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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특집/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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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예술의 악마성
예술에 나타난 악마성
강경희|문학평론가
1. 악마성의 심리학
입으로는 바이런의 아름다운 시를 읊으면서 손으로는 태연히 사람의 목을 따는 남자, 잔인하게 널려진 시체들 속에서 영웅적 인간으로 추앙되는 인물,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쿠르츠 대령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세븐>, <파이트 클럽> 등 인간의 잔인성과 폭력성, 극단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데이비드 핀처와 같은 영화 감독은 인간의 악마성을 극단의 정신적 쾌락으로 변용시키기도 한다. 잔인성과 폭력성은 악마성을 대표하는 요소이다.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윤리적 가치판단을 송두리째 배반하는 이 현상들은 우리에게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그런데 이 공포와 혐오의 감정 이면에는 그것에로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쾌락의 감각이 숨어있다. 극단의 고통은 극단의 희열을 드러내기도 한다. 육체적 고통을 성적 엑스터시로 전환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끔찍한 형벌을 신성화하는 것은 고통과 희열이 대립되고 상호 모순적인 감정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예술에서의 악마성은 이처럼 선한 가치 기준을 위반하고 전복시키는 충격과 이율배반을 통해 선과 악의 감정과 인식을 갈등하게 만들고 교란시킨다. 그렇다면 왜 예술은 추하고 역겹고 끔찍한 것들과 같은 부정화된 것들을 문제시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복잡한 욕망을 재현해 내려는 의식과 관련된다.
서정주의 「화사」는 육체적 애욕과 관능을 끔찍하고 징그러운 뱀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본능적 악마성을 미학적으로 승화한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예술작품에 반영된 악마성은 금기를 위반하는 부정의 표상들을 전면화함으로써 인간의 부조리성과 다중적이고 모순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인간의 욕망은 아름답고 조화롭고 평화롭고 안정된 것들을 희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럽고, 역겹고, 추하고, 끔찍하고, 살벌하고, 잔인한 것들은 강렬하게 욕구한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상반된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충돌하고 갈등하는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기여한다. 예를 들어 산제물로 인간을 바치는 제의적 의식은 일체감과 결속을 다지는 최고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과 같다. 르네 지라르의 말처럼 “인간의 공격성을 한곳으로 유도하고 몰아주면서”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무의식적 공격성을 집단화함으로써 사회의 결속과 유대감을 갖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피터 부르커르트는 이러한 현상을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사회를 구출”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잔인한 제의적 의식을 통해 인간은 절망을 경험하기보다는 오히려 파멸과 절멸의 나락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흔히 악마성의 문제가 종교적 신성성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제적 상황은 도덕에 등을 돌림으로써 종교적 구원과 삶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때문에 악마성은 인간 본성의 양가적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악마성은 악을 경계하고 반성하려는 도덕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기도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거역할 수 없는 악마성을 옹호함으로써 자기 위안과 구출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2. 가학과 피학의 악마성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마성은 흔히 자기 파괴, 공격성과 같은 가학과 피학의 문제들로 드러난다. 이는 악마성을 대표하는 상징적 요소이다. 극심한 고통, 신체를 변형하고 파괴하는 극단의 이미지는 고통을 상상함으로써 고통을 거부하려는 강렬한 인식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과 절망의 심리를 안겨주기도 한다. 이때 고통에의 편입은 고통에 항거하려는 의지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고통과 일체가 되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낳기도 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쿠르츠 대령이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은 스스로 악마성의 창조자가 됨으로써 고통의 가해자가 아닌 주체가 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고통을 극복하는 극단의 방식이다. 즉 야수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악마성의 수호자가 됨으로부터 고통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현대 예술에 나타난 악마성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야기한 신체 학대와 왜곡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대 예술은 부분적인 이미지, 잘려나간 신체, 조각나고 파편화된 신체를 통해 오늘의 세계가 더 이상 이상적이며 조화로운 삶의 공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형상은 이전의 온전한 유기체로서의 몸을 지닌 대상이 아닌, 추악한 이미지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린나 노클린은 이러한 절단되고 변형된 신체의 이미지들을 통틀어 근대사회의 특징을 대변하는 모더니티의 은유라 해석한다. 즉 조각난 신체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자아의 파괴와 사회의 전체성이 해체된 근대성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인간이란 더 이상 숭고하거나 존엄한 대상이 아닌 비천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더 이상 ‘목적’ 그 자체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라는 비극적 현실인식을 드러낸다. 이처럼 훼손된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위기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 변형된 주체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쥐를 본다
내 몸 속에서 쥐 한 마리가 부풀어오른다
쥐는 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거나 무지개빛깔의 털로 뒤덮여 있어도 상관없다 쥐가 야옹하며 쥐를 쫓거나 쥐가 쥐를 잡아먹어도 상관없다
쥐가 나무를 갉아댄다
내 몸 속에 있는 쥐도 나무를 갉아댄다
(중략)
난 늘어진 쥐들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나를 본다
쥐들도 그런 나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쥐를 본다
쥐들이 바라보는 것이 굳이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쥐들이 바라보는 것이 쥐가 아니라 그런 나이거나 그런 나가 아니라 그냥 나라해도 아무 상관없다
―여정, 「쥐와 쥐」 부분
여정의 시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이며 일반적 관념을 여지없이 파괴해 버린다. 그의 시에 있어 인간의 형상은 흔히 ‘벌레’, ‘쥐’와 같이 비천한 생물이거나, 또는 ‘구멍’, ‘콘센트’, ‘인조인간’과 같은 사물화된 존재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그가 인간의 가치를 한없이 추락시키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 삶 또한 이러한 하찮고 끔찍한 동물의 세계와 다름없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쥐와 쥐」는 변형된 주체의 심각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쥐를 본다/내 몸 속에서 쥐 한 마리가 부풀어오른다”라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쥐’의 실체는 화자의 내면 의식이 만들어낸 변형된 주체이다. 즉 시인은 섬뜩하고 징그러운 ‘쥐’를 통해 인간내면에 자리한 악마성을 느끼게 한다. 즉 ‘쥐’는 악마성을 알레고리한 것이다. 갉아먹고, 잡아먹고, 한없이 부풀어오르는 끔찍한 쥐의 모습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혐오스러운 악마성의 일면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즉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잡아먹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 건재한 것들을 끊임없이 ‘갉아대는’ 파괴적 현실을 통해 세계에 내재된 악마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이러한 생존을 위한 본능만이 남아있는 무서운 현실 속에 자기 자신 또한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체의 의지가 만들어낸 적극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공모자이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깝다. 즉 “난 늘어진 쥐들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나를 본다”라는 것은 이미 모든 능동적 행위를 거세당한 채 기생적이며 종속화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 특히 ‘쥐’가 ‘쥐들’로 복수화되는 것은 이러한 공포스러운 현실이 무한히 증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세계를 개선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지의 결핍이라기보다는 현실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한계적 상황에 가깝다. 따라서 ‘상관없다’ 라는 진술은 인간 주체의 고유성이 왜곡되고 변형되는 폭력적 현실의 악마성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혹은 그것을 개선할 수도 없는 절망적 현실에 대한 방관적이며 냉소적 태도인 것이다.
여정의 시가 변형된 주체를 통해 억압된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면 강정은 잔혹한 삶의 방식을 요구받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감히 내가 죽은 줄 알았단다
뇌수의 팽팽하던 신경들이 톡톡 부러졌단다
머리 터져 핏물 든 밤이 남해 먼 바다 해일처럼 드셌단다
죽지 못한 몸에선 아직도 공사가 한창
거울 속 유년을 삼킨 용 한 마리 인두겁을 쓰고 솟았다던데
귓바퀴 타고 돌다 핏줄 어느 구석엔가 죽은 쥐처럼 박혀버렸단다
썩지 못한 껍질을 말리는 중이란다
울지 못하면, 목을 따서라도 쫓아야 한단다
잠 못든 밤, 여직 못간 죽음의 나라
열쇠로 걸린 어미 얼굴 지워야 한단다
피 흘리고 골을 터쳐야 한단다
산 송장에서 솟는
붉은 비를 맞아야 한단다
(중략)
인간이 아닌 괴물이어야 한단다
―강정, 「불가사리」 부분
강정에게 있어 인간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어야 한단다”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비인간화된 존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불가사리」는 온통 살벌한 자학적 행위와 살인적 광기가 출몰하는 잔혹한 현실로 채워지고 있다. ‘머리 터져 핏물 든’, ‘썩지 못한 껍질’, ‘목을 따서’, ‘피 흘리고 골을 터쳐야’와 같은 구절은 온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된 신체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끔찍한 형상을 뒤집어쓴 인간은 온전히 살아 있지도, 죽지도 못한 ‘산 송장’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이는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도 말살되고, 자신의 근원적 모태인 ‘어미’도 부정해야하는 인위적으로 재창조된 인간이다. 즉 “새끼를 낳으면 쇠로 이어야 한단다/잘디잔 신경 마디마디 은빛 錄을 입혀야 한단다”라는 구절처럼 기계화된 인간이다. 따라서 강정에 있어 자아의 모습은 ‘괴물’ ‘산 송장’, ‘기계’와 같은 존재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복합적인 형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여러 가지 형태로 주체를 분산, 분열, 왜곡시키는 것은 현대인의 일그러진 내면 속에는 이러한 다양한 속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으로 변형되든지 결국 온전한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형상을 지닐 수 없다는 비관적 현실인식을 내포한다. 즉 위악적 현실은 인간의 숭고한 ‘탄생’과 ‘죽음’의 문제마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없다는 종말론적 삶을 의미한다. 기계화된 삶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병든 현실, 모든 인간성이 말살되어 버린 타락한 시대에 있어 ‘삶’이란 곧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다.
권총 든 사내가 여자의 손을 잡고 불타는 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 나는 해변의 나무의자에 앉아 검은 시집을 읽었다 아이들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들고 비 내리는 골목을 지나갈 때 유리창에는 푸른 나방이 붙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아스팔트 위를 뛰어갈 때 사내는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김참, 「검은 시집」 부분
김참의 시는 주로 상황에 대한 구체적 묘사를 통해 객관적 사실만을 진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검은 시집」 또한 주체의 감정이나 판단이 중지된 채 보여지고 있는 사실 그 자체만을 그리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모두 시인의 상상이 불러온 실재하지 않는 현실이다.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사내’와 ‘목이 잘린 여자’, ‘목잘린 아이들이 서로의 머리통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그로테스크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검은 시집’만을 읽고 있다. 살벌한 현장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으려는 ‘나’의 모습은 인간의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이다. 그저 세계를 관찰하고 목격하기만 하는 ‘나’의 모습은 세계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려는 욕망마저 거세된 사물화된 인간이다. 이는 극단적 형태의 악마성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에서 ‘검은 시집’이 함의하는 의미는 섬뜩하다. 어떠한 꿈과 아름다운 이상도 제시하지 못하는 ‘검은 빛깔’은 이미 악마적 세계로 온통 채워진 풍경이다. 김참이 불러낸 환상은 추악하고 냉소적인 끔찍한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공포와 전율이라는 인간의 기초적 감정마저 제거된 살풍경한 공간을 통해 김참은 오늘의 현실이야말로 어둠과 죽음이 난무하는 악마적 세계임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공포의 트럭은 새벽 두 시에 단단하고 푸른 쇠로 만들어진 철교를 지나 버려진 잠수함을 개조한 실험실에 도착한다. 트럭에서는 특수합금 기계인간들이 내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들이 실험실 바닥에 찍힌다. 이 시대에 한번도 보지 못한 새들이 잠수함 위에서 죽은 인간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바다에서 무수한 물들이 육지로 올라왔으며 잠수함은 노란 깃발을 휘날리며 공중으로 천천히 올라간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새들은 새끼고래를 발기발기 찢어놓았고 당황한 사람들이 물 속으로 비명도 없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김참, 「재앙의 서곡」 전문
「재앙의 서곡」이라는 제목처럼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이 시를 압도한다. ‘공포의 트럭’, ‘새벽 두 시’, ‘특수합급 기계인간’, ‘죽은 인간’, ‘발기발기 찢어놓은 새끼고래’, ‘비명도 없이 가라앉는 사람들’은 모두 비정상적이며 그로테스크한 모습들로 가득하다. 오직 살아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은 ‘기계인간’과 한번도 보지 못했던 기이한 ‘새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두려움을 모른다는 점이다. 두려움이란 인간의 본능적 감정이다. 두려움을 통해 인간은 인간적이 될 수 있다. 즉 공포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고, 이러한 두려움을 해결하고 넘어서려는 의지와 욕구를 갖는다. 그런데 김참은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감각마저 상실해버린 사물화되고 기계화된 세계를 그림으로써 생명의 역동성이 거세된 잔인하고 끔찍한 공간을 창조한다. 그것은 악마적 세계이다. “비명도 없이 가라앉”는 세계는 비명조차 허용되지 않는 비극적 현실이다. 고통을 감각하지 못하는 존재, 두려움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는 기실 인간이라 할 수 없다. 비인간화의 극단, 사물에 의해 소외되고 말살되는 존재, 폭력적 상황에 대한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수동화되고 기계화된 인간은 더 이상 세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피와 살이 터지고, 아우성과 비탄의 울음이 난무하는 세계보다 더 악마적이다. 김참은 이처럼 인간의 냄새가 사라진 건조한 세계를 ‘재앙의 서곡’이라 말한다. 서곡이 이렇다면 재앙의 본격적 국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재앙이 쓸고 간 이후의 세계를 과연 인간의 세계라 말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엎드려 그림을 그렸지
그는 꽃잎 같은 얼굴을 하고 몸은 짐승의 털이었지
그 얼굴에서 진득한 침이 흐르기 시작했지
은촛대 위에 까만 표지의 성경이 펼쳐져 있고
고개를 꺾은 그의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지
옆구리에는 창이 꽂혀 있었는데
―이재훈, 「참 이상한 꿈이 있었지」 부분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한 현상은 이재훈의 시에서도 또한 마찬가지로 제시된다. 화자가 그리고 있는 꿈의 세계는 온통 암울하고 참담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짐승의 털’, ‘침’, ‘고개를 꺾은 십자가’, ‘돼지의 꼬부라진 성기’ 등과 같은 모습은 모두 혐오감을 자아내게 상황이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라 표현함으로써 이 충격적인 낯선 세계가 실상은 가장 친숙한 낯익은 세계, 즉 현실 세계라는 의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러한 환상시의 저변에는 현실에 대한 직접화법이 아닌 시인이 만들어낸 환상의 영역을 통해 모순된 현실과 절망적 현실을 보다 과장되고 자극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3. 추의 미와 악마성
추의 미는 예술의 악마성을 구체적 형상화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추’의 미를 특징지을 수 있는 요소는 무형태, 불균형, 부조화, 몰형식성, 정신적 자유의 부정에서 기인한 기형과 비속한 것, 혐오할 만한 것들이다. 특히 현대 예술은 조화와 이상을 추구하기보다는 긴장, 갈등, 불협화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세계가 절대적 이상(理想)을 구현하며 합리성을 추구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현대 예술은 현상계에서 긍정적인 것과 뒤얽혀있는 부정적인 것을 과감하게 노출함으로써 절망적 현실의 제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더 이상 세계 해결의 방법이 될 수 없을 때, 역설적으로 추한 것을 통해 세계를 개선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추한 것으로서 저주받은 요인들을 자신의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의 ‘추의 미학’은 당대 현실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형식미를 설명한다. 새로운 예술 작품에는 잔인성이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잔인한 면은 예술이 행하는 비판적 자각의 일부이다. 새로운 예술은 화해된 존재로서의 자신이 요구하는 권한에 대해 절망한다. 예술 작품 자체의 속박이 흔들리게 되면 잔인한 면이 노골적으로 작품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공허한 유희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이라는 형식적 카테고리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추의 미’는 이러한 형식미를 드러내는데 유효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즉 악마성을 드러내는 유효한 방식인 ‘추의 미’는 비정상적이며 왜곡된 현실을 강요받는 현대적 인간 존재의 모순을 ‘탄핵’하기 위한 미학적 전략이 될 수 있다.
또한 추의 미는 ‘미에 대한 안티테제’로 현실 세계에 대한 부정 정신을 대변한다. 이는 기존에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던 ‘미’의 영역을 전복시킴으로써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악마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추의 미학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려는 시대정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날아가버린 머리통을 매일매일 찾으러 다녔다 사제의 예언은 하나도 맞지 않아 내 머리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기름을 뒤집어쓴 긴 목 아이가 투덜거렸다 날개 잘린 새가 쿨럭거리며 뜨거운 불꽃을 쏟아냈다 아이의 피 같은 선홍빛 기름이 파편 위로 곱게 물들었다
―이영주,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부분
이 시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순결한 존재가 아니라, 정체성을 잃고 떠도는 몸으로 표상 된다. “날아가버린 머리통을 매일매일 찾”으러 다니는 아이와 “기름을 뒤집어쓴” 아이는 모두 불구화된 세계가 낳은 시대의 사생아들이다. 파편화된 육체와 산업사회의 찌꺼기로 오염된 아이들의 미래는 “날개 잘린 새”들과 다를 바 없다. 세계는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인간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상의 곳곳에 자리잡은 폭력의 칼날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도륙해 버린 것이다. 폐허가 되어 버린 도시, 시체와 죽음의 흔적만이 난무하는 이 잔혹한 거리는 악마성의 흔적만이 가득한 공간이다. 불구화된 세계, 잔인한 도시의 풍경을 통해 이영주는 고통만이 삶의 본질이 되어 버린 기괴한 현실을 고발한다.
허공의 계단에 엎드린 달 누렇게 변색된 얼굴 위로 딱딱한 어둠 덮인다. 허리를 꼬부리고 늙은 사내 그 달에 매달려 쭈글거리는 젖가슴을 빨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 허옇게 엉킨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척 그의 안구를 쑥 뽑아간다. 계단이 허공으로 빙빙 돌며 사라지고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눈알을 기증받은 처녀 더러운 시립병원 보호소에서 쭈글쭈글한 아이를 낳는다. 출생신고서의 붉은 지장처럼 아이의 이마에 달빛을 꾹 눌러주고는 지하도 구석에서 슬며시 손을 놓아버린다.
두 개의 눈알을 손에 꼭 쥐고 텅빈 눈을 자꾸 비비는 아이, 검은양수가 터져 줄줄 흐르는 듯 눈 속으로 자꾸 쏟아져 들어오는 검은 물, 마지막 열차는 떠나고 먼지 낀 거울 앞에서 마주친 늙은사내와 아이, 붉은 눈알을 한 짝씩 나누어 달고는 컴컴한 지하도를 헤엄치기 시작한다. 누군가 하모니카 불며 딱딱한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이기성, 「달」 전문
인위적이며 인공적인 도시 생활은 무엇보다 감각에만 의존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감각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육체를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육체와 관련을 맺지 않은 오염은 거의 없으며 육체의 경계는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모든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다”라는 메리 더글라스에 말처럼 오염된 육체는 폭력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삶을 대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기성의 「달」에 등장하는 인간의 육체는 오염되고 변형된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눈을 빼앗기면서도 쭈글거리는 젖가슴을 빨고 있는 ‘늙은 사내’, 이미 늙어버린 아이를 더러운 시립병원 보호소에서 낳는 ‘처녀’, 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구를 비비는 기형적 ‘아이’는 모두 불구화되고 병적인 추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육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들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유린당하고 착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엉킨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척 그의 안구를 쑥 뽑아간다”는 구절처럼 위로와 사랑의 손길은 정작 가장 중요한 삶의 수단인 눈을 빼앗아 버린다. 또한 갓 태어난 아이는 “지하도 구석에서 슬며시 손을 놓아”버리는 버림받은 인간으로 자라나게 된다. 이처럼 그들의 삶의 근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실체는 다름 아닌 “허공의 계단 위에 엎드린 달”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달’이란 풍부한 생산력과 모성성의 근원이 되는 원형적 상징물이다. 하지만 이 시 나타난 달은 ‘딱딱한 계단’, ‘시립병원 보호소’, ‘컴컴한 지하도 구석’에 엎드려있거나 빙빙 맴돌면서 소외되고 왜소화된 인간의 삶을 장악해 간다. 이러한 비자연적인 달의 모습이란 다름 아닌 비인간화된 도시적 삶을 표상한다. ‘누렇게 변색된 얼굴’로 ‘붉은 달빛’을 비추고 있는 달은 순수한 자연의 본성을 상실한 타락한 자연이다. 이는 원시적 생명성을 지닌 살아 있는 자연이 아니라 왜소해지고 딱딱하게 굳어진 화석화된 자연이다. 결국 타락한 자연, 인공적 자연이 만들어낸 생명력이란 ‘검은 양수’, ‘붉은 눈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의 빛깔만이 가득한 추악한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이기성은 현대인의 불구화된 내면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추악한 악마성만이 남아있는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일그러진 현실을 풍자한다.
4. 악마성의 현주소
선과 악, 유혹과 저주, 아름답고 추한 것들이 야기하는 상반된 감정과 인식은 서로 충돌한다. 인간은 본능으로서 삶을 살 듯 충동으로서 죽음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삶과 죽음, 에로스와 티나토스의 긴장 속에 인간이 살아가듯 선과 악은 공존한다. 선에 대한 강렬한 의식은 악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그것은 둘 다 인간적이라는 측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예술작품에 반영된 악마성은 도덕과 본능이라는 이중적 문제 앞에서 다양한 사회적 해석을 요구한다. 이것은 간혹 악마적 미가 옹호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도덕적 타락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현대시에 나타난 악마성은 인간 본성의 차원으로서의 악마성에 집중하기보다는 주로 현실 비판의 매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가치가 중시되고 볼 수 있다. 즉 현대시에 나타난 악마성은 미적 대상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는 부정화된 사회적 현실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특히 현대시에 나타난 악마성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변형되거나 해체된 인간 존재를 왜곡시키고 변형시키는 방식을 대거 등장시킨다. 또한 절망적 공간과 인간성이 사라진 냉소적 풍경을 그려낸다. 이처럼 절단되고 변형된 신체, 암울하고 절망적 시공간의 이미지들은 공통적으로 자아의 분열과 파괴, 해체되고 파편화된 세계, 사물화와 기계화의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오늘의 시가 주로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는 가치 지향적 문제로 집중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는 악마성의 미학이 주로 사회적 문제를 예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마성의 문제는 보다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되고 창작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서정주의 초기시가 보여주었던 역동적이며 원초적인 인간 본질로서의 악마주의가 오늘의 시인들에게서 발견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원초적 악마성, 자연과 초자연, 신성과 악마주의, 문명과 반문명에 이르기까지 악마성의 문제가 보다 다양하게 확산될 때 우리시는 보다 풍요로운 시적 성과들을 일구어 낼 것이다.
강경희 · 2001년 <문화일보> 신춘 문예로 등단
· 현재 숭실대․안양 과학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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