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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서평/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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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54회 작성일 08-03-01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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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윤지영 시집 <물고기의 방>

■박현수 시집 <위험한 독서>



언어를 통해 보는 삶, 삶을 통해 보는 시
강 수|시인

1.


언어는 삶을 비추는 하나의 프리즘이다. 추상적인 통합체인 삶은 이 언어(言語)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날이미지로 현현(顯顯)한다.

시인은 그러한 언어를 살아간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단순한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합목적성(合目的性)을 지닌 주체이다. 사람이 언어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람을 살아가는 것이다. 언어가 사람의 영혼을 구축하고, 언어가 사람의 삶을 지배한다.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생리를 터득한/터득해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언어에 집착하는 것이고, 언어의 정수(精髓)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한 두 시집을 보고 있다.


2.

윤지영의 <물고기의 방>은 시인의 언어에 대한 감각이 얼마나 다양하고 깊은 진폭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 다양성과 진폭의 깊이는 결국, 상상력의 확산을 가져오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양상은 시인이 언어의 두 측면, 그러니까 기표(시니피앙)과 기의(시니피에)의 틈새로 내려가, 일상적이고 사전적인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제 2, 제 3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맺어내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다음 작품을 보자.


어느 날, K는 P에게 차돌 하나를 주었다 검고 작은 심장이라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문질러 주라고 온기가 전해져 숨결이 돌면 차돌에 박힌 하얀 새가 날아갈 거라고//그보다 오래 전 어느 날, J는 K에게 차돌 하나를 주었다 항상 네 눈만 바라보는 별이라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남쪽 하늘에 박혀 항상 따라다닐 거라고//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 P는 J에게 차돌 하나를 주었다 네게 불러주고 싶던 노래라고 매일 밤 내 그리움의 노래를 들으며 잠들라고//지구에는/아주 오래 전부터/어디서 막 굴러먹던 돌들이/크고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돌고 있었다

―「We are the world」 전문


이 시에서 ‘차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인은 그것을 ‘작은 심장’, ‘하얀 새’, ‘별’, ‘노래’ 등으로 재명명(再命名)하여, 기의의 진폭을 넓히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망을 해석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작은 심장, 하얀 새, 별, 노래’의 기의는 무엇인지 또 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기표의 유희(遊戱)이다. 의미의 매듭을 맺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독자이고, 이런 면에서 시인은 독자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준 셈이 된다. 그렇다고, 일부 시인들처럼 현학적인 체하거나, 이미지나 언어에 휘둘려 시를 통제하지 못하여 그 기표와 기의의 물살에 휩쓸려 나가는 우(愚)를 범하지는 않는다. 그 역할을 해 주는 것은 이 시의 주조를 이루는 정서(情緖)이다. 이 시의 주조를 이루는 정서는 ‘그리움’인데, 이 정서는 이 시 전체의 의미망을 직조(織造)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이 시를 보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게 되고, 그러한 심정으로 이 시의 시어들을 하나씩 해석해나가게 된다. 그 결과, 우리가 궁금하게 여겼던, ‘작은 심장, 하얀 새, 별, 노래’ 등은 결국, ‘그리움’의 1차 변형인 것이며, 그것들이 모여 ‘차돌’이라는 2차 변형으로 응축된 것이라는 비밀을 풀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차돌을 주고받는 주체(主體)를 살펴보자. 이 시에서는 P→J, J→K, K→P의 순서로 설정되어 있고, 하나로 이어보면 ‘P→J→K→P’의 순환고리를 추출해낼 수 있다. 우선, 왜 그 주체를 알파벳 이니셜로 제시했을까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그리움’의 문제와 과정의 보편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테면 문명인이나 비문명인이냐를 막론하고, 때로는 P이고, J이며, K일 수 있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그 순환 양상인데, 여기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그리움’의 ‘주체’이면서 ‘객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리움’은 돌고 도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그리움’에 감염되고, 서로에게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묘미는 막판의 반전에 있다. ‘막돌’은 ‘잡석(雜石), 아무 쓸모없는 돌’이다. 시인은 ‘그리움’을 ‘막돌’로 치환한다. 이제 ‘그리움’은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잡석이나 다름없다. 너무 흔해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리움’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흔해빠진 것이지만, 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움’인 셈이다.

‘그리움’은 무엇인가의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 ‘결핍’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리움의 끝에 네가 맺혀 있다’(「그리움의 원형」), ‘요추 3번에 모여드는 너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자각하며’(「웰빙시대의 명상법」), ‘지긋지긋한 내 병이 시작되는 곳에 그가 있지, 금 간 병을 베고 잠만 자는 그의 병은 서풍이 불 때마다 배를 띄우는 것’(「발병일기」) 등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실존의 위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무엇인가로 채워야 하는 데, 채울 것이 없을 때, 그것은 깊은 우울이 되며, 결국 실존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기도 한다. 다음 작품을 보자.


가거나 말거나/울거나 말거나/지거나 말거나//그래서 나는 가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지지도 못합니다//가지도 말거나/울지도 말거나/지지도 말거나//그래서 나는 바람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꽃도 아닙니다//그래서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닙니다//여우비 오는 내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우비 오는」 전문


‘여우비’는 ‘볕이 난 날 잠깐 뿌리는 비’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비도 아니고 맑은 것도 아닌’ 그 경계에 내리는 비인 셈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판단유보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적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극심한 존재의 혼란이며,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 놓여있는 경계의 삶에 다름 아니다. 이 시의 화자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셈이 된다. 그러니까, 이 시의 화자에게는 ‘여우비’ 내리는 삶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결핍’의 이러한 양상이 개인의 실존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담장 밑의 아이들」 연작에서는 사회적 실존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상은, 윤지영 시인의 시적 관심의 이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개인적 내면의 결핍을 사회적 결핍의 문제로 확산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의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지하, 아침은 늘 반쯤만 찾아 왔다/반쯤 투명한 햇살이 창턱을 반만 넘어 들고, 창가의 제라늄이 반만 꽃잎을 벌리는 아침, 반쯤 벌어진 꽃잎 사이로 고물장수의 발만 보였다. 아침밥을 반도 먹기 전에 덫에 걸린 쥐새끼가 반쯤 열린 부엌문 뒤에서 단발마의 비명을 흘리는 아침의 연속이었다/반지하의 시계는 언제나 반 박자씩 늦게 갔고, 주인집의 시계는 반 박자씩 앞서 갔다. 시계 바늘과 시계 바늘이 만든 공터에서 반지하의 아이가 반쯤 졸다 반쯤 깨는 사이 저무는 반나절, 누렇게 뜬 어느 봄날//어느덧/반지하에도 밤이/밤만은 온전히/찾아오곤 했다. 반쯤 흐릿한/형광등을 켜도 바퀴벌레가/도망가지 않는 방이었다

―「반지하 생활자의 아이-담장 밑의 아이들 1」 전문


시인은 ‘반지하’라는 공간의 ‘반(半)’이라는 어휘에 주목한다. 반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만 충족되어 있고, 나머지 반은 결핍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공간에서는 무엇이든 반(半)밖에 얻을 수 없다. 심지어 보고 듣는 것,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 그리고 잠까지도 그들을 외면한다. 이것은 경제적 궁핍이 결국에는 실존적 궁핍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밤은 공평하게 내리는 역설적 상황. 아무리 어둠을 밝히려고 해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삶. 그것은 어떤 노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궁핍을 드러내는 것이며, 내면적 실존적 결핍의 현현(顯顯)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윤지영 시인의 눈은 ‘비어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적․사회적 결핍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시집의 화자들은 대체로 고독, 우울, 그리고 판단유보의 혼란스러운 정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결핍’에 대한 시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과 갈등이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는 것은, 시인이 그러한 모든 외부적 사건과 사물들을 내면으로 끌어들여 자아화(自我化)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아화(自我化)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내포하며, 자기반성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진실성을 담보해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는 그러한 면을 잘 드러내 준다.

나는 왜 웅덩이처럼 우울한가, 나는 왜 커서처럼 꿈뻑거리는가, 나는 왜 일회용 컵처럼 초조하고 돌멩이처럼 퉁명스러우며 책상처럼 지루한가, 나는 왜 거울처럼 위선적이고 빨간 풍선처럼 신경질적이며 좌회전 신호처럼 잘 웃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내가 한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이유」 중에서

지금까지 윤지영 시인의 시집을 ‘그리움’이라는 화두를 통해 살펴보았다. 시인의 감각적인 언어감각과 상상력의 진폭을 확대시켜주는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개인적 정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움’이라는 ‘개인적 결핍’을 사회․경제적․실존적 결핍으로 확대하는 안목, 그리고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아성찰, 외부 사물과 사건을 내면화시키는 솜씨가 잘 드러나고 있다.


3.

박현수 시인의 <위험한 독서>는 정말 위험하다. 그는 시를 통해 삶을 보는 것이 아니고, 삶을 통해 시를 본다. 시적 발상 자체는 단순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곧 책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니까. 아니, 삶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가 그렇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온 우주는 한 편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원고를 쓰고 각주를 달며 수정해가는 집필과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시집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러한 모티프 때문이 아니라, 온 우주적 삶을 통찰하는 인식의 깊이 때문이다. 다음 시를 보자.


말없음표처럼/이 세상/건너다 점점이 사라지는/말일지라도/침묵 속에 가라앚을 꿈일지라도/자신을 삼켜버릴/푸르고 깊은 수심을 딛고/떠오를 수밖에 없다/떠올라/저 끝을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수면과 간신히 맞닿으며/한 뼘이라도/더 나아가기 우해/수평선을 닮아야 한다, 귀는

―「물수제비」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아마, 강가의 넓적한 조약돌을 골라 던졌을 것이다. 그 조약돌이 그의 손 안에서 떠나는 순간, 그는 ‘조약돌’로 전화(轉化)된다. 그리고, ‘조약돌’과 함께 물을 건너는 것이다. 이 선명한 이미지에서부터 깊은 실존적 울림이 퍼져 나온다. ‘물’은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형적 상징의 의미망에서만 봐도 그렇다. 그것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물처럼 죽음의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수많은 생명의 원형적 에너지로서의 의미, 즉 모태(母胎)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에서는 그 두 가지 역설적 의미망을 모두 수렴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의 ‘물’은 ‘수면 위는 삶’, ‘수면 아래는 죽음’이라는 대립적 의미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조약돌’이 ‘수면 위의 삶’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면 아래의 죽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이 그렇다. 모든 것이 이러한 이항대립적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그 경계를 외줄타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위 시에서 ‘수평선’이 주목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건너가기 위해서는 수평선을 닮아야 한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죽음이기 때문이다. 수평선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영역이다. 우리의 삶은 바로 그 경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그 경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박차고 튀어오를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조약돌’은 수면 아래로 내려앉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수직적 공간 체계를 ‘수면(수평선)’, ‘수면 위’, ‘수면 아래’, 이렇게 세 부분으로 보면서, ‘수면’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영역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앞에서 본 것처럼, 이 세상을 단지 ‘이항대립적 관계망’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제3의 공간을 간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바로 이 제3의 공간을 주목하고,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한, 집념.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살기 위해, 한 뼘이라도 더 너아가기 위해 ‘수면’을 박차오르는, ‘수면’과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쓰는,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이다. 우리 삶이 써가는 시(詩)이다. 그러한 삶에는 구구하게 말(語)이 필요없다. 온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몸부림이 있기 때문이다. 경건함이 있기 때문이다. 꿋꿋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시는 박현수 시인이 우주의 언어를 어떻게 해석해내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는 믿는다/아니, 믿고 싶어진다/의미라든가 의도 같은 것을/납덩이 같은 중심을/보이지 않는 심해에 드리워진 닻을/아니, 닻 같은 것을/수면에 흔들리는 건/개구리밥풀 같은 몇 음절의/풀잎이라는 걸/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어서/내게로 흘러들어온 삶과/내게서 흘러나간/회한을 견딜 수 없어서/그러니 낚시추만 한 닻 위에/연잎처럼 무성한/말들을 부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연잎」 전문


여기서 수면은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를 나누는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수면 위에 떠 있는 ‘개구리밥풀’이나 ‘연잎’같은 것은 기표인 것이며, 그 밑에 닻처럼 가라앉아 있는 것, 즉 의미, 의도, 중심, 닻 등은 기의이다. 그런데, 화자는 ‘연잎’을 부러워한다고 한다. 우리 삶의 격랑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중심․닻․기의보다는 그 삶의 수면 위에 무성한 연잎․말․기표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 밑에 무수한 의미․중심․닻․기의가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의 의미․중심․닻은 우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자가 ‘연잎’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 ‘연잎’이 우주의 몸이며, 그것을 통해 우주가 전하는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현수 시인은 우주 만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탐구하고, 그것을 발견하는 서지학자이다.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을 읽는다. 그러한 양상은 ‘채석강 앞에서 서면/서지학자처럼/지치고 눈이 아프다’(「채석강」), ‘서지학은/얼마나 헛된 학문일 것인가/가장 가까이 있기에/한 번 펼쳐/보았다가 나는 결혼했다/한 번도/독파된 적이 없는 난해한 서적과’(「위험한 독서」)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박현수 시인이 지향하는 것은 시(詩)이다. 그의 삶은 시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犧牲)이다. 황소이다. 뚜벅뚜벅 시(詩)를 향해 우직하게 걷는 소의 걸음을 그의 시에서 느낄 수 있다.


시총(詩塚) 가는 길은 아무도 모른다/세월은 물처럼 빈틈없이 스며들어/물 아래 옛 길을/물고기에게 내주었지만/시총을 세운/마음들은/노을 속에서 오래도록 젖지 않는다

―「시총(詩塚)·1. 촉도난」에서


이 세상 어딘가에/시가 묻혀/있을 무덤을 생각하면/생은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문장이 삼백예순의 뼈를/이루고 글자가/수억의 피톨로 떠돌고/문맥이 좌청룡/우백호를 타고 흐르며/한 생을/거뜬히 대신하고 누워 계신/시를 생각하면/시는 영혼이라는,/시는 몸 너머에 존재한다는/오랜 믿음들/문득, 후멸로 돌아간다

―「총(詩塚)·3. 촉도난」에서


‘시총(詩塚)’에 대한 설명을 보면, ‘임진왜란때 전쟁의 이슬로 사라진 정의번의 유해를 찾지 못하여 그 사람이 생전에 지은 시를 묻어 무덤을 만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지금, 그 시총(詩塚)은 찾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나은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있을 시총(詩塚)은 이미 하나의 이상적 공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시가 그 주인인 사람을 대신한다. 시총(詩塚)은 기표(시니피앙)이고 그 속에 묻혀 있는 것은 기의(시니피에)이다. 시총(詩塚)은 기표(시니피앙)이고 정의번은 기의(시니피에)이다. 그런데, 시인 정의번의 무덤은 없고 시의 무덤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을 대신한다. 맞다. 시는 몸 너머에 존재한다. 아니다, 시가 몸이다. 시인들이여. 모두 시총(詩塚) 하나씩 남기시기를. 박현수 시인은 이 말을 하고 싶었으리라.

지금까지 박현수 시인의 시를 기표와 기의의 관계망을 중심으로 살펴본 셈이다. 그 결과, 박현수 시인의 시에 대한 관점과 언어관을 살필 수 있었고, 그가 지향하고 있는 삶의 단면들을 살필 수 있었다. 사실, 이 시집을 읽어보면, 그의 시들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시들과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큰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살핀 것처럼, 그만의 독특한 언어관과 시의 철학을 지니고 있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너무 중언부언했다. 집 한 채 잘 지었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4.

프리즘이라는 어휘가 이 두 시집만큼 잘 어울리는 시집도 없는 것 같다. 나름대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두 시인이지만, 두 시인 모두 언어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상상력의 풍요로움과 다양성, 삶에 대한 천착의 폭과 깊이. 이 두 시인의 다음 시집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 수․19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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