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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서평/오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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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62회 작성일 08-03-01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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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강경희 평론집 <타자의 언어학>

고명철 평론집 <순간, 시마詩魔에 들리다>



노동의 비평과 모험의 비평
오양진|문학평론가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와 경험은 모든 부분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그는 한편에서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중심을 축으로 진행되어 삶의 전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그러한 삶의 전체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의미의 삶을 구축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짐멜은 이 두 가지 측면이 다양한 형태로 삶의 모든 내용을 결정한다고 말하면서, 이 두 가지 체험 가운데 전자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획득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이라는 의미를 획득한다고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노동>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질료와 에너지가 인간의 목표를 최고조로 달성하는 데 이바지하도록 삶의 통일적인 연관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통합의 체험이고, 그에 반해서 <모험>은 그 내적인 의미에 입각해서 이전과 이후로의 관계로부터 독립적이고 삶의 연속성이 원칙적으로 거부되거나 삶의 일상적인 연속성과 아무런 관계없이 진행되는 분열의 체험이다. 물론 짐멜은 <모험>이 단순히 우연적이고 이질적이며 단지 삶의 외피만 건드리는 모든 것과 구별된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삶의 전반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동시에, 바로 이 운동과 더불어 다시금 삶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는 예술의 본질적 체험과 닮아 있다고도 말한다.

사실 <노동>과 <모험>에 관한 짐멜의 규정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비평>이라고 부르는 것의 행위와 경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말하자면 비평가에게서 우리는 통합의 체험을 중시하는 <노동>의 경향이나 분열의 체험에 주목하는 <모험>의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문학작품을 비평하는 일에서, 어떤 비평가들은 한 작품은 다른 작품이 만들어지면서 또는 다른 작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끝난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작품들이 서로 관련성을 가지며, 또한 이와 더불어서 작품 전체의 통일적인 연관관계를 형성하거나 이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즉 <노동>하는 비평가들은 어떤 작품의 특성은 연속성을 지닌 작품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역사적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비평가들은 한 작품은 인접한 작품들과 서로 의존하거나 작용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나아가 이 작품은 무한히 연속되는 작품들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그 작품 자체의 내적인 중심에 의해 결정되는 자족적인 형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모험>하는 비평가들은 문학작품의 연속성에서 원칙적으로 거부되는 것, 즉 처음부터 이질적인 것이나 감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미학적 견해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비평의 유형학>이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비평들이 <노동>과 <모험> 사이에서 펼쳐지는 <비평적 스펙트럼> 상의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두 비평집을 읽어보고자 한다.


노동의 비평

<타자의 언어학>(문학과경계, 2006)은 문학평론가 강경희 씨의 첫 비평집이다. 이 비평집은 그녀가 <등단 이후 6년 동안 발표한 글들 중 일부>(8; 이후에도 책의 페이지만을 표시함),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시 평론만을 묶은 것인데, <주로 9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문학 현장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중심 텍스트로 삼>(8)고 있다.

강경희 씨의 비평집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먼저 1부에는 <90년대 이후 시의 문학적 지형과 문제적 징후들을 살펴보고>, <새로운 세기의 시인들의 다양한 시적 모험과 상상력>(8)을 탐색하는 7편의 글들이 추려져 있다. 이른바 총론에 해당하는 비평들이다. 그런가 하면 2부는 <90년대 이후 활발한 시적 성과를 보여주었던>(8) 7명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그들 각각의 작품 세계를 검토하는 소위 시인론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3부에는 <중견 시인들을 비롯해 신인들의 첫 시집에 이르기까지 2000년 이후 발표한 시집들>(8)을 음미하는 13편의 작품론이 실려 있다. 2부와 3부는 말할 것도 없이 1부에 대해 각론적 성격을 지닌다. 자신도 밝히고 있지만, 강경희 씨의 비평적 관심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기의 문학의 지각 변동의 특성>(8)에 모아져 있는데, 그녀는 문학, 특히 <90년대 이후의 시>가 <디지털화된 세계>(8)로 요약되는 오늘날의 변화된 문화적 상황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물론 <타자의 언어학>이라는 비평집의 표제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비평은 새로운 문화적 상황에 연동된 낯선 문학적 변화에 대해 일단 회의와 비판보다는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는 쪽이다. 나는 특별히 이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자신의 비평이 <타자의 삶에 대한 무한한 매혹>(6)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강경희 씨의 비평은 마치 <이질적인 타자의 땅으로 떠나는 여행>(6)과 같다. 그녀는 실제로 <후기 자본주의의 테크놀로지화된 삶의 양식>(16)이 <도구의 차원>(16)이 아닌 <존재 기반>(16)이 된 새로운 시인들(이원, 서정학, 성기완, 여정)의 작품이나 <현실을 낯설게 재구성하거나 일그러뜨림으로써 우리의 보편적인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매우 생경한 세계를 재현>(77)하는 실험적인 시인들(김옥희, 김행숙, 박계해, 박판식, 유형진, 조민, 조연호, 진은영, 최하연, 하재연, 황병승)의 이른바 <아방가르드 시>(76)에로 주저 없이 비평적 여행을 떠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세계 개선에 대한 의지와 목표가 비교적 분명했>(97)던 이전의 희극적인 작품들로부터 <보다 가벼워지고 내면화하고 요설화하는 특징>(97~98)을 보여주는 <일군의 신세대 시인>(97)(서정학, 이장욱, 유홍준, 이응준, 김참, 이승원, 백인덕)의 작품들을 구별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오늘날의 <웃음>(97) 속으로도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러면서 강경희 씨는 그러한 <9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70년대생 젊은 시인들의 작품>(59)에서 변화된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수용>(38)과 <향유>(74)라는 수동적인 의미만을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한 <비판>(74)과 <전복>(38)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읽어낸다.

이처럼 기존의 작품들로부터 분리되며 동시에 그 작품 자체의 내적인 중심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자족적 형식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것을 비평적으로 향유하려 한다는 점에서, 강경희 씨는 일단 <이질적인 것에 대한 매혹>을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하는 비평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황폐한 현실에 대한 사려 깊은 문학적 응전이 되지 못하고 그러한 현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일종의 사회문화적 투영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면서도, 기존의 작품들이 형성한 연속성 속에서 파악될 수 없거나 거부될 만한 것을 존중하고 가치화하는 미학적 견해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70년대 생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내용과 형식의 비동일성에 <부정의 미학>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강경희 씨에게 앞에서 언급한 <의심>은 주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본질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강경희 씨의 <모험적 비평들>의 이면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작품은 현실과 반성적 관련성을 가져야 하고, 이를 통해서만 작품의 미학적 의미가 표현된다고 고집하는 <노동하는 비평가>의 모습을 지속적이면서도 뚜렷하게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면적인 고뇌>(40)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반성적 사유>(75)라는 전통적인 비평 기준을 근거로 젊은 시인들에게 비판적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강경희 씨의 글은 <노동하는 비평>의 숨겨진 요소를 보여주는 듯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강경희 씨는 <사이버 문학을 표방하는 이원과 서정학, 성기완의 시>(39)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테크놀로지화된 삶의 양상>(16)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고 보면서, 이것은 <불안과 모순이 중첩된 현대사회를 진정성 있게 바라보려는 태도>(40)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젊은 시인들이 <지극히 기계화된 삶에 편향된 채 가상에만 도취된 병적 나르시시즘을 드러낸다는 점>(40)을 들어 <시적 상상력을 편협한 울타리에 가두는 상상력의 빈곤>(40)을 지적한다. 그리고 <언제나 문제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면적인 고뇌가 시 속에 각인되었느냐 하는 점이다>(40)라고 비판적 조언을 덧붙인다. 사실 이러한 <비평적 알고리즘>은 강경희 씨의 비평들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그런데 강경희 씨의 비평적 알고리즘이 우리를 끌고 가는 곳은 놀랍게도 내면적인 고뇌의 열도를 통해 문학적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낭만주의적 믿음의 공간이다. 그곳은 무엇보다도 <욕망의 유토피아가 온다고 믿는 것은 헛된 믿음이다>(127)라는 것을 아는 곳이고, 그리하여 <자연과 세계가 하나 되던 아름다운 세계>(337)를 동경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다. 요컨대 <모험의 비평>이 우리를 이끌고 간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직 가보지 않은 다가올 미래의 땅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오래된 과거의 땅, 곧 본질적인 <시원(始原)의 세계>(148)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나는 강경희 씨를 <이질적인 것에 대한 매혹>을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하는 비평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이제 그녀는 오히려 <오래된 것에 대한 매혹>을 간직하고 새롭고 전위적인 작품들에게 과거의 문학적 기율을 설득하는 <노동>의 비평가로 다가온다. 결국 <모험하는 비평가> 속에 숨겨진 <노동하는 비평가>가 강경희라는 비평가의 진짜 모습인 셈인데, 나는 왠지 그녀의 재능이 모험할 때보다 노동할 때 더욱 빛나는 것 같다.


모험의 비평

<순간, 시마詩魔에 들리다>(작가, 2006)는 문학평론가 고명철 씨의 시 비평집이다. 이미 여러 권의 비평집을 가진 고명철 씨이지만, 사실 시 비평집으로서는 첫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 비평에 전념해 온 것도 아니라, 먼 발치에서 시를 읽으며, 시인들의 시적 인식과 그 내면을 엿보고자 신열(身熱)을 앓으며, 저 혼자 시마에 들리고자>(11; 이후에도 책의 페이지만을 표시함), <시를 향한 짝사랑>(10)을 실천해 왔다고 하는데, 이 비평집은 그 첫 결실인 셈이다.

고명철 씨의 비평집은 크게 5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1부는 <1990년대의 시문학사를 거칠게 파악해보면서>(11), <‘지금’, ‘이곳’ 시단의 지형도를 점검해보>(11)는 글과 <1990년대 이후 변화된 현실 속에서>(11) <나태해지는 진보 문학을 향한 성찰의 목소리>(11)들을 검토하는 글 등 6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그리고 2부는 <전통 시조의 율격을 창발적으로 계승한>(11) 시조 시인들(고정국, 김제현, 조영일, 이달균, 황다연, 윤금초)의 시집을 다루는 글 6편이, 또 3부는 <삶의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12)는 각 시인들(정규화, 이승하, 정군칠, 이해웅, 안차애)의 시집 5권을 주목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4부에는 4명의 개별 시인(성찬경, 문충성, 문태준, 김사이)의 시 세계를 살펴보는 <일종의 작가론적 성격의 글들>(12)이 <보유>까지 포함해 5편 묶여 있고, 마지막으로 5부에는 <2004년 한 해 동안 계간 ≪열린시학≫의 계간평을 통해 발표된 것 중>(12) <나름대로 애착이 가는 시들의 감상>(12)에 해당하는 24편의 글들이 실려 있다. 고명철 씨의 비평적 관심은, 그 폭이 넓기는 하지만, 주로 90년대 이후 변화된 <국내외의 정치적 상황>(21)에 연동되어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진보 문학>(11),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 참여계열의 시>(21)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고명철 씨는 진보 문학, 특히 <민중시에 대한 생산적 비판>(28)에 힘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와 더불어 그는 <민중시인들의 시작에 애정을 갖는 것>(28)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바로 이 국면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삶의 대지로부터 이반된 채 둥둥 떠다니는 욕망의 시가 아니라, 대지에 밀착하여 삶의 생래를 육화시키는 시를 통해 우리는 삶과 현실 속에서 외면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참된 가치를 성찰할 수 있다>(103)라고 말하는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고명철 씨의 비평은 대지로부터 이반된 채 떠도는 여행의 비평이 아니라 <대지에 밀착된 채 삶의 참된 가치를 일구는 노동>의 비평을 지향한다. 실제로 그는 무엇보다도 <1980년대에 지녔던 민족문학진영의 진보적 문제의식>(23)이 새로이 모색하는 <민중적 서정성의 미학>(23)이나 <민중의 낙천성과 낭만성>(111)과 같은 것을 그리고 있는 <일과시> 동인들의 작품에 주목한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거대담론에서 소홀히 간주되어온 여성에 관한 문제의식에 착목한>(23~24) <여성시>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별히 주목받게 된>(24) <생태시>에 전위적인 관심을 가지면서도, 이처럼 급부상한 <여성시>와 <생태시>의 문제의식을 지난 진보문학이 추구했던 미완의 과제와 연계시키는 데 주력한다. 이 사실은, 고명철 씨가 <1980년대의 진보적 문학>(117)의 터전이 붕괴되고 90년대 이후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전횡하는 작금의 현실>(117)이 현재의 <진보 문학>에 지난 민중문학의 <낡고 고루한 경계를 넘어선 창조적 전복과 생성의 계기>(29)가 필요함을 뜻한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들의 시 세계를 다루면서 언제나 이것을 단순히 <미적 대상>(101)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세계의 고통에 치열히 대면하>(77)는 <시적 진실>(101)로서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작품들이든 지난 작품 전체와 통일적인 연관관계를 형성하거나 이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 특성이 연속성을 지닌 작품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고명철 씨는 일단 작품들에서 <대지에 밀착된 삶의 참된 가치>를 통해서 작품 전체를 맥락화하는 <노동하는 비평가>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는 <비평은 모험을 두려워해서 안 된다>(10)고 생각하고, <창조적 전복과 생성>(28), 즉 <낡고 고루한 껍질을 벗는 갱신의 치열성>(44) 같은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과거의 시조를 계승한 현대 시조의 미학을 말할 때조차 <틀을 내파(內破)시키는 아름다움>에 이끌린다. 그러나 고명철 씨는 줄곧 기존의 작품들이 형성한 연속성과 아무런 관계없이 진행되는 작품이란 존재할 수 없고 작품을 연속적으로 이어주는 고리는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진보 문학>에서 <창조적 전복과 생성> 또는 <갱신의 치열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진보 문학으로부터의 벗어남>이 아니라 <진보 문학의 거듭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연대의 민중 시인들의 작품이나 90년대 이후 변화된 진보적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시적 진실>(101)을 발견하고자 하는 고명철 씨에게 앞서 언급한 <모험>과 <전복>과 <갱신>에 관한 호의적 관심은 이른바 <노동하는 비평가>에게는 다소 좀 이질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에게 놀라운 것은, <노동하는 비평> 이면에 있는 그런 <모험적 비평>의 요소가 고명철 씨의 비평에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령 그가 90년대 시의 새롭고 전위적인 미학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뚜렷하게 드러난다. 고명철 씨는, 세계정세의 급변에 따라 90년대 이후 <민족문학진영 시들의 현실적 파급력>(21)이 현저히 약화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 속에서, 1980년대와 같은 방식의 현실 참여계열의 시로서는 더 이상 현실적인 시적 대응을 다 할 수 없다>(21)고 보고, 변화된 현실에 응전하려면 <1980년대와 변별되는 1990년대 시의 새로운 미학>(22)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1990년대의 이 새로운 미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역사철학적 문제의식>(22)이 <근대의 도구적 이성중심주의에 의해 배제되었던 타자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 그 진정한 가치를 복원시키는>(22) 의미를 갖는다고 특별히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90년대 김참, 연왕모, 이원 등이 보여주는 <환상시>의 <전복과 위반의 상상력>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주목하는 듯하다. 이처럼 그는 소위 <민중시>와는 거리가 먼 <일상·개인·타자·욕망·탈주·질주 등 미시적 차원과 연관을 맺으면서 다원화된 가치들에 주목하는 시들>(21)에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90년대 <환상시>의 전복과 위반의 상상력을 말하면서도 이것이 갖는 <시적 설득력>이 <환상적 리얼리티>(49)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고명철 씨는 여전히 현실이라는 대지에 밀착된 <노동하는 비평가>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어쩌면 진보 문학에 대해 애정을 표현해온 고명철 씨가 <새롭고 전위적인 미학>에 매혹된 데 대한 일종의 변명, 곧 <비평적 알리바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지에 밀착되어 있어야 할 <노동하는 비평가>가 뜬금없이 <시마(詩魔)>라는 낭만주의적 영감 개념에 <들려 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은밀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하면, 이 모든 것은 고명철 씨가 너무 오랫동안 진보적 문학을 읽어 와서 답답해지자 자신의 비평을 <자유롭게> 하려는 데서 생겨난 어떤 양상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노동하는 비평가> 속에 감추어진 <모험하려는 비평가>가 고명철이라는 비평가의 현재 모습인 셈이다.

지금까지 강경희 씨와 고명철 씨의 비평집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강경희 씨의 비평에서는 <모험하는 비평가 속에 숨겨진 노동하는 비평가>를 만날 수 있었고, 반면에 고명철 씨의 글에서는 <노동하는 비평가 속에 감추어진 모험하려는 비평가>를 만나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질적인 것의 공존>이라는 어떤 <포스트모던>적 역설과 마주친 것인데, 나는 이것이 과거와는 다른 현재 우리 비평의 핵심적 양상을 보여주는 시금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험이 노동과 함께 있고 노동이 모험과 더불어 사는 두 비평집의 모습은, 일단 그동안 순수와 참여의 이분법과 같은 진영 논리 속에서 증폭되곤 했던 우리 비평의 논리적 편협함이 어떤 <균형 감각>에 이른 결과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균형 감각은 우리 비평을 변화시키는 <도전>으로 작용할까, 아니면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단념>으로 작용할까? 이것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나에게 없다. 다만 나는 그러한 <이질적인 것의 공존>이 전략적 사고에 기초한 애매한 태도가 아니고 사려 깊은 균형 감각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양진․1969년 인천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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