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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특집/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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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77회 작성일 08-03-01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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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예술의 악마성

악마나 괴물은 없다. 단지 인간의 모습일 뿐

강성률|영화평론가


1. 왜 공포영화를 보는 것일까?
영화는 대중의 욕망을 표상하는 매체라는 것이 대부분의 영화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영화가 소설이나 미술, 음악과 달리 쉽게 대중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다른 매체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대중들의 욕망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크린에 직접 재현된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쉽게 관객과의 동일시를 이끌어낸다. 가령 이런 것이다. 소설이나 음악, 미술 작품을 읽거나 듣고 본 사람들은 쉽게 그 작품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누구나 금방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해 쉴새없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것은 왜 그런 것일까? 지식의 정도를 떠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점에서 이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영화가 다른 매체에 비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산업이기 때문에 대중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 그것도 대중들의 욕망이 투사된 스타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영화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사된 매체이다. 대중들이 영화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대중들의 욕망을 영화 스크린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서도 영화 속에 몰입할 수 있는, 그것도 극적 동일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 속에 그려진 내용이 대중들의 욕망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관객들의 상상계가 영화 속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이 해피엔딩과 권선징악으로 끝맺는 것도 대중들이 그런 행복한 결말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대중들의 욕망과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의 영화도 있다. 그럴 때 관객들은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인간의 악마성을 다룬 영화들이 그러하다. 가령 공포영화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영화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악의 존재가 등장해서 인간을 괴롭히거나 죽인다. 그런 영화를 보는 순간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느끼다가 마침내 극단적인 공포를 접하게 된다. 심지어 영화 속 인물들이 악마적 존재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할 때에는 마치 바로 옆에서 그런 살인이 ‘직접’ 일어나는 것 같은 무서운 공포를 느끼게 된다. 영화 속 인물을 잔혹하게 살해한 인물이 다시 나에게 다가와 살인을 할 것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주인공과 동일시된 상황에서 느끼는 끔찍한 살해의 현상은 이미 나를 죽인 것 같은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이런 공포 때문에 공포영화를 보지 못하는 이들도 생각보다 꽤나 많다.
그런데 관객들이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영화 속의 공포가 현실로 전이되지 않는다는 것을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무리 무서운 악마적 존재가 영화 속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스크린에서만 활동하다가 러닝 타임이 끝나면 그 존재도 끝난다는 장르의 규칙을 관객들이 이미 숙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알고 있기에 스릴을 즐긴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공포를 즐길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공포를 통해 현실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재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이 그렇게 공포스럽지 않다는 것을 공포영화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과연 공포영화 속에 그려진 악마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판타지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단지 집단무의식적 악의 존재일까? 그래서 그는 절대 선의 존재와 대결하다가 결국 지고 마는 것인가? 물론 대부분의 판타지 영화 속의 악의 존재는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집단무의식적 악의 존재로서, <반지의 제왕>의 악마의 존재가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악마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공포영화 속에 그려진 악마나 괴물의 존재는 현실 속의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세상을 살아가는 실제 인간들이 가상으로 만든 괴물이 공포영화에 등장하는데, 그들이 가상으로 괴물을 만든 이유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괴물을 통해 표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공포영화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공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공포영화를 통해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포영화가 여러 하위 장르를 지니고, 괴물의 양태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도 우리 사회가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부조리를 다양한 하위 장르와 다양한 괴물을 통해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한 악마적 존재나 괴물을 통해 그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적해보도록 하자. 

2. <괴물>에는 괴물이 없다?
2007년 초반, 영화 속에 악마나 괴물이 등장한 영화를 단 한 편만 들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괴물>은 지난 해 여름 한국의 극장가를 휩쓸어 버린 ‘괴물’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시간>이 극장을 찾지 못해 방황할 때, <괴물>은 600개 이상의 극장을 독식하며 전국 스크린의 1/3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대부분은 <괴물>을 보러가자는 의미였다. 즉, ‘영화=<괴물>’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괴물>은 전국 관객 130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면서 새로운 한국영화사를 작성했다. 
한 영화가 1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랍고도 놀라운 기록이다. 한국 사람들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워낙 놀라는 일이 많아 쉽게 놀라지 않기 때문에 이 기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록인지 모르지만, 이 기록은 아무리 과장된 수식을 동원해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록이다. 4800만 명 가운데, 그것도 불법다운로드가 판을 치는 현 시점에서, 영화관에서만 1300만 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것이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는 기록인가? 영화를 자주 보는 10대 후반과 2, 30대는 거의 대부분 이 영화를 봤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런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광적으로 <괴물>을 보았던 것일까?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에? 물론 맞는 말이다. 영화적 재미를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괴물>을 본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영화가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때문에 그들이 <괴물>의 어떤 면에 재미를 느꼈는지,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객들이 <괴물>의 무엇에 중점을 두고 보았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괴물>은 그리 재미있는 장르 영화가 아니다. 괴물의 존재를 초반에는 숨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내는 일반적인 괴수영화와도 상당히 다르다. 괴물의 존재는 영화 초반에 이미 전부 드러나고 만다. 그렇다고 괴물의 결정적인 약점을 찾아 싸우는 인간들의 고군분투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 속의 괴물은 그리 강력한 괴물이 아니다. 총 몇 방에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리는 괴물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괴물과 인간의 쫓고 쫓기는 스릴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괴물과 인간이 만나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이 영화는 분명 괴수영화의 컨벤션을 빌려왔지만 괴수영화가 아니다. 고로 이 영화는 기존의 장르영화와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 보자. 이 영화의 괴물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통상적인 괴물이라면 인간의 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괴물은 용가리나 고질라처럼 도시를 마비시키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괴물은 한강 다리에서 부드럽게 덤불링 하는, 그리 무섭지 않은, 부드러운 존재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괴물을 처치할 때도 어마어마한 화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작 화염병과 신나로 태울 뿐이다. 헬리콥터나 탱크와 같은 화력은 필요도 없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이 영화는 괴물이 등장해서 서울이라는 한 나라의 수도가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상황을 다루고 있는데, 왜 정작 영화 속에 등장한 괴물은 그리 강력한 괴물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 사회의 부조리가 나타나 있다. 이미 영화 초반에 나타난 것처럼, 이 영화의 괴물은 미군에서 버린 독극물 때문에 돌연변이를 일으킨 물고기가 괴물로 변형된 것이다. 그 괴물은 물 속에 살면서도 물 밖에서 생활할 만큼 매우 기형적이다. 사람을 통째로 삼켰다가 삭혀서 먹는 그런 존재이다. 중요한 것은 이 괴물을 만든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괴물이 등장하게 된 기본적인 배경이 실제 사건이었던 한강의 독극물 투척 사건이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에서 등장한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보건기구에서 직접 나와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인 한국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한강에서 괴물과 싸웠던 용감한 인물을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물로 치부하면서 마치 죄인을 다루듯 하거나, 무엇보다 존재하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찾으려는 세계보건기구의 노력은 마침내 주인공을 정신병자로 몰고 갈 뿐이다.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잃어버린 딸이자 손녀이고 조카를 찾으려는 일가족의 노력을 마치 범죄자의 탈선으로 묘사한다. 병원의 의사나 그들을 인터뷰한 언론, 그리고 언론의 말을 믿고 몸을 사리거나 현상금을 노리는 이들을 통해 이런 일은 매우 순식간에 발생한다. 잃어버린 딸을 찾으려는 일가족의 노력은 당국의 방해와 감시를 뚫고 진행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괴물의 존재가 부각된다. 사실 이 영화의 괴물도, 괴물에게 잡혀있는 현서만큼이나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이다. 무슨 말이냐고? 사실 괴물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는 단지 한강에 뿌려진 독극물을 먹고 괴물로 변해버린 죄밖에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 역시 피해자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한강변에 있는 수많은 먹이감(사람들)을 보고 이 무슨 횡재인가 하는 심정으로 갔다가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때문에 그 역시 피해자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멀쩡한 물고기를 괴물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사살하는 사람들의 폭력도 엄청난 폭력인 것이다. 혹자는 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냐고 말하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괴수영화의 괴물은 항상 사람을 해치는 존재이다. 그들의 존재의의는 바로 이것이다.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현서를 잡아가지 않는다면 괴수영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괴수영화의 성립을 위해서는 괴물을 악한 존재로 그려야만 한다. 이것이 괴물의 비애이다. 
여기서 왜 나약하고 불쌍한 괴물을 그렸는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 괴물 같지도 않은 괴물을 등장시켜 한반도가 순식간에 마비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구에 종속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는 괴물의 존재가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괴물보다 더 비참한 우리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한강에 등장한 괴물을 통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멀쩡하던 한강의 다리가 파괴되거나 백화점이 무너지고 배가 뒤집히며 도로에서 불기둥이 치솟는 등, 너무도 어이없고 끔찍한 사건을 많이 겪은 이 나라에서 괴물의 등장은 또 다른 대형 사고에 다름 아니다.
한강에 괴물이 등장하자 언론은 호들갑만 떨고 공무원은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데, 그 순간에도 이권을 챙기고 있다. 졸속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오히려 피해자를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급기야 그들을 가두고 만다. 여기에 미국의 개입으로 국가의 주권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나가고 만다. 이런 일은 우리가 너무도 자주, 그리고 익숙하게 겪어왔던 일이다. 돈을 쓰지 않으면 어떤 일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보면서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사회의 부조리한 모순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괴수영화라는 장르 컨벤션을 이용한 것뿐이다. 고로 이 영화의 괴물은 괴물이 아니다. 단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 상상적으로 만들어낸 대형 사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3. 악마적 인간의 복수는 완성되지 못한다
악마적 존재가 등장하는 한국영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면 아마도 박찬욱의 영화도 리스트에 포함될 것이다. 박찬욱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매우 강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는 사람을 죽이고 복수하는 잔혹한 장면이 여과없이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복수 3부작’이라고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영화 속 인물들은 정상인으로서의 도저히 행할 수 없을 것 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행한다. 게다가 복수가 복수로 이어지면서 그 방법은 더욱 강도를 더한다. 
현재 한국영화 시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렇게 강한 표현을 구사하는 박찬욱의 영화가 흥행에서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흥행의 성공뿐 아니라 비평에서도 호평을 얻어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면서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국영화 관객들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몇 편의 영화가 흥행을 독점하는 지금의 편협한 영화문화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박찬욱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매우 영리하게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복수 3부작’ 가운데 가장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나의 치유를 위해 부잣집 아이를 유괴해서 돈을 강탈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가 먼저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약과에 불과하다. 이제부터 복수의 복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자신의 신장을 강탈한 조직을 찾아가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그것도 신장을 갈기갈기 씹어 먹고) 자신의 아이를 유괴 살해한 여자와 남자를 찾아 결국 죽이고 만다(전기 고문과 아킬레스건을 잘라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이때 살인을 행하는 방식이 너무도 끔찍해서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살인을 행하는 이들은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고 매우 차분하게 살인을 저지른다. 더욱 이상한 것은 몇 살인은 경찰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과한다는 것이다. 즉, 살인을 행할 것이라는 것과 살인을 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경찰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복수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과격한 주장을 하기 때문에 살인을 행하는 인물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악마적 존재로 보인다.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인을 행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인간적인 미를 느낄 수 있겠는가. 분명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인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는 인간이다. 사실, 귀신이나 초자연의 위력은 그리 무섭지 않다. 동물의 습격도, 초자연적인 힘의 공포도 그리 두렵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복수심은 무섭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살인이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박찬욱의 영화는 어떻게 보면 ‘정직’(?)하다. 그의 영화에는 아무 의미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은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희대의 살인마가 유희의 하나로써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는 <한니발>이나 <쏘우> 시리즈의 직쏘 같은 살인마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박찬욱의 영화 속 인물들은 복수의 한 방법으로 잔혹한 살인을 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욱의 영화는 매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살인 방법이 잔혹하고, 그 잔혹한 방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실의 살인도 많은 부분 복수라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돌발적인 상황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살인은 원한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사람을 죽이면 평생을 죄의식에 시달려야 하고, 또한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릴 만큼 위험한 것이기에 일반인들은 쉽게 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되는 절박한 상황이 되면 복수라는 이름의 살인을 결심하기도 한다. 박찬욱이 다루고 있는 살인도 원한과 관계된 복수라는 형태의 ‘의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그의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복수를 법이라는 제도에 의지해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원시적인 폭력의 형태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는 그 정도가 매우 세다. 아이를 유괴해서 죽인 범인을 부모들이 모여 집단 살인을 행한다. 금지옥엽 같은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어느 폐교에 모여 어떻게 유괴범을 죽일지 모의를 하다가 순서에 따라 들어가 조금씩 고통을 가해 죽이기로 한다. 둔기로 상처를 입혀 조금씩 죽이는 과정도 끔찍하지만, 그들이 모의하는 과정을 유괴범이 듣게 함으로써 유괴범의 공포를 더하게 하는 것을 알게 되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결국 그들은 경찰의 입회 하에 유괴범을 죽이고 사체를 유기한다. 그렇게 복수가 완성된 후 그들은 빵집에서 즐거운 모임을 갖는다.  
<올드보이>에서도 두 개의 복수가 등장한다. 친구의 가벼운 입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친구를 15년 동안 감금시키고 그의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졸지에 감금되고 가족도 파탄 난 친구는 그를 그렇게 만든 인물을 찾아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복수를 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복수를 향한 그 집념은 인간을 성장하지 못하게 만들고 인간을 괴물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허무한 결말로 끝나고 만다. 그 무서운 복수의 집념도 해결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복수의 집념에 불타는 인물의 무시무시한 행적을 다루고 있지만, 박찬욱 영화의 복수는 결코 완성되지 못한다. 그것은 박찬욱 영화가 죄의식과 구원을 문제와 닿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인물들은 복수를 해야만 자신의 죄의식이 없어질 것 같은 마음에 잔혹한 복수를 저지른다. 멀쩡한 인간을 악마로 만들 만큼 그들의 복수에 대한 집념은 컸지만, 복수를 한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는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부르기 때문에, 또는 자신에게 복수를 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복수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때문에 복수가 완성되었을 때 인물들은 살해당하거나(<복수는 나의 것>) 죄의식에 괴로워하거나(<친절한 금자씨>) 자살하거나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만다(<올드보이>). 이것은 그들의 복수가 결국 자신의 집념의 소산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죄의식을 씻지 못하고 구원과의 더욱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박찬욱 영화가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복수는 완성되지 못하고 인간의 고통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상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복수를 행하지만, 복수가 결코 그들을 평안하게 안식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죄의식을 지우는 방법으로 복수를 행하고 그것을 통해 구원을 갈구하지만, 결코 구원받지 못하는 잔혹한 인간사를 보여주는 것이 박찬욱 영화가 아닌가 싶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박찬욱 영화가 그리는 세상은 매우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것이다.   
4. 악마는 없다. 사람의 다른 얼굴이다
봉준호의 <괴물>과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을 중심으로 영화의 악마성에 대해 논했지만, 무언가 허전함을 느낀다. 논의가 편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괴물을 등장시킨 <괴물>과, 복수의 허망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는 ‘복수 3부작’ 외에도 영화에서 잔혹한 살인을 행하는 악마적 존재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실화에 소재를 둔 <살인의 추억>이나 <그놈 목소리>에는 인간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이 등장한다. <살인의 추억>의 연쇄 살인범은 화성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여성을 연이어 살해했고, <그놈 목소리>의 유괴범은 아이를 유괴한 후 이틀만에 죽였으면서도 부모를 협박해 돈을 강탈했다. 두 영화의 범인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악마적 존재이다. 아이를 죽였으면서도 애절한 부모의 심정을 이용해 돈을 강탈했고, 우발적으로 한 명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유희로 연쇄 살인을 행했다.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지난 두 사건을 다룬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살인의 추억>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철권 통치를 행할 때 어떻게 한 지역에서는 연이어 살인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 사회적 의미를 묻고 있다. 즉, 악마적 살인마의 행적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이 죽음의 처지에 놓여 있을 때 군부 독재는 왜 그런 죽음에 대응하지 못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놈 목소리>는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에 카메라를 기울여 다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란다. 감독이 바라는 것은 간단하다. 마지막에 범인의 실제 목소리를 넣어 정말로 범인이 검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범인의 악마적 존재를 부각시키면서도 아직도 미결로 남아있는 사건에 대한 윤리적 차원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악마적 살인마를 다루고 있지만, 한 영화는 사회적 의미를 묻고, 다른 영화는 윤리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두 편의 영화 외에도 악마적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는 얼마든지 있다. 비단 악마적 인간만이 아니라 외계인의 침입도 있고, 동물들의 공격도 있으며, 초자연적인 재앙도 있다. 그러나 그런 세세한 것까지 이 지면에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지면에서는,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것을 중심으로 삼아야겠기에 몇 부분으로 국한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영화의 악마성은 악마나 괴물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마성은 결국 인간의 악마적 본성과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악마나 괴물은 없다. 단지 인간의 악마성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만이 희망이지만 사랑만이 절망이기도 하다.


강성률․
저서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바보 등
․현재 한성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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