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5호 신작시/이승훈
페이지 정보

본문
이승훈
언어를 잊으려고
모자는 나를 모르고 모래도 모르지
모기도 모르지 저 모기는 여름밤에
나를 물던 모기 그러나 가을밤에도
나를 무네 나를 모르는 모기가
나를 무는 밤 침대 아래 모기향을
피우고 쫓아도 달려드는 모기
미친 모기 저 모자도 미친 모자다
벽에 걸린 저 모자도 나를 모르고
달려드네 저 모자는 구두가 아니지만
아마 구두라고 생각할 거야 그건
너희들 맘대로야 그러나 미친 모자는
행복할 거야 누구나 미칠 때 언어를
잊을 때 섹스도 사랑도 언어 너머
있을 때 언어를 모를 때 행복한 거야
언어 때문에 소외되고 얼어붙는 밤
저 모자는 언어를 모르지 모래도
모래도 모르지 언어 때문에 얼음이
되는 밤 싸우는 밤 하얀 얼음 다시
하얀 밤이다 너를 안아도 얼음이
되는 밤 쫓겨가는 밤 얼음의 극한
에는 병원이 있네 하얀 병원 난
그동안 병원을 먹고 살았다 멸치들의
병원에서 멸치들과 함께 웃으며 살았지
미역 다시마가 찾아오는 밤이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살았다 언어가
없다면 욕망도 없겠지 소외도 없고
얼음도 없겠지 아마 병원도 없겠지
나는 병원에서 시를 쓰고 하얀 병원
언어 병원 만두는 만족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망각에 도달하려고
언어를 잊으려고 언어 너머 언어
너머 있는 너에게 도달하려고 미친
모자가 되려고 나를 모르는 모자
나를 무는 모기가 되려고 모두 버리려고
시를 쓰네 언어를 잊으려고
침대
잠이 안 와 일어나 앉으면 침대도 일어나 나를 쳐다보는 밤이 있고 어둠 속에 침대와 마주 앉아 말을 나누는 밤도 있다
침대는 사람이 아니다
침대는 한번도 이런 시를 쓰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곧 벌레들이 기차를 타고 올 거야
우리는 중얼대며 잠이 든다
그러나 다시 잠이 안 와 일어나면 침대도 따라 일어나고 나는 다리가 두 개이고 침대는 다리가 네 개이다
나는 입으로 숨쉬고 침대는 다리로 숨쉰다
그러나 나도 깃털이 없고 침대도 깃털이 없다
이승훈․
1942년 춘천 출생
․1963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시집 A, 환상의 다리,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 외
․시론집 모더니즘 시론
․한국시협상, 현대문학상 수상
․한양대 국문과 교수
추천39
- 이전글25호 신작시/백우선 08.03.01
- 다음글25호 신작시/강인섭 0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