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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특집/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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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돈, 그 먼 거리의 역설
이경수|문학평론가
1. ‘돈의 등장’이라는 사건
근대 이후의 시에서도 ‘돈’은 소재로든 주제로든 시에 들어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시인들의 관심은 돈이 없고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돈이 없음으로 인해 유발되는 정서를 향하고 있었지 돈 자체는 아니었다. 가난이 시와 운명적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면, 시와 돈 사이의 거리는 그만큼 멀다고 할 수 있겠다. 근대의 도시 문명은 시인들에게 때로는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소외감을 일으키는 환경이었고 때론 극복해야 할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그 구체적 산물 중 하나인 자본과 돈에 시인들의 관심이 향하기까지는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사실 김수영에 앞서 이상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시 돈과 자본에 대한 관심은 시가 아닌 소설로 주로 드러냈다. 이상의 소설을 돈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견해들은 종종 눈에 띄지만, 그것이 시 작품에까지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김수영은 드물게 「돈」이라는 시를 직접 쓰기도 해서, 시 작품에 ‘돈’이 하나의 소재이자 주제로 등장한 사건으로도 김수영의 「돈」이라는 시는 기억될 만하다.
나에게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 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3, 4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어린 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김수영, 「돈」(김수영전집 1-시, 민음사, 2003) 전문
1963년 7월 1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돈」의 전문이다. 4․19 직후 4․19 혁명의 정신에 공감하며 역동적인 시를 발표한 김수영은 4․19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바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급격한 침체기를 겪는다. 1961년 6∼8월 사이에 발표한 「신귀거래」 연작시들은 시적인 퇴행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도피적인 심리를 내보이며 상처 입은 시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돈」은 바로 이런 침체기를 지나서 발표한 시이다.
사실 시의 제목이 ‘돈’이긴 하지만 시를 읽어 보면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고 할 만큼 시적 화자가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30원 여유가 생겼다는 것에 스스로 대견해할 만큼 그는 돈과는 인연이 없었던 셈이다. 살면서 그 역시 무수한 돈을 만져 왔겠지만 결국은 헛 만진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결국 그는 모처럼 생긴 여윳돈을 잘 쓰는 대신 한 삼사일을 그저 가지고 있기만 한다. 그러나 돈이라는 건 대개 쓰지 않고 가지고만 있어도 문제를 발생시킨다.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처럼 돈이 있음으로 인해 돈을 집어가는 누군가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은 아이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다. 언젠간 없어질 돈이므로 그는 “내 돈이 아닌 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환가치를 지닌 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시인의 판단일 것이다.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화자와 함께 한 돈”은 결국 돈을 소유하고 있을 때의 화자의 심경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바쁜 돈”이라고 화자는 말하지만, 정작 바쁜 것은 돈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자 돈을 소유하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못한 동안의 심리 상태일 것이다.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에 “돈의 비밀”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바로 본다는 것은 결국 그 본질을 본다는 것인데, 무수한 돈을 만지고 돈에 집착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돈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가리켜 시인은 돈을 정시하지 못한다고 한 것일 게다. 어쩌면 김수영은 이미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자본의 막강한 위력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시인이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 것도, 또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옹졸하다고 느끼며 자조하는 것도 돈이 교환가치를 지닌다는 것과 야경꾼들과 소시민 뒤에 숨어 자본을 움직이는 실체가 있음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임스 띵」에서 인수인계할 신문배달 아이를 데리고 신문 값을 받으러 온, 제임스 딘을 닮은 책임자에게 시인이 화를 낸 까닭도 따지고 보면 그가 주어야 할 것이 “신문값만이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제임스 띵”은 문명의 혈세를 강요함으로써 그의 짜증과 노기를 자아냈고 결국에는 정적과 침묵을 그에게서 빼앗아가 버렸다. 부당하게 지불해야 하는 돈은 단지 교환가치로서의 물리적 액수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함을 시인은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신문배달 아이들까지 데려와 신문 값을 강요하는 책임자가 하필 미국 문화의 상징적 아이콘인 제임스 딘을 닮았다는 것 또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다분히 의도적인 장치이다.
김수영은 돈에 관한 시를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몇 편의 시를 통해서도 오래 기다려 온 만큼의 날카로운 인식을 보여주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시인의 직관으로 꿰뚫어본 것이다. 김수영의 출현 이후, ‘돈’은 우리 시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종종 시의 소재나 주제로 활용된다.
2. 세속 도시와 자본의 권능
돈이 우리 시에 등장하기까지는 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근대화가 진행된 이후의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띠게 되면서 ‘돈’ 또는 ‘자본’이 한국 현대시의 주요한 시적 주제로 등장하게 된다. 세속 도시에 넘쳐흐르는 위험하고 노골적인 욕망을 그린 시들은 자본의 권능에 주목한다. 무소불위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존재가 자본임을 시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규원은 “이 시대의 순수시”는 “음흉하게 불순해”질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다. ‘사랑’과 ‘시대’와 ‘꿈’마저 목적 달성을 위한 한낱 도구이자 상품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라고는 고작 “매주 주택복권을 사는 자유, 주택복권에 미래를 거는 자유”뿐이거나, “지각 안하고 출세 좀 해볼까 하고 봉급 봉투 털어 기세 좋게 택시 타고 출근하는 자유, 찰칵찰칵 택시 요금이 오를 때마다 택시 탄 것을 후회하는 자유. 그리고 점심 시간에는 남은 몇 개의 동전으로 늠름하게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유”(「이 시대의 순수시」) 정도임을 그는 바로 알아차린다.
성경에 가라사대 마음이 가난한 者에게 福이 있다 하였으니
2백억을 축재한 사람보다 1백 9십 9억을 축재한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1백 9십 9억 원 축재한 사람보다 1백 9십 8억을 축재한 사람 또한 그만큼 더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그보다 훨씬 적은 20억 원이니 30억 원이니 하는 규모로 축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돈 이야기로 詩라고 써놓고 있는 나는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궁상맞은 시인이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오규원, 「마음이 가난한 者」(오규원 시전집1, 문학과지성사 2002) 전문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성경 구절을 패러디하고 있는 인용 시에서 오규원은 2백억과 1백 9십 9억과 1백 9십 8억을 가진 어마어마한 부자를 비교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성경의 구절을 비틀어 놓는다. 날마다의 끼니를 걱정하던 과거에 비해 오늘날은 절대적 빈곤의 수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이 가중됨으로써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심해졌다.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상대적 박탈감과 결핍감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2백억 가까이 되는 돈을 소유한 사람에게 1억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부와 가난을 판단하는 기준이 상대적이 되면서 그 작은 차이로 “天國은 그의 것”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 시대에는 가난과 부를 판가름하는 기준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낳을 수 있음을 시인의 직관으로 꿰뚫어본 것이다.
그러나 오규원조차도 ‘돈’과 같이 세속적인 주제로 시를 쓰는 일에 대해서는 모종의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돈 이야기로 시라고 써놓고 있는” 자신을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궁상맞은 시인”이라고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궁상맞은 시인이야말로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보다는 천국에 어울리는 존재임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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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토지등급정기조정결과통지서
이 시대에는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실한 사연이 아닌가
―함민복, 「자본주의 사연」(자본주의의 약속, 세계사, 1993) 전문
언젠가부터 우편함에는 사연 있는 편지 대신 각종 납부통지서들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 중에 간혹 납부기간을 경과한 데 따른 독촉장이 끼어 있기도 하다. 이메일은 오고가도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드물어졌다. 편지와 함께 그것이 담고 있던 낭만적인 상징도 머잖아 사라질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구구절절한 사연에조차 돈이 개입한다. 각종 납부통지서를 통해 돈을 내라고 통보하고 기한이 지났음을 알리며 독촉하는 사연보다 더 절박하고 절실한 사연은 없는 듯 보인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는 함민복은 마침내 하루 종일 지출하는 돈과 그날 하루의 삶을 동일한 가치로 놓는다. “주머니에 남은 삶을 점검해 보다” “전화 삶 150원/담배 삶 700원/버스 삶 250원/지하철 삶 300원/지금까지 산 삶”이 “1400원”임과 “잉여 삶 700원”(「자본주의의 삶」)이 남았음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를 지니고 그것으로만 평가되는 사회.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임을 시인은 정확히 통찰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과 자본 사이에 주객의 전도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자신이 지출한 돈만큼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지출한 돈이 그의 삶을 살아버린 것임을 그는 이내 깨닫는다.
내 재산은 저금통장이나 부동산에 있지 않다. 거리마다 돌아다니는 핸드백과 지갑 속에 현찰로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구태여 저금하고 계약서에 도장 찍으랴. 구차하게 예금청구서를 쓰고 신용카드를 자동인출기에 넣다 뺐다 하랴. 친절하게 세어서 내어주는 돈은 도무지 맛이 없다. 내 손은 거의 움직임이나 소리 없이, 지나가는 돈들을 내 주머니에 정확하게 옮긴다. 그렇게 날아들어온 돈은 비린내처럼 싱싱하다. 주머니에서 펄쩍펄쩍 뛰는 것이 느껴진다.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손이 저 혼자 일을 한 적도 있다. 어떤 아주머니가 백 속에 든 지갑이 없어졌다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어떤 놈이 무례하게 남의 구역에서 일을 하나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살피는데, 뭔가 이상했다. 순간 안주머니를 만져보니 웬 두툼한 지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을 모르게 하라. 하, 내가 그런 경지까지?
돈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쉬지 않고 손에서 손으로 지갑으로 금전등록기로 뛰어다닌다. 우둔한 사람들은 그걸 숨막히는 금고나 저금통장에 가두고 굳이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만들어 안전하게 죽여 잡는다. 죽으면 골치 아픈 숫자가 되는 돈을…… 그러나 거리는 살아 있는 돈으로 가득하다. 인파 속을 미끄러져 들어가면 충성스러운 돈들이 이 주인을 알아보고 주머니에서 핸드백에서 고개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게 보인다. 그래도 난 그 감칠맛 나는 냄새를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언제나 그놈들은 새 주인이 아름다운 솜씨로 낚아채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냥 가만히 놔두어도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김기택, 「소매치기」(사무원, 창작과비평사, 1999) 전문
저금통장이나 부동산으로 부를 축재하기에 바쁜 사람들은 세속도시의 생리를 터득한 사람들이다. 이 도시는 수입의 50퍼센트 이상을 저축하며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현재의 행복보다는 정체불명의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간다. 당장의 행복보다는 안전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현재는 도무지 생기가 없다. 안전하게 죽은 돈들로 넘쳐날 뿐이다. 어디 돈뿐이랴.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생기를 잃은 채 얌전하게 죽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 세속도시의 생리 속에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애초에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김기택의 시는 소매치기의 시선을 빌려 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실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란 총칼만 안 들었을 뿐 훨씬 잔혹한 전쟁인데(「쩐의 전쟁」이라는 만화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얌전하게 거래되는 돈을 시인은 참을 수 없어 한다. 그가 소매치기를 끌어들여 “비린내처럼 싱싱”한 돈, 심장이 뛰듯 “펄떡펄떡” 뛰는 돈을 그려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돈의 생리를 소매치기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
라쿠치나 이탈리아 요리 전채 해산물 모둠 2만 원
전채 해산물 스파게티 3만 원
메인 농어구이 4만 원
디저트 아이스크림 만 원
라마띠에 프랑스 요리 전채 푸아그라 3만 원
전채 랍스터 수프 2만 원
전채 라비올리 2만 원
메인 메로구이 4만 원
메인 쇠고기 안심 스테이크 4만 원
메인 양고기 찹 스테이크 5만 원
메인 농어와 도미 로스트 5만 원
―이승원, 「明」(어둠과 설탕, 문학과지성사, 2006) 부분
이 시의 제목은 ‘明’인데, 밝음의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돈으로 세계적인 최고급 요리를 즐기고, 최고급 호텔에서 머물고, 가격이 3천 3백만 원에 육박하는 명품 스피커를 장착해 음악을 듣고,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최고급 아파트에서 거주한다. 이렇게 사는 삶이 이 시대의 양지에 속함을 시인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暗」이라는 시에서 그와 대조적인 암울한 삶을 보여준다. 이처럼 양극화가 심화된 삶은 돈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明’의 세계가 저 멀리서 손짓하는 세속도시의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늘어갈 때 자본의 권능은 점점 더 막강해져 갈 것이다.
3. 부재/결핍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
더 많은 시에서 돈은 부재不在로서 존재를 드러낸다. 돈이 없음, 즉 가난함은 오래 전부터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로 형상화되어 왔다. 돈과 시 사이의 먼 거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가난을 노래한 시들 중에서도 가난을 자족적인 것으로 그린 시들은 좀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시들은 돈의 논리를 소극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본에 저항하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유형의 시의 앞머리에 백석의 시를 놓을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것은 잠풍날씨가 너무나 좋은탓이고
가난한동무가 새구두를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매고 곻은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것은 또 내 많지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탓이고
이렇게 젊은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짖인것은 맛도 있다는말이 작고 들려오는 탓이다
―백석, 「내가이렇게외면하고」(≪女性≫ 3권 5호, 1938.5) 전문
백석의 시에는 ‘가난한 나’가 종종 등장하는데, ‘가난한 나’를 그리는 시인의 태도는 좀 이중적이다. 백석의 시에서 ‘가난한 나’는 셈이 밝은 세속적인 삶의 태도에 지배되지 않는 ‘깨끗하고 순수한 나’라는 의미를 지닌다. ‘가난한 나’는 흰 빛깔과 친연성을 띠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동반하지만, 백석 시의 주체는 그 안에 자족적으로 기거하려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모습에서 오히려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용한 시에서도 많지 못한 월급을 고마워하는 화자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자족적이라는 느낌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화자의 모습에서 화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쓸쓸함이 전해져 온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이라고 말하며 자기 안의 세계에 칩거하는 방식으로 백석은 일제 말을 견딘 셈인데, 바로 그런 시인의 심리적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백석의 시에서는 ‘가난’이었던 셈이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천상병, 「나의 가난은」(천상병전집-詩, 평민사, 1996) 전문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던 천상병의 후기 시에도 ‘가난’한 시적 화자는 자주 등장한다. 그의 시에서 가난은 종종 행복과 결부된다. 물론 그도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을 정도로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때 행복감을 느끼고, 반대로 돈 걱정을 해야 할 때 서러움을 느끼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가난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가난 속에서도 최소한의 여유를 누리며 자족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상병 시에 나타난 가난은 자발적 가난에 가깝다. 욕심을 버리고 최소한의 것에 만족하며 사는 자족적인 상태를 천상병 시인은 가난이라고 지칭했는데, 그것은 무욕의 경지에 가깝다. 돈을 모아 저축하는 예금통장을 갖지 않으려는 태도는 소유욕에 사로잡히려 하지 않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곳 임대아파트로 이사온 지 내일이면 꼭 1년
월 175,300원 그 임대료가 벌써
두 달째 밀렸네
말렸네 나를 말렸네 피를
말렸네, 극빈
극빈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쪽’도 많이 팔렸구나
그래서
쪽빛顔色이 쪽빛藍色이구나
이것은 pun이 아니라
정당한 진술이다 ‘언표’다
극빈……
‘명령’이다
극빈……
‘번역’이다 극빈
‘반역’이다 극빈
荒原의
body language,
극악한 극빈.
―김영승, 「극빈」(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 나남, 2001) 부분
실제로도 극빈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김영승 시인은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에 실린 몇 편의 시에서 ‘극빈’의 상태에 대해 노래한다. 그가 그리는 가난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경지의 ‘무소유’라기보다는 실제 체험에 바탕을 둔 ‘극빈’에 가깝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극도로 가난한 그 상태를 시인이 무소유보다 더 찬란하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월 175,300원의 임대료도 두 달이나 밀린 상황에서 가장인 화자가 받는 중압감은 분명 작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밀리다-말리다’로 이어지는 펀(pun)을 통해 그것이 자신의 피를 말린다고 고백한다. 낯빛이 쪽빛이 될 정도로 면목 없고 무안한 상황. “쪽빛顔色이 쪽빛藍色”이 될 정도로 ‘쪽’ 팔리는 상황. 그것은 펀(pun)이 아니라 정당한 진술이자 언표라는 시인의 말은 예사롭게 보아 넘겨지지 않는다. 실제의 지독한 체험에서 솟아나오는 말장난. 그것은 말장난으로서의 말장난과는 분명히 다른 힘을 지닌다.
극빈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극빈은 자발적 가난에 가깝다. 물론 종종 피를 말리는 상황을 견뎌야 하므로, 그것은 자발적 가난만큼 여유롭지는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시인의 정신적 지향만큼은 다분히 극빈의 상태에 머물고자 하는 의식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을 향한 시인의 반역이자 황원荒原을 견디기 위한 ‘body language’일 것이다. 극빈은 극악한 것이지만 세속적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을 소극적으로나마 거부한다는 점에서 ‘무소유’를 찬양한 도가적인 세계보다 찬란한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당신 미쳤어요 남이 쓰다 버린 밥상은 왜 가지고 들어와요
여자는 신문지 위에다 밥을 차리며 쫑알거렸다
언제까지고 신문지 위에다 밥을 놓고 먹을 순 없잖아
밥상은 정말 낡고 색이 바래 있었다 그런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한쪽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있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밥상으로 도대체 뭘 하려고요
여자는 밥주걱을 대신하여 수저로 밥을 퍼담고 있었다
내가 한 손으로 이렇게 받치고 있지 그럼 되잖아
당신 정말 미쳤군요,
그들은 그렇게 밥을 먹기로 했다
여자가 먼저 밥을 먹고 그동안 남자는 밥상을 떠받치고 있다
이번엔 여자가 밥상을 떠받치고 남자가 밥을 먹고 있다
정말 왜 이렇게 살아야 하죠
여자가 떠받치던 밥상의 다리를 흔들자 남자의 국그릇이
대신 울어준다
―최치언, 「가난한 날들의 밥상」(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랜덤하우스중앙, 2005) 부분
최치언의 시는 가난한 부부가 다리 하나가 부러진 밥상머리에 마주앉아 있는 상황을 희화화해서 그리고 있다. 밥상이 없어서 신문지 위에다 밥을 놓고 먹던 부부는 어느 날 남편이 주워 온, 누군가 쓰다 버린 밥상 위에 밥을 차려놓고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상다리 하나가 심각하게 부러져 있어서 한 사람이 밥을 먹는 동안 나머지 한 사람은 부러진 상다리를 받치고 있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된다. 여자는 이 웃지 못할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쫑알거리며 불평을 말하고, 남편은 거기에 지지 않고 응수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왜 이렇게 살아야 하죠”라고 묻는 여자의 말처럼 울기라도 하고 싶은 비참한 상황이지만, 끊임없이 주고받는 이 젊은 부부의 대화는 그 상황을 웃음을 띠고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웃음을 유발하는 그 힘이 가난을 견디게 해준다. 조금만 움직여도 국그릇이 쏟아지는 상황이지만, 젊은 부부는 끊임없이 쫑알댈 뿐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국그릇이/대신 울어”줄 뿐이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기우뚱한 밥상 위에서 서로 다리 하나를 받쳐주며 번갈아 가며 밥을 먹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지만, 마침내 “땅바닥에서 밥을 먹”을 수는 없다는 데 부부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때 “여자의 눈에서”는 “별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부재를 통해 돈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최치언의 시에서, 가난한 날들의 밥상을 빌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치유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은 그의 시에서도 끔찍하거나 벗어나야 할 것으로 그려지기보다는 그 안에서 기거하는 법을 터득한 자들의 생활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가난’은 이 시인들에게서 풍요와 욕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하나의 삶의 태도가 된다.
4. 갈등의 원인과 자본에 대한 저항
자본의 무소불위의 힘이 극대화된 오늘, 돈은 갈등의 원인이자 불씨가 된다.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 사고의 이면에도 대개는 돈이 눈을 번득이며 잔인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예전에 비해서는 분명 풍요로워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욱 심해졌다. 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리는 일이 많아지면서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줄어든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양극화가 점점 심해져 가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돈이 화근이 되어 일어날 문제들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임에 틀림없다. 돈과 시는 비교적 거리가 멀었지만 전 세계가 자본주의로 재편되면서 돈이 유발하는 갈등의 문제에 주목하는 시들이 본격적으로 씌어지기 시작한다. 돈을 신봉하는 황금만능주의 풍조와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장악해 버린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면서 자본에 대해 저항하는 형식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도 있어서 눈여겨볼 만하다.
선물을 받고 싶다
대가가 아닌 선물을 받고 싶다
교환이 아닌 선물을 받고 싶다
교환 뒤에 따라오는 슬픔이여
대가 뒤에 따라오는 분노여
너의 가치는 치욕이었다
자로도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시집 한 권을 주랴
화폐 한 다발을 주랴
가능하다면 모두를 받고 싶다
그러나 사랑의 질량을
가늠할 수 없는 분량만큼만
선물을 주고 싶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생을 걸고 마련한 그 무엇을
당신께 주고 싶다.
―조기조, 「선물」(기름美人, 실천문학사, 2005) 전문
대가나 교환이 아닌, 선물을 받고 싶다는 화자의 바람은 모든 것을 자로 재고 저울로 달아 수치로 환산해 그 가치를 매기는 풍조를 겨냥하고 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도 무언가를 베풀 수 있는데, 너무나 계산적인 요즘의 사회는 마치 그런 일 따위는 없는 양 취급한다. 진정한 의미의 선물이 사라져가는 요즘의 세태를 향한 화자의 비판은, 슬픔과 분노를 유발하지 않는 거래, 치욕스러움을 안겨주지 않는 가치평가가 가능한 시대를 향한 그리움을 내포하고 있다.
시집 한 권과 화폐 한 다발의 가치를 계산하여 비교하지 않는 사회를 시인은 꿈꾼다. 요즘은 사랑조차 계산적이지만,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존재를 그는 믿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생을 걸고 마련한 그 무엇을/당신께 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속에는 지극히 계산적인 오늘의 풍조를 향한 시인의 비판이 숨어 있는 셈이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비행기에서 낙하하는 꿈을 가끔 꾼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위에는 보트가 떠 있는데
필승! 충성! 같은 군대 구호나
안전! 제일! 같은 공단의 구호가 착지점의 표시로 박혀 있어
낙하산을 조종하며 내려간다
그런데 말일인 어제의 꿈에서는
利子란 구호가 보트 위에 새겨져 있어
나는 경악했다
의아스럽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안 내려갈 수 없어
利子! 利子!
바다에 빠지지 않고 내려앉은 다음날
나는 아파트 관리비며 도시가스비며 전기세며 아이들 학원비를
구호를 외치며 납부했다
―맹문재, 「착지점, 利子」(책이 무거운 이유, 창비, 2005) 전문
비행기에서 낙하하는 꿈은 현실에서의 불안을 반영한다. “필승! 충성! 같은 군대 구호나/안전! 제일! 같은 공단의 구호” 대신 “利子란 구호”가 새겨진 보트 위로 착지해야 하는 꿈을 화자는 꾼 것이다. 꿈속에서도 화자는 의아스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했지만 안 내려갈 수 없어서 “利子! 利子!”라는 구호를 외치며 보트 위에 착지한다. 이상한 꿈이지만 따지고 보면 시인의 일상도 별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아파트 관리비며 도시가스비며 전기세며 아이들 학원비” 등을 제때에 내지 않고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니 말이다. 아파트 관리비며 도시가스비며 전기세 같은 것은 두어 달만 연체돼도 독촉최고장이 날아들고 정전이 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월세라면 바로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아이들 학원비도 제때에 내지 않으면 당장 학원을 보낼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외상을 밥 먹듯이 하던 인심 좋던 시절도 우리에게 있었으나, 21세기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필승! 충성!” 같은 구호를 외치며 상명하복 해야 하는 군대의 논리보다 더 무서운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장의 납부통지서와 각종 고지서를 납부 기한 내에 내야 하는 일상이야말로 전쟁 같은 나날이 아니겠는가.
유독 그런 상황에 예민한 맹문재 시인은, “적이 없는 시대에” 이자가 “연체에 물린 적을 만든다”(「이자가 적을 만든다」)고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눈앞의 적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지불해야 하는 돈이나 이자를 연체했을 때 누구든 적이 될 수 있다. 원수가 아니어도 연체로 인해 불특정다수가 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현주소가 아니냐고 시인은 묻는다.
우리 노동자들끼리 서로 만나 인사할 때
돈 좀 벌었느냐고 묻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노동계급이다, 노동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
그럼, 돈은 누가 버느냐!
돈을 버는 건 영화배우나 제작자
운동선수나 정치가 들이다
장동건은 무려 한해 68억을 벌었고 그 돈은
직공이 20명이나 되는 ‘순이’네 핸드폰 인쇄공장
일년 매출액보다 더 많은 것이다
너와 내가 피땀으로 만든 돈이 얼마인지
아는 건 일급비밀이다 요컨대,
저차원에서는 국가안보의 문제이며
고차원에서는 문화발전과 결부된 거다
재주는 원숭이가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
―최종천, 「돈!」(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 부분
아직도 노동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지켜가며 시를 쓰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하나인 최종천은 당연히 돈에 대한 시를 제법 남기고 있다. 자신이 만든 생산품이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을 무수히 체험해 온 노동자들은 돈으로부터도 소외된다. “노동은/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만든 돈을 벌고 쓰고 누리는 것은 정작 운동선수나 정치가나 연예인 같은 다른 계급의 사람들임을 간파한다. 그야말로 “재주는 원숭이가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 상황인 셈이다.
그런데 노동자들끼리 만나서 인사할 때도 돈은 좀 벌었느냐고 묻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노동의 대가를 동등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인정받는 가치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돈은 좀 벌었느냐고 묻고 대답할 때마다 이 사회가 원하는 자본의 논리에 은연중에 짜 맞춰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시인은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노동계급의 발언은 발언이 아니며/노동계급은 인간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닌 시대에 “노동의 종말”을 선언하고 노동자들도 “이제 더 이상 돈을 만들지 말고 벌자”고 그는 처방을 내린다. 반어적인 표현이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풍요로 넘쳐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처 입은 노동자의 모습이다. 최종천의 시는 자기모멸과 냉소를 통해 자본에 저항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 전략은 낡은 것이지만, 말랑말랑한 생태주의자가 되어가는 노동자 시인들을 여러 차례 목격한 탓인지 그의 냉소를 좀더 지켜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약 냄새,
돈은 슬퍼라,
어린 육체보다 더 슬픈 십 원짜리 지폐,
황혼, 두견, 소양강 처녀보다 더 슬픈
내 어릴 적의 십 원짜리 지폐,
미국 중앙정보부가 노나주었던 십 원짜리 지폐,
어느덧 나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 사내의 선의를 믿지 못하네
코끝에선 약냄새가 났고,
미친 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
적산가옥 앞길을 지나
포대기에 업힌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외삼촌의 술주정이 약냄새에 섞여 날 어지럽게 한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난 그런 현실감에 목마른 것이다
자동차 바퀴살을 호이루라고 부르던 시절,
<빵꾸 나오시> 집에서 나는 살았다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은
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그러니 내가 브라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봉지쌀의 아트만이 사라졌듯이, 내 유년시절의 아트만들도
이젠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진이정, 「아트만의 나날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 부분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개념을 빌려 진이정은 인간 존재의 핵을 이룬다는 아트만에 대해 노래한다. 원래 인도 철학에서 아트만은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 존재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만, 일상에 치여 살아가는 오늘의 아트만은 도무지 살아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절망감에 빠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절망감의 근원에는 “슬픈 돈”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육체보다 더 슬픈 십 원짜리 지폐”. 시인의 유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십 원짜리 지폐에는 한 나라의 굴욕적인 현대사와 절망감 속에서 죽어간 외삼촌의 비극이 겹쳐져 있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그러나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은/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외삼촌의 아트만은 물론 시인의 유년시절의 아트만도, 봉지쌀의 아트만도 사라지고 없다. 지금 시인은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라는 인도 철학의 주장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냥 없어지는 것임을 그는 삼십 갑자 만에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그는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겠다고 한다. 브라만의 존재나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라는 말씀에 기대기보다는 차라리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박카스 한 병을 사먹고 그로부터 위안을 받으리라고 한다. 그것은 가난과 술과 약냄새와 박카스에 취해 있던 삼촌의 구체적 일상을 다시 살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진이정의 시는 “슬픈 돈”을 직시함으로써 종교가 더 이상 위안이 되지 못하는 시대의 절망감과 고독감에 대해 노래한다. 그 근원에 자리하고 있는 가난은 단지 개인적 의미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진이정은 자신의 우파니샤드는 더 이상 종교적 경전이 아니라 “거꾸로 선 현실”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와 자본주의의 욕망에 맞서 시인은 현실을 직시하고자 한 것이다.
5. 거리의 역설
돈을 노래하기까지 시는 먼 길을 돌아왔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돈을 노래하는 일은 이제 시에서도 필연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들은 돈으로부터 심정적으로는 먼 거리에 있다. 세속도시에서 발휘되는 자본의 권능에 주목하든, ‘가난’에 기거하며 부재로서 돈의 존재를 부각시키든, 좀더 적극적으로 자본에 저항하는 방식을 선택하든 ‘돈’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선은 긍정적이지는 않다. 돈을 다루는 시가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동시에 돈에 대해 시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이 시인들의 관심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던 때에 비해 그만큼 시와 가까워졌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현상적인 진단일 뿐 돈과 시 사이의 심정적 거리는 그만큼 더 멀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경쟁 논리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오늘날, 돈에 대한 시인들의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저항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싸움이다. 시와 돈이 더 이상 불화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아마도 그것은 시의 종말이 왔을 때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경수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저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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