벌써 두 권의 소설집을 상재하며 궤변론자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박형서. “현란을 극한 정오”의 사이렌 속에서 허망하게 사그라진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날개」)라는 이상의 간절한 열망은 ‘마침내’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 그 망상의 세계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실현된다.(「날개」) 이미 그의 소설이 “편집증 환자가 만들어낸 얼토당토않은 망상들의 거대한 체계”(김형중, 「소설 이전, 혹은 이후의 소설」)라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이 내려진 바 있거니와, 그와 같은 진단을 내린 비평가는 일말의 개연성도 없이 전통적 소설관념을 마구 허물어뜨리는 박형서의 소설이 소망충족을 바라는 욕망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온몸을 값싼 플라스틱 장기로 이식한 노파였는데, 겉옷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적혀 있었다……(중략)……그녀는 200살이 맞다. 그리고 170년 전인 2005년에는 서른 살이었다. 서른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내가 사는 정릉 풍림아파트의 바로 아래층인 1001호에서 소음성 히스테리를 부리며 살고 있었다. 솔직담백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를 물어 죽이고 싶다. 그녀의 히스테리는 정말 끔찍하다……(중략)……나는 다음주에 있을 내 고양이의 생일 선물로 그녀가 투신자살 해주었으면 딱 좋겠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처럼 온몸의 장기를 바꿔가면서 서기 2203년, 술 취한 부랑자의 이빨에 물려 죽을 때까지 그 개 같은 목숨을 이어간다.”(「날개」, 65~66쪽)
그러니까, 교양머리 없는 인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상상적으로나마 해소하려는 소망이 이 소설을 낳았다는 말이다. 소설의 발생학적 근원이 겨우 그것이냐고 반문한다면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 그건 층간소음이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는 문제인지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유수의 언론매체에 의하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못 말리는 다혈질적 국민성 탓으로 우리와도 곧잘 비교되는 유럽의 반도국가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참지 못한 아랫집 부부가 위층에 사는 두 살 난 젖먹이 아이를 비롯해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하고, 심지어는 사건현장을 목격한 옆집 할머니까지 살해했다가 검거되는 엽기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공산당식 선전선동도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로 탁월하게 구사하는 한국 언론의 ‘믿거나 말거나’식 보도에 의하면 그렇다. 그리고 이 보도를 접하고 살인자들의 끔찍스런 행동이 과하긴 하지만 그 심정만큼은 십분 이해가 간다는 누리꾼들의 반응도 층간소음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망상의 문제는 접어 두고 박형서식 서사가 구축되는 정교한 논리성에 주목해 보자. 사실 망상이라는 개념틀만으로는 정교한 논리로 조작되는 박형서의 소설의 면모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궤변론’의 입장에서 박형서 소설의 진면모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 설 필요가 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이하 「음란성」)는 한국문학의 정전(Cannon)을 해체하는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 “ ‘달걀’에서 시작된 생명에 대한 화학적, 언어적, 원형ㆍ신화적, 생물학적 고찰”에서부터 “성적 상징”(149쪽)의 탐구에 이르기까지, 번뜩이는 창의성에다 웬만한 문학연구자는 찜 쪄 먹는 박학다식이 어우러져 치밀하게 전개되는 논증과정이 돋보인다. 게다가 “남근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 중심적 사고로 옮겨”(150쪽)갈 것을 제안하는 인식론적 패러다임의 주문은 말할 것도 없고, 논문 글쓰기가 갖는 엄격한 형식에 갑갑해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잘난 체와 신랄한 비난은 물론 육두문자까지 섞어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며 씨알도 안 먹힐 법한 주장을 차근차근 합리화하는 모습이 압권이다. 그로부터 도출된 결과도 획기적이어서 “옥희의 집은 평범한 가정이 아니라 한 남성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매음굴이”고,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옥희의 ‘아버지’와 ‘아저씨’는 산수나 국어를 가르치는 평범한 선생이 아니라 성교와 출산, 갱신과 영원을 지도하는 생명의 스승이며, 옥희는 여섯 살이 아니라 그저 젊은 처녀”(164쪽)라는 놀라운 결과를 도출해 낸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한동안 한국문학계를 뒤흔들만한 연구업적이 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정교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친구 몇”(279쪽)을 즐겁게 속이는 데나 적당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만한 독자는 빤히 알고도 남는다. 다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과정은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그가 한국소설사에 있어 최고의 궤변론자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음을 증거 한다.
전작들에 비한다면,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은 궤변이 괴이한 망상으로 치닫는 대신 치밀한 논리를 거쳐 개연성의 세계와 맞닿는다는 점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는 작품이다. 작품의 무대는 「권태」의 배경이 된 시골마을 성천(成川)만큼이나 볼품없고 가난한 마을이다. “네가 살았던 작고 외진 마을은 특징이랄 게 없었다.”(146쪽) “그곳에서 사람들은 닭이나 돼지처럼 그저 태어나고, 밋밋하게 살아가다 조용히 늙어 죽었다.”(같은 쪽) 그렇게 “숨막힐 듯한 적막과 무료함과 외로움”(147쪽)만이 가득한 마을에 내린 폭우가 괴이한 사건의 발생을 촉발한다. “모든 건 저 폭우에서 비롯되었다.”(같은 쪽) “호수 바로 곁에는 본디 벼랑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던 커다란 바위 하나가 굴러 떨어져 있었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겉을 감싸고 있던 얇은 사암층이 벗겨져나가 어른 키 정도의 둥근 화강암만 남았는데, 전체가 은빛 광택을 품은 돌비늘로 덮여 있어 반짝반짝 빛났다. 그 운모바위에는 호수를 등지고 지름이 한뼘쯤 되는 깊은 구멍이 언덕을 향해 나 있었다.”(148쪽) “너와 주민들은 감탄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바위의 비늘은 수면에 반사되거나 나무 이파리 사이로 흘러들어온 일광을 받아 끊임없이 은빛으로 명멸했다. 그건 마치 고통과 간지러움과 배고픔을 느끼는, 독립된 영혼을 가진 존재 같았다.”(같은 쪽) 이 정도면 박형서의 궤변이 펼쳐질 서사적 무대가 제대로 갖추어진 편이다.
이제, 사건이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사건이 터진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호숫가의 운모바위에 난 틈, 그 자그마한 구멍에 낯선 외지 사내가 머리를 처박고는 축 늘어져 있었다.”(같은 쪽) 그리고 또 다시 마을 이장이 바위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기서 과학수사라는 말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기본적 상식을 무시한 엽기적인 시체 수습장면은 궤변의 서사이기 때문이거니 하고 그냥 눈감아 주자. “어떻게 된 걸까? 그들은 왜 거기 그처럼 머리를 처박고 죽어야 했던 걸까? 도대체 누가, 왜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인 걸까?”(159쪽) 하는 의문도 자연히 밝혀질 테니 일단 덮어두자. 대신, 박형서 소설의 매우 중요한 덕목 하나를 지적하고 넘어 가자. “어떠한 인간도 진심으로 타인의 불행을 바라지는 않는다. 미물조차 동족이 폭우로 떠내려가면 슬퍼한다. 하지만 이방인의 죽음으로 인해 네가 살았던 마을은 이제 막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듯 활기를 띠었다. 주민들이 그걸 즐겼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눈엔 별반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151쪽) 그렇다. 알쏭달쏭한 이 문장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못된 본성을 은근히 비꼬고 있는 중이다. 그 진수를 더 맛보려면 인간의 야비한 승부근성을 희화화한 「논쟁의 기술」을 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엄숙주의적 가치와 규범을 전복하려는 시도로 시끌벅적 했던 장정일만 하더라도 「아담이 눈뜰 때」에서 볼 수 있듯이, 도덕적 회개와 순치된 성장으로 마무리되는 ‘착한 문학’의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면, 어느덧 한국문학도 도덕주의의 완강한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집요한 탐색의 도정에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걸 도덕적이고 희망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선량한 희망과 투쟁해야 한다. 그 싸움에서 승리할 때 비로소 이 작품이 품은 강렬한 어둠이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며, 세계의 명암은 보다 확고히 구분지어질 것이다.”(「음란성」, 164쪽)
이제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의 주인공이자 마지막 희생자 ‘너’의 행적을 더듬어 볼 차례다. “너는 늘 도망을 꿈꿔왔다……(중략)……마을을 그토록 증오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저 끔찍한 무료함 때문이었다. 두 통의 벌을 치고, 마당의 채소를 가꾸고, 콩밭의 김을 매는 일은 영원히 반복되는 따분한 형벌 같았다.”(159쪽) 그러므로 ‘너’는 괴이한 죽음이 불러 온 흥분과 활기를 뒤로하고 또 다시 “저 느슨하고 맥빠진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153쪽) 그러나 ‘너’ 역시도 “나른한 일상과 곤한 휴식에서 깨어난 우리, 마을 한구석에서 너처럼 무료하게 살아가던 땅벌들”(160쪽)에 쫓겨 호수로 내달리다, 어둠 속 돌비늘의 반짝임을 물결의 일렁임으로 착각하고 바위구멍 속으로 “불운한 도약”(146쪽)을 하게 된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너는 아찔한 어둠에 갇혔다……(중략)……
놀랍게도 너는, 그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힌 너는 탄성을 지르려 했다. 두 죽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내었다는 생각에 격렬한 환희를 느꼈던 것이다. 입과 턱이 구멍 안쪽에 뻑뻑하게 물려 있고 또 부풀어오른 목 때문에 아무 소리도 새나오지 않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모든 걸 척척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자꾸 탄성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너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너는 네가 알아낸 비밀을 영원히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처지였다. 저 두 사람을 죽인 건 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가 아니었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 161~162쪽

드디어 모든 것이 밝혀졌다. 교묘한 복선을 깔고 전개되는 치밀한 서사의 도정을 거쳐 현실적으로 납득이 갈만한 사건의 전후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은 서사적 개연성과 무관하게 괴이한 사건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궤변에 그치지 않고 경험적 현실세계에도 부합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도약한다. 그러나 우리의 불운한 주인공 이상으로 “상식적이고 이성적”(156쪽)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급해도 바위를 물로 착각할 수 있을까? 지름이 한 뼘밖에 되지 않는 구멍에 사람의 머리가 들어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을 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도대체 이 작품이 뭘 의미하는 거냐고 따지지는 말자. 작가에게 “촌스런 놈”이라는 면박이나 받기 딱 알맞다. 그럼에도 급박한 경황 중이니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에 만족하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은 못되니, 면박을 감수하며 이런 설명을 덧붙이면 어떨까.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욕망의 응시는 객관적 시선이 인지 못하는 대상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인식논리상 현실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욕망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으슥한 야밤에 고개를 넘다 맞닥뜨린 도깨비와 밤새 씨름을 했는데 아침에 보니 피 묻은 빗자루였다 식의 이야기도, 객관적 합리의 차원을 떠나 욕망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그리 황당한 이야기만도 아닌 것이다. 경험적 현실의 세계에서는 궤변으로 여겨지는 것이 욕망의 세계에서는 진실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욕망의 차원에서는 은빛 비늘로 덮인 바위를 물결의 일렁임으로 알고 그 구멍 속으로 머리를 처박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체의 결여를 메워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그 구멍이 오히려 주체의 근본적 결핍을 드러내는 지점이라는 때늦은 자각이 안타까울 뿐. 살고자 하는 의지를 배반하는 죽음충동이 안쓰러울 뿐…….

3.
스스로를 삶의 무의미와 세계의 부조리를 감득(感得)한 자,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날」)은 현실 속에서 저 혼자 깨어 그 아픔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로 여긴다는 점에서, 김태용의 인물들은 아웃사이더의 후예다. 그들은 대개의 아웃사이더가 그렇듯, 겨우 존재하는 자라는 자의식으로 가득 차서 자신을 이렇게 규정한다.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부재하는 것은 아닌,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세계의 문학》, 2005 봄호, 177쪽) 그러니까, 그들은 일말의 방어기제도 없이 너무나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다가 자기애의 부족으로 우울증에 걸린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은 때때로 그들로 하여금 세상이 자신을 밀쳐낸다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그 순간 너는 세계가 너를 문 밖으로 밀어내고, 너는 결코 세계의 문을 열 수 없음을 깨달았다.(「궤적」,《문학ㆍ판》, 2005 겨울호, 106쪽) 그럴 때면 그들은 차라리 세상의 밖에서 “아무런 구속 없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고 싶”(「중력은 고마워」,《작가세계》, 2006 가을호, 245쪽)어 한다. “너는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끝에 앉아서 너는 오래도록 지상의 바닥을 응시했다.”(「궤적」, 113쪽) 하지만 그들이 부조리한 세상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서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들은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사람처럼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나른한 권태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인생은 지루한 것./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도착한 곳에 있어도/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고./인생은 지루한 것.”(「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 182쪽) 권태가 근대 도시인의 질환이라는 걸 감안하면, 한적한 시골마을보다 현대도시에 갇혀 있는 그들이 권태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 이상한 것도 없다.
김태영의 인물들은 우울과 권태가 숨막히게 그를 조여올 때면 부르조아 사회의 일상을 조롱하는 은밀한 도발을 감행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뫼르소처럼 낯선 여인과 섹스를 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집으로 기어들거나(「궤적」), “아버지를 납골당에 안치시킨 뒤 화장실로 가 뼛가루가 묻어 있는 장갑을 낀 채로 수음”(「검은 태양」,《문예중앙》, 2006 봄호, 216쪽)을 즐기는 위악(僞惡)을 행한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와 방식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궤적」, 109쪽)는 훈계조의 말이 그들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오히려 그러한 반응과 마주치면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소위 문명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 예의와 상식이라고 것들을 위반함으로써 거기서 은밀한 쾌감을 맛보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이쯤 되면, 김태용의 인물 역시도 “실존주의가 인생을 공포물로 취급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태용의 신작 「풀밭 위의 돼지」는 우울과 권태에 빠진 자의 몽상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부조리극이라고 칭할 만하다. 평생 장사꾼 소리를 들으며 비굴하게 번 돈으로 자식을 철학과 교수로 키워내고, 이제는 은퇴해서 한가하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 그 ‘나’의 하루 일과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죽을 각오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256쪽)는 몽상이다. “나의 생각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생각일 뿐이고 생각의 실체는 없다. 오로지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동하는 생각의 우스꽝스러운 궤적만 있을 뿐이다.”(255쪽) 존재론적 무기력과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적의가 뒤엉켜 있는 듯한 그 사념 내지 몽상의 요체는 자신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하면서 근근이 삶을 지탱”(256쪽)해 왔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적 숙명에 과감히 맞서지도 그렇다고 그에 순응하지도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평생을 살아 온 것이다. 이는 임신을 시켰으니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여자의 거짓말에 속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은 ‘나’가 세대론적 유전에 강한 혐오감을 갖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때 “어느 순간 아들에게 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라고 선포할 날을 미루고 미루며 이 지경에 이른 것이”(261쪽)라는 발설 못한 내면의식에서 엿보이는 친밀한 관계 맺기에 대한 거부 의지는 김태용의 종전 작품에서 익히 보아 온 바다.
「풀밭 위의 돼지」에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점은 유희의 충동이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돼지의 퀠, 소리를 듣고 나 역시 퀠퀠퀠,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 돼지는 소주병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249쪽) “몇 번 그런 과정이 반복되자 이제 습관이 된 놀이가 되었다.”(250쪽)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손자처럼 볼펜으로 주름의 선을 따라 낙서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퀠퀠, 거리며 웃었다.”(252쪽)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자며 이불을 아주 세게 펄럭였다. 아이의 몸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솟아올랐다. 다음 순간 나는 이불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이의 몸이 이불에 닿아 미끄러지면서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257쪽) 사실 이 텍스트 전체가 하나의 유희적 언술의 집적체로 간주한다면, 실체 없는 생각의 궤적까지도 일종의 놀이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풀밭 위에서 몸을 굴린다. 한 바퀴 돌아 나의 자세는 그대로다. 좀더 세게 굴린다. 두 바퀴 돌아 나의 자세는 다시 그대로다. 어느 순간 저편으로 굴러갔던 내 몸은 다시 이편으로 굴러온다. 멈추려고 하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 내 몸을 굴리고 있다. 풀밭을 벗어나고 싶으나 풀밭 밖에서 누군가 막아서고 있다. 그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 존재는 실체가 없어졌다. 오로지 거부할 수 없는 힘만 남았다. 내 몸을 굴리고 있는 이상한 힘에 저항하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떨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항문이 오므라들었다가 열리면서 한 무더기의 물컹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지금 풀밭에 누워 있다. 몸 밖으로 빠져 나간 똥물이 다시 온몸에 파장을 일으키며 몸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더럽혀질 대로 더렵혀진 풀밭 위에 누워 발목의 흉터를 더듬는다. 멀고도 가까운 거리에서 퀠퀠, 거리는 돼지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있다.(265쪽)

몽상의 끝에 가로놓인 이 ‘풀밭 위의 인간 돼지’라는 희극적 상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철없는 늙은 아이’가 벌이는 실체 없는 사념의 장난을 거듭하면서 인간 내부의 동물성이라는 “저 불가항력의 자연”(255쪽)이 지닌 압도적 힘을 드러내려는 것일까. 아무튼 블랙유머가 섞인 ‘장난’은 단순한 유희에 그치지 않고 상식의 통념을 교란하는 ‘작란(作亂)’으로 치달으려는 조짐마저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통각(痛覺)이 없는데 제 몸에 고통이 가해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265쪽) 관념적 존재가 김태용의 인물들이라면, 그럼에도 허무감을 넘어 생명감의 고양을 맛보기 원하는 것이 그들이라면, “나는 정신도 감정도 아닌 육체를 통해 통찰한다”(니진스키,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는 몸의 절규를 다시 한번 감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이 계절, 나아가 이 시대의 문학은 문명과 본능의 딜레마적 관계를 근원에서부터 되돌아보게 하는 데가 있다. 문명이 본능의 억압에 기초한다는 프로이트의 명제는 보편적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그 명제와 달리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외침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프로이트의 충실한 계승자 마르쿠제는 일정한 억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문명의 유지와 무관하게 인간사회에 덧씌워진 과잉억압의 철폐를 주장한다. 보다 성숙한 문명에서는 불필요한 억압들을 폐기하고 본능의 만족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한편, 프로이트의 파문 당한 제자 라이히는 아예 모든 본능의 해방을 주창하며 스승의 보수적 견해를 일소에 부친다. 억압이 권위주의에의 맹종과 사회적 병폐를 낳으니, 도리어 문명사회에 필요한 것은 창조적 삶의 에너지로서의 본능의 해방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또한, 문명의 이단아 사드는 아예 ‘쾌락원칙’을 문명사회의 기본 덕목으로 프랑스 인권선언에 포함시키려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그에 덧붙여,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는 말은 얼마만큼 진실일까. 인간해방을 역설함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계몽의 열정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본능의 억압을 초래하기도 한 것이 근대문학이지 않을까. 이를 감안한다면, 재미와 유희를 추종하는 문학의 비상은 엄숙주의에 짓눌린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의 풍경이기에 앞서 ‘근대문학의 완성’을 위한 힘찬 날개짓으로 환영해야 마땅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유희적 문학의 득세는 상대적으로 현실의 모순과 존재의 고통에 민감한 문학의 쇠퇴와 맞물린 현상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우려를 낳기도 한다. 본능의 해방이 인간해방으로 이어지지 않고 되레 방종과 성의 상품화현상을 낳는 현실을 목도하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마르쿠제의 경우처럼, 재미와 유희를 추종하는 문학이 인간해방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깊은 실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우려를 우려에 그치게 하기 위해서 본격문학은 언제나 재미 이상의 그 무언가를 갖추어야 한다. 재미와 유희야 굳이 본격소설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지 않은가. 문학이 진지해야 한다는 편견만큼이나, ‘야설’까지를 포함한 수많은 대중서사를 내버려두고 굳이 문학에서 재미를 찾아야 한다는 태도도 어불성설이다. 유희의 문학을 옹호하는 작가는 독자에게 재미를 주는 것에 더해 왜 대중서사가 아닌 본격문학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까지도 내어놓아야 한다. 이는 비평가에게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멋진 문학 작품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편협한 해석만이 유령처럼 배회할 때 작가가 느끼는 고통은 가늠하기 어렵다. 정확한 의도를 짚어내는 것이 힘들다면 가능한 한 다양한 담론을 생산해야 할 필요성이 그래서 존재한다.(「음란성」, 135쪽)󰡓맞는 말인 듯싶다. 어떤 비평적 언설보다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담긴 발언이고,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비평적 담론이 개진되며 그 요구에 부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늘의 비평이다. 그러나 오늘의 비평은 다양한 비평담론이 비평 자체의 무능을 감추는 교묘한 방어기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심각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다원주의 자체가 첨예한 현실의 모순을 감추는 지배문화의 또 다른 방어기제에 불과한 것일 수 있으니…….



이정석․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숭실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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