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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서평/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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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8회 작성일 08-03-01 01:11

본문

|서평|



■황희순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

■정숙자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



고통의 흔적, 완성을 향한 발걸음
박선영|문학평론가

1.

운명이 고통을 동반해 엄습하면 누구나 한 마리 짐승처럼 상처를 핥는 데 몰두한다. 절대적인 아픔과 긴장 속에서 인간은 신음을 토하며 웅크리거나, 울부짖으며 고통의 원인을 향해 돌진한다. 자극과 반응의 쉼 없는 상호작용 사이에 두뇌가 끼어들 여유는 거의 없다.

황희순 시인의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는 고통의 공격에 직면한 자가 보여주는 본능적 몸부림과 흐느낌의 기록이다. 그가 감당해야 할 딜레마는 즉물적 고통이 사라진 후에도 아픔은 더욱 생생하게 지속된다는 점이다. 고통이 갑작스럽게 닥쳐온 상실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한 원망이든 자학이든 그 무엇인가를 잡아 상실과 부재 앞에 세우고 단죄해야만 그는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링 위에 올라 뻥 뚫린 부재를 향해 쓰러지는 순간까지 주먹을 휘두른다. 자신이 휘두른 펀치에 얼얼하게 가슴을 맞고 비틀거린다. 벨이 다시 울리고 쉽게 끝나지 않을 이 싸움은 계속 반복된다.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이를 악무는 고투는 처절한 비극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지루한 싸움 끝에, 이윽고 눈물을 닦고 고독한 링에서 내려오며 스스로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 아프다.


처절하게 흐느끼는 자에게 다가가 고통이야말로 삶을 성숙하게 할 것이라 위로를 건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선인가. 지금도 “시들지 않는 지겨운 상처”(「시들지 않는 꽃」)가 줄줄이 절망을 낳고 있는데 말이다. 절망의 흡반은 동정 없이 삶의 혈액을 빨아 멍자국을 남긴다. 고통은 “잘라도 잘라도 시퍼렇게 싹 돋”(「봄은 무덤이다」)고 “아무리 도려내도, 넘치고 또 넘쳐”(「버려진 신발을 보면 뒤집어보고 싶다」) 그만큼 다시 차오른다.

오래 전 깨뜨린 유리컵이 방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잠자리에 들면 날카로운 유기조각이 살을 찌르며 몰려다닌다 밤마다 오도가도 못 하는 피투성이 시간이 상처를 통과한다 팔다리 잘린 몸통이 어둠에 둥둥 떠내려간다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보면 눈을 부라린 유리조각이 내 목을 노리고 있다 매일매일 자라는 저 유리조각, 뽑아버리고 싶은 고장 난 신호등

―「파란불이 켜지지 않는 방」 전문


상실이 낳은 고통에서, 아픔은 상실한 그 순간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후 부재를 실감할 때 정점을 찍는다. 날선 고통은 부재를 사무치게 확인할 때마다 칼날을 더욱 단단하게 박는다. 깨뜨린 컵은 오래전에 치웠지만 뽑아낼 수 없는 유리 파편들에 찔린 몸과 마음은 출혈과 지혈을 반복하며 곪아가고 있다.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거라 약 올리듯 날을 박는 고통이 “고장난 신호등”처럼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득거린다. 묵은 시간의 기억들은 잘려나간 손과 발을 타고 새롭게 살아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다. 상처로 가득 찬 기억의 반복은 죽음의 충동마저 불러일으킨다. 고통의 책임을 안으로 돌려 자기에게 참혹하게 복수하거나, 스스로를 자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억의 칼로부터 면제도 회피도 불가능한 자아는 매번 비정함만을 맛본다. 날을 세우고 달려드는 기억 앞에서 그는 “사방팔방 부서지지 않는 저 두려운 것들/어떻게 뚫고 나갈까”(「회귀를 위한 변명」)라고 엎드려 자조한다.

또한 고통은 무기력이라는 낯선 얼굴을 끌어내고 있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아픔 때문에 주체는 삶의 주도권을 조금씩 잃어가고 만다. 생의 주도권을 갖고 있을 때 인간은 희망을 품고 미래의 꿈을 부풀린다. 하지만 수긍할 수 없는 압도적 부조리와 마주할 때는 어떠한 의지도 결국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지속적 고통이 보호의 방어막을 깨부술 때, 상처가 노출된 자는 적극성을 빼앗긴 채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강요된 수동성으로 인해 자아는 “이건 정말 꿈일지도 몰라요”(「꽃에 찔리며 살아요」)라며 현실을 부정한다. 부정은 존재감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부재중인 채 똑같은 하루가 꿈처럼 흘러가”(「지금은 부재중이오니」)고 있다며 자기가 부재하는 것인지 세계가 부재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한다. 한편으로는 “나를 구석구석 더듬어보”(「다시, 상처 핥기」)거나 “손바닥이 얼얼”(「또 한 계단 내려서며」)하도록 내리칠 때 느껴지는 감각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안은 대상의 수나 양, 질감을 반복적으로 세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정류장에 줄선 사람을 세고 쥐똥나무 열매를 세고 뉘엿뉘엿 지는 해를 세”(「꼬깃꼬깃한 하루」)는 행위로 실감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멈춘 시간에 목 졸리고 슬픔에 미래를 저당 잡힌 채 과거의 미로 속을 헤매던 자아는 고통의 뿌리를 뽑기 위해 기억 이곳저곳을 파헤친다. 상실의 근본 원인을 찾아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감정 속으로 치밀하게 파고 들어가 본다. 그러나 과거로의 탐색은 “나는 아버지의 실패작”(「나는 실패작」)이고 “잡종”(「개가 늑대처럼 울어」)이라는 자조만을 불러오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자조는 자신의 삶이 원래 산산조각 나도록 예정되었을 거라는 무력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혼란 속에서도 감정의 높낮이와 망각이라는 옷을 번갈아 갈아입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조각난 삶의 퍼즐을 끌어 모아 다시 맞추고, 어떻게든 상실을 메꿔 간다. 이때 살아있음은 상처의 산패를 막고, 발효시켜 줄 강한 힘을 제공하고 있다. 자아는 상처도 “먹으면 약이 된”(「벌레 먹다」)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망각에서 재생의 동력을 구하려 한다.


슬프다는 것, 처음엔

뽑아버리고 싶은 이물질이다가

언제부턴가 들여다보며 살더라

깊이 박힌 못처럼 숨조차 쉴 수 없던 것이

점점 헐거워지더라, 헐거워진 그곳으로

숨을 쉬더라

―「기억의 중심」 부분


고추 몇 포기 심은 8층 베란다 화분에 엄지손톱만한 청개구리 한 마리 앉아 있다 창문도 꽁꽁 닫아 놓았는데 이 한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인연이 닿으면 생명도 전깃불 켜지듯 홀연히 켜지는 것일까

언젠가 만져본 듯한 보드라운 살 두 손 오므려 받쳐 들고 풀밭 찾아서 가는 길, 꼬무락꼬무락 손가락 사이를 헤집는다 깜깜한 나도 불이 켜지려나, 정수리가 따듯해져 온다

―「한여름 밤의 꿈」 전문


위의 두 편의 시에서는 단단히 똬리를 틀었던 모멸과 부정이 자기연민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슬픔과 동거하려는 극복의 기미까지 내비친다. 이러한 시도는 이제 그만 기억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뒤틀어진 내면을 매만지려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스스로 작아질 만큼 작아진 후, 그 “헐거워진” 틈새로 조금씩 숨을 쉬며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청개구리의 “보드라운 살”은 잊고 있던 기억 속 생명의 감촉을 불현듯 떠올리게 한다. 타자의 불완전함을 받쳐 든 자아는 그 감촉으로 인해 비로소 “정수리가 따뜻해져” 옴을 느낀다. 고통을 지고 미로를 헤맨 자의 자격으로 그는 자신의 슬픔을 연민으로 전환한다.

상처받은 자가 어둠 속을 헤매며 얻는 것은 비극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런 미로에서 절망한다 해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영영 갇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늘 떠나가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의 눈물로 젖어 있다. 이제 그는 젖은 눈을 들어 빛이 새어나오는 출구를 조심스레 기웃거린다.

부조리, 우연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변수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과연 생은 완전해질까. 누구도 고통을 피해가지 못한다는 삶의 불완전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고통 없이 완전하다면 우리는 각자 혼자만의 공간 속으로 들어앉게 될 것이다. 자신의 불완전을 통감한 자만이 타인의 불완전에 연민의 눈길을 보낼 수 있다면 고통이야말로 생의 필요조건이리라. 황희순 시인의 시편들은 절망으로 체온을 높여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따뜻함을 담고 있다.


2.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에 담긴 시편들은 소소하게 흘러가는 개인적 경험들을 정련하여 빛나는 사리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정숙자 시인은 고독한 대장장이처럼 내면의 용광로에 불꽃을 지피고 잡다한 불순물을 태워 순도를 높인다. 그는 이렇게 제련한 정신에 다시 정과 끌을 대고 정금 같은 언어를 조각하고자 전력투구하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스쳐갈 경험들도 날카롭게 벼린 인식의 칼날에 닿아 여지없이 깎여나간다. 그는 자기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수도자처럼 고독하게 긴장과 고통을 자청한다. 그 길은 외롭고도 엄격하다. 고통은 정신을 더욱 강하게 단련해줄만한 사유를 경험 속으로 개입시키기 위해 그가 기꺼이 불러들인 것이다. 이유도 달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이야말로 생의 원천적 부조리라 할만하다. 직접적인 자극이 가신 후에야 그 의미를 종합할 수 있다는 특성은 고통을 주체성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만든다. 불현듯 찾아오는 낯선 경험에 무방비 상태로 의식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받아들일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고통은 상처를 새기고 달아나기를 반복한다. 그 상처를 사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야말로 단단한 정신을 창조해주는 자양분이라 그는 믿고 있다. 생을 볼모로 쉴 새 없이 찾아오는 부조리와 야심찬 대결을 벌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정숙자 시인은 “나의 대명사는 인간”(「1초 혹은 2초 사이로 지나가는 태풍」)이라고 단언하며, 모든 사유는 “자신에게 빗금치고 자신을 외우”(「둥근 책」)는 것이라 정의한다. 존재에의 물음이야말로 “삶의 준비다. 시작이다. 진행이다”(「로댕은 묻는다」)라고 확신하는 그에게 견고한 사유는 지상의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몰아치는 모래바람은 별빛을 따라 사막을 횡단하는 자가 감당할 당연한 통과의례라는 듯, 그는 지나간 흔들림에 대해서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다만 “그 맑은 노래를 위해 갈대는 그렇게나 오랜 세월 나부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오선의 깊이」)라고 흔들림을 슬쩍 내비치는 정도다. 삶이 위태로운 비탈을 조심조심 걷는 과정이라면, 비탈을 넘고 더 높은 봉우리로 시야를 옮기는 것은 그 여정의 필수적인 절차이리라. 비탈길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육체와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해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는 “실족”마저도 더 “단단한 진화를 위”(「파야 할 땅은 시간이다」)해 감수할 마땅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다스려 전진한다.


흔들리는 건 정신이 아니다

맞으면 맞을수록 의지는 더 깊이 박힌다

하지만 고뇌여, 너무 때리지 마라

욱신거리는 침묵이 지금 이 순간에도 회색 하늘을 지나고 있다

뭉개지지 않게, 허리도 발목도 휘지 않게, 눈물도 무너지지 않게 촛불 한 자루 세워야지 그 이상의 바람은 없다 잘 잡힌 균형만이 힘을 기른다 바다가 스스로를 지켜낸 것도 제 안에 답이 있었던 거다

끝없이 밀려나오는 저 대팻밥

내면을 깎는 물보라

간절해야만, 단단해야만, 삼각파(三角波) 아울러야만 비로소 섬일 수 있다

섬을 꿈꾸는 자만이 섬에 닿는다

별똥별 사철 두고 돌아오는 곳

먹구름도 말끔히 헹궈 은빛괭이갈매기 떼로 나는 곳

외곽으로, 여백으로, 고독으로 나앉은 미래는 오늘도 오로지 용맹정진

돌 하나만 저리 굴러도 우주의 중심이 바뀌는 것을…

하물며 핏방울이 젊은 숨이랴

―「섬의 정신」 전문


누구와도 나눠 멜 수 없고,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짐이라는 점에서 고독과 고통은 실존 그 자체이다. 고통의 적극적 수용은 그것에 무감각해지거나 익숙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단단해지려는 갈망에서 비롯한다. “욱신거리는 침묵”은 균형을 획득하고자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는지 알려준다. “균형이 잡히면 울음도 출렁거림에서 벗어나는가”(「의자 위의 책」)라는 기대를 채찍삼아 수만 번의 날갯짓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실패를 정화의 과정에서 “밀려나오는 대팻밥” 같은 불순물로 넘길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얻은 균형이야말로 셀 수 없는 비상과 실패가 낳은 소중한 감각인 것이다. 자아는 바다 멀리 솟은 섬으로 다가가려 노의 균형을 잡고 파도를 다스린다. 그 항해를 위해 “촛불 한 자루”를 켠 다음 섬 한곳으로 시선을 집중한다. 이때 촛불의 가녀림은 바다의 압도적인 어둠과 냉기어린 파도를 짐작하게 한다. 오랜 시간 파도를 헤쳐 왔기에 촛불 하나에 의지해 바다를 환히 밝힐 수 없다는 것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섬에 도달할 방법은 “모두 제 안에 있”(「열매보다 강한 잎」)기에 “중심을 모아 푸른빛을 고르”고 흐트러짐 없이 나아간다. 섬으로의 도달은 달리 말해 자신의 내면을 섬으로 가꾸는 일이기도 하다.

효율과 속도에 강박적으로 시달리는 이 시대에 내면을 가꾸는 것은 비생산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물질적 효율성을 추동력으로 삼아 생산량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는 세속적 일상사에 무관한 태도를 게으름으로 평가절하하기 쉽다. 이에 그는 세상의 우선순위에서 자발적으로 밀려나와 “외곽으로, 여백으로, 고독으로 나앉”는 게으름을 선택한다. 게으름이야말로 “사유의 세계로 달리는 제1국도”(「멈춤, 상상의 속도」)라고 믿기 때문이다. 온전히 침묵과 고요함만으로 채워진 게으름은 “거듭거듭 다친 이들”의 “하염없는” 눈길을 얻게 한다. 자아는 정관(靜觀)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가꾸며 내면의 봉우리를 향해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발이 머리로 들어온다

우울한 발은 머리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안개에 질리고, 바람에 막히고, 소신만이 푸른 발

사유 속으로 진입한 발은 하늘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신발이 닳지 않는다

길을 재지도 않는다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다

발이 창공으로 날아간 순간 길은 원시림으로 돌아간다

온 만큼만 돌아가면 태초다

벗어남/체념/전락이라고 짚어도 좋다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한 순배 익어가는 발

지나온 시간들이 압축된다

다시 씨앗이다

꽃을 지닌 떡잎이 지상으로 뻗어나간다

―「한 바퀴」 전문


위의 시는 근원적 “씨앗”을 찾아 정신의 심해로 탐사선을 내려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대로 영근 씨앗만이 찬란한 꽃을 품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찾은 씨앗은 견고한 껍질 속에서 “꽃”의 꿈을 꾸며 “떡잎”으로 뻗어나간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야말로 이러한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 동력일 것이다. 내면으로의 침잠은 “지나온 시간들”을 “압축”시키며 태초를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한다. 그는 자기 안으로 향한 여행을 “벗어남/체념/전락이라고 짚어도 좋다”며 “사유 속으로 진입한 발”에 기꺼이 몸을 내맡긴다. 사실 일상이 혼란과 잡념으로 분주할 때는 아무리 곧게 걸으려 애써도 발자국은 늘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갈망하는 정신은 고요함과 명상을 나침판삼아 다시금 정방향을 추구한다. 절대적인 광채에 사로잡혀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리고 다가가자 주변의 유혹은 어느새 사라진다. 사유의 고요한 영지로 편안하게 침잠한 자아는 쓸모없는 말을 삼가하고 침묵을 지팡이삼아 거닌다. 그리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고독 속”으로 더욱 깊이 진입하려 한다. 태초의 시간을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발은 이미 차원 높은 경지를 찍고 “한 순배 익”어 있다.

정숙자 시인에게 고통은 그것과 한 치의 양보 없이 맞붙어 사유로 증류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부조리라는 근원적 조건을 정직하게 파고드는 모습에서 빛나는 열매들이 매달린 미래를 떠올릴 수 있다. “고도로 압축/정화된 언어”(「문인석」)를 얻기 위한 노력은 불굴의 금속성 의지라 부를 만하다. 우직할 정도로 한 지점만을 바라보고 가는 <열매보다 강한 잎> 속 시편들은 첫 장의 기대를 크게 거스르지 않은 채 끝까지 나아간다. 격정을 토로하는 여타의 시들 사이에서, 견고함을 반듯하게만 담아내려는 시도는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했던 이 여정이 끝날 무렵, 그 길을 엿보던 이들은 시인의 걸음이 벌써 아득한 곳에 도달했음을 깨닫게 된다.



박선영․200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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