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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서평/김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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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57회 작성일 08-03-01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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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정규 소설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


서사의 구성원리와 분열된 주체
김석준|문학평론가

1. 글을 들어가며

박정규의 소설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를 읽다보면 적지 않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빼곡히 들어선 문자의 향연이 글읽기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소설의 서사를 그림의 세계와 잇대어 놓고 있어 서사의 진위파악 또한 혼동시킨다. 이 두 가지 서사적 기술 방식이 소설의 가독성을 많이 떨어트린다. 사실 그의 소설들은 행위예술가의 자살을 서사화한 「안녕, 먼 곳의 친구들이여」를 제외하고는 소설과 그림과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렵다. 박정규의 소설들은 그림에 조예가 깊은 비평가만이 그의 소설이 가진 진면모를 드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박정규의 소설의 이러한 창작 기법은 유니크하기 때문에 섣부르게 잘못 비평했다가는 작품 자체를 오독하게 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물론 해롤드 불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창조적 작업은 오독에서 비롯한다는 말도 있지만, 박정규의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는 그림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지 않고는 올바른 비평이 될 수 없다. 물론 그림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소설텍스트의 문자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서사와 주체 문제를 논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미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술에 대하여 문외한인 나로써는 베르나르 뷔페, 조르지오 데 키리코, 하나 윌케, 리히터, 쟝 뒤뷔페 등의 화가들의 미술세계를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것은 이 글을 쓰는데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소설과 그림의 연계점을 짤막하게 각주 처리하여 화가들의 미술세계의 이해의 통로를 열어 놓고 있다. 이러한 이해의 통로는 역으로 소설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가 각주와 공모관계를 이루면서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질적인 텍스트를 서로 잇대어 놓고 그것을 통해서 서사는 그림을 그림은 서사를 상호 보완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박정규의 소설은 바로읽기로는 소설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박정규의 소설은 꺼꾸로 읽어야만 한다. 소설을 통해서 화가들의 그림을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소설가의 상상적 지평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림언어를 문자언어로 치환시켰는가를 추적하여야만 박정규 소설집의 이해가 완결된다.


2. 하이퍼텍스트 또는 치환된 기호

조지 P. 랜도우는 <하이퍼텍스트 2.0>에서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이퍼텍스트는 중심, 주변, 위계질서, 그리고 선형성의 사상에 토대한 개념 체계들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며 그것들을 다선형성, 결절점, 링크, 네트워크와 같은 생각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한다.’ 물론 이 개념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전자적 글쓰기 방식을 유념해둔 정의이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을 육화시킨 자크 데리다의 <조종Glas>이나 롤랑 바르트의 <S/Z>의 해체론적 글쓰기 방식은 미셸 푸코가 <지식고고학>에서 말한 텍스트의 네트워크와의 연결, 즉 ‘한 책의 경계들은 그 책이 다른 텍스트들, 문장들에 대한 지시 체계들에 얽매여 있고 하나의 책은 하나의 네트워크 속의 한 지시망 속의 한 결절점이다.’ 그러므로 데리다와 바르트의 텍스트는 하나의 서사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두개의 텍스트가 서로 잇대어져 있다. 특히 이합 핫산의 <포스트모더니즘 개론 : 현대문화와 문학이론>이나 데리다의 <조종>의 경우는 하나의 이론텍스트에 두개의 글쓰기가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글쓰기 방식을 해체하는 것에 해당한다.

박정규의 창작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는 하이퍼텍스트의 전형으로 알려진 데리다나 이합 핫산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서사텍스트의 구성원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서사는 두개의 이질적인 서사가 결합되어 하나의 서사를 형성하는데, 독자는 소설텍스트를 단선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소설가 박정규의 형상화전략이자 노림이다. 총 8편에 달하는 작품집 전체는 이중의 구조틀 위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서사구조 전체는 작가가 췌록한 몇 줄 안 되는 문장에 걸려 넘어진다. 다시 말해서 예를 들어 단편 「내가 달려간다」는 두 개의 예술텍스트가 결합한 형태이다. 쟝 뒤뷔페의 회화 「내가 달려간다」와 박정규의 「내가 달려간다」가 동시에 링크되어 하이퍼텍스트를 연출하게 된다. 문제는 링크에 있다. 비록 몇 줄 안 되는 췌록으로 각주 처리되었지만, 이 각주의 내용은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감시하게 된다. 만약에 각주의 내용을 무시하고 소설의 서사만을 추적 정리할 때, 박정규의 소설텍스트는 훼손되거나 오독될 확률이 매우 높다. 하이퍼텍스트의 텍스트성은 서사의 선형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읽기와 쓰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열린 텍스트이다. 그러나 박정규의 하이퍼텍스트성은 자유텍스트의 독법에서 조금 이탈하여 두개의 텍스트를 상호 필연적인 관계로 연접시킨다. 데리다의 <조종Glas>이 두개의 텍스트를 링크시켜 한 권의 책을 만들기는 했지만, 두 텍스트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작동하고 있는 이질적 텍스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데리다의 두 텍스트는 피터지게 대립 반목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선형적 동일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는 데리다가 언명한 산종이다. 마구 흐트러트리고 마구 착란시키는 텍스트의 유희이다.

그런데 박정규의 하이퍼텍스트는 해체적이지 않다. 이종교배(hybrid)된 소설텍스트는 착종된 의미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의 지점으로 수렴해가고 있다. 문제는 소설의 서사가 선형화된 사태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설적인 의미의 현상학적 환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서사 속에 그림 언어가 어떻게 육화되었는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지점이 박정규 소설 읽기의 어려움이다. 한편의 소설이 하나의 문단으로 처리된 빽빽한 문자들에 의해 질식할 것 같은데, 문자의 사건을 헤집고 소설의 구조 속에 응축된 회화의 기호나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녹녹하지 만은 않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에 박정규의 소설 속에서 그림 언어를 문자 언어로 치환시킨 기호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비평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물론 「안녕, 먼 곳의 친구들이여」 같은 작품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네덜란드 출신의 행위미술가 얀 아더의 삶을 모티브로 해서 형상화된 소설임이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그이외의 소설은 그림과 서사의 접점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두개의 텍스트를 괄호 안에 넣고 판단중지를 통한 텍스트의 객관화 작업이 선행되지 않은 텍스트 읽기엔 무엇인가 미진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소설의 읽기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읽기는 각주의 그림 언어 읽기로부터 시작해서 서사 읽기로 종료되지만, 소설의 이해는 완결된 서사의 파국으로 종결되지 않고, 각주의 지점을 응시하게 된다. 문제는 그림언어와 서사 언어가 하이퍼텍스트로 링크된 지점에 존재한다.

박정규의 소설들은 소설과 그림언어 사이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박정규 자신이 자초한 소설의 기법이다. 질식할 것 같은 문장들의 독해가 완벽하게 성공했다할지라도 그것은 텍스트의 독법만으로 완결된 텍스트 읽기가 되지 않는다. 박정규의 소설 텍스트는 철저하게 각주로부터 검증받아야만 한다. 각주는 박정규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그의 소설이 지닌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소설텍스트만의 의미에 주목한 박정규에 관한 비평론은 거짓이거나 위선이다. 그것은 박정규의 소설에 대한 명예 훼손이다.


쟝 뒤뷔페Jean Dubuffet 1964년 작.

40세쯤 미술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정신질환자들의 조형 표현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62년부터는 낯익은 인물과 모티브가 환상적 퍼즐처럼 얽혀 있는 「우르루프Hourloupe」 연작에 착수했다. 우르루프란 ‘늑대loup’와 ‘간책entour-

loupe’을 합성해 만든 단어이다. 이 계열의 그림들은 군중 속에 갇혀 있을 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을 가로질러 주위를 둘러싸고, 해체시키고 변형시켜버리는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한 흐르는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달려간다」도 같은 방법의 작품이다.

―앞의 글은 <20세기 미술의 모험>(쟝 루이 페리에Jean louis Ferrier 편저, 김정화 옮김)에서 필자가 임의로 발췌한 것임


위의 인용문은 소설 「내가 달려간다」에 각주 처리된 쟝 뒤뷔페의 「내가 달려간다」와 그의 미술세계를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소설은 쟝 뒤뷔페의 그림과 링크되어 있지만, 사실 링크의 실체는 해설을 쓴 페리에이고, 그것을 번역한 김정화이고, 다시 그것을 췌록한 박정규이다. 소설 「내가 달려간다」는 엄밀히 말해서 4개의 결절점을 위를 횡단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이다. 소설가가 그것을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상관없이, 소설의 서사는 수많은 결절점으로 짜여져 있다. 다시 말해서 소설 「내가 달려간다」는 네 명의 사유체계가 결합한 하이퍼텍스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주체는 소설가 박정규 자신이겠지만, 그의 선택적 링크는 텍스트 자체 즉 뒤뷔페의 그림 자체를 간접적으로 링크시키고 있다. 우리는 뒤뷔페의 「내가 달려간다」를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을 현존의 장으로 되불러올 수 있는 장치는 소설 「내가 달려간다」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쟝 루이 페리에의 글은 뒤뷔페와 박정규를 연결시키는 고리이다. 별개인 두 예술텍스트를 나란히 병치시켜 하나의 텍스트로 융합반응시키는 메타텍스트가 페리에의 글이다. 그런데 예술이란 특히 추상회화는 감상방법에 따라 다양한 해석루트를 제공하기 때문에 페리에의 글은 그림 언어에 대한 하나의 이해통로이다. 그것은 박정규의 선택적 의지, 즉 소설이 형상화되는 구성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더 나아가 뒤뷔페의 예술텍스트의 이해는 박정규가 링크시켜놓은 페리에의 글에 한정된다. 만약에 베네바 부시의 메멕스로 또 다른 글을 링크시킬 수 있다면, 더 나아가 하이퍼텍스트의 본성인 읽기에 쓰기 기능이 첨부된다면 박정규의 소설들은 끊임없이 서핑(surfing)될 수 있게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결코 닫혀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끊임없이 리좀되고, 노드됨으로써 가상적 연결망을 형성하는 열린 텍스트이다. 특히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는 naver.com의 사이버스페이스의 검색창으로부터 문인희의 글을 일부 링크시켜 소설 속에 각주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규의 소설들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벌어지는 하이퍼텍스트 임계점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의 글쓰기의 전략은 하이퍼텍스트적이지만, 그것이 곧 전자적 글쓰기 방식이 완벽하게 체현된 것은 아니다. 그의 하이퍼텍스트성은 인쇄매체 위에서 벌어진 링크이기에 그의 소설들은 애초에 쓰고자 했던 박정규의 소설쓰기의 목적을 역전시킨다. 다시 말해서 회화가 소설을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서사가 회화의 존재성을 역으로 검증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은 쌍방향으로 독법이 가능한 하이퍼텍스트가 아니라 역방향의 하이퍼텍스트로 소설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비평은 이 이중의 경로를 검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소설텍스트 내부 그 어디에도 뒤뷔페의 「내가 달려간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뷔페의 추상회화는 지금 미술관에서 기획 전시되고 있다. 만약에 미술관에 달려가 뒤뷔페의 「내가 달려간다」를 감상하고 소설 「내가 달려간다」를 비평한다면, 소설 밖의 사태를 비평적으로 링크시키는 행위가 된다. 그것은 두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지름길이 될 수 있지만, 텍스트의 읽기를 통한 상상적 지평의 길을 막을지도 모른다. 뒤뷔페의 그림을 통해서 소설 「내가 달려간다」의 구조와 의미를 해석해낸다면, 소설의 미적 자의식은 뒤뷔페의 추상회화 「내가 달려간다」에 종속되게 된다. 만약 박정규의 소설들이 진정한 의미의 하이퍼 문학을 지향하면서 씌어진 전자적 글쓰기일 경우, 이해의 통로나 독법을 다층화시켜 그의 소설들을 주변부로 내몰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양한 링크의 길을 따라가면서 읽고 쓰기가 가능한 것이 하이퍼문학의 특징이기 때문에, 텍스트는 무한히 노드되고 서핑됨으로써 텍스트 자체의 정보량은 보강되고 확장된다.

그러나 박정규의 소설들은 4개의 결절점을 지닌 단 일회의 링크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의 소설쓰기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독이적인 박정규의 글쓰기의 전략은 새로운 소설쓰기의 한 전형이 될지도 모른다. 루카치적인 의미의 전형 창조가 아니라 칸트적인 의미의 전형 창조가 박정규 소설의 형식 속에 육화되어 있다면, 그의 소설은 내용층위가 아니라 형식층위가 강점이라면, 박정규의 소설들은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이 세계 속에 현시하는 선구적 작업이 된다. 헤겔이 그의 방대한 저작인 <미학>에서 미의 본질을 정신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규정짓고 있지만, 기실 그 정신을 육화시키는 본질적인 기재는 형식이 아니겠는가. 정신이 미를 이끌어가는 내용 층위라면, 형식은 그 내용을 미로써 승화시키는 본질적인 국면이자 미적 현실성이다. 미의 육체성은 형식위에서 펼쳐지는 향연이다. 그러므로 박정규의 형식에의 도전 정신은 그의 소설의 성패를 떠나서 아름다운 미적 실천의 한 전형이 될 수 있다.

박정규의 하이퍼텍스트는 그림문자를 소설의 서사로 치환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박정규 소설을 읽는 재미중에 하나이다. 과연 쟝 뒤뷔페의 그림기호가 어떻게 소설 속에 서사화되어 박정규만의 문학소로 변환되었는가를 비교 분석할 때, 하나의 예술은 자신이 속한 장르 속에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상호텍스트성의 구조 속에서 퓨전되어 새로운 미적 형식을 창조할 수도 있다. 린다 헌천이 패로디를 현대정신으로 명명했을 때, 현대성의 미적 실천력은 다양한 예술적 소재를 차용하거나 수용하여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정규의 소설들은 현대정신의 적극적인 실천에 해당한다. 그것은 박정규 소설 속에 형상화된 추상회화의 언어와 서사 언어를 매개시키는 페리에의 언어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페리에의 뒤뷔페 추상회화의 정의적 설명 즉 ‘정신질환자의 조형 표현’, ‘환상적 퍼즐’, ‘군중 속에 갇힌 밀폐된 공간의 해체와 변형’이라는 개념들은 이중으로 매개되어 있다. 페리에의 정의는 뒤뷔페의 「내가 달려간다」와 박정규의 「내가 달려간다」를 링크시킨다. 문제는 링크 자체가 아니라 링크를 통해서 공유되는 미적 형상화의 지점이다. 다시 말해서 박정규의 「내가 달려간다」에 육화된 세 개념의 지점을 정확하게 집어낼 때, 링크의 본질적인 목적은 완성된다. 그것은 뒤뷔페의 그림언어가 문자언어로 코드변환을 일으키는 지점이자, 박정규 소설이 미적으로 현상하는 소설의 현실성이다.

그림의 화폭은 문단나누기를 전혀 하지 않은 채 빽빽한 문자열로 치환된다. 서양화는 동양화와 달리 여백 전체를 주도면밀하게 분할 배치하여 공간 전체를 의미의 구조로 채워놓는다. 비록 한 순간의 장면적인 사건성을 묘사해내지만, 그 여백의 화폭은 주도면밀한 공간배치를 통해서 촘촘하게 가장 강렬한 의미를 채색해 넣는다. 그림 서사는 순간의 미적 이념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그 순간은 영원을 대변하는 극한의 지점이자 가장 강렬하게 채색된 순간이다. 박정규 소설의 서사는 한 폭의 추상회화 그림을 시간과 공간 속에 입체화시키는 작업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한 문단으로 한 서사를 마무리한 빽빽한 말들의 문자열의 집합체는 그림텍스트의 공간적 재현을 의미한다. 만약에 문단나누기로 소설의 서사를 구조화시켰다면, 그림 서사의 공간분할에 결점이 생겨 불완전하게 재현되게 된다. 그러므로 한 문단으로 구조화된 빽빽한 말들의 서사는 그림 서사와 정확하게 일대일 대응된 균형관계를 이룬다. 소설의 서사 문자는 코드변환된 그림 문자이다.

소설의 서사 문자는 뒤뷔페의 평면적인 공간과 시간을 욕망하는 주체의 좌절과 해체 속에 다양한 장면과 시간으로 코드변환시켜 입체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은 페리에가 이해한 뒤뷔페의 예술기호를 박정규의 문학소로 재전유하면서 문자적 서사를 이룩해낸다. 소설 「내가 달려간다」의 주인공(지하철 부역장)은 페리에가 뒤뷔페의 예술세계를 정의대로 강박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환영과 과잉된 자의식 속에 빠진 채 살아가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부역장은 아내의 혼전임신과 낙태 사실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심적인 고통과 갈등 속에 휩싸이게 된다. 가정은 거의 해체 일보 직전이었고 교통사고로 뇌성마비 아들이 사망하고 결국 아내마저 잃게 된다. 주인공은 과거의 의식 속에 유폐되어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고 못한다. 무료한 일상과 수많은 군중들의 삶 속에서 그는 언제나 유리된 존재로 살아간다. 뒤뷔페의 회화공간이 박정규의 서사공간으로 코드변화되어 있음을 다음의 예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원초적 어둠이었다. 눈을 감았을 때는 차라리 시신경의 착오에 의한 빛의 환영이라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눈을 뜨면 완벽한 어둠이었다. 공기가 희박해서인지 호흡마저 곤란했다. 압사직전의 상태처럼 조여 오는 가슴이 질식할 만큼 답답했다. 마음껏 소리라도 지르면 좀 시원해질 듯싶었다. 그러나 갈라진 목구멍을 비집고 넘어온 지렁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마저 소리의 간섭이 심한 폐쇄공간의 공명현상으로 환청처럼 아스라했다. 절망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어둠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발은 한 치도 앞으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내 어깨를 낚아채는 힘에 이끌려가다 작살처럼 망막에 들어와 박히는 빛살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화들짝 눈을 떴다.

―「내가 달려간다」 중


뒤뷔페의 공간은 선의 분할을 통해서 공간의 해체는 물론 인간 정신의 해체를 묘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물화된 현대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소외를 상징하는 공간이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가따리와 들뢰즈가 <앙띠오이디푸스>에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 존재하는 인간형들을 정신분열자로 규정했던 것처럼, 아니 자본주의가 정신분열자를 양산하고 있다고 인식했던 것처럼, 뒤뷔페는 추상공간 내부를 분열된 의식으로 채색하고 있다. 이 뒤뷔페의 추상 회화의 공간적 의미가 그대로 소설로 치환될 수는 없지만, 위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주인공(부역장)은 꿈을 꾸고 있다. 꿈 내용은 프로이트 식으로 말해서 압축이나 전치된 소망 충족의 억압적인 측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꿈 사실을 리비도적 욕망의 억압으로 해석하고 있다. 박정규 소설들을 이끌어가는 모티브는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인데, 그것의 내적 동인은 인륜성의 기본단위인 ‘성모랄’의 해체에서 파생된 것이다. 뒤뷔페의 공간은 코드변화되어 조르주 바따이유적 에로티즘적 의미를 띤 육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서사의 미적 원리로 고양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뒤뷔페의 해체된 회화공간은 소설가 박정규라는 해석소가 개입하면서 생에의 자기본능의 실현 장소인 여성의 질 내부로 변이된다.

위의 인용문은 꿈을 통해서 서사의 미래 전체를 예시하고 있다. 융식으로 말해서 어둠은 아니마이고 빛은 아니무스이다. ‘원초적 어둠이었다. 눈을 감았을 때는 차라리 시신경의 착오에 의한 빛의 환영이라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눈을 뜨면 완벽한 어둠이었다.’라는 이 구절은 주인공(부역장)의 현재적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원초적 어둠(여성, 아니마, 감성) 속에서 빛(남성성, 아니무스, 이성)을 보고 빛의 세계 속에서 어둠인 이 상태는 주인공의 페르조나(현실적 삶)가 그의 내적 인격(아니마)과 불일치할 때 경험하는 상태이다. 남성성이 여성성과의 합일이 불가능한 지점. 아내와 화해를 하고 그녀의 자궁 속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고 싶지만 발기불능 상태. 현실적 자의식과 내면적 무의식의 불일치. 이 지점에 주인공이 위치해 있을 때, 그의 내적 자아는 초자아의 검열로부터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폐쇄공간 속에서 환청을 듣고 절망하게 된다. 그것은 팜므파탈적인 유혹적 손짓(수아와의 섹스)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발기불능이자, 과거의 상처와 죄의식의 지점이다.

서사가 파생되는 지점은 극렬한 섹스의 성기 결합에 있지만, 그 결합은 과거의 상흔의 지점이 상기되는 순간 불가능하게 된다. 서사는 발기불능된 페니스의 복원력, 즉 발기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주체는 복원된다. 뒤뷔페의「내가 달려간다」의 추상회화 공간 속의 분열적 사태는 박정규의 「내가 달려간다」에서 코드변환되어 분열된 의식이나 무기력의 상태에 머문 주체를 정상으로 회복시킨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이 칠흑 같은 어둠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전동차의 굉음소리 사이로 죽은 아내와 아들 성호의 어눌한 환청을 듣는 순간 회복된다. ‘아아빠아 뛰이어어.’ ‘여보 빨리 뛰어요’라는 환청 같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무의식을 억압한 초자아(성에 대한 편견이나 관행, 아들에 대한 죄의식)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죄의식으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파업하고 있었던 생식 능력이 다시 소생한 것이다.’ 발기상태는 과거와 화해된 상태이다. 서사의 파국을 주인공의 생식능력의 회복으로 끝나지만, 끝남은 진정한 끝남이 아니다.

박정규의 서사의 구성 원리는 현재적 사태의 문제성을 과거의 상흔의 지점에서 치유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파국적 결말이 아니다. 박정규는 「제단」의 서술자인 시나리오 작가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작품의 끝은 종말이 아니고 항상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때 새로운 전환점이란 박정규 소설들 속에 어떤 미적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가. 서사의 파국적 종결이 종말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것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 새로운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서사의 논리로만 풀어낼 수 없는 작가의 메타담론이다. 비록 시나리오 작가의 입을 통해서 서술되기는 하지만, 글쓰기의 목적은 하나의 필연, 하나의 신념을 과정화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당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3. 해체된 주체 또는 불온한 의식의 전환

박정규의 소설집 중에 「안녕, 먼 곳의 친구들이여」를 제외한 소설들을 이끌어가는 서사의 원리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다. 과거는 상처의 지점이고 서사의 문제성이 촉발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과거는 현재 속에 잠재된 주인공들의 무의식이다. 사건은 현재의 서사 위를 달려가다가 종결되지만, 결국 서사적 파국은 상처 난 과거의 시간 속으로 재귀해 들어가 현재의 사건을 정립하게 된다. 과거는 주인공들의 정신분열과 편집증이 발생하는 라캉적인 의미의 기표이다. 과거는 상상계는 물론 상징계까지도 피해망상이나 분열증을 일으켜 올바른 주체를 형성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과거는 육체적 상흔이 아니라 정신적 외상(trauma) 위에 펼쳐지는 실재의 공간이다. 과거는 시간이 아니라 주인공들에게 현재하는 공간이다. 무의식의 지점과 현재의 삶을 지배하는 현존성의 복판 위에 존재하는 사건적 사태가 바로 박정규 소설 속의 과거의 참모습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끊임없이 작동하여 주인공들의 삶과 현실을 갉아먹는다. 주인공들은 해체되고 분열되어 올바른 주체를 형성할 수 없고 융적인 의미의 그림자가 그들의 주체들을 지배하고 있다.

과거 위에 덧대어진 현재는 실상이 아니라 기만적 가상이다. 그것은 언제나 위선과 기만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기에 승화되고 전환되어야만 한다. 현재의 실상은 상처받은 영혼의 흔적이다. 그것의 실존성은 「한나절의 수수께끼」의 근무력증의 삼촌이고, 「제단」의 시나리오 작가의 섹스 자체가 불가능한 열리지 않는 몸이고,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의 무정자증 환자인 교활한 유부국장이다. 현재는 과거의 덫에 걸려 넘어져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지점이다. 현재의 공간은 분열된 주체들이 활보하는 공간이다. 주인공들이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과거가 언제나 유예된 현재이거나 임시로 지불 정지된 그러나 언젠가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빚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빚은 현재를 활보하고 주인공들의 상처를 덧내다가 생의 형식을 전환시킨다. 다시 말해서 앞장 말미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박정규의 글쓰기의 목적은 분열된 주체 위를 활보하다가, 분열된 주체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을 치유하는데 있다. 물론 소설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 전체가 그렇게 형상화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박정규의 소설들의 서사적 결말은 승화를 지향하고 있다. 정신적 외상의 지점에 응고된 초자아의 검열, 즉 관습화된 질서와 모랄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정위시키는데 있다. 그것은 주체의 결단이 요구되는 자기 구제행위이고, 생의 영속성을 유지해가는 전환이다. 서사는 종결된 사태가 아니라, 사태의 변곡점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박정규가 지향하는 전환점은 과거의 덫으로부터 새로운 생의 형식을 개현시키는 의식의 전환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전환은 파국의 국면에서만 발생한다. 실존적 삶의 공간 속의 서사 행위 주체들은 위태위태하게 현실을 살아내다가, 상처 난 과거의 자리를 응시하고 그것으로부터 자기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박정규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분열적 국면 위를 질주하면서 기표로 존재하는 상처를 의미화시킨다. 상처는 기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상처는 라캉적인 의미의 의미를 소거시킨 부유하는 기표적 의미나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 흔적을 남긴 기표는 결코 부재하는 실재(과거의 지점)를 지향하지 않는다. 상처는 부재하는 실재의 지점을 현존의 삶과 상징적 질서 속에서 구원받아야만 한다. 박정규 서사의 주인공들의 상처는 상징계와 상상계는 물론 실재계와도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박정규가 형상화한 상처는 라캉이 인간 심리적 존재의 위상학을 규정 제시한 ‘보로매우스의 매듭’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상처란 내파(implosion)와 외파(explosion)가 동시에 일어나는 우발적 사건의 지점이지만, 그것은 외연적 보로매우스 매듭과 내포적 보로매우스의 매듭으로 무한히 증폭되어 인간의 현실성과 정신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상처의 보로매우스의 매듭이 현시되지 않았을 때, 주인공들은 표면적으로는 소설가, 화가, 번역가, 시나리오 작가, 프리랜서 작가, 행위예술가, 신문사기자, 외과의사, 대학강사, 지하철 부역장 등의 번듯한 직업군들의 인물들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몇몇의 주인공을 빼고는 거의 하나 같이 상처의 자리에 응고된 채 병들어 있다. 그들은 왜 병들어 있고, 편집증에 빠져 있는가. 특히 여성주인공의 경우 성에 대한 모멸적 태도를 보이거나 심어지는 남성혐오증에 걸려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소설 속에 묘파된 남성주인공의 형상이다. 심장병환자가 발기부전 치료제인 씨알리스를 먹고 돌연사하거나, 성불구자, 마약중독자, 무정자증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행위예술가 등의 모습 속에 건강한 남성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훼손된 남성성은 박정규 소설쓰기의 비밀이 내재된 것은 아닌가. 주인공들의 훼손된 성적 사태, 즉 주인공 남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발기불능, 여성의 남성혐오증이나 섹스가 불가능한 몸은 올바른 주체형성과정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가. 그것은 어쩌면 소설가 박정규의 비극적인 개인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에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인간의 주체형성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가따리와 들뢰즈는 <앙띠오이디푸스>에서 이 삼각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만, 엄마-아빠-나(아들, 딸)의 삼각형은 팔루스적(남근적) 어머니에게 위안 받고 동일시를 이루다가 구강기와 항문기를 경유하여 남근기(주체형성기)에 이르러 아버지에 의한 거세공포증에 시달리다가 아버지의 권위에 순응하면서 동일시를 이룩하게 된다. 그것은 라캉이 <에크리>와 <세미나>에서 말한 ‘아버지의 이름으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는 우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가 속한 상징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성의 통제와 정체성을 구조화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만약 이것이 실패하면 나르시시즘적인 퇴행이나 거세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박정규의 소설 속에 형상화된 남성들은 올바른 남성성을 현시하지 못한다. 남성은 라캉의 그것처럼 나르시시즘이나 거세 콤플렉스에 시달리지는 않지만, 성의 향유 면에서 완벽하게 실패한다. 다시 말해서 팔루스는 존재하지만, 팔루스가 작동하여 생의 내부(주체형성)와 외부(여성과의 성관계)를 구조화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팔루스는 불능의 기표이다. 팔루스는 리비도와 주체의 심각한 균열 사이를 헤집으면서 여성성을 포용하여 안아 넘지 못한다.

이러한 사태를 가장 심각하게 형상화한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의 유부국장과 「작은방」의 강만석 원장은 프로이트나 라캉적인 의미의 아버지의 이름을 배척하는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아버지와의 동일시의 실패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분석한 대법원장 슈레버의 환각과 거세 콤플렉스, 라캉의 언어 상실에 의한 정신착란성 헛소리와 광기로까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유부국장과 강만석 원장은 발기불능과 매저키즘과 사디즘 사이에 고착되어 있다. 그것은 주체 형성의 실패이다. 특히 발기불능을 대리하는 유부국장의 권력욕망이나 출세지향성은 부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통 사이에서 비열하고 무모한 폭로 행위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지만, 욕망의 충족과 반비례로 그의 가족들은 추락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유부국장의 욕망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전이되어 치매에 의한 자살행위와 정신착란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남성의 권력을 지향하는 욕망은 훼손된 남성성을 대리보충하지만, 그 대리보충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남성의 타자(여성)는 은유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유부국장의 아내는 언어를 상실한 채, ‘자음과 모음의 분화가 확실치 않은 소리를 반복’할 따름이다. 이것은 라캉적인 의미에서 볼 때, 아버지의 이름을 배척한 결과가 남편인 유부국장에게 투사된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역투사된 것이다. 그것은 유부국장의 삶에 관한 왜곡된 태도에서 비롯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삶과 내면 세계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내는 미쳐버렸지만 나는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시시콜콜 따지고 앉아 있다. 나는 정신적 장애 따위는 결코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어줍잖은 가치관을 내면에 품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 중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유부국장에게 마음의 그림자(Shadow)를 보게 된다. 융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림자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열등성인데, 그것은 올바른 주체 즉 자기(Self)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상대적인 악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인간의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어둠이기에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인 실체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융의 수제자인 마리아 루이제 폰 프란츠는 그 그림자를 어둡고, 아직 살지 못한, 억압된 자아 콤플렉스라고 정의내린다. 프란츠의 이 정의는 유부국장의 내면세계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은 자신의 존재성을 극렬하게 증명하는 원초적 공간이다. 아니 남성에게 있어서 발기력은 전부이다. 그것은 영화 <모넬라>에서 노년의 신사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패로디한 ‘나는 발기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테제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그러나 유부국장은 자신의 남성성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 있다는 주체 의식을 형성하지 못한다. 청소년기에 목격한 어머니의 불륜장면이 그의 의식 속에 보태져 그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인간형으로 성장하게 되게 된다. 그의 성적 정체성은 훼손되어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불능상태이다. 유부국장은 자신의 외적 페르조나를 강화시켜 자신의 내적 모순성이 외부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한다. 어줍잖은 내면과 현실적 삶의 충돌을 의도적으로 회피해갈 때, 그는 기만적인 사술(어머니와 불륜관계에 있는 박병호 부장검사의 비리 폭로)로 지위를 얻었음에도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비리 폭로 행위는 가슴 한켠에 쌓여 있던 니체적인 의미의 원한 감정을 표출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유부국장의 행위는 악의 상징에 가까운 그림자가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 전체를 통어하는 주인공들의 주체성 문제는 ‘보이지 않는 남자’라는 용어 속에 집중되어 분열된 정신과 육체의 총체적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에코르체는 피부벗기기를 한 남성의 근육의 과시적 측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 상징성은 이내 훼손된 남성성임이 드러나게 된다. 박정규 소설 속의 남성들은 남성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이거나 모양만 남성인 보이지 않는 남자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박정규 소설 속에 남성은 무수히 많지만, 진정한 남성성을 실현시키는 남자는 부재하다. 그 부재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앞서 잠깐 언급하다 말았지만, 소설가 박정규의 유년기 체험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5,6세쯤부터 아버지(해금작가 박노갑)가 부재했다는 전기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가 라캉이 말한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주체를 구조화하는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박정규에게 있어서 소설쓰기란 자신의 상처의 자리를, 결핍된 아버지의 원상을 반추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 창작집 <에코르체 혹은 보이지 않는 남자>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그 자신의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뒤틀리고 왜곡된 남성성들은 여성을 훼손시키고, 그 훼손된 여성이 다시 남성을 절망시키는 그 순환의 고리, 즉 라캉의 ‘보로매우스의 매듭’이 인간의 실체임을 박정규는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가 박정규는 창조적 글쓰기의 작업을 통해서 이 사회 전체에 뿌리박혀 있는 상처받고 지친 인간군상의 모습을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창조적 글쓰기는 자기를 갉아먹는 고행의 길이다. 그러나 그 고행은 인간의 생 전체를, 불온한 의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이다.


4. 글을 나오며

소설가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동일성보다는 이질성의 세계를 투시하고, 그것을 외적으로 현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질성은 사드의 언어가 그렇고, 까뮈의 언어가 그렇듯, 새로운 생에의 형식에 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소설가가 형상화한 그 생은 개연적 사태 속에 벌어진 미적 창조이기에 보다 포괄적인 성찰과 인간이해를 요구한다. 만약 그것이 결여되었을 때, 세계는 판타지가 지배하게 된다. 소설의 판타지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이 21세기를 대표하는 코드로 성장해가는 형국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판타지는 실존의 자리를 유희코드로 변질시켜 생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을 차단하게 만든다. 생은 생으로 이어지고 종결된다. 그러나 소설은 이 운명의 형식을 다층화시켜 세계를 일어날 수 있는 개연적 사태와 그것의 총체화를 통해서 특발성을 보편성으로 지양 극복하게 된다. 소설적 사건성은 세계-내-사건성을 우연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필연으로 전이시키는데 있다. 소설의 질량은 삶의 질량보다 앞서는 지점에 위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이유는 소설 속의 삶의 실체적 국면은 이미 일어난 사태의 총합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총합적 사태이기에 소설은 항상 세계성을 전취하고 있다. 소설가 박정규는 그러한 소설의 문법을 향하여 조금은 더딘 걸음이지만, 그러나 탄탄한 소설기법과 사유로 무장하여 미지의 기호를 소설화하고 있다. 그가 어느 길을 예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새로운 형식 창조를 위하여 분투하는 예술가의 영혼이 아름답다.


김석준․2001년《시안》

․저서 <비평의 예술적 지평>

․현 서울산업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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