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6호 권두칼럼/백인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21회 작성일 08-03-01 01:38

본문

권두칼럼
‘거울이 아니라 창문’으로 문학하기



21세기의 중심을 향해 매년 학기가 새로 바뀔 때마다 개인적으로 ‘강의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필자가 맡고 있는 교양과목은 대체로 문화, 매체, 문학을 주 내용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는데, 문학에 집중할 것이라는 일부의 오해와는 정반대로 문화나 매체를 주제로 할 때 훨씬 힘이 덜 들고 반응도 좋다. 물론 필자의 역량과 출강하는 학교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체험은 ‘문학의 위기’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거대담론과는 달리 문제를 일상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의사소통 양식에 따라 인류의 발전사를 간략하게 기술해 보면, 구술언어 중심세계, 문자언어 중심세계, 영상언어 중심세계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술언어에서 문자언어로의 전환은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를 기점으로 하고, 문자언어에서 영상언어로의 전환은 기술적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정보 전송 방식의 변화를 기점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름대로의 장점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는 정보를 교환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다시 말해 일반인들의 준거점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비교 항 중에서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시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구술언어 영원이나 반복을 믿는 원적인 시간관을 가졌다면 문자언어의 경우에는 역사나 진보를 믿는 선적인 시간관이라 할 수 있고, 영상언어는 시사성이나 사건에 주목하게 되는 점의 시간관을 드러내게 된다. 이들 각 언의 매혹의 패러다임을 보면 구술언의 경우에는 신비나 도그마, 서사시 등의 성격을 내포하는 신화가 주류였고, 문자언어는 유토피아나 시스템 등을 형성하는 이성이었으며, 영상언어의 경우 정서와 환상의 창조를 우선시하는 영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각 언어의 주체성 형성의 중심에는 영혼과 의식, 몸이 놓이게 된다.
맥루한의 견해에 따르면 문자와 인쇄 매체가 부족적인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분리된 개인의 집합체로 바꾸어버렸지만 전기서자電氣書字는 속도를 이용해 순간적으로 다른 모든 인간과 관계되는 문제를 사람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인류 가족은 또 한번 부족이 될 수 있다. 근대는 바로 문자 문화의 시대로서 오관을 골고루 사용하던 구어의 시대의 인간과는 달리 편향적이고 조각난 인간을 만들었고 새로운 미디어들에 의해 열리게 된 영상의 시대는 이러한 구어적 시대의 전인을 회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 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영상언어 중심세계의 입구에 서 있는 말이 된다. 이러한 시대적, 정신적 배경 앞에서 ‘책’을 만들고 출판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일까? 미력이나마《리토피아》는 이러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구해보고 싶었다.
일찍이 김우창은 한국문학이 ‘돈’과 ‘매스미디어’라는 두 ‘신神’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지적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이번 호의 특집을 ‘예술과 돈의 사회사’라는 제목으로 정해보았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한낱 종이가 지폐로 변하는 연금술을 논하면서 인간이 ‘자본’을 얻음으로써 세 가지 고통스러운 손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 의미를 잃어버렸다. 두 번째는 안정에 대한 걱정, 그리고 세 번째로는 향상된 복지수준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더 많은 근심, 특히 자신의 부와 그것을 얼마나 더 성취 가능한가에 대한 근심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무수히 발간되는 문학잡지들이 ‘구텐베르크 은하’의 마지막 유성들이 아닐까 싶어 안타깝다. 또한 그 중의 일부는 종이를 지폐로 바꾸려는 문화적 연금술의 술수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릴케는 일찍이 사물의 내부를 투시하고 싶은 욕망을 ‘거울이 아니라 창문’이라고 쓴 바 있다. 요 며칠, ‘거울’과 ‘창문’이 눈앞과 목 안을 맴돌고 있다. 자꾸 되새길수록 부끄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번 호에 대한 세세한 내용은 이 책을 펼쳐든 독자들의《리토피아》에 대한 굳은 사랑을 믿기에 목차와 내용에서 확인하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백인덕(본지 편집위원, 시인)
추천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