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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신작시/백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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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선
반지와 밥
―바우덕이 묘에서
시월인데 바우덕이는 제 묘에 제비꽃 피워
꿀샘의 뒤꼭지를 따고 꽃자루를 꽂은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살아서도 사람들에게 끼워주어
식구들의 숟가락과 붉은 살과 한뎃잠에
밥과 옷과 집이 되어 주던
웃음반지, 재주반지, 살반지에 이은 꽃반지였다
다가오는 겨울
마음만이라도 자기 식구들에게 주고 가라고
제 몸꽃 반지를 끼워주었다
제 몸으로 고봉밥 한 그릇 높이 지어서는
물에라도 말아 먹으라고
시냇가에 맨밥 한 상 차려 놓은 채였다
땅쇠구미호
―최우람 조각 「울티마 머드폭스」
이것은 서울올림픽 미술관에서 처음 본 기계생명체이다
조각가 최우람 씨가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포획한 것이다
지하 터널 벽 속에서 차량을 따라 빠른 속도로 날다 차와 함께
잠깐 멈춘 사이 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붙잡았다 한다
케이블이나 무선으로 송수신되는 온갖 정보들과 버려진 기계들을
도시 지하 병원의 로봇 닥터들이 이용하여 탄생시킨 것이다
인간의 배아줄기세포 배양 기술을 상용화하여
고장난 부품들이 새 부품으로 소생하기도 하고
자기 증식, 복제, 돌연변이를 거듭하는 기계들과 더불어
이것의 초첨단 능력도 날마다 업데이트되고 있다
탁월한 예술적 영성으로 생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의 먹이인 물과 전기, 전자파 등의 유실은 늘어만 간다
사람들을 칸칸 층층이 제법 자유로이 드나들게 놓아둔 채
그들의 말과 눈빛과 숨결, 뇌파까지 먹고 살면서
점점 빨라지고 노선을 넓혀가는 지하철 비단뱀,
날로 거대하고 지혜로워지는 빌딩이나 아파트 공룡들과 함께
언제 사람들을 재나 숯덩이로 해치워 버릴지 알 수 없는
이들의 세계가 바야흐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백우선․
1981년《현대시학》으로 등단. 1995년〈한국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봄비는 옆으로 내린다, 미술관에서 사랑하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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