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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서평/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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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16회 작성일 08-03-01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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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영하 장편소설 <빛의 제국>



2006년 서울 율리시스, 그 좌절된 모험에 대한 기록
임영봉|문학평론가

1. 형식의 모험과 모험의 형식

김영하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은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작가 김영하가 그동안 꾸준히 문제작을 선보여 왔던 만큼 이번 장편에 거는 독자의 기대 또한 큰 것일 수밖에 없다. <빛의 제국>이 가진 새로움은 일단 작품의 형식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빛의 제국>은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문제작 <율리시스>(Ulysses)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빛의 제국>의 이야기 구성은 블룸이라는 주인공의 하루 일과를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는 <율리시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빛의 제국>의 스토리는 김기영이라는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게 되는 일들, 만 24시간의 흐름에 연결된 일련의 사건 전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빛의 제국>에서 이야기는 아침 7시 정각에 시작되어 다음날 아침 7시 정각에 끝난다. 전체 이야기는 시간의 경과에 대응하는 스무 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의 이야기들 속에는 주인공 격인 기영을 비롯하여 그의 아내 마리와 딸 현미,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물 설정에 있어서도 <빛의 제국>은 <율리시스>와 비교될 수 있으며 후자의 원본에 해당하는 <오딧세이>를 함께 떠올릴 때 세 작품의 의미는 더욱 흥미로운 것이 된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형식상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벌이는 행위의 특수성-모험적 여정과 자기 복귀의 의미와 일정하게 연결되어있다. <빛의 제국>에서도 물론 이런 형식적 특질은 작품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것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간첩’이라는 특수 신분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빛의 제국>은 관심과 흥미를 끄는 다양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지만 독자들의 궁극적 기대지평은 역시 작가의 메시지, ‘이 작품은 <율리시스>라는 형식의 차용을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놓여 있다.


2. 환멸의 형식, 율리시스 되기

<빛의 제국>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김기영’이다. 그는 평양 출생으로 평양 외국어대학을 다니던 중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김정일 군사정치대학의 양성소에서 특수 훈련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다. 조직 내부의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오랫동안 연락두절 상태에 있었던 주인공은 어느 날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자신에게 내려온 암호문을 해독한다. 암호문은 북의 지령,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는 4호 명령을 담고 있었다. 위로부터의 연락이 끊긴 지난 십여 년 동안 그에게는 아무런 명령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영화수입사의 사장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신의 정체를 은닉한 채 남한 생활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80년대 중반 남파된 기영은 북의 지시에 따라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여 운동권 대학생으로 활동했으며 그때 만난 아내와 결혼하여 중학생 딸까지 두고 있다. 주인공 기영은 자신에게 내려진 갑작스런 귀환 명령을 앞에 두고 망설이기 시작하는데 남한 생활이 자신의 존재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그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그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게 없던 시절에 내려와서 남한 사람들과 함께 그 신기한 발명품에 놀라며 그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중략) 어쩌면 평균적인 남한의 사십대보다도 더 잘 적응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옮겨다 심은 사람’이었으므로 적응이야말로 최우선의 과제였다. 재생 처리된 사이보그처럼 그의 눈, 심장 그리고 하드디스크가 어느새 이 세계의 것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 철저히 바뀌어버렸다.(77~78쪽)

1963년 평양 출생의 주인공은 1985년 봄, 서울에서 1967년생 김기영으로 다시 태어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온 셈이다. 문제는 지금의 주인공에게는 돌아가야 할 조국이 분명치 않다는 사실이다. 남한의 수도 서울에서 살아오는 동안 기영은 변했고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동안 조국에 대한 그의 생각 또한 달라졌다. 롯데월드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낙원이라는 구호를 의심하게” 된 이후로 기영은 개인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북한 사회에서 인간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주체사상의 허구성과, 순혈주의에 가까운 북한의 민족주의 또한 체제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빛의 제국>은 자명성을 상실해버린 세계의 한복판을 배회하는 또 다른 블룸의 이야기, ‘2006년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판 율리시스’(그리스어로는 ‘오딧세우스’이다)의 모험담으로 대두한다. 주지하다시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머의 <오딧세이>에 대한 패러디이다.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은 고향 이타케를 떠나는 데서 시작하여 귀환 장면에서 끝난다. 오딧세우스에게 있어 고향 이타케의 존재는 <빛의 제국>의 기영이 돌아가야 할 조국과도 같은 것이다. <오딧세이>에서 이타케는 등대의 불빛처럼 오딧세우스의 여정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타케로의 귀환에서 완결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이 섭리에 의해 주재되는 대낮처럼 밝은 세계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암흑처럼 캄캄해진 세계 상황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블룸과 같은 20세기의 오딧세우스들 앞에는 도달해야 할 삶의 목적지 같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빛의 제국>의 주인공 기영이 직면한 상황이기도 하다. 한국판 율리시스의 모험담으로서의 <빛의 제국>은 조국의 귀환 명령에 대한 주인공 기영의 회의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며 그런 의식의 저변에는 이념의 상실에 대한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조국의 현존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의 상실은 기영의 이중적 환멸의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권태는 무차별적으로 퍼져있었다. 기영은 권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그것을 실제로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떠나온 사회에서 권태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에나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권태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권태는 차라리 무료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적절한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떤 자극만 주어진다면 금세 사라질 가볍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자본주의적 권태에는 무게와 질량이 있었다. 그것은 삶을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유독 가스처럼 느껴졌다.(80쪽)

<빛의 제국>에서 기영의 율리시스 되기는 남북한 사회에 대한 동시적 환멸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있다. 인간을 억압하고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남북한의 사회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이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등질적일 뿐만 아니라 각각의 모순을 서로 비추어주는 거울의 의미를 띠고 있다.


3. 기억하는 기계의 판타지

<빛의 제국>의 주인공 기영에게는 돌아가야 할 ‘조국’이 없다. 여기서 조국의 사라짐은 그가 가졌던 이념의 상실이자 세계의 상실을 의미한다. 세계의 존재를 비추고 질서화하는 이념의 불빛이 꺼져버렸을 때 그가 서 있는 세계는 자명성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빛의 제국>에서 자명성을 상실한 세계의 실상은 자본주의 남한 사회에 대한 기영의 환멸적 감정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영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존재를 ‘괴물’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느끼고 있다.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마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공통 감각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마리의 의문 속에서 삶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기영과 마리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에게 있어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는 불가해하면서 통제 불가능한 어떤 힘으로 감각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빛의 제국>의 주인공 기영의 운명은 카프카의 <성>에 등장하는 측량기사 K의 그것과 동질적이다. 성 안의 누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는지 알지 못하는 K처럼 기영 또한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 말고는 다른 어느 것도 모르고” 있다. K처럼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만 결코 알 수 없다. <빛의 제국>에서 주인공 기영의 율리시스적 모험은 이러한 맥락 위에 놓여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돌아가야 할 조국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남아있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조국을 찾아나서는 행위일 것이다. 그리하여 기영은 마음의 여행을 시작한다.

우리가 감정에 일일이 어떤 표식을 부착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그 순간의 그의 감정을 ‘너무 일찍 도착한 향수(鄕愁)’라 명명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귀환 명령을 받은 그로서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이제 다른 방식으로 감각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은 일견 장기 여행자가 짐을 꾸리는 것과 비슷하다. 정신적으로 그들은 이미 여행지에 속해있다. 그래야 그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들이 샴푸와 속옷, 안대와 손톱깎이를 챙기듯 이 세계의 이미지와 소리와 냄새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훗날의 소용, 향수라는 아주 사치스런 소비를 위한 재료들이었다.(51쪽)

그러나 위의 대목에서 자신의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기영의 행위는 운명적으로 실패가 예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여행은 단지 “세계의 이미지와 소리와 냄새를 수집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세계의 실체는 결코 포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조차 보증할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빛의 제국>에서 주인공의 마음의 여행, 자신의 내면 탐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후기근대적 세계 상황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개인과 자아의 존재는 확증될 수 없거나 부재의 형식으로 제시되는데 기영의 아내 마리가 보여주는 죽음과 사라짐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빛의 제국>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일종의 유령들’이다.

기영의 대학 후배 소지현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배우이면서 동시에 관객”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경험은 경계와 질서가 사라진 세계상, 그러니까 삶이란 그 자신이 배우이면서 동시에 관객이 되어 벌이는 다양한 ‘연극’이고, 세계는 그런 연극이 상연되는 거대한 ‘극장’과 같은 것임을 환기시킨다. 그 세계의 대변자는 “내면도 없고, 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은 물론 내세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내면성과 초월적 의식이 아니라 ‘본능’과 ‘욕망’일 뿐이다. 그녀는 명령조로 기영에게 명령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보면 주인공 대신 늙어가는 그림 있잖아? 원래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난 모르겠어. 그렇지만 형은 이 배역을 너무 잘 소화한 나머지, 이제 배역과 구별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 초상화가 진짜고 도리언 그레이가 가짜인 것처럼 형도 이 세계의 형이 진짜 형일 거야. 원래의 자기는 잊어버려”라고.

<빛의 제국>에서 주인공 기영의 율리시스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기억하는 기계로서의 그 자신의 운명이다. 기영의 기억하는 기계 되기는 자신의 존재와 삶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 세계와 싸우는 순간이다. 기영의 율리시스적 모험은 본질적으로 기억하는 기계의 시간여행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는 기계로서 그가 불러낸 과거의 시간들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어두운 빛깔의 것이기에 자기 존재와 삶의 회복이라는 목표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살아있는 삶의 시간들, 그 순금의 기억들은 그의 마음속에서조차 부재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사정이 그러하니만치 <빛의 제국>의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 인물들의 내면 공간 또한 그만큼 좁다. 그들은 모두 운명적으로 기억하는 기계이지만 자신의 협소한 내면 공간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기영의 아내 마리의 운명도, 기영을 뒤쫓고 있는 국정원 요원 박철수의 운명도 주인공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

<율리시스>나 <오딧세이>처럼 <빛의 제국> 또한 모험의 종료를 의미하는 주인공의 귀환 장면에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빛의 제국>에서 주인공의 자기복귀 과정은 <율리시스>나 <오딧세이>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빛의 제국>에서 기영의 자기복귀를 이끌어내고 있는 힘은 오딧세우스를 인도하는 ‘객관적 섭리’도 아니고 블룸을 지배하는 ‘내면적 진실’도 아니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주인공의 대학 후배 소지현은 그녀를 찾아온 기영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 것 같아. 지난 몇 년간 너무 평탄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거든.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 앙드레 말로는 마오의 대장정에 참여했잖아. 그런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혁명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어디에도 위험이 없어. 오직 불륜밖에는. 그러나 그 흔하디흔한 모험에는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283쪽)

기영의 고백을 듣고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소지현은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그의 무모한 모험에 동행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은 물론 마음의 행로를 따라 여행길에 나선 기영의 마지막 도달점이기도 하다. 이제 세상에 혁명 같은 것은 일어날 수 없고 진정한 의미의 모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혁명과 모험이 사라진 자리에 대두하고 있는 것은 일상성의 세계이다. <빛의 천국>에서 기영의 자기복귀는 ‘모험’ 대신 ‘일상’을 선택하고 그 세계의 내부로 되돌아감을 의미하고 있다. 기영의 모험은 이념마저 취향의 기호이자 ‘일종의 소비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힘의 존재, 자본주의 일상체제 앞에서 좌절되고 만다. 이야기의 끝 대목에서 기영의 자기 고백에 대해 아내 마리가 보여주는 비정한 태도는 자본주의 일상체제의 냉혹함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주고 있다. 우여곡절을 겪지만 기영은 결국 자신의 가정,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아가는 가족 체제 속으로 돌아간다. <빛의 제국>은 주인공이 집을 나서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집으로 복귀하는 데서 정확히 끝을 맺고 있다.

이야기 전반의 흐름을 염두에 둘 때 주인공의 현실타협적인 일상 복귀는 너무 싱겁고 성급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의 선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담지하고 있는 시대정신에 대하여 <빛의 제국>에서 기영의 선택은 얼마만큼의 폭과 깊이로 우리 시대의 정신을 담지하고 있는 것일까. <빛의 제국>에 대한 평가의 핵심에는 이 물음이 놓여있다. <빛의 제국>의 문제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주인공의 의식 근저에 놓여 있는 새로운 세계관의 형태, ‘도저한 허무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이 상징하는 바처럼 그런 의식 앞에서 세계는 기괴한 환상처럼 전도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빛의 제국>은 자본주의 일상체제에 대한 환멸의식과 함께 심미적 허무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전도된 세계상’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빛의 제국>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 삶에 대한 작가의 전망과 통찰 의식을 집약하고 있는 이 심미적 허무주의의 성격은 충분히 쟁점적이다.



임영봉․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 등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추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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