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5호 계간평(시)/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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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최동호 「명륜동 죽림거사를 찾아서」
∙김혜순 「처녀들」
∙김 근 「어깨들」
∙김경주, 「구운몽(九雲夢)」
∙박해람, 「육손이」
∙권혁웅, 「눈사람-젖가슴․3」
∙장종권, 「저녁의 생각․3」
만루 홈런을 꿈꾸는 타자수처럼 그들은 차례로 방망이를 휘둘렀고, 쓰러졌다. 생의 비의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객석 위의 관객들은 우우우우- 야유를 외치고 흩어졌으며, 맵집 좋던 선수는 현란한 VIP 위너 클럽들의 간판이 우후죽순 생겨나자 종적을 감추었다. 만루 홈런을 꿈꾸었던 타자수의 단단한 방망이는 기억할까, 사라진 타자의 지문들.
주체의 시민권을 버리고 사라진 타자들, 그러나 이 오래된 타자들은 가난한 주체의 욕망 속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매장당한 신석기 시대의 미라처럼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매파도 없는데 빙하기의 시간 속에서도 실종된 타자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왔던 것이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공소시효가 지난 어린이 유괴사건과 여대생 실종 사건, 연일 계속되는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으며, 나이지리아의 검은 천사와 인도네시아의 어린 노예들이 죽어가는 밤. 어느새 생은 프로그래시브 작별의 노래들로 가득 차 어떤 지상의 노래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캄캄한 밤.
1. 오래된 수염-무림 고수를 찾아서
영화 동방불패였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무술을 연마하고도 무림을 떠나려는 고수와 고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스승의 대화는 박상륭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도승 유리처럼 스케일 면에서 내게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룡 발자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때 내 왼쪽 어깨를 관통한 필을 다시 재연하기는 힘들겠으나 스승의 말을 잠시 미천한 입으로 빌려보면 ‘사람이야말로 무림이라는 것’.
시 「명륜동 죽전거사를 찾아서」를 읽다가 문득, 오래된 무협 영화의 고수가, 죽전동에서 은자처럼 산다는 고수의 얼굴이 일백 나한의 허기진 배고픔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설악산에서 한 거사가 내려왔다고 하여갔더니
그는 홀로 문 앞에서
떨어진 감잎을 쓸고 있었다
대숲 그윽한 원각 정자에 앉아 녹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우리는 먼 옛날 당대의 죽림거사였다
가끔 감나무에서 우는
까치 소리 곁들이니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것일 터이라
주인이 애써 권하는 붉은 감을 반으로 나누어
허기진 배를 달래니
명륜동의 이 은자야말로
왜 그렇게 분주했나고 가만히 묻고 있었다.
―최동호, 「명륜동 죽림거사를 찾아서」(《시와 세계》, 2006 겨울호)
이 시에서 소란스런 세상을 피해 살아가는 은자는 어쩌면 생의 비의를 모두 관통한 생의 고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에서 생의 고수는 절대 생의 달인인 척 하지 않는다. 그는 손님을 환대하는 ‘까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세상살이의 외로움과 ‘분주’한 세상 속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는 시적 자아의 심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즉 ‘먼 옛날 당대의 죽림거사’로서 두 사람의 만남은 허기진 세상과 외로운 세상을 한데 아울러 조우하는 것이다. 어린 애들이 하는 시시한 땅따먹기가 아니라, 상상 공간이 무한대로 커지는 스펙타클한 광경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무림 고수들의 발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중 부양 속에서 그들은 ‘먼 옛날 당대’의 시간과 ‘설악산’, ‘명륜동’의 공간을 지나쳐 ‘붉은 감’을 ‘반으로 나누어’ 먹었을 뿐인데 일상적 시·공간을 넘어 상상적 시·공간의 조우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붉은 감’을 반으로 나누는 무림 고수의 칼의 기술을 나는 보지 못했다. 칼을 쥐었다고 칼을 겨누다 제 살을 베이는 비극적인 검객의 희극적인 칼솜씨도 좋지만, 가르지 않으면서 횡단면과 종단면을 가로지르는 무림 고수의 칼의 기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과 맞지 않는다하여 행여 숨은 뜻이 좌절된다하여 필살기로 복수의 칼날을 갈거나 세상을 등지고 미친 척 광인 흉내를 내이는 검객들에게 숨어사는 은자의 무한한 환대의 기술이 반가운 것은 자칫 현란한 검의 기술에 눈이 멀어 버린 검객들이 많아서일까. 단 한 편 무협 영화를 본 너스레치곤 너무 많이 아는 체 떠들어대었으니 이제 장광 잡설은 여기서 그만두도록 한다.
그럼에도 이 오래고 반가운 타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꼿꼿한 정신의 사유 속에서 제련된 빛나는 결기의 사유도 아니고, 주체의 유혹에 도취된 먹빛 바다도 아니니 오래된 수염이라고 그만 불러본다. 내게도 그런 외할아버지가 있었다. 일정 때 한의사를 하며 백구두에 흰색 양복을 입고 일본 순사에게 잡혀간 마을 사람들을 구명하다가 폐병으로 죽었다는 오래된 수염 할아버지.
캄캄한 밤의 풍경 속에서 오래된 수염이 빛난다. 은자는 죽지 않았다. 스필버그의 거대한 공룡발자국처럼 은자는 아직도 살아있다.
2. 처녀 엄마를 낳아줘
-애기를 낳았는데도 보존되어 마치 시트처럼 붙어 있는 처녀성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처녀들이 소풍을 가네
처녀들의 옷 속엔 납작한 거품 같은 레이스 꽃 피어있고
검은 스타킹 속엔 작은 진주 같은 소름들 촘촘히 돋아 있네
하얀 목면 잠옷을 입고
구름 망사모기장 아래
하얀 달빛 받으며 잠들어 있는
처녀 365명
눈 감고 생각해봐 백만 년 전에 잠든 화산도 침 흘리는
하얀 숨결 365개
처녀들이 소풍을 가네
한번 웃을 때마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번쩍이는 머릿결
깔깔거리는 소리를 따라서 터져나오는 겨드랑이의 솜털들
산들바람에 사과처럼 볼록거리는 뒤통수들
그러나 그 처녀들의 발밑에서 남몰래 뭉개지는
아기천사들의 빛나는 살덩이들
처녀들의 침대 옆에는 한밤 내 눈 뜨고 있는 비린 거울 하나씩
새벽빛에 눈 뜨자 마자 달려가 달아오른 제 얼굴을 올리고
긴 머리칼 빗어내리며 경배하는 365개의 제단들
세 명에 한 명 꼴로 피 묻은 아랫도리를 품고
잠옷 속에서 비린내 뿜어 올리는 365명의 만신들
나 늘 만나지만 늘 헤어지는 그녀
나 늘 만지지만 늘 숨겨놓은 그녀
나 늘 혼자 냄새 맡지만 어디에도 없는 그녀
이봐 하고 부르면 지금도 금방 돌아보지만
얼굴이 없는 그 이름
처녀들이 소풍을 가네
쏟아진 도시락 속에는 개미떼 가득 차고
우거진 숲은 너무 험해 그 속에 웅크린 백사 홍사 독사
멀리 가면 안 돼 엄마하고 약속했잖아
태어나자마자부터 몇백 년째 그 처녀들 기다린 나무들
그들이 음흉하게 뻗어 올린 기다란 손길들
경찰을 보내봐도 소용없고
카메라기자를 보내봐도 소용없어
처녀들의 소지품 냄새 아무리 맡아봐도 소용없어
실종된 처녀는 찾을 수 없어
엄마 잃은 사슴을 그냥 내버려두는 숲은 없어
눈 감고 상상해봐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365개의 희디힌 침대
지나간 순간, 순간의 유령들이 먼지처럼 떠도는 기숙사
발가벗은 밤만이 몇 천 바퀴째 돌고 있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운동장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기숙사, 그 침대
나 혼자 싸늘한 침대에 누워 소풍 간 처녀들 기다리네
―김혜순, 「처녀들」,《현대문학》, 2006 11월호
배고픈 일백 나한의 허기를 간신히 면하고 돌아오다가 ‘365명의 만신들’을 만난다. 이 시의 자아 속에는 ‘늘 만나지만 늘 헤어지는’ 365명의 오래된 처녀가 있고 이 365명의 처녀들은 ‘실종된 처녀’의 행방을 수소문중이다. 처녀성을 위협하는 풍경 속에서 경찰과 기자가 속수무책으로 ‘실종된 처녀’의 행방을 찾지만 실종된 처녀를 끝내 찾아낼 수 없다. ‘실종된 처녀’를 기다리는 동안 ‘365개의 제단’ 위에 ‘365명의 만신들’ 속에서 시적 자아는 세상의 어떠한 위협에도 훼손될 수 없는 오래된 처녀성을 기원한다.
나는 ‘365개의 제단’ 위에 있는 ‘365명의 만신들’을 365명의 우굴우굴한 처녀 엄마로 불러본다. 그런데 이 시에서 어머니의 계보에도 없는 처녀 엄마가 태어나게 된 것은 ‘실종된 처녀’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종된 처녀’가 처녀 엄마를 낳은 셈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처럼 상실과 소멸의 파토스-‘엄마 잃은 사슴’- 속에서 상실의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신성한 타자로서 처녀 엄마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 처녀 엄마의 탄생은 ‘실종된 처녀’를 기다리는 동안 ‘실종된 처녀’의 상황을 ‘소풍 간 처녀’의 상황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처녀성이 결코 유린되거나 훼손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365명의 우글우글한 처녀엄마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징그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처녀성이 유린당하는 고통이 이 우글우글한 365명의 처녀엄마에 의해 해소된다는 것은 시 적 상상 속에서 상상적 타자를 불러냄으로써 고통을 상쇄시키는 힘을 갖는다.
처녀 엄마를 낳은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자아와의 합일을 꿈꾸며 남성 타자를 기다리느라 목을 늘어뜨린 전통적인 여성성과는 거리가 멀다. 상상적 타자를 통해 새로운 주체로서 변신하는 그의 시는 그래서 늘 재기발랄하다. 처녀 엄마를 낳는 힘. 고통의 파토스 속에서 그의 시는 상상적 타자를 통해 생의 고통 속에서 고통을 상쇄하는 모성적인 기원으로서의 시를 보여준다.
오래된 분만의 고통 속에서 태어난 그의 시 아가는 한국 현대시의 전통 속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획득한다. 서둘러 앳된 감각을 분만하는 시와는 달리 그의 시가 단단한 깊이를 획득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365명의 처녀 엄마를 낳은 시인을 생각하다가 나는 그의 시가 상상할 수 없이 아주 오래 아팠을 거라 가늠해본다. 치명적이다 못해 먹먹했던 고통의 멍울들에 대해 그의 시는 오래 고통의 기억을 껴안고 타인의 그것마저 보듬어야 했을 것이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오래 고통 속에서 분만했을 것이다.
3. 층층 계단에서 만난 차력사
그는 어깨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층층이 그의 몸에 얹혀 있었다던 수많은 어깨들
별빛이 그의 어깨에 오는 동안
몇 백만 광년쯤 그는 그 모든 어깨들이 차례로 걸렸다는데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깨들 위를 자박거리던 차가운 발들
사금파리 같은 웃음 깨뜨리던
아이들의 우당탕 소리
이미 없지만 있는 것 같은
어깨들, 어깨들의 조금씩 마모되던 모서리들
층층이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고 허공으로 어깨들이
문득 사라졌다고 말하는 그의 말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고
실은 죽었으나 산 것처럼 마치 똑 그렇게
한 번도 계단이 아니었다고
다만 결린 어깨들을 얹고 지나온 삶 혹은 죽음이었다고
오직 어깨 하나를 늘어뜨리고 그가 내 발밑에서 중얼거렸다
―김근, 「어깨들」,《현대문학》, 2006, 12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무시무시한 괴력의 차력사는 아니더라도, 이 시에서 ‘결린 어깨들을 얹고’ 살아온 차력사는 제 삶을 ‘실은 죽었으나 산 것처럼’ 지나왔다고 말한다.
‘어깨들’을 얹고 살아가는 삶, ‘어깨들 위로 자박거리던 차가운 발’과 ‘사금파리 같은 웃음’을 기억하는 그의 삶의 ‘어깨’가 층층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어깨들’을 얹고 살아온 고단한 어깨로서의 삶의 무게는 고스란히 그것을 지켜보던 자의 어깨 위에 얹혀 진다. ‘오직 어깨 하나를 늘어뜨리고 그가 내 발밑에서 중얼’거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깨들을 얹고 지내온 사내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시적 자아의 어깨에 얹혀지면서 시적 자아는 숙명처럼 차력사로서의 삶을 예감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또 ‘사라진 어깨들’을 짊어지기 위해 사라진 어깨들의 흔적을 찾아 방황할 것이다. 사라진 타자의 지문들을 찾아 그는 한 세기, 삶 혹은 죽음 같은 삶을 어깨들을 짊어진 자로서 유리하게 될 것이다.
오래 전 미당의 시에서 나는 자의식 속에 숨어든 부채(負債) 의식으로서 삶을 들여다 본 일이 있다. 어찌 미당뿐이랴,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평생 김춘수 시인은 의미와 무의미를 횡단하였으니 그의 시를 역사에 대한 고단한 부채의식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각의 주체화를 내세우는 요즘 젊은 시의 현장에서 누군가는 타자 지향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물며 부채 의식이야 더 말할 수 있을까마는 역사에 대한 책임과 자유에 대한 연대감, 근대 시민과 주체되기와 같은 부채 의식이 사라진 곳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타자의 삶에 대한 후채(後債) 의식이 있어 끝끝내 젊은 시인의 어깨를 사로잡는 것은 아닌가.
고단했던 세월의 어깨들은 사라졌지만, 시는 어깨들에게서 어깨들에게로 유전되는 고단한 생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일인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어깨들을 들어 올리는 고단한 차력사들이 태어나는 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고단하고 아름다운 생의 여정이 시작되는 밤. 누군가의 어깨를 짊어지고 층층 계단을 오르는 차력사의 뒷모습이 그리운 밤이다.
4. 취생몽사
1.
도공이 헛간에서 톡톡톡 돌을 깍는 소리 들려옵니다 정이 돌 속에서 하
나의 눈을 파내다가 다른 하나의 눈으로 정을 옮깁니다 정이 돌 속에서
눈 하나를 꺼내는 소리 달까지 열렸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꿈꾸는 소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꿈꾸는 사람이 돌에 누
워 자다가, 저도 몰래 돌 위에 흘린 눈물이라고도 부릅니다 길에 누운 돌
로, 길이 스미는 사이라고 저 혼자 부르기도 합니다
물속에 어두운 체온을 흩뿌뿌려놓고 가는 둥근 고기들의 저녁입니다 도
공이 돌을 깎아낼 때마다 돌에서 눈보라가 흘러나옵니다
도공이 만들다 만 그녀의 무릎으로 초가의 빗물이 떨어집니다 무릎은
둥글어서 오래 걸렸습니다 바람이 땅밑에서 새소리보다 엷어지고 한기를
모은 나무들이
가…… ……아……아……같…이……이……
사……아……아……알……자……
정을 내려놓고 도공은 붉은 술을 끓이며 젖은 볏집에 숨긴 새들의 심장
을 뜯어먹습니다
2.
밤비가 가장 늦게 사람의 눈을 만나면 그것은 가장 이른 눈(雪)이 됩니다
가장 늦게 공기로 돌아가시는 비가 가장 희미한 그늘로 땅에 스밉니다
가장 낮은 산에서 가장 늦게 알을 낳은 새들은 세월이었습니다
돌이 된 그녀의 무릎에 도공은 머리를 베고 잠이 듭니다 문 밖은 세월이
고 문안은 저토록 눈보라인데 삶은 꿈이 날아가 달아나지 않게 돌 하나
꿈에 올려놓는 일입니다
잠든 도공의 입 밖으로 돌가루가 조금씩 흘러나옵니다
사랑은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여백이어서 돌망치가 손에서 지금 툭 떨
어지는 것입니다.
―김경주, 「구운몽(九雲夢)」,《창작과 비평》, 2006, 겨울호
‘취생몽사’라는 술이 있었다. 과거의 모든 고통스런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술. ‘우리는 그것을 꿈꾸는 소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꿈꾸는 사람이 돌에 누워 자다가, 저도 몰래 돌 위에 흘린 눈물이라고도 부릅니다’라는 김경주의 시를 읽으며 꿈꾸는 소리에 취한 도공의 노래 속에서 취생몽사의 취기를 듣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조각하고 ‘돌이 된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든 도공의 꿈. ‘문 밖은 세월이고 문안은 저토록 눈보라인데 삶은 꿈이 날아가 달아나지 않게 돌 하나 꿈에 올려놓은 일입니다’라는 것은 취생몽사의 취기처럼 삶과 죽음,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물렁해지는 순간을 노래한다. ‘돌이 된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든 도공의 입 속에서 ‘돌가루’가 흘러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여백’이라니. 이때 ‘여백’이라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기호화될 수 없는 것이기에 여백으로 남는다. 사랑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지는 여백 같은 것이어서, 돌망치를 잡은 도공과 ‘돌이 된 그녀’ 사이의 경계가 한순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사랑은 의미한가, 무의미인가. 쉽게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재단하지 않으면서 여백 속에서 사랑을 부여잡으려는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주체 욕망을 포기하고 타자와의 합일을 지향한다. ‘가…… ……아…… ……같……이……이…… 사……아……아……알……자……’라는 메아리 같은 소리만이 남는 것은 타자와의 합일을 염원하는 자아의 소망과 그 아스라한 자아의 소멸에서 비로소 사랑이 발원하기 때문이리라.
비록 현실에서 이러한 상상이 한낱 허무한 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시인이 ‘구운몽’에 취하는 것은 자아와 타자와의 경계를 허물고 소멸 속에서 합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때 타자의 기호는 기호화될 수 없는 사랑의 여백 속에서 영원하다. 불멸의 타자가 태어난 곳도 여백의 한 귀퉁이쯤이지 않을까 싶다.
‘붉은 술’을 끓이듯 생의 허무와 죽음의 취기 속에서 도공은 사랑에 취해 ‘돌이 된 그녀’의 무릎을 베고 사라진다. 주체 욕망의 현시 속에서 제 몸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사처럼 감쪽같이 자아의 자취를 사라지게 하는 것. 이 매혹적인 도취 속에서 플라톤의 경고처럼 시는 위험하고 음험하면서 비밀스런 밀교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매혹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상상 공간의 마술 속에서 ‘구운몽’은 ‘여백’ 속으로 사라진 그대의 다른 이름이리라.
5. 나의 여섯 번째 손가락-거짓말하는 영원한 애인에게
나뭇잎 한 장을 살짝 올려놓고 그것을 내쪽으로 뒤집는데 나는 가만히
당신 손을 내려다보았지요. 늘 당신 근처에서 말을 매어놓고 극과 극을 왕
래하는 풀들을 뜯게 했고요.
그런데 어제는 당신이 큰 도시를 다녀오고 엄지 옆에 있던 푸른 약속이
사라져 버렸군요. 살짝 바람이 둥근 액자 속을 넘나들며 스스스 그 풍경들
을 덮고 말았지만, 당신의 그 여분의 약속을 믿었던 건 아니지만 덧나지 말
라며 고개를 돌리는 약까지 먹었군요.
약속이란 늘 앞에서 기다린다지요
그러다 먼저 간 당신이 약속 앞에서 기다려줄 때
그래서 늦게 도착한 나와 만날 때
그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진 것이라지요
모소족 처녀가 나뭇잎을 뒤집어
너무 가벼운 이별을 말하고
괜찮아, 나뭇잎은 아직도 많으니까, 노래를 불렀지요
나는 밤새 울음으로 반주를 하다가
깨끗해진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가
떨어져 나간 당신의 여섯 번째 손가락에 붙어있던 것들을 생각했지요
늘 여분의 약속이 더 있어 좋았던 당신
이제는 그 손가락으로 거짓말을 세고 있군요
참 예쁘게 팔랑거리면서 말이죠.
―박해람, 「육손이」,《문학사상》, 2006, 12월호
이 시는 ‘육손이’라는 기형적인 신체를 통해 부재하는 타자와의 사랑을 확인한다. 사라진 몸의 기호를 통해 시 「육손이」는 문명의 현실에서 부재하는 타자를 불러내 사랑의 속성을 확인하고 배신이라는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사랑과 증오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해소한다.
여섯 번째 손가락을 지닌 ‘모소족 처녀’는 ‘큰 도시를 다녀오고’ 여섯 번째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던 사랑의 기억을 깨끗이 잊는다. 그러나 처녀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통해 ‘여분의 약속’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청년은 ‘깨끗해진’ 모소족 처녀의 손, 즉 정상인이 된 처녀의 손을 잡아 보지만 이제 그녀의 손은 예전처럼 ‘여분의 약속’을 간직한 손이 아니다. 이제 그녀의 정상적인 다섯 손가락은 ‘예쁘게 팔랑거리면서’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세는 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 자아인 청년은 정상인의 손을 가진 모소족 처녀를 보면서 그녀의 배반을 원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여섯 번째 손가락이라는 그녀의 기형적인 손을 사랑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은 상징계의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김경주의 시에 등장하는 ‘여백’과 같은 것이어서 다섯 손가락의 현실 속에서 사랑은 여섯 번째 손가락과 같이 기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근대 주체의 탄생 이후, 흔히 타자는 야만인과 괴물 같은 것으로 표상되었는데 이 시에서 비문명권을 상징하는 모소족 처녀가 ‘큰 도시’를 경험한 이후 여섯 번째 손가락을 절단하는 행위는 문명으로 표상되는 주체 욕망에 의해 거세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의미한다.
사랑이나 꿈, 인간의 연대에 대한 희망은 주체의 탄생 이후, 주체 욕망에 의해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쉽게 변질되어 버린다. 더구나 교환의 원리를 내세운 자본주의 속에서 모든 가치의 척도는 교환의 원리에 의해 이해된다.
교환될 수 없는 고통과 같은 것은 합리적인 세계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정서인 사랑은 욕망의 교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에서 모소족 처녀에 대한 청년의 고집스런 사랑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이 문명의 이성적 사고로는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의 세계 속에서 무조건적인 믿음이나 희생과 같은 사랑의 속성은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모소족 처녀의 ‘팔랑거리는 예쁜 손가락’에서 청년이 절망을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섯 번째 손가락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그는 문명 속에서 부재하는 것을 사랑하는 광인에 가깝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처럼 이러한 청년의 지순한 사랑은 병인에 가까운 고통을 가진 것으로, 합리적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실제로 시인은 여섯 번째 손가락을 가진 모소족 처녀를 사랑했으나 그녀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후, 모소족 청년의 자살 사건을 보고 이 시를 썼다고 한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러한 사랑은 도파민이라는 일종의 호르몬 역할을 하는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에 의해 설명되는 합리적 사랑과는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다. 유효기간이 2-3년에 불과한 합리적 사랑에 비해 모소족 청년의 사랑은 신석기 시대의 미이라처럼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광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잘려나간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사라진 타자를 향해 뛰어드는 광인의 몸짓이다. 주체 욕망의 배신 앞에서 사라진 타자를 복원해내는 일, 시의 역사는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사랑의 역사를 기록하는 고독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6. 패왕의 눈사람 싸만코
눈사람은 온몸이 가슴이다
큰 가슴 위에 작은 가슴을 얹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토록 빨리 녹는 것이다
흔적도 안 남는 것이다
―권혁웅, 「눈사람-젖가슴․3」,《문학․선》, 2006, 겨울호
어느 책에선가 원래 인간의 젖가슴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였는데 쾌락욕망에 의해 그 하나가 퇴행되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집 축사에서 나는 커다랗고 까만 돼지 엄마를 보았다. 돼지 엄마의 말랑말랑한 돼지 젖꼭지에 대한 기억. 시외버스 옆 해장국집에서 술에 취한 취객 손님에게 국밥 한 그릇을 덤으로 내주는 국밥집 주인여자를 보았을 때 오래 전에 보았던 그 돼지 엄마가 생각났다. 탱화 속에 손이 여럿 달린 부처처럼 젖이 무수히 달린 돼지 부처가 있다면 세상에서 배고파서 우는 아이들과 싸움하는 어른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베여 나왔다.
권혁웅의 시 「눈사람-젖가슴․3」을 읽으며 나는 문득 돼지 젖꼭지를 생각하다가, 패왕별희의 패왕을 닮은 시적 자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시인에겐 미안한 일이나, 그의 시집 <마징가 계보학>을 읽으며 나는 줄곧 그의 시에서 마징가의 계보를 잇지 않기 위해 실패를 위장한 패왕의 얼굴을 보았던 것 같다. 패배의 기원을 알지 못하나 주체 현시의 욕망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거세한 채, 생각보다 희극적이고 우려했던 것보다 휠씬 비극적인 시적 자아를 가진 듯했다.
그의 시를 읽다가 패왕의 손에 들린 눈사람 사만코(아이스크림)를 떠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온몸이 젖가슴인 눈사람’, 그래서 흔적도 없이 그만 빨리 녹아 없어지고 마는 눈사람. 그러나 엽기적인 데다가 비극적이기까지 한 ‘눈사람’을 들여다보는 시적 자아의 눈은 언제 젖었냐는 듯 제 감정의 여운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눈사람’이 녹는다고 엄살도 행패도 부리지 않는다.
비극적인 슬픔으로부터의 서먹한 거리두기. 패왕처럼 주체 욕망을 포기한 서먹서먹한 자아가 온 몸이 젖가슴인 눈사람에게로 다가간다. 눈사람이 다 녹는 동안 한 번도 울어본 일 없는 꽁꽁 언 눈사람이 온 몸이 젖가슴인 물컹한 눈사람을 보고 있다.
7. 기억의 유전자
숲을 바다라고 하자. 바다를 꽃이라고 하자.
꽃을 벌레라고 하자. 벌레를 호박이라고 하자.
꽃을 꽃이라 한 약속은 끝내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약속은 하늘이 무너져도 진실일 수가 없는 일이다.
새로운 약속은 언제나 무참하게 학살을 당하고,
그 무덤 위에서 껍데기 약속들은 승전가를 부른다.
오래 전 자궁 안에서의 내게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었던 시절의 평화는 이제 꿈이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혁명은 혁명이 아니고 반역은 반역이 아니다
진실이 껍데기로 위장되어 있는 한 나 역시 내가 아니다.
진실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꽃은 꽃이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면서 그냥 피는 것이다.
호박은 호박도 아니고, 꽃도 아니면서
그냥 저 혼자 마냥 퍼질러지는 것이다.
너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면서, 그냥 있는 것이다.
―장종권, 「저녁의 생각․3」,《리토피아》, 2006년, 겨울호
현대시는 오래된 타자를 어떻게 수용하는가? 그것은 숨어사는 은자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고, 처녀 엄마를 분만해내는 고통의 제식이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어깨들을 짊어진 차력사의 연대기이며, 제 몸을 사라지게 하는 자아 소멸의 마술이고, 의사과학과는 차원이 다른 사랑의 역사를 기록하는 고독한 발굴 작업이며, 주체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거세한 서먹한 거리두기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삭제된 기억의 유전자 속에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면서 그냥 있는 것’으로서 호명되기 이전의 원시적 존재성을 지향하는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시 「저녁의 생각․3」은 타자성이 결코 여하한 타성에 젖을 수 없는 것, ‘혁명’이나 ‘반역’같이 여하한 이데올로기적 ‘약속’에 의해 매개될 수 없는 것, ‘호박’이나 ‘꽃’으로 호명될 수 없는 존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때 ‘나’와 ‘너’는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에 의해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음’으로의 존재성 속에서 개체이면서도 한 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성은 근·현대사의 음험한 왜곡 속에서 왜곡된 타자의 존재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인생의 허무를 읊조리는 전도서의 기자나 실존주의와는 별개로 이러한 존재성은 기억의 유전자 속에서 이미 삭제되어 기억할 수조차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막 위에서 흐릿한 발자국을 따라가지만 더러 그것은 지독한 주체 욕망의 고독 속에서 제 발자국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고 진흙과 먼지의 풍화작용 속에서 소멸되는 열락을 통과해 환각의 뼈를 줍는 일이기도 하고 거꾸로 나이를 먹는 사내처럼 시간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의 긍정과 부정으로부터 나이도 잊은 채 백발노인이 새파란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으로 들어가신다. 언젠가 그의 시가 ‘저녁의 생각’으로부터 ‘저녁’에 당도하리라. 그때까지 시에서의 자아는 세계의 이방인이리라.
(* 본문에서 언급한 시 외에도 천수호의 「새소리마을」(《문학동네》, 2006, 겨울호)과 박진성의 「문중 회의」(《문예중앙》, 2006, 겨울호)는 각각 ‘거인들의 생태학교’와 ‘바코드 어머니’를 통해 사라진 ‘새소리’와 ‘가족’이라는 타자를 지향한 것이었다.)
조하혜 · 1972년 서울 출생. 1994년《현대시사상》으로 시 등단.
·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와 <울지 말아요, 비둘기>가 있으며,
· 번역서로 오스카 와일드의 환상동화집 <행복한 왕자와 다른 이야기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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