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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2006년 겨울호) 서평/권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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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33회 작성일 08-03-01 01:12

본문

|서평|



박해람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박서영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상처, 달, 그리고 죽음
권경아|문학평론가

1.상처를 삼키는 배고픈 달

박해람의 첫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인간은 삶을 얻는 동시에 죽음 또한 얻게 된다. “시작과 끝이 한 몸”(「다리」)에 있는 것이다. 길 사이에 있는 “다리에게는 양쪽의 세상이 다 입구”인 것처럼 삶과 죽음은 모두 인간의 삶이 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이 시집의 근간이 되고 있다. 비록 삶보다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그려지고 있지만 이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순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모차」에서 버려진 유모차를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또한 삶과 죽음의 순환이다. 생의 끝을 향하고 있는 노인이 생을 시작하는 아이의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은 끝과 시작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릴레이」에서 닭의 죽음이 인간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퍼덕이던 닭의 날개가 조용해지면 “달그락 후루룩거리는 소리들이 달라붙은 그릇에 죽음의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게 된다. 닭의 죽음이 곧 인간의 생을 이어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것들은 끊임없이 삶에 협조하는 것들이다”라는 인식은 곧 삶과 죽음이 순환적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는 것은 삶을 상처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거북이가 땅을 느릿 기어간다

나무 막대기로 슬쩍 건드리면

상처받기 쉬운 것들 안으로 꽁꽁 숨는다

상처의 후생들이 몸 안으로 숨어들어가고 저

전생의 상처만 딱딱하다

기어다니는 것들에게 앞가슴은 전생의 등짝이다

그 앞가슴은 연약한 것들을 무뎌지게 만들어

한 생(生) 슬쩍 뒤집어 등짝을 만드는 것이다

등지고 살아야 하는 것들

그 필요성을 거북이를 보면서 알았다

한 번도 제대로 등 뒤에 붙은 상처를 다독거리지 못하는

상처의 껍질을 평생 등에 지고 다녀야 하는

보이지 않는 습관의 무게

―「상처의 등」 부분


이 시에서 거북이의 딱딱한 껍질은 삶의 상처이다. 삶의 모든 상처들이 등 뒤에 붙어 딱딱한 껍질로 남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이러한 “상처의 껍질을 평생 등에 지고 다녀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 상처는 고통의 흔적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상처는 또 다른 마음의 문이다 견고한 마음에 잠시 틈을 내어 덧문을 생각하게 하는 의사소통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은 상처에서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길 사이에 있는 “다리에게는 양쪽의 세상이 다 입구다 그 입구가 상처의 문이다”(「다리」)에서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상처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입구라는 인식에 닿아있다. 「양귀비」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상처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이다. “상처에서 새살이 흘러나오듯 모든 상처에서 흐르는 것들은 제각기 천국(天國)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에 대한 인식은 다음 시에서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저 달을 좀 봐. 세상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베어 물고 흰 피를 흘리는, 밤을 찾아 떠도는 여정을. 점점 배가 불러 골목 깊숙한 곳까지 살을 구겨 넣고 있는 저 달을 좀 봐.

그렇게 구겨진 내가 마다 않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그곳에서 새살로 돋아나기도 하고

혹은, 욕망 같은 것들이나

잘 여문 씨앗들이 터지는 은밀한 소리를

조수간만의 차이로 밀어내기도 하지.

아프리카에서 본 적이 있어. 야성의 갈기를 휘날리며 수없이 많은 죽음을 먹어치우는 것을, 붉게 물든 목덜미며 포만감으로 새벽까지 뒹굴다 모든 고요의 숨통을 물고 만삭의 몸을 풀러 숲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숨어 있는 모든 것들은 나의 식량이지

끊임없이 먹어치워도 배가 고픈 나는

온몸을 활활 태우며

차가운 허기를 뿜어내며 밤새 떨지.

새벽이 오고

잠자리에 들었다 깨어보면

내 몸이 녹아 사라진 것도 모르지

그렇게 모든 교차 지점이야 나는, 늘

죽음과 삶을 동시에 넣고 다니는 나는, 나는

허공에 이름을 걸고 사는 배고픈 달이야.

―「달」 전문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달의 상상력을 통해 삶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에 다가가고 있는 이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섬세한 시적 상상력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달. “세상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베어 물고 흰 피를 흘리”며, “골목 깊숙한 곳까지 살을 구겨 넣고 있는” 달.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상처를 다 삼키고 있는 달처럼 시인은 삶의 상처를 끌어안기로 한다. 아프리카의 육식동물은 “수없이 많은 죽음을 먹어치”운다. 포만감이 든 그 짐승이 “만삭의 몸을 풀러 숲 속으로 숨어”들 듯 상처는 상처를 먹어치움으로써 치유되는 것이다. 시인이 “끊임없이 먹어치워도 배가 고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먹어치워야 할 삶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시인의 삶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삶과 죽음은 “시작과 끝이 한 몸”(「다리」)으로 이어진 상처이다. “죽음과 삶을 동시에 넣고 다니는” 시인이 “세상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베어 물고” 있는 “배고픈 달”이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2.죽음으로 가는 길

박서영의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는 도처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시집은 「무덤 박물관에서」연작뿐 아니라 그 외의 시들에서도 곳곳에 죽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 삶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태어나자마자 “喪家→”라는 표식을 따라왔다(「죽음의 강습소」)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에게 삶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어디든 간다」에서 시인은 어디든 가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은 “무수히 많은 길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棺이 쩍쩍 달라붙기 시작”하는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무덤 옆을 지나며 “저 푸르디푸른 문을 열어라 이제 내가 열고 들어가야 할 문은 저것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으므로”(「무덤 박물관 가는 길」)라고 말하고 있는 것 이러한 맥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삶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인식 속에서도 삶을 부정하거나 포기하지 못한다.


무덤 내부를 체험하는 공간이라!

나는 이 엘리베이터 앞에 몇 번인가 서 있었다

한동안 그냥 서 있기만 했었다

혼자서는 무덤도 두려운 내부다

살아서는 혼자 무덤의 내부에 이르지 못한다

나는 왜 무덤의 내부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일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 내부에 혼자 들어가는 건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텅 비어 있을까, 구름이 떠다니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한 줌의 흙 위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덤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삶을 누를까, 죽음을 누를까

고민하면서 봄날 내내 서성거렸다

―「혼자서는 무덤도 두려운 내부다 -무덤 박물관에서」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무덤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삶을 누를까, 죽음을 누를까” 고민하고 있다. 죽음을 향해 있으면서도 온전히 죽음으로 나아가지도 삶을 향하지도 못하고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죽음을 향하고 있으면서도 이렇듯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영역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이러한 머뭇거림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갈등과 긴장이다. 이러한 경계에서의 갈등과 긴장은 삶에 대한 희망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혼자서는 무덤도 두려운 내부”가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시인의 머뭇거림은 죽음을 향하는 방식이 “무덤 박물관”이라는 객관화된 무덤을 찾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죽음이 사물화되어 나타난 무덤이라는 곳은 죽음을 상징하고는 있지만 죽음 그 자체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덤을 시인은 또한 관람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삶과 죽음 앞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꽃과 잎사귀의 네트워크인 저 나뭇가지들

공중누각인 우리의 방을

지상과 은밀하게 연결해 놓은 것은 허공이다

이 세상에서 허공의 만다라처럼 무덤이 열려 있고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삶에도 죽음에도 사로잡혀 있다

사로잡힌다는 말이 연결해 놓은

너와 나

둥근 무덤들이 날갯죽지를 펼쳐

가만가만 주검을 뒤덮고 있는 가야의 숲

네트워크는 직선이 아니다

저리 둥근 곡선인 것

곡선이 하늘과 땅을, 죽음과 삶을 통하게 한다

박물관 뜰에서 비둘기와 참새를 만나게 한다

비 내리는 날 너와 나를 만나게 하고

아아, 꽃과 잎사귀가 만나는 가지 끝을

오후의 허공이 후려치고 간다

휘어지는 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꽃잎들

이렇게 갑자기

우리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한다

―「네트워크는 어디든 있다 -무덤 박물관에서」 부분


렇다. 시인은 “삶에도 죽음에도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죽음과 삶을 통하게” 할 둥근 곡선이라 할 수 있다. 꽃과 잎사귀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나뭇가지”이다. 나뭇가지라는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기에 벌레 한 마리가 건너와 “알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날카로운 한끝을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생을 건너가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을 통하게 할 둥근 곡선인 네트워크를 찾고 있는 것이다. 박서영에게 “죽음은 가장 오래 기억해야 할 불멸이다”. 그러나 불멸인 죽음이 매혹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자서)는 시인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 삶 또한 매혹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권경아․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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