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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특집/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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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22회 작성일 08-03-01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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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젊은 시의 지형도

잡종성의 두 얼굴

이경수|문학평론가




1. 잡종성의 존재론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문학을 비롯해서 문화예술 전반에 가장 지배적인 담론은 탈근대와 탈식민주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탈식민주의 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기 위한 담론으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두 담론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허무는 상상력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문학에 나타나는 방식에서는 유사성이 발견된다.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될 당시에는 혼성모방이라는 이름으로 장르 간의 경계를 허무는 상상력이 문학의 영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경우 90년대 문학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시보다는 소설을 중심으로 한 이론이기는 했지만, 유하나 장정일 등의 시에서 혼성모방이 실험되기도 했다. 최근에 와서는 탈장르라는 속성을 넘어서 식민지를 체험한 문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잡종성에서 저항적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경계를 허무는 상상력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잡종성’에서 저항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호미 바바에 의해서지만, 저항적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이 저항적 성격을 전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저항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되 해석의 양면성을 열어 놓는 면이 있다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잡종성’을 장르의 경계와 국가 및 민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허무는 성향을 지닌 것으로 폭넓게 이해하고자 한다. 호미 바바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잡종성’이라는 용어를 씀과 동시에 그것의 저항적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인데, 우리의 경우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미 바바는 식민 지배자의 문화에 종속되면서도 그들에 의해 배척받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를 부분적으로 포함하는 피지배문화의 잡종성에서 식민지 담론의 극복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잡종성’은 네그리․하트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재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모더니티’의 신화에 대한 비서구인들의 자의식에서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는 탈근대론은 탈식민주의 이론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식민’ 자체가 ‘근대’의 산물임을 생각할 때, 탈식민의 이론은 탈근대 담론을 거점으로 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 이 글에서는 이질적인 성향을 지닌 것들이 장르적 속성이 되었든 국가․민족에 수렴되는 성향을 지닌 것이든 간에 서로 뒤섞여 특별한 중심을 이루지 않고 공존하는 상태를 가리켜 ‘잡종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크게는 식민 문화와 피식민 문화가 섞여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좀 더 좁게는 영화, 만화, 판타지, 음악, 미술 등 대중문화가 장르의 벽을 허물고 문학에 섞여 있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것은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양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잡종성의 시적 계보

우리 시사에서 근대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탈근대적 지향, 탈식민주의라는 관점을 동시적으로 지니고 있는 시인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그 첫 자리는 김수영이 될 것이다. 후반기 동인들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시화집을 내는 것으로부터 시적 출발을 한 김수영은 모더니스트의 일원이었지만,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탈근대적 지향, 피식민지 지식인의 ‘통문화로서의 잡종성’이 발견되는 시인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미 김수영이 산문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그가 자유자재로 구사한 언어만 해도 ‘일어→한국어→ 영어’로 이동을 경험했는데, 이는 피식민지 지식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잡종성의 언어적 전제 조건이 된다. 더구나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김수영이 가지고 있었던 선망과 경멸이라는 이중적 태도는 김수영의 시에서 잡종성이 나타남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그 저항적 가능성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1960년대 우리 문화의 후진성을 언급하면서 김수영은 미국의 상업적이고 조야한 ‘딸라정책’이 이에 일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일제 강점기보다 더 심각한 조제품과 위조품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김수영의 판단이었다. 거기에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적 후진성이 일제 강점기와 마찬가지로 검열을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후진성을 더욱 부추겼다는 것이었다. 자기 검열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할 때 김수영은 일제 강점기의 기억이 당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은 문학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정치적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 민주국가가 형성되기를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의 미망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이중성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한국의 시단에서 ‘잡종성’을 다시 문제 삼을 만한 시기는 1990년대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문단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되면서 ‘혼성모방’의 기법이 시작품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는데,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면서 중심을 형성하지 않고 중심을 해체하거나 전복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잡종성’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일찍이 장정일은 1987년에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1988년에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연달아 출간하면서 자본의 질서가 지배하는 도시적 감수성을 키치와 패러디아 혼성모방의 상상력으로 보여 준 바 있다. 그 뒤를 이어 유하는 1991년에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에서 ‘애마부인’ 시리즈, 각종 텔레비전 드라마 및 영화, 포르노 비디오 등의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모든 것을 상품화해 버리는 지구적 자본주의를 예감한다. 이후 1997년에 박정대는 <단편들>에서 영화, 음악, 소설, 회화, 시, 고전 등등에서 일부분을 조각조각 차용한 형식의 시를 통해 유장한 리듬이 흐르는 새로운 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미지나 분위기에 의해 차용된 조각조각의 구절들은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잡종성의 예가 된다. 박정대의 시는 잡종성을 활용함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해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자체가 새로움의 창안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그의 시는 담고 있다.

2000년대 상반기에 첫 시집을 출간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잡종성은 다시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 2005년에 출간된 황병승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에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눈에 띄는데, 가령 그의 시에는 일본 이름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이 인물들은 일본이라는 지구상에 실재하는 국가와는 무관하다. 황병승의 시에 ‘무국적의 상상력’이 나타난다고 평가받은 것은 그 때문인데, 이러한 성향은 탈국가와 탈민족과 탈근대와 탈장르를 표방하는 잡종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음악이나 회화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시에 침투하기도 하는 김이듬의 시는 2005년에 출간된 첫 시집 <별 모양의 얼룩>에서 탈장르․탈국가․탈근대 등을 표방한 플럭서스 운동와의 연관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듯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물론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허물며 이질적인 요소들을 공존케하는 특징은,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감각이나 문화적 체험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올해 시집을 출간해 아직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은 김경주와 이승원의 시를 중심으로 잡종성의 양가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김경주의 시와 이승원의 시는 음악과 시의 접합을 시도함으로써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시인의 시에서 잡종성이 지향하는 바는 상당히 다르다. 그 차이를 통해서 잡종성의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3. 시와 음악의 경계 허물기, 혹은 음악 되기-김경주의 시

김경주에게 시는 곧 음악이다. 음악과 시는 서로를 구분 짓는 경계를 선명히 드러내기보다는 기꺼이 한 몸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의 시가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시가 하나였던 까마득한 과거를 환기하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음악과 시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합치되는 모습을 통해 근대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생각해 보면, 시가 노래[歌]로부터 분리되어 인쇄매체에 씌어져 눈으로 읽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구별 짓고 경계를 만들고 분화하는 것을 즐겨한 근대적 사고방식은 노래와 시를 분리하여 시를 시각적 매체를 통해 지각되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김경주의 시는 음악과 시가 경계를 허물고 어우러지는 탈장르의 상상력을 통해 근대로부터 벗어나 근대를 극복하기를 꿈꾼다. 그의 시가 탈근대적 지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음악과 시의 경계 허물기를 통해 유장한 리듬을 생성해내고, 궁극적으로 낭만적 지향을 드러냄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탈근대적 지향을 드러낸다.


이름 없는 바다 속 동굴의 벽에 붙어사는 미물(微物)들은 아무도 모르게 눈이 조금씩 퇴화해간다는데 그곳엔 정말 눈 없는 물고기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대신 눈이나 날개기관 따위는 다 소실돼버리고 팔다리만 조금씩 가늘게 길어진다는데 가늘어진다는 말의 소요들. 이것은 5∼6억 년 전부터 살아남은 캄브리아기 생물들의 절대음감에 관한 얘기다 젖을 먹고 자란 새들이 날개를 펼쳐놓고 고공에서 알 수 없는 바다 속을 내려다보고 있다 새들의 눈은 그런 해저의 동굴 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몇백만 킬로의 바람을 날아와 새들은 물 안의 시간들만 바라보고 있다 새들은 아무도 모르게 말라간다 사람들은 아무도 새들이 마르는 것에 참여할 수 없다 바람에 가까워지기 위해 어미로부터 눈을 버렸고 너희들이 날개라고 부르는 것들이 내게는 점점 가늘어지는 일일 뿐이어서 마르고 있다는 건 점점 세계 밖으로 희미해지는 일이란다 아무도 모르게 바다 속 이름 없는 동굴의 벽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다시 우리가 모르는 이국(異國)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령, 심해에서 긴 혀를 꺼내 바닥을 핥고 있던 물고기들이 그물에 건져 올려질 때 눈을 뜨지 못하고 내는 가는 신음 같은 건 사라진 새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눈이 없는 물고기들을 어부들이 다시 심해로 돌려보내준다 처음 그물질을 배울 때 그들은 물고기들이 바다 속에 사는 음악들이라는 것을 익혔다 해저에서 백 년에 한번쯤 눈을 치켜뜨고 물을 떠나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물고기나 물 밖에서 백 년은 새의 눈을 따라 항해하는 어부들은 고요의 바닥에서 눈을 감는 일이 적요로운 것임을 안다 그들의 몸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은 자신의 눈들이 조금씩 인성(人性)의 밖으로 퇴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겐 돌에게 잠시 번진 물고기의 무릎도 없고 물고기의 보일 듯 말 듯한 슬픈 귀들도 없지만 조금씩 가늘어지는 몸이 있으니 아무도 모르게 말라가는 것이 점점 너에게 가까워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몇 달가량 집을 비우고 돌아와보니 욕조에 말 한 마리가 배를 깔고 앉아 있다 그 말은 또 다리를 어디다 둔 것일까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또 다른 얘기다

―김경주, 「파이돈-가늘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중앙, 2006) 전문


김경주 시인은 자신을 “양팔이 없이 태어”나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외계」)로 묘사하거나 “눈이 조금씩 퇴화해”가면서 팔다리가 조금씩 가늘게 길어지고 있는 기형(畸形)으로 그린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시인의 생각은 그가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5∼6억 년 전부터 살아남은 캄브리아기 생물들의 절대음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가늘어지기는 시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르고 있다는 것은 점점 세계 밖으로 희미해지는 일인데, 팔다리가 가늘어지며 말라가는 시인은 언제 그 존재가 희미해져 지워질지 알 수 없다. 존재가 희미해진다는 것은 그 존재의 특성을 드러내주는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음악과 시가 경계 없이 뒤섞이고, 대상으로서의 음악과 주체로서의 시인이 스며들거나 뒤섞이는 일도 종종 일어나는 것은 이로 인해서인지도 모른다. 김경주의 시에서 하나의 존재는 그 경계가 선명하지 않다 오히려 희미하게 지워져 자기 존재를 지워가는 특성을 지닌다. 그의 시에서 바람이 각별하게 그려지는 까닭도 그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바람처럼 형체도 없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존재.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바람 같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날아다니는 새와 자유로이 유영하는 물고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려진다. 물고기가 바다 속에 사는 음악들이라면, 새와 바람은 하늘의 음악이며 시인의 분신이기도 하다.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김경주,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전문


시인이 워크맨으로 듣는 음악에서는 갠지스 강이 흐른다. 아니, 음악 자체가 갠지스 강이 되기도 한다. 환상을 주축으로 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종종 등장하는 ‘다른 신체 되기’의 상상력은 김경주의 시에서는 ‘음악 되기’로 나타난다. 음악은 시인의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니다가 그곳에 깃들어 살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외로운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담배를 사오던 골목에서 그가 붓다의 외로운 방황을 이해하던 바로 그 순간, 시인은 “겨우 음악이 된다”.

그는 붓다의 수행 중에서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방랑이란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이다. 사랑으로 가슴 무너져 골방 속에서 떨어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방랑에 대해 생각할 때 시인의 눈에서는 강물 냄새가 나고, 그는 갠지스 강이 된다.

김경주의 시는 대체로 그렇지만, 이 시에도 물기가 가득하다.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슬프고 유장한 음악, 음악을 따라 시인의 몸속을 흐르는 갠지스 강,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 그리고 밤새 들리는 산양의 울음소리가 더해져 물기가 흐르는 슬픈 풍경을 자아낸다. 김경주의 시는 노골적으로 낭만적이고 감상적이다. 유장한 리듬을 타고 그의 낭만적 감성은 자유자재로 흐른다. 낭만적이라는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힘. 음악처럼 분석 이전에 그냥 몸을 내맡기고 싶어지는 낭만의 힘을 그의 시는 가지고 있다. 다른 예술과는 다르게 단번에 사로잡아 버리는 광기의 힘을 어쩌면 시인은 음악으로부터 느끼고 그것을 가장 부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눈에 띄는 비문조차 그의 시가 감싸 안고 흐르는 것은 ‘음악 되기’를 실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언어로 된 음악이다. 아니, 시인 자체가 음악이 된다. 그러고 보면 「테레민을 위한 하나의 시놉시스(실체와 속성의 관점으로)」에서 음악이면서 동시에 사람인 ‘안인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전생에 음악이었지만 현세에 사람으로 다시 환생한” 그는 “자아가 음악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그것은 김경주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일찍이 음악으로 스며든 바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음악은 유적지를 남기지 않지만 어느 먼 나라에서는 음악이 방금 다녀간 나라들을 허공이라 부른다

아흔아홉 번째 레퀴엠, 태어나자마자 음악은 스스로 자신의 풍경을 조금씩 지우기 시작한다. 시간과의 친교로 음악은 인간의 세계에 가서 망명을 보내다 죽는다 일찍이 소년들이 사슬을 끌고 걸어가 구석에서 독한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음악 속으로 시간을 유배해버린 자신의 열렬한 회의 때문이다.

얼음의 산으로 들어가 저격수들이 배우는 첫 번째 기술은 호흡이다 자신을 완전히 적신다는 호흡, 그것은 몇백분의 일로 방아쇠를 분할해 당기면서 돌연 호흡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저격수들이 자신의 몸 안으로 완전히 분할해버리는 호흡에 대해서 상대는 참여할 수 없다 상대의 음역에 무방비로 놓여버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방적이고 사랑에 가까운 자기혐오를 유발하기도 한다 가끔 저격수의 그 호흡들이 음악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쪽의 보이지 않는 호흡이 저쪽을 정확히 겨냥하여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 리듬인 자신의 맥박을 들으며 천천히 저격수의 음악을 받아들이며 상대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허물어진다 음악이 방금 다녀간 텅 빈 공연장처럼 현장은 늘 결연하며 단순하다 연주를 막 끝낸 지휘자의 침묵이 거대한 울음을 상기하듯.

그 사람이 아직 소녀였을 때 그는 현기증 때문에 늘 첫서리를 피했다 가장 추운 곳에 닿아 우는 새처럼 음악은 소녀의 우울에 더 이상 주석을 달지 않았다 모든 흉상들이 두려웠던 시절 소녀는 몇 년 동안 집에 살았지만 몇 년 동안 집을 비웠다고 기록했다 그것이 그 소녀의 음악이라고 청년이 되고 나서 얼굴이 틀어진 소녀들을 자신의 구멍으로 불러놓고 그는 한참을 수줍어해야 했다


음악의 우기(雨期)를 맞이하면 얼굴 속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는 습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의 다리를 가만히 만져보는 일처럼 골목에 버려진 기타에 다가가 대일밴드를 붙여주고 흐흐 웃는 소녀처럼 음아그이 태반을 찢고 나온 도로 위에 그는 벌렁 누워버렸다 ‘시간이 그를 치고 가리라’ 일주일에 한 번 길 건너 교도소에서 피아노가 울린다 ‘거긴 교도소의 응급실일 테지’ 피아노가 있는 빈집으로 몰래 들어가 피아노를 두드리다 붙잡힌 소년은 교도소에서 청년이 다 되었다 필로시네마 그는 영원히 복귀하지 않는 사병, 휴가를 나와 자신의 관을 짜놓고 부대로 배달시켰다는, 가끔 그 야설(夜說)이 자신을 조금씩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김경주,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 부분


음악은 눈에 띄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유적지를 남기지 않지만 어쩌면 더 지독한 흔적을 남겨 지나간 자리를 허공으로 만든다. 지나감으로써 텅 비는 허공이 되는 흔적. 김경주 시인은 자신의 시가 독자의 가슴에 그런 허공을 만들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이 그의 가슴에 허공을 깊이 패게 했듯이.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풍경을 조금씩 지우기 시작한 음악은, 경계를 허물고 자유자재로 흘러드는 음악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와 다를 바 없는 그의 음악은 매우 낭만적이지만 또한 현대적이다. 이 시에는 다섯 개의 각주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각각 야나체크,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올리버 메시앙(올리베 메시앙에 대한 각주가 두 개이다)이라는 음악가에 대한 것이다. 이들의 음악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음악을 꾸준히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매우 현대적인 음악이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서 그는 시를 본다. 생의 마지막 리듬인 자신의 맥박을 들으며 천천히 저격수의 음악을 받아들이며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허물어지는 상대는 김경주의 시에서 음악과 시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온몸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며 경계를 허무는 방식. 김경주의 시에서 장르의 벽은 그렇게 허물어진다.

김경주의 시는 정서적으로 강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육박해오는 음악을 닮았다. 아니, 그런 음악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분석하려는 이성을 해체하며 통째로 스며들어온다. 그것은 바람의 움직임을 닮았고, 강물의 흐름을 닮았으며, 방랑하는 외로운 영혼을 닮았다. 김경주의 시는 ‘음악 되기’의 방식으로 탈장르를 체현하며, 탈장르적 잡종성을 통해 탈근대를 실현한다.


4. 저항의 가능성으로서의 잡종성-이승원의 시

이승원의 시에서도 음악과의 접합을 통한 장르의 경계 허물기는 시도된다. 단, 그가 들여오는 음악은 힙합이다. 김경주의 시가 고급문화로서의 현대 음악과 접속한다면, 이승원의 시는 하위문화의 일종으로서의 힙합과 결합을 시도한다. 사회비판적 발언과 풍자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힙합 음악의 속성은 이승원의 시에 그대로 계승된다. 그의 시는 가히 랩으로 읊는 시, 또는 시로 쓰는 랩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을 때 랩 특유의 박자감과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始作해

詩作해

선남선녀 미남미녀 방아 찧는 밤에

겨울에도 모기 나는 지저분한 방에

노예들과 진배없는 너와 나의 생애

쓰레기 소각장의 불타는 시간들

케이블을 타고 오는 춤추는 거짓들

장애물과 방해꾼인 지루한 가족들

어린 칭크 가진 것은 캉골 타미 팀버랜드

가라 힙합 취하는 건 금줄 그루피 메르세데스

리얼 MC 친구들은 디제이와 그래피티 비보이스

눈감고 꿈꾸는 건 백만장자 영화배우 인기가수

잠에서 깨어나니 요리사 웨이터 옷장수

정신을 차려보니 경비원 주유원 운전수

MC S1 태어난 곳 기지촌 이태원

조선을 지배하는 냄새나는 미국군

알록달록 화려한 아이노꾸 기지 소년

시장에서 담배피던 뒷가르마 학성이형

록키파 대장이신 가죽바지 석범이형

열두 살에 놀아난 MC S1 어린이갱

이봐 너희들

내 말이 안 보여? 내 말이 안 보여?

내 말이 안 보여? 내 말이 안 보여?

죽으면 사라질 힘 헬스는 왜 하는지

어차피 병 걸릴 몸 웰빙은 염불인지

배울 것 없는데 참 학교는 왜 가는지

외롭고 괴로운 삶 결혼은 안 하든지

보험금 세금 정기적금 빌어먹을 국민연금

녹색불이 켜졌어! 요 어디로 갈건가! 요 생각해! 요

선남선녀 미남미녀 방아 찧는 밤에

겨울에도 모기 나는 지저분한 방에

노예들과 진배없는 너와 나의 생애

쓰레기 소각장의 불타는 시간들

케이블을 타고 오는 춤추는 거짓들

장애물과 방해꾼인 지루한 가족들

어린 칭크 가진 것은 캉골 타미 팀버랜드

가라 힙합 취하는 건 금줄 그루피 메르세데스

리얼 MC 친구들은 디제이와 그래피티 비보이스

―이승원, 「Real Rhyme」(<어둠과 설탕>, 문학과지성사, 2006) 전문


단순히 주어진 가사를 읊는 수동적인 랩퍼가 아니라, Microphone Checker 또는 Microphone Controller의 약자로 ‘마이크 지배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MC라는 용어는 직접 가사를 쓰는 의식 있는 랩퍼를 가리키는 말이다. 힙합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자존감이 들어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원의 시는 힙합 음악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들을 시에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자신의 시가 힙합과의 경계 허물기를 통해 쓰여지는 것임을 드러낸다. 물론 첫 시집 <어둠과 설탕>에 실린 그의 모든 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첫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략임에는 분명하다. 랩 특유의 창법을 빌린 그의 인용시 「Real Rhyme」은 말 그대로 리얼하다. 주지하다시피 랩에서 라임(Rhyme)이라는 것은 운을 맞추는 것을 가리킨다. 라임을 맞추기 위해 언어유희를 적극 활용하는 랩처럼 이승원의 시도 자유자재로 언어유희를 활용한다.

“始作해 / 詩作해”로 본격적인 언어유희는 시작된다. 랩을 시작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를 쓰는 것이므로 始作은 곧 詩作이 된다. 각 연의 끝부분은 모두 라임을 형성하고 있어서 랩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것은 각운과 매우 닮았다. 다만, 그 내용을 채우는 것들이 랩의 가사에 필적할 만하다. 결국 인용한 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노예들과 진배없는 너와 나의 생애”에 대해서이다. MC 대부분이 꿈꾸는 것은 “백만장자 영화배우 인기가수”이지만,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현실은 “요리사 웨이터 옷장수”이거나 “경비원 주유원 운전수”에 불과하다.

MC S1이 태어난 곳은 “기지촌 이태원”이다.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지촌이 낳은 아이들인 셈이다. 그곳에서 그는 “어린이갱”으로서의 삶을 체험하고 미국의 하위문화인 힙합을 배운 것이다. 남의 나라 군대가 버젓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온갖 문제를 일으켜도 법적으로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나라의 자랑스러운 국민들은 헬스와 웰빙과 교육과 결혼에 목을 맨다. “보험금 세금 정기적금 빌어먹을 국민연금”에 쥐꼬리만한 월급을 저당 잡힌 채 미래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반납하고 산다. 문제는 이렇듯 우리네 인생이 “노예들과 진배없는 너와 나의 생애”임에도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봐 너희들 / 내 말이 안 보여?”라고 네 번이나 외치면서 화자는 답답해한다. 그에게 가족은 장애물과 방해꾼인 지루한 존재들이며,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는 케이블을 타고 방송되는 춤추는 거짓들에 놀아나는 별 볼일 없는 곳이다.

장르의 벽을 허물고 랩을 시에 본격적으로 들여옴으로써 시인이 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한 의존적인 상태이면서도 자주 국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삶을 살면서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이상한 기운이다. 현재가 달라지지 않는 한 미래가 달라질 리 없는데도,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과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고 저당 잡힌 인생을 살아가는 이 땅의 이상한 이데올로기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원의 시는 김수영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식민지적 잡종성에서 긍정적 가능성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면, 미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힙합 문화를 우리 방식으로 수용하고 소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도 같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멸하면서도 미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해 사는 모습이야말로 잡종성의 예라 할 만하다.


내가 아직 자라고 있었을 때

집엔 아버지의 번쩍이는 지휘봉이 길에 나가면 털 많은 미군들의 다리가 흔들렸지 그것들은 몹시 길었어

내가 아직은 다 자리기 전에

학교에는 교사의 짙은 회초리와 손위 아이들의 거친 각목이 건들거리고 일요일마다 어둡고 빨간 십자가가 매달렸지 그것들은 매우 길었어 내가 다 자라기 전까지는

이제 상황은 달라졌어 펜을 쥐었지 불어로 ‘나의 친구’라고 새겨 있는 A.K.A. 153 볼 포인트 0.7

이제 공수가 바뀐거야 나의 별자리는 신의 입술

강 건너 바리사이파의 몽블랑이나 워터맨이 아니지만 모두 길디긴 나의 친구 앞에 무릎 꿇고 紙面에 키스하게 될 걸

나는 군복 대신 알몸이 되었으니까 수박 세 덩이는 잭팟을 뜻하지

너희들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어 디다스 소녀 탈리카 소년 너 같은 애들이 원하는 게 뭐야? 점안을 바라니?

조악한 공중 보도 휘어진 LP 음반 구멍 없는 암나사 같은 것들

탱화 같은 절름발이의 움막에서 불바람은 너희를 시체로 만들고

목적 없이 차를 몰고 시내를 배회하는 기분으로 나는 승리를 즐길 거야

원소기호 S는 원자번호 16 원자량 32.14 녹는점은 119℃ 끓는점은 444.6℃ 물도 알코올로도 녹일 수 없고 전기와 열의 불량 도체지

성냥의 연료란다 불을 켜는 데는 성냥 글을 쓰는 데는 펜이면 되지만 실용을 넘어 극한을 추구하지 내 본관은 신의 혀 사람 위의 사람

이제 전세가 역전됐어

―이승원, 「MC S1」 부분


이승원의 시는 최근에 나온 젊은 시인들의 시 중에서 상당히 정치적 성향이 강한 편에 속한다. 정치적이라는 말을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더불어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개인적인 것이라고 해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타자와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의 시에서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는 항상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와 군인과 미국과 학교와 폭력과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것이라 시인이 꼽은 존재들인 셈이다. 가정과 학교와 군대를 거치면서 대개 우리는 폭력과 억압과 복종에 길들여진다. 교회로 상징되는 종교는 거기에 복종의 논리를 더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라기 전까지의 일이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는 화자의 말은 다 자랐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펜을 쥐었다는 말이 바로 이어진다. 적어도 펜은 시인에게 폭력과 억압과 굴종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상징이다. “군복 대신 알몸이 되었”다는 것은 억압과 굴종의 흔적을 벗어던지고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용을 최고로 취급하는 실용주의의 시대에 시인은 “실용을 넘어 극한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힙합의 정신이자 시의 정신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메탈리카 셔츠와 아디다스 신발”을 신은 소년/소녀들을 ‘디다스 소녀/소년’, ‘탈리카 소년/소녀’라 부르며 조소하는 것도 브랜드를 따지고 겉멋에 들린 문화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지금, 여기’의 우리 모습 또한 이승원 시의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이미 제도 속으로 웬만큼 수용된 힙합이 더 이상 사회 비판적이고 전복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듯이, 형식적인 비판과 풍자에 머물 위험을 가지고 있지만, 잡종의 문화가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다. 자기 갱신이든 전복이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인정할 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참견할 거야 내 거짓말은 아주 정직해”라는 일종의 선언은 시인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실용주의가 극에 달한 이 세상을 자기 나름의 불온한 방식, 다시 말해 “나태한 생활 밤의 어둠 속에 취해” 살아가는 방식을 자발적으로 택하고자 한다.


당신은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가

르완다와 부룬디가 잠비아와 짐바브웨가

어떻게 다른지 모릅니다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 과테말라가

그러나 당신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인되는 것이 싫습니다

난이도는 낮추지 못합니다

어복쟁반과 고소한 육전이

갈지 않은 통미꾸라지 추탕과 재첩국이

당신의 소울 푸드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간의 외유에서도

음식으로 고생합니다

간단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늘도 전동차를 탑니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의 생식기

당신의 지폐 당신의 후손이

타인의 기타와 시보다 소중합니다

때문에 하차할 승객을 가로막고 진입합니다

당신은 평등한 처우보다 특별 대우를 사랑합니다

며느리는 봄볕에 딸은 가을볕에

복잡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 사창의 포주와 기둥서방들

소아기호증 환자 자기가 예술가임을 자각한 남자

공통점은 집착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지네처럼 아름답습니다

―이승원, 「감성적 독재」 전문


인용한 시는 우리의 허위의식을 아프게 겨냥한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가/르완다와 부룬디가 잠비아와 짐바브웨가/어떻게 다른지” 모르면서 우리 자신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인되는 것”은 싫어하는 심리, 타인의 기타와 시보다 자기 자식의 생식기와 지폐와 후손이 훨씬 소중한 지독한 가족이기주의, 어려서부터 먹고 자란 이 땅의 음식에 길들여져서 “일주일 간의 외유에서도 음식으로 고생”할 만큼 차이를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 겉으로는 평등한 처우를 말하지만 사실은 특별대우를 사랑하는(그것이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더욱이나 그런) 모순투성이 마음. 이것을 시인은 “감성적 독재”라 이른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의 집착이나 사창의 포주와 기둥서방들이 사창가 여자에게 보이는 집착이나 소아기호증 환자의 집착이나 자기가 예술가임을 자각한 남자의 집착이나 지독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 집착이 때로 아름다움을 풍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네 같은 아름다움, 끔찍하고 징그러운 미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승원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타자와 관계에 대해서이다. 아니, 타자와 관계를 말할 때의 우리의 허위의식에 대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좀더 정확할 것 같다. 그는 분명 타자와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지만, 그것은 허망하고 위선적인 희망을 품고 있지 않다. 오히려 「타자」에서는 ‘나’와 그들 사이의 차이와 대립이 강조되고, ‘나’의 소외를 부추기는 존재들로 타자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연대와 공감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허구이기 쉬움을 그는 적어도 잊지 않고 있다. 이런 그의 태도에서는 김수영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김수영이 미국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 같이 이승원의 시는 역사도 분노도 성찰도 없는 우리의 서울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우리는 정신대 노파의 한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니 니혼진의 현지처는 행복하고 한국관광공사는 더욱 행복하다”-「재퍼니즈맨 인 서울」). 돈과 상품에만 눈이 먼 속된 이 도시를 시인은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며 비아냥거리고 조롱한다. 그 조롱 속에는 물론 시인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5. 잡종성의 새로운 시적 가능성

이제 잡종성은 이미 우리의 삶의 조건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음식마저 ‘퓨전’이 유행이고,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직업의 세계에서도 ‘투잡’ ‘쓰리잡’이 유행하고 있으며,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도 잡종성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 우물만 파라’는 것이 삶의 지침이던 시절이 점점 과거의 추억 속으로 밀려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알려주는 여러 지침서들이 쏟아지면서 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친절히 일러주고 있지만, 이렇게 한 세대가 밀려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건가, 라는 회의가 들지 않는다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든 간에 문학이 지나치게 발 빠르게 변화의 흐름을 추종하는 것은 솔직히 좀 우려되는 것은 사실이다. 낡은 생각이겠지만, 새롭고 발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닐 테니 말이다.

김경주, 이승원 두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잡종성에 대해 살펴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쏟아져 나올 더 젊은 시인들에게 잡종성은 자연스러운 삶의 조건임에 분명할 것이다. 한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데 이들은 별 거부감이나 저항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들 세대의 장점이자 한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고 이질적인 것들을 공존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 이들은 가지고 있다. 반면에, 아무런 장애나 경계(警戒) 없이 넘나들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각적이지 않을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스며 있음을 깨달을 기회를 어쩌면 그들은 박탈당한 것은 아닐까?

피식민지를 체험한 나라에서 발견되는 문화의 잡종성에서 저항적 가능성을 발견한 호미 바바의 견해는 그런 점에서 의식적이고 창의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면 헛된 희망에 불과한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이중성과 허위의식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로부터 출발할 때 잡종성은 하나의 저항적 가능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문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경수․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불온한 상상의 축제>, <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 등

추천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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