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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특집/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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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예술의 악마성
악, 부정방정식의 X
정은경|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악의 존재 형식은 부정방정식(예를 들면, 2X+3Y=Z)에서의 X와 같다. 즉, 두 개 이상의 해를 필요로 하는 부정방정식에서 X는 Y라는 다른 미지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악’은 반드시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이는 ‘악’이 일체의 ‘부정성’을 상징한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가 악은 개념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식과 만나 그 의식에 의해 행해질 수 있는 위협적인 것의 이름”, 혹은 “자유에 대한 대가”라고 했을 때, 악은 어떠한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행동, 한계지점을 돌파하는 경이로운 체험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부정하는 힘(reaction)으로서 악, 일체의 굳어진 지반에서 벗어나려는 악의 존재 형식에 대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설파한 바 있다.
나는 도저히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종의 숙명에 의해서 <부정(否定)>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네. (중략)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의 멸망을 요구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아니 살아 있어 다오. 자네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 만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원만하고 완전하다면 무엇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자네가 없으면 사건이 없어지고 사건이 없으면 곤란하다> (중략) 나는 부정방정식의 X야. 나는 일체의 시작도 없고 종말도 상실한 인생의 환영의 하나라네.
-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형제들>, 동서문화사, 1987, 625~626쪽
이반의 또 다른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악마’는 위 인용문에서 자신을 부정방정식의 X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부정의 힘인 악마를 살도록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결코 만족을 모르고 어떤 것에도 안주하지 않으며, 오로지 꿈틀대는 생의 충동에 의해서만 나아가는 인간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라는 고전적 악마를 불러온 것도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진리와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대학자 파우스트인바,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게 된 것 또한, “오직 쉴새 없이 활동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인식,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인류의 자아로까지 승화시켜 마침내 인류와 더불어 나 자신도 함께 멸망하기를”, 그리하여 “끝까지 해보련다”라고 한 그의 무모한 도전 정신 때문이 아니던가. 결국 악마, 즉 인격화된 악의 존재의 일차적인 원인은 인간인바, 이는 ‘신’의 존재의 일차적인 기반이 인간인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악마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것과 동일한 크기로 나타난다. 즉 악마, 데블, 사탄, 루시퍼, 악령 등이 지금보다 훨씬 강고한 힘을 발휘했을 당시에 인간적인 것의 영토는 그만큼 협소했고, 인간 이성의 한계 또한 명백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부정성으로서의 악은 오늘날 인간의 이성이 달나라로 확대된 만큼 더욱 확장되고 강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악마는 이제 데블, 타락 천사 등의 가시적인 형체를 버리고 ‘악’이라는 실체 없는 ‘힘’으로 온갖 비가시적 영역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유형의 실체를 버린 만큼 그것은 더 자유롭게 인간 세계를 유영하게 된 것이다. 부정의 힘이라고 할 때, ‘악’은 한편 인간적인 것을 확장시키고 고양시키는 힘이기도 하지만, 한편 인간을 ‘인간 이하’로 추락시키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정하는 힘으로서의 악은 지금 우리 문학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우선, 앞서 언급했듯 악이 부정방정식의 X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악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나 형태가 아니다. 하나의 부정방정식에 의해 구해지는 미지수라는 점에서 악은 각각의 개별 작품에서 작가가 제출해놓은 바로 그 부정방정식에 의해 구현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어떤 것이다. 칸트는 인간 본성 내부에 있는 근본악(das radikale B̂̂öse)을 상정했지만, 바디우의 말처럼 그러한 성향에 의해 분출된 하나의 척도로서의 절대악을 규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바디우가 ‘인종말살’을 절대적인 악의 형태로, 하나의 준거로 만드는 데 반대하는 것은 ‘악’이 전부 실현되지 않았고, 여전히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악으로 상징되는 X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X는 여전히 Y로부터 사고되어야 한다. 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악은 “진리들의 가능한 차원이어야만 하고” 그러한 점에서 “참(le vrai)의 뒤틀어진 결과인 바”, “선으로부터 사고되어야 한다.” 악이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부정의 힘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때로 혁명의 이름으로, 혹은 일탈과 탈주의 이름으로, 혹은 퇴폐와 파괴, 폭력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학’에서의 ‘악’을 고찰하고자 하는 이 글이 개별 작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부정방정식의 Y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개인이라는 것 :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로부터 시작해보자. 1996년에 발표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90년대 문학 자장 안에 놓여있지만, 자살보조업자라는 인물을 통해 죽음을 유포시켰다는 점에서 21세기 한국 문학의 악마주의의 본격적인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김영하가 자살 보조업자를 통해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제출되었는가?
이 작품의 악마주의는 대체로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첫 번째, 90년대 문학의 특성과 관련해서이다. 9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문학은 대체로 진보와 이성에 대한 믿음, 역사의 필연성에 대한 신뢰와 혁명에 대한 열기로 추동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에 기초하여 역사와 민족, 사회현실, 이념 등을 중요하게 다뤄왔던 이전의 문학은 크게는 계몽의 기획 아래 놓여 있었다. 계몽의 기획을 소박하게 ‘더 나은 삶을 대한 희망과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본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여기에 전면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다. ‘더 나은 삶이라니?’라고 반문함으로써 자살 안내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란 한낱 치기어리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역사의 발전과 필연성 혹은 진보란 허상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삶 또한 우연적이고 가변적이며 따라서 무의미하다고 최종 결론을 내리고 있다. 90년대 초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붕괴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사회변혁에 대한 믿음도 사라졌지만, 이후 9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새롭게 추구할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전까지의 사회 변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만큼 이들의 허탈함과 환멸감은 컸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가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작가들도 있었지만, 김영하는 그들과 함께 방황하지 않고 도발적으로 ‘죽음’을 들고 나온다. 이 악마주의적 태도, 즉 반사회적 반계몽적인 극단적 지점이 바로 김영하 소설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실제 그는 한 작품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담배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유독하고 매캐한, 조금은 중독성이 있는, 읽는 자들의 기관지로 빨려들어가 그들의 기도와 폐와 뇌에 들러붙어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다소는 몽롱하게, 탈색된 채로 뱉어져 주위에 피해를 끼치는, 그런 소설을 쓸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김영하, 「작가 후기」,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문학과 지성사, 1999, 285쪽
비유하자면 ‘지나친 흡연은 몸에 해롭습니다’라는 계몽의 기획에 전면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는 이러한 발언은, 한편 계몽에 의해 억눌려 있던 인간의 온갖 욕망들을 해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흡연과 온갖 나쁜 것을 권장함으로써 인간의 비합리적인 충동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라는 가장 큰 금기, 그 강력한 빗장을 풀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김영하의 이 선언이 의미 있다면 그 극단의 지점에서 이러한 개인의 욕망을 해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위악적인 이 발언은 선이 아니라 ‘악’이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 하여 그간의 계몽적 기획이 개인에게 얼마나 억압적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계몽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과 관련하여 김영하의 악마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한계지점은 ‘개인’, 죽음과 맞닿아 있는 ‘개인의 자유’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은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와 사강이 마약 복용으로 법정에 섰을 때 진술했던 말이다. 개인의 무한한 권리를 주장한 셈인데, 그것이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파괴의 권리까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개인 옹호는 보다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국가로 대표되는 어떤 집단적 규범과 사회적 제도에 의해서 관리되고 통제될 수 없다는 것, 즉 개인의 절대자유를 주장하는 이러한 도발적인 선언은 이전까지의 공동체적 지향과 계몽의 기획을 부정하고 개인주의를 전면적으로 내세운다. 이 개인주의는 인물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다. K가 어머니의 장례식 날, 유디트와 섹스를 한다는 설정은 까뮈가 <이방인>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과 흡사한 것으로, 이들이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의무감으로 주어지고 기대되어지는 감정들-이를 테면 가족에 대한 유대감-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일체의 관습적이고 상식적인 관계망들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 관계에서 누락된 인물들이다. K는 5년 전 이미 가출하여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집에 돌아온 인물이고, 세연 또한 열여섯에 가출하여 업소를 전전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C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고아가 된 셈인데, 따라서 이들 세 인물은 어떠한 연대감과 소속감에서도 제외되어 있는 인물들, 나아가 어떠한 집단적 가치와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클림트의 유디트 그림을 내세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디트는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잠든 틈에 목을 잘라 죽였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걸이다. 클림트는 유태인에게 일종의 영웅으로 숭배되던 이러한 인물을 관능적인 요부로 그렸는데, 김영하가 이 그림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과 개인의 욕망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는 나를>의 악마주의가 제출하고 있는 죽음과 관련한 문제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살 안내원, 즉 타인을 죽음으로 안내하고 그의 죽음을 기획, 주재, 관장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화자는 한국 소설사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김영하 이전까지의 한국 문학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회현실의 문제, 그리고 그러한 현실과 개인의 관계를 탐색해왔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초 들어서 개인의 내면에 시선을 돌린 이른바 신세대 문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윤대녕, 신경숙의 문학으로 대변되는 이들 문학도 비교적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존재론적 질문의 자장 안에 놓여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악마주의가 반드시 죽음을 합리화하고 권유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 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1996, 140쪽
자살 보조업자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에 죽음의 충동이다. 위 인용문에서의 화자의 마지막 말은, 그 죽음의 충동이 인간에게 건네는 말이다. ‘멀리 떠나도 아무것도 변하게 없지 않느냐’ 라고 넌지시 묻는 것, 즉 권태와 환멸감이야말로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정녕 죽음에 몸을 맡길 용기가 없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이는 죽음의 그 강력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너는 어떻게 살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죽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냐’라는 질문. 이 질문이야말로 죽음과 맞대면한 것이기에 근원적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답하는 독자들 각자의 답은 그만큼 절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대의 무게-어느 날 혹은 어느 밤, 한 악마가 가장 적적한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네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 다음과 같이 네게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이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일일이 열거키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다시금 되풀이 되어야 한다.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로 되돌아 올 것이다.
-니체, 권영숙 옮김, <즐거운 지식>, 청하, 1998, 284쪽
“멀리 왔는데도 달라진 게 없죠?”라는 질문은 위 인용문에서의 니체의 악마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생이 한순간도 달라지는 것 없이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대로 되돌아온다면?”이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 라고 답할 수 있는 자, 즉 “생이여 다시 한번! (amor fati)”라고 외치는 자는 허무주의를 넘는 진정 강인한 자이며, 자신의 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서, 즉 수백 번, 수만 번 다시 반복이 되어도 될 만큼 생을 긍정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최종적인 삶인 것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악마주의는 결코 니힐리즘, 허무주의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세 번째, <나는 나를>의 악마주의는 90년대 출현한 신세대의 쿨한 감수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쿨한 감수성이란 대체로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발표 당시, “첨단의 도시적 감수성으로 세기말의 악마주의적 심성을 세련되게 제시했다”라는 평가는 바로 이 작품이 현대적인 감수성, 세련된 쿨한 정서에 기초해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쿨한 감수성의 소유자는 감상적인 인간들을 경멸한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이 감수성의 기원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감정과 열망을 품되, 그것으로 인해 파멸당하지 않기 위해 타인과 절대적인 거리를 두는 것, 이 절대적인 기율에 기초한 신인류에 대해서 세연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나빠.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52)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감동, 무관심, 무감각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부동심(apatheia)이다. 능동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외부에 수동적으로 내맡기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차가운 감수성의 핵심인 것이다.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태도는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 등장하는 왕의 시선, 그리고 냉혹한 자살 안내원의 관조적 태도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그들의 비정성은 어떠한 것에도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개인주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3. 사회라는 것 :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우아하고 세련된 악마에 비한다면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악마들은 차라리 괴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천 서울랜드 근처의 한 저택에서 한창림이라는 왕수컷과 박태자라는 암컷이 벌이는 온갖 악행은 사드의 <소돔 120일>의 수준에 육박할 만큼 잔혹하고 외설적이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을 유괴하여 쇠줄과 개목걸이 등으로 묶고 온갖 폭행을 가하고, 미리 준비된 콘티에 따라 포르노그라피를 찍고 나서 소위 ‘거름’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묻어버린다. 전기쇼크로 기도가 오그라들고,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쇠줄로 결박된 벌거벗은 사내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라 촬영에 쓰일 ‘오브제’이자 “물리적 사실”에 불과하다. 납치, 강간, 살인, 강간, 시체 절단 등 이들이 벌이는 엽기 행각은 덩어리와 물질로 환원되는 그들 오브제와 함께 그들을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떼어내어 야수성의 세계로 소환한다. 이 부부의 기괴한 야수성은 두 개의 모델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동물원의 만드릴 육식 원숭이이고, 또 하나는 펫숍의 보스 삼촌이다.
1) 수컷은 떨어진 암컷을 향해 중기갑차처럼 돌진했고, 무기력하게 웅크린 채 울부짖고 있는 암컷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턱
대고 할퀴어대기만 하더니, 암컷의 몸이 뒤집어지자, 목을 물어뜯었다. 육식 포식자가 먹이의 숨통을 끊어놓고 싶을 때 항상 하는 행동이었다. (중략) 거칠던 암컷의 경련이 차차 잦아들고 완전히 숨이 끊어질 때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떨림이 멈추자 수컷은 주저앉아, 암컷의 배를 찢어 내장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문학동네, 2000, 172쪽
2) 그녀의 찢겨진 성기로부터, 허벅지를 타고 무릎을 적시고 발목을 거쳐 발바닥까지 흘러내린 것들이었다. 핏덩이였다. 그녀 허벅지 양쪽으로 피가 흥건했다. 걸쭉했고,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 등뒤 형광등이 켜진 환한 방에서부터, 그림자 두 덩어리가 그녀를 쫓아나왔다. (중략) 두 개의 슬래쥐 해머가 그녀를 내리쳤다. 하나는 그녀의 왼편 빗장뼈를 꺽어 주저앉혔고, 하나는 그녀의 목뼈를 찍어 부러뜨렸다. (251쪽)
3) 남편의 팔이 공중 높이 솟는 게 보였다. 뭔가, 핏물 같은 게 형광등께까지 흩날렸다. 다음 순간 거구가 한쪽 뺨을 감싸쥔 채, 의자 뒤로 사라졌다. (중략) “그게 뭐야?” 남편의 손에 뭔가가 꼭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묻자, 남편이 손을 들어 펴 보였다. “귀.” 그건 귀였다. 거구의 귀였다. 귓붙 옆에 터럭 한줌이 붙어 있었다. (205~206쪽)
위 인용문들에서 암컷을 잡아먹는 만드릴 육식 원숭이(1), 박태자를 집단 강간하고 살해해서 육절기와 뼈 분쇄기에 쓸어넣는 펫숍 삼촌(2) ‘뷰피플 피플’의 언니 남편의 귀를 잡아뜯어낸 한창림(3)의 잔혹한 행위는 그 행위의 신속함과 난폭함에 있어 구별이 안될 만큼 상동성을 지니고 있다. 원숭이, 펫숍 삼촌, 한창림이라는 주체와 상관없이 이들의 행동은 어떠한 죄책감과 동정심 따위를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기계적인 야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계적인 야수성’이라는 이들의 악마적 행위에는 두 가지가 함의되어 있다. 하나는 ‘수컷 냄새’, ‘이빨’ ‘발작’ ‘피’ ‘숨통’ ‘독취’ ‘배설물’ 등이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비인간성’, 즉 인간의 바깥이라고 치부되었던 인간의 야수성이다. 동물 차원으로 추락한 자연 인간 모습은 한국문학에서 일찍이 김동인을 위시하여 손창섭, 장용학 등에 의해 탐사된 바 있으나, 이토록이나 작위적으로 과장되어 표현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과잉되게 조작된 비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흔히들 얘기하듯 이러한 반인간학적 기획은 우선 금기와 제도를 넘어서려는 위반의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바깥으로 추방된 “잉여들의 반란” 혹은 “실재(the real)들의 습격”라 할 수 있는 이 거름들의 행보가 의도하는 것은 물론, 상징계를 흠집내는 것이다. 한창림을 통해 작가가 언표하고 있듯, 이들 부부들이 보여주는 야만성과 정신병리학-편집증, 강박증, 분열증, 조울증-은 “사회 체제 바깥”에 있는 것이다.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이나 <나이트 메어>의 프레디로 비유되는 이들 부부는 애초부터 괴물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이며, “제 아무리 용을 써도” “괴물스런 위력이 얼마나 막강하든, 바깥에 존재하는 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아무리 지랄을 쳐도 자기가 태어난 이 사회에 한 뼘 손톱 자국조차, 한 뼘 이빨 자국조차 낼 수 없는 무력한, 비극적인 존재”(261)인 이들 괴물의 악행은 따라서 바깥이 아니라 차라리 상징계 질서의 강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바쳐진 듯하다. 그들의 엽기는 상징계의 ‘틈’이 아니라, 아예 상징계 ‘바깥’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백민석의 인물들의 야수성은, 자연주의에서 말하는 그러한 ‘그럴듯한’ 인간의 동물성이 아니라, ‘허구적인 야수성’이다. <목화밭 엽기전>은 이 가상 세계를 통해 인간 ‘바깥’의 항목들, 일종의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는 이질적인 것들을 향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소설은 고딕 픽션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러나 문제는 이 작품이 단지 과잉과 도착에 대한 매혹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창림과 박태자, 그리고 ‘슈퍼수컷’인 삼촌은 물론, 그들의 쾌락을 위해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다. 광란의 현장에서 한창림은 “땀샘과 기름샘들이 극한까지 활성화되어”(197) “후끈 달아오르는” 쾌감을 맛본다. 이들의 악행이 어떠한 인간적 의미와 연유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악을 위한 악, 즉 ‘절대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청담동 사내애가 그들의 스너프 필름을 위해 희생되는 것, 혹은 양담배를 물고 있던 회계사가 창림에게 얻어맞아야하는 데에는 어떤 절대적인 이유가 없다. 청담동 사내애가 수컷의 기질을 지녔고 회계사가 양담배를 피웠다는 것은 거짓 핑계에 불과하다. 별 뚜렷한 이유없이 창림 부부의 놀이개로 전락한다는 측면에서 <목화밭 엽기전>의 야만성은 기계성을 의미한다. ‘기계성’은 창림이 사내애의 죽음의 향연을 위해 트리플 섹스와 사도-매저키즘적 성행위로 이루어진 콘티를 주도면밀하게 짜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은 삼촌이 지배하는 펫숍의 폭력 시스템을 정확히 모방하고 있다. 해머와 육절기, 뼈 분쇄기, 그리고 이와 다르지 않은 점원들에 이르기까지 살인 기계 장치로 가득 찬 펫숍에는 인간은 한낱 “웃는 플라스틱”, 혹은 “우는 기계”에 불과하며, 이들을 처리하는 펫숍의 시스템은 컨베어벨트의 그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삼촌이라는 오직 단 하나의 관객을 위해 연출되는 창림 부부의 기괴한 폭력성과 그것의 기계성은 <목화밭 엽기전>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 평론가에 의해 “초강력 권력에 의해 작동되는 시스템”(황종연)이라고 지적된 바 있듯, 이들 동물원의 밑그림은 인간을 한낱 기계로 내모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이다. 삼촌에게 극도의 공포의 감정을 지닌 창림, 그리고 끝내 삼촌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이 소설의 결말은 관료화된 이 사회의 위계 질서의 위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계몽적 이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현대 사회라는 것이 인간을 ‘사육하고 관리하며’ 폭력으로 내모는 하나의 거대한 자동기계에 불과하다는 이러한 실상은 <목화밭 엽기전>의 야수성이 사실 ‘사회체제 바깥’이 아니라 ‘체제 내부’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을 규제하고 사회를 규격화된 벽돌들로 짜 맞추려고 한다. 자본주의에는 규제되지 않는 흐름이라면 어떤 것도 흐르게 하지 않으려는 군주적 통일의 원리가 내재한다. 자본주의는 무의식의 리비도가 부착하는 대상들의 모서리를 깍아 반듯하게 다듬고 싶어한다. 생산 양식에 맞추어 욕망들을 규격화함으로써 억압적 질서에 순종하는 온순한 신하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이다. 돈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교사, 집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목사-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경비병들이다. 자본주의는 사실을 논리로 바꾸고 논리를 도덕으로 바꾼다.
-김인환, <다른 미래를 위하여> , 문학과 지성사, 2003, 8~9쪽
위 인용문에서 한 비평가가 탁월하게 지적하고 있듯,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표상되는 현대 사회는 욕망의 흐름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반하는 어떠한 절대적인 준칙들에 움직이는 세계이다. ‘사색’하지 않는 창림 부부의 기계적 행위는 그들의 행위 준칙이 자기 내부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의 자연스러운 분출이 아니라, 사실은 사회제도의 규율을 아무런 반성 없이 체화하였을 때 발생하는 도구적 이성의 폭력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홈리스로, 치료의 권리를 박탈당한 물리적 육체로, 불량 아동으로 내쫓긴다. 추방자로 불리는 이들은 이 사회 시스템에서 하나의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목화밭 엽기전>에 가득 찬 사체들과 단백질 덩어리들은 비인간으로 전락한 인간들에 대한 극단적 비유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의 악마적 야수성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가 되는 것이다. 결국 <목화밭 엽기전>은 “얼굴 없이 작용하는 법”으로서의 작동하는 자본주의 원리를 “어디에나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는” 삼촌으로 표상되는 지상 명령에 비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기 바깥의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악의 질서 가운데 최고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지젝이 지적했듯, “추상적 도덕 기준들에 대한 그와 같은 완강한 집착은, 일체의 능동적 주체성에 대한 우리의 심판을 합법화할 수 있는바, 악의 궁극적 형식이다.”
4. 감각의 논리와 오류에의 충동
위에서 살펴본 두 작가의 경우, 악의 부정방정식에서 Y는 대체로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와 이데올로기, 혹은 관료화된 사회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구현되고 있는 ‘악’이 극단적인 개인주의이든 혹은 현대 문명사회를 닮은 기계적 야수성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현실 사회의 어떠한 부조리와 모순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 판타지 양식과 괴담이라는 반사실주의적 장르에 기초해 있지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목화밭 엽기전>은 비유 혹은 알레고리로써 현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환기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크게는 현실 재현이라는 근대 소설의 기율의 어름에 놓여 있다. 이 두 작품은 분명 ‘지금 현실’의 어떠한 한계지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악마주의는 그 지점을 돌파하고자 하는 일종의 자유의 몸짓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2000년대 이후의 ‘악’을 환기시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의 경우, 앞선 두 작가와는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예를 들면, 도무지 현실세계를 닮지 않은 듯한 편혜영의 그로테스크한 소설이나, 박형서의 괴담들, 그리고 백가흠, 김도언의 잔혹극들 말이다. 중요한 것은 편혜영의 시체들, 박형서의 영악한 악마들, 백가흠의 기형아들이나 김도언의 잔혹한 취향을 지닌 인물들의 악마성이 김영하와 백민석의 잔혹한 폭력성과 기괴성에 못 미치느냐, 넘치느냐가 아니다. 이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악마주의가 현실의 그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는 것이다.
편혜영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예를 들어 「저수지」에는 음습한 저수지와 이 근처에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저수지, 그리고 개의 사체와 야생 고양이, 다량의 쓰레기가 가득한 숲에 대한 묘사에서부터 작가는 섬뜩하고 괴기스러운 것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동물의 사체를 태우는 냄새, 시궁창 냄새, 안개, 실종자, 실종자의 신발, 경찰의 수색과 수색견과 같이 불쾌하고 불안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의 형상 또한 괴물의 아이들이라고 할 만큼 기괴하기 그지없다. 엄마에게 버려져 집에 남겨진 아이들, 몸이 썩어 들어가고 구취를 풍기는 아이들은 쥐똥과 과자 부스러기, 쓰레기들과 나뒹군다.
셋째는 쥐의 배를 가르는 일을 계속 했다. 셋째가 던져준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자란 쥐는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셋째는 녹이 슨 칼로 쥐의 배를 갈랐다. 가른 배에서는 붉은 피와 내장에 휩쓸려 새끼 쥐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피를 묻힌 맨살의 죽은 쥐들이 방안을 솜처럼 떠다녔다. 사방의 벽에서 떨어진 벌레들이 쥐를 피해 갈라진 틈으로 숨었다.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벌레들은 아이들의 벌린 입 속으로 드나들었다. 둘째의 귀로 꼬물거리는 구더기가 몇 마리 숨었다. 구더기들은 둘째 몸에 기생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저수지」, <아오이 가든>, 문학과 지성사, 2005, 31~32쪽
위 인용문에서 그려지고 있는 아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시체와 같은 존재들이다. 편혜영 소설에는 비단 구더기, 쥐, 화농, 악취, 피를 범벅이 되어 있는 이 아이들 뿐 아니라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온갖 역겨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D시, U시, 혹은 도시 외곽, 서쪽 숲, 왕피천 계곡 등으로 호명된 모호한 공간에는 역병이 돌고, 시커먼 개구리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토막 난 여자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어린 아이가 투견과 싸우고, 고양이의 자궁을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이 수십 마리의 붉은 개구리를 낳고, 갓난아이와 여자가 포르말린 담겨 박제되고, 죽은 여자의 혼이 동굴을 배회하고, 개들이 사람을 좇는다. 요컨대 ‘시체, 똥오줌, 악령’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편혜영 소설은 그로테스크 미학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가장 역겨운 것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점액질의 오물과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 혹은 그와 흡사한 하드고어 필름을 연상시키는 이 비극적 유머의 세계는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단지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마니아적 취향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혹은 ‘합리성’으로 표상되는 현대 문명에 대한 습격인가?
최근 편혜영의 소설의 배경이 일상 현실로 조금씩 옮겨오고 있다는 측면에서 몇몇 비평가들은 편혜영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글쓰기의 성숙에 해당될 뿐 근본적인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 즉, 이제 ‘오물과 시체’와 같은 직접적인 것 없이 일상 공간에서 그가 의도한 것들을 좀더 세련되고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정도의 변화이다. 편혜영 소설의 악마성이 시종일관 겨냥해왔던 것은 어떠한 감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오물과 시체’로 표상되는 것들, 즉 불쾌함, 역겨움, 섬뜩함, 공포와 불안 같은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 발표된 「사육장 쪽으로」(《창작과 비평》, 2006년 여름호)에서는 이러한 감수성이 농밀하게 잘 형상화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앞선 작품들에 비해 리얼리티가 강화된 도심 외곽의 변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원주택을 꿈꾸면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이사 온 주인공 가족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들이다. 치매에 걸린 노모가 있긴 하지만,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그저 그런 불행의 하나일 뿐, 매일 아침 출근을 위해 고속도로를 가로지르고, 직장에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화단에 물을 주고, 아이와 공놀이를 하는, 그러한 평범한 가족인 것이다. 이들에게 불길한 운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는 파산 경고장이다. 과도한 융자로 인해 파산 선고를 받은 이들 가족은 이제 서서히 파멸에의 공포에 휩싸이고 이들의 히스테리컬한 불안 심리는 개 짖는 소리와 고속도로에서의 위험한 질주 등을 통해 선명하고 속도감 있게 묘사된다. 그들의 전원주택은 야산 너머에 있다는 개 사육장에 면해 있는데, 이들 가족의 몰락에의 징후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라는 탁월한 효과음에 의해 더욱 증폭되고, 개사육장에서 뛰쳐나온 개들에 의해 아이가 처참하게 짓이겨지면서 이들의 파국은 절정에 이른다. 주인공인 ‘그’는 미친 듯 방망이를 휘둘러 개를 쫓으려 하지만 자신이 내려치는 게 “개인지 아이인지 분간할 수 없을”만큼 공포와 광기에 휩싸인다. 이 이야기가 의도하는 것이 그저 한 평범한 가족 몰락의 서사가 아니라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광란의 질주에 의해서 잘 드러난다. 주인공 ‘그’는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 위해 차를 몰지만, ‘사육장 쪽’이라고 말해진 병원은 도무지 오리무중이고, 개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 가족은 어느새 개 짖는 소리를 나침반 삼아 그 ‘도착적인 구원의 장소’를 향해 미친 듯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정에는 비명 같은 아내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배음처럼 깔리고, 사나운 트럭 운전자들의 광폭한 추월과 짐칸 가득 ‘개들’을 실은 트럭이 있고, 그들을 쫓는 “시커먼 어둠”이 있다. 결국 이 작품에 의해 그려지는 감수성이란 ‘개 짖는 소리와 위태로운 질주’로 상징되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오감도」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의 탁월함은 바로 이러한 감각을 독자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소설적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오가든>의 작품들이 특정 감각들을 전달하기 위해 그러한 것을 연상하는 사물들을 나열하고 있다면, 이 작품의 경우는 직접적인 언술의 방식을 피하고 세련된 기법과 간접화된 방식을 통해 ‘감각’을 교묘하게 환기시키고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편혜영의 최근의 또 다른 작품 「소풍」(《문예중앙》, 2006년 겨울호)에서도 이와 같은 불안과 히스테리의 정서는 여지없이 파헤쳐지고 있다. 결국 시체와 오물들이 우글거리는 편혜영의 작품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바로 안온함과는 거리가 먼, ‘나쁜 감각들’인바, 따라서 편혜영 작품을 읽고 독자들이 불쾌감이나 역겨움, 혹은 어떤 불안과 공포의 감정에 휩싸인다면 그것은 작품의 실패가 아니라, 작품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품을 읽고 고개를 돌리는 독자들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작가, 그가 바로 편혜영인 것이다.
편혜영이 건강한 시민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긍정적인 감수성, 혹은 ‘쾌’의 반대편에 놓인 일련의 ‘나쁜 감각’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박형서, 백가흠, 김도언 또한 이러한 범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업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마다 다소 편차를 보이지만,그 내용과 상관없이 주로 ‘감각’에 집중하고 있는 편혜영과 달리, 이들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감각과 잇닿아 있는 사건과 드라마에 치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도언의 경우, 권태와 고통, 위악, 불안 등에서 풀려나오는 인간의 폭력성과 비루함을 「악취미」 연작을 통해 탐사하고 있는데, 애완동물 뿐 아니라 애인마저 망치와 톱 등의 잔인한 도구로 살해하고 절단하면서 잔혹에 대한 병적인 취향에 집착하는 인물을 그린 「잔혹-악취미들 3」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어두운 욕망의 지형학을 보여주고 있는 백가흠의 경우, 살인, 강간, 폭력 등의 반사회적 범죄행위를 정신병리학적 현상들과 결합시킴으로써, 앞선 선배작가들에 의해 개척된 ‘무의식’의 영토 위에서 있으면서 조금은 새롭게 그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박형서의 경우, 조금 특이한 것은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악마성’이 어느 정도 낭만주의와 맞닿아 있는 ‘악에의 매혹’의 범주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을 다룬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창작과 비평》, 2006년 겨울호), 혹은 엄마를 독차지하기 위해 어린 동생은 물론 엄마마저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마 같은 아이의 이야기를 다룬 「물 속의 아이」(<자정의 픽션>, 문학과 지성사, 2006)와 같은 작품은 분명, 어두운 충동에 의해 파멸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정의 픽션>에 실린 작품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스펙트럼과 스케일은 이 작가의 서사적 충동의 근간이 ‘악’에의 충동과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진지한 학문적 논쟁에 대한 패러디(「논쟁의 기술」)와 유쾌한 농담조의 환타지(「두유 전쟁」, 삶과 죽음의 가교에 대한 성찰(「노란 육교」) 등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그의 작업은 스스로 ‘자정의 픽션’이라 명명했던 ‘근대 이후’를 염두에 둔 작가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소설의 형식’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이 작가에게 ‘나쁜 감수성’ 혹은 ‘악에의 충동’은 ‘낯설고 새로운 서사’를 위한 하나의 매개일 뿐이다. 물론, 이 작가가 보여주는 모험의 새로움은 그가 단지 형식적 실험에 머물지 않고 소설 개념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데 있다. 리얼리즘이 아니더라도 알레고리, 아이러니, 풍자 등등의 수사적 개념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존의 전위적 작품들 또한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느슨할지언정 맞닿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형서를 비롯한 최근 젊은 작가들(한유주까지 포함하여)이 보여주는 새로운 서사들은 ‘현실의, 현실에 의한, 현실을 위한 문학’이라는 문학 개념에 대한 도전을 보여주고 있다. 악을 형상화하는 이들의 방식 또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주로 순정한 허구에 의해 펼쳐지는 이들 작품에서의 ‘악’은 현실 사회의 한계 지점을 넘어서려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새로운 예술’에 대한 열정에 의해 추동된 결과물이다. 이는 미적 근대성이라는 모더니티 기획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또 한번의 강조가 지금 우리 문학에 주요한 흐름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낭만주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하고 있는 미적 근대성은, 도덕은 물론 진리의 영역으로부터 미와 예술 영역의 독립을 의미한다.” 과학과 기술의 주요 원리인 ‘진리’, 법과 도덕의 주요 원리인 ‘도덕’과 결별한 예술은, 그 자율적 영역에 ‘오류와 악’, 그리고 심지어 ‘추’라는 항목까지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향유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이러한 미적 근대성은 시기를 달리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출현해왔지만, 현재 우리는 우리 문학에서 이러한 미적 근대성의 만개를 목도하고 있다. ‘진’과 ‘사실’이 아닌 가상에의 유희, ‘도덕’과 ‘선’이 아닌 ‘비도덕’과 ‘악’에의 충동, 그리고 추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악’의 미학으로 포괄할 수 있는 이러한 젊은 작가들의 도발은 일종의 비인간화의 경향과 ‘개별성’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지적한 바 있듯, 현대 예술은 “1)예술을 비인간화하고자 하는 경향 2)생동적인 형식을 피하려는 경향 3)예술작품은 예술 작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경향 4)예술을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경향”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편혜영, 김도언, 박형서, 백가흠의 몇몇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현대 예술의 한 경향을 대변하고 있으며, 이들 작품의 ‘악마성’도 그 맥락 위에 놓인다. 이들이 작품을 통해 제출하는 ‘악’의 부정방정식은 보다 소박한 의미에서의 현실 사회라는 Y를 포괄하지 않으며, 좀더 나은 삶을 겨냥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들의 부정방정식은 이 방정식에 함의된 합리성 자체를 부정하고 폐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제기한 “어째서 2×2=4냐?”라고 했던 질문, 이 근본적인 부정이야말로 ‘악’의 존재형식임을 젊은 작가들은 새롭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상상력은 이제 ‘2X+3Y=Z’ 따위의 도식에 의해 구해지는 삶의 총체성이 아니라, 모든 연계와 맥락들을 무관한 감각의 논리와 오류에의 충동에 바쳐지고 있는 듯하다. 이 상상력은 지젝이 “궁극적으로 상상력은 직접적 지각이 한데 모아놓는 것을 절단하는, 어떤 공통의 개념(을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징을 다른 특징들로부터 ‘추상’하는 우리 마음의 능력을 나타낸다. (중략) 상상력의 폭력이, 즉 모든 객관적 연계를, 사물 자체에 기반하는 모든 연관을 분해하는 상상력의 ‘공허한 자유’가 무제약적으로 군림한다.”라고 했던 그러한 상상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작업이 갖는 의미란? 아마도 근본적 차원에서 물어져야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이들의 후속 작업과 함께 계속 궁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성급하게 이들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자면, “예술은 삶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며, 쾌활함의 새로운 양식”, 혹은 ‘예술을 감수성의 확장과 대변혁’(릴케와 엘리엇)으로 보았던 몇몇 현자들의 충고에 기댈 수 있다. 감각과 오류에의 충동이 좀더 시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산문적 진실을 추구하는 소설에서의 이러한 작업이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새로운 감수성을 통한 우리의 지각과 인식의 변화는 분명 ‘새로운 삶’을 위한 하나의 초석이 될 것이다.
정은경․2003년 <세계 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등단
․주요 평론으로 「소설 공학, 엑스터시 그리고 엑소더스-김영하론」, 「사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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