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5호 서평/장성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38회 작성일 08-03-01 01:36

본문

|서평|


■최인석 소설 <목숨의 기억>

■이기호 소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기담과 만담, 하위 주체들의 새로운 정치적 언술 형식
장성규|문학평론가

1. 정치적 언술로서의 기담과 만담

기담과 만담은 우리 근대 소설사에서 항상 비주류의 위치에 있었다. 근대 소설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소설은 합리적 인과성의 원리에 입각한 잘 빚어진 언어의 구성물로서 규정되었고, 이 과정에서 기담과 만담은 전근대적인 ‘이야기’로, 즉 근대 소설에 미달인 B급의 형식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소설의 원천은 무엇인가? 고상한 지배적인 언술의 장에서 소외당한 이들의 언술 형식이 소설의 원천이 아닌가? 작은 언술이라는 소설(小說)의 어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소설은 지배적인 언술의 장(場)에서 발화되지 못하는 하위 주체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형식이다.

그렇다면 기담과 만담이 배제된 우리 근대 소설사란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 근대소설사를 구성하는 언술 형식은 그것이 계몽주의이던 유미주의이던, 리얼리즘이던 모더니즘이던 간에 일정한 문화자본을 획득한 엘리트들의 언술 형식일 뿐, 그 안에 하위 주체들의 작은 언술은 배제되어왔다. 비록 근대 소설의 담당층인 문화적 엘리트들이 꾸준히 자신의 소설에 하위 주체들의 입장을 투영시키고자 하였다 할지라도 그렇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엘리트들의 시선에 의해 전유된 하위 주체들의 수많은 삶 중 극히 일부분만이 그들의 소설에 투영되는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담과 만담이 근대 소설사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근대 소설이 지니는 ‘근대’적 성격에 기인한다. 독립된 주체가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이를 텍스트에 반영한 것이 소설이라는 근대 소설의 규정이 기담과 만담을 소설 미달인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즉 세계는 투명하게 존재하며 이는 단단한 주체에 의해 온전히 정복될 수 있다는 근대 소설의 전제가 기담과 만담을 체계적으로 배제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소설의 전제 자체가 회의되는 지금, 기담과 만담은 다시 복권되어야 한다. 세계는 단일하고 투명하게 해석되지 않으며 주체란 모순덩어리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떤 형식을 모색해야 하는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하면서도 환원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며 다양한 하위 주체들의 언술을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적합한 형식이 바로 기담과 만담이다.

이런 면에서 기담과 만담은 신기하고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언술 형식이다. 근대 소설이 부르주아의 단단한 세계관을 반영하는데 반해, 기담과 만담은 하위 주체들의 복잡한 삶의 양상들을 반영한다. 기담은 표면적으로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 세계의 모순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 대한 부정적 상상력을 표현한다. 만담은 하위 주체를 배제시키는 정치적 언술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상으로 구성된 현실 세계가 아닌 하위 주체들의 표상들로 새로운 현실 세계를 구성해낸다.

얼핏 거리가 있어 보이는 최인석과 이기호는 부르주아적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넘어 하위 주체들의 정치적 언술로서의 소설을 복원시킨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들의 작품집을 함께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정치적 (무)의식의 발현과 기담의 복권

최인석의 소설은 일반적으로 현실의 부정성과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얼마전 출간된 그의 소설집 <목숨의 기억>(《문학동네》, 2006)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최인석의 소설이 정치한 현실 인식과 유토피아에 대한 뚜렷한 경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소설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어진 하위 주체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발현시킴으로써 현실 세계의 모순을 드러내고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그런데 하위 주체들의 정치적 (무)의식은 지배적인 언술 형식으로 표출될 수 없다. 이때 최인석이 사용하는 형식이 기담이다. 그런데 최인석의 기담이 중요한 것은 그의 기담이 단지 기괴하고 신기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기담은 현실 세계의 문맥 속에서 강력한 정치적 (무)의식을 발현시킨다.

예컨대 「목숨의 기억」에서 빵덕모자 빵덕이 아저씨의 정체는 마지막까지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는 “도대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비인가, 빵떡모자 빵떡 아저씨인가?”(102쪽)알 수 없는 존재이다. 또는 「달팽이가 있는 별」에서 제주도 신부는 동석의 신부인가 아니면 나의 믿음처럼 “원래 제주도 신부는 영득이의 색시였을 것”(203쪽)인가? 나아가 「내 님의 당나귀」에서 순이 아비는 순이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순이 아비인지 아닌지 끝내 확인할 수 없었던 그 사람”(256쪽)인가?

이들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의 단단한 주체로서의 성격이 아닌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모호한 알레고리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빵덕모자 빵덕이 아저씨는 현실의 영역에서는 남파 간첩이며 장기수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기담의 영역에서 그는 금지(金池), 즉 황금연못으로 상징되는 할애비의 역사적 상상력을 계승하는 인물이다. 할애비의 역사적 상상력은 매우 기괴한 양상으로 표출된다. 할애비의 역사적 상상력은 조선 말기의 혼란부터, 원산총파업의 현장을 넘어 을사조약과 의병투쟁, 그리고 일제시대 만주의 마적의 기억으로 까지 확장된다. 결국 할애비는 현실적인 주체가 아니라 우리 근대사의 기억들을 집약적으로 체현한 하위 주체들의 표상이다. 빵덕모자 빵덕이 아저씨는 해방 이후 현대사의 기억들을 통해 할애비의 역사적 상상력을 계승한다. 그는 남쪽과 북쪽을 모두 어둠으로 표현하며 “감옥소 안이나 밖이나 다를 게 없드라”(102쪽)는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남과 북, 그리고 감옥 안과 밖 어디에나 가득한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현실 세계의 모순을 체현한 표상이다. 이는 「달팽이가 있는 별」의 영득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실의 영역에서의 영득은 “미친 것이 분명”(190쪽)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의 별로 상징되는 기담의 영역에서는 “영득이와 제주도 신부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얼마든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얼마든지 소주를 마실 수 있었으며, 그들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203쪽)고 서술된다. 그런데 영득이로 상징되는 기담의 상상적 공간을 박탈하는 것은 누구인가? 영득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직후 “북괴 찬양 어쩌고 하는 혐의”(206쪽)로 경찰에게 체포된다. 즉, 영득의 기담은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되어야만 하는 불온한 텍스트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담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 세계가 사실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 표상임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신부는 과연 동석의 아내인가, 영득의 아내인 순기인가. 현실에서는 답이 자명한 이 물음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라는 방법론적 회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담이다.

최인석의 기담은 논리적인 언술체계로 수렴되지 않는 하위 주체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표현하는 언술 형식이다. 그것은 「목숨의 기억」과 같이 우리 근현대사의 모순의 심연을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황금연못’과 ‘수궁’의 꿈으로 극복하려는 시도이며, 「달팽이가 있는 별」과 같이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회의하게 만드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최인석의 기담이 제기하는 윤리의 문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번 소설집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는 하위 주체 내부에 잠복해 있는 모순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다. 이는 「달팽이가 있는 별」에서 하위 주체의 언술 형식을 상징하는 영득을 경찰에 신고한 것이 지배계급의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의 부모였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나의 부모는 개인택시 면허를 얻기 위해 영득을 북괴를 찬양한 것으로 신고한 것이다. 「미미와 찌찌-盆地에서 노래하는 앵벌이」에서 어미를 장사지내기 위해 찌찌가 선택하는 방법은 그의 아버지가 당한 것과 같이 “부랑인 노숙자에게서 주민등록증과 인감증명을 빌려 대출도 받고 자동차도 샀다 팔고 신용카드도 만들어 물건을 사서 팔아먹고 휴대전화도 가입하여 빌려주고 팔아먹고…… 하는 것”(169쪽)이다. 그리고 「내 님의 당나귀」에서 순이를 장기매매업자에게 팔아버리는 순이 아비는 사실 나의 분신이다. 즉 최인석의 소설에서 하위 주체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아니라 바로 하위 주체 내부의 비윤리적인 욕망이다. 하위 주체의 정치적 (무)의식의 표현 형식으로서의 기담은 바로 하위 주체 내부의 모순에 의해 붕괴된다. 그의 기담은 하위 주체 내부의 모순에 대한 성찰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왜냐하면 근대적 주체의 내면의 고백으로서의 근대 소설이 바로 근대적 주체의 붕괴로 인해 위기에 처한 지금, 하위 주체의 언술 형식으로서의 기담은 스스로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부터 자신을 복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부르주아의 독백으로부터 하위 주체들의 언어적 카니발로 나아가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3. B급들의 카니발과 만담의 정치적 상상력

최인석의 기담이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 세계를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면, 이기호의 만담은 다른 방식으로 하위 주체들의 언술 형식을 구성한다. 만담이라는 언표가 표상하는 것처럼 이기호의 소설은 부르주아적인 고상한 언술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를 통해 하위 주체들의 언술의 카니발적 성격을 복원시키는 것이 이기호의 만담이다. 이러한 만담이 정치적 상상력과 결합되어 형상화 된 것이 그의 두 번째 소설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2006)이다.

예컨대 「나쁜 소설」은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즉, 근대 소설의 읽는 행위 대신, 구술 행위로서의 이야기가 복원된다. 이는 부르주아적 근대소설이 지니는 독백적 성격을 상호 교감을 통한 카니발적 언술로 전복시키는 전략이다. 따라서 「나쁜 소설」이 ‘당신’이라는 2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단단한 주체로서의 문사(文士)의 발화가 아닌, “나이는 서른두 살, 서울시 9급 행정직에 응시했고”, 그것이 “연령 제한에 걸리지 않는 마지막 시험”(19쪽)인 ‘당신’의 발화. 이 ‘당신’은 근대 소설의 담당층인 문화적 엘리트가 아닌 하위 주체의 표상이다. 그의 소설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어떤가. 그에게 소설은 근대적 인과성에 기반한 필연적인 플롯을 지니는 장르가 아니라 “소설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만큼 나온다고. (……)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269쪽)라고 인식된다. 이기호식 리얼리즘은 ‘살아온 이력’, 즉 구체적인 삶에서의 발화 형식이다. 이것은 문화자본으로부터 소외당한 하위 주체들의 발화 형식의 특징이다. 따라서 결국 이기호의 소설은 「수인」에서 보이듯 고상한 작업이 아닌 ‘곡괭이질’로 상징되는 단단한 벽을 부수는 ‘노동’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의 ‘곡괭이질’이 부수는 단단한 벽은 무엇인가. 이기호의 B급의 삶(B급의 삶이야말로 하위 주체들의 삶이 아닌가!)을 사는 인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술들을 전복시킨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에서 주인공과 명희의 행복한 “밝고 연한 초록색의 공간”(89쪽)은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땅굴 발굴 조사단’이라는, 노란 완장을 찬 사람들”(91쪽)에 의해 파괴된다. 반공과 안보의 언술, ‘땅굴 발굴 조사단’과 경찰서, 국정원의 고상하고 준엄한 심문의 언술은 주인공과 명희에게는 다만 “흙 먹고 싶어서 내려간 건데요”(91쪽)라는 대답으로 희화화된다. 「국기게양대 로망스」에서 신성한 국기게양대는 변태성욕자의 ‘사랑’의 대상으로 추락한다. 이 순간 ‘국보법’이나 ‘국가’는 ‘사랑’앞에서 그 힘을 잃는다. 반공, 안보, 국가 등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술들을 B급의 삶을 통해 전복시키는 것이 이기호의 만담이 지니는 힘이며, 근대 소설의 엘리트적 속성을 넘어서는 언술 형식으로서의 만담이 복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지점이다.

따라서 많은 평자들의 지적과 같이 이기호가 형식적 새로움에 비해 정작 그 내용의 새로움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기호의 만담이 단지 기존의 지배적인 언술 형식을 전복시키는 것에 그친다면 그러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그의 만담은 B급들의 사회적, 역사적 인식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기호는 이미 「백미러 사나이」에서 박정희로 상징되는 군사독재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고하게 우리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형상화했으며, 「간첩이 다녀가셨다」에서는 우리의 비윤리적 욕망의 공모가 분단체제를 용인하는 근본적인 동인임을 밝혀냈다. 이러한 이기호의 정치적 상상력이 보다 확장되어 B급들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이번 소설집의 가장 큰 성과이다.

앞서 살펴본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에서 주인공이 ‘흙’을 먹게 되는 것은 강고한 레드 콤플렉스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기호는 단지 레드 콤플렉스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치아에 있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입맛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의 한계를 미리 그어버리도록”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우리 책임”(57쪽)이 크다.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발랄한 정치적 상상력을 스스로 검열하는 B급들의 삶의 방식 자체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B급들의 카니발적 상상력을 통해 ‘흙’을 ‘일용한 양식’으로 재인식해내는 것이 이기호의 전략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지배 이데올로기들의 표상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면, 대안은 B급들의 상상력을 통해 이들 표상을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호의 대안은 역사적 상상력으로까지 이어진다.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는 하위 주체들의 역사가 어떻게 복원되고 치유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할머니는 글을 모른다. 따라서 오직 구술되는 이야기만으로 자신의 삶과 역사를 기억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한국전쟁 당시 조카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죄의식이 있다. 좌익과 우익,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 간의 갈등 이전에 구체적인 삶의 위기로서의 전쟁과 그 가운데에서 생존과 윤리의 문제가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진행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공식 역사 속에서 소거 당한 하위 주체들의 역사를 직시하고 이를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서 소설가로 등장하는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자신의 소설의 원천임을 고백한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로 상징되는 하위 주체들의 공식적인 담론의 장에서 배제된 언술들이 ‘나’의 소설의 원천이며, 그 언술들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윤리로서의 역사를 복원시키며 치유하는 힘이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추상적인 언술들은 구체적인 하위 주체들의 삶을 역사의 장에서 지워버린다. 그러나 ‘글’이 아닌 할머니의 ‘이야기’는 남과 북의 지배 이데올로기간의 전쟁이 하위 주체들의 삶에 어떤 폭력으로 다가왔으며, 그때 하위 주체들에게 생존과 윤리의 갈등은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소설가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만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라고 말할 뿐이다. 그 마저도 할머니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 채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이야기’가 지니는 삶의 구체성은 근대적인 ‘소설’이 담아 낼 수 없는 언술이기 때문이다.

만담은 한 편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술을 전복시키는 카니발적 성격을 지닌다. 만담은 동시에 B급들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기호의 소설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의 만담이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술을 일회적으로 전복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B급들의 상상력을 통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공과 안보, 국가와 이념과 같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을 넘어선 “글을 깨치기 전, 오직 목소리로만”(238쪽)구성되는 하위 주체들의 언술로 구성된 세계이다. 이 언술을 통해 우리는 B급들의 삶을 규정하는 현실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고, 그 상상력을 통해 우리를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적 표상 자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이기호의 만담이 지니는 정치적 불온성이며 그의 소설이 B급들의 삶을 복원시키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4. 다시, 하지만 새로운 정치적 언술을 위하여

언제나 정치적 언술로서의 소설은 존재해왔다. 가깝게는 80년대 리얼리즘 문학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언술은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선험적인 근대 소설의 규정 안에 자신을 가두어두었기 때문에 정작 지배적인 언술 형식과 구별되는 하위 주체들의 언술 형식을 실험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적 언술은 결국 문화자본을 소유한 양심적 엘리트들이 하위 주체의 일부분을 텍스트에 반영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진정 하위 주체들의 정치적 언술 형식을 복원시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보다 부르주아적 근대 소설의 규정을 넘어서는 하위 주체들만의 ‘낮은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최인석과 이기호는 각각 기담과 만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하위 주체들의 새로운 정치적 언술 형식을 보여준다. 기담은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하위 주체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발현시키며, 만담은 B급들의 언어적 카니발을 통해 강고한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며 이를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최인석과 이기호가 보여주는 기담과 만담은 그 형식적 새로움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들의 모색은 하위 주체들의 새로운 정치적 언술 형식을 생성시키는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작업은 어렵지만 낙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달팽이가 있는 별’(최인석)과 ‘곡괭이’(이기호)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장성규․1978년 서울 출생

․2007년〈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

추천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