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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신작시/윤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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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섭
언제고 누군가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온전히 죽는다
1. 니르바나 식물원
꽃은 중얼거린다
바람에 간들거리며 아침나절부터 중언부언이다
병들지 않았어 나비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고 해도 난 멀쩡한 몸이야 미치지도
않았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쳤지만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냐 내가 잘못한 것일까
피어나지도 말았어야 하는 걸까 너무 일찍
피었나 죽었나 이미 죽었나
그건 꽃들이 하늘을 향해 독경을 하는 풍경이었다
그들은 넋이 나갔거나
길 떠날 채비 중이었다
어쩌면 화창한 가을 때문이다
가시넝쿨은 따사로운 햇살을 친친 감아 오르고
나뭇가지는 감미로운 달빛의 머리카락을 닮아 하염없이 흐느적거렸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개하였고
식물원이 주는 물과 식사에 배불렀으며
예쁘게 꾸민 울타리 안에서 기름질만큼 기름졌다
그러므로 꽃으로 망명하기엔 너무 늦은 것이다
2. 샬롬
모퉁이를 돌아서면 공중전화다
전화를 걸면
수화기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발원지는 그제서야 생겨난 것이다
저 너머 어딘가에 나와 동시에 발 딛고 선 무변의 영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에도 달이 떴을까
나는 달나라 계수나무를 바라본다
너는 토끼가 보인다고 말한다
나는 달무리가 보인다고 말한다 너는
어제 보았다고 말한다
다시 전화를 건다
전화번호를 누를 때마다 숲이 피어나고 산이 솟아오르고
0 하나에 별 하나 1 하나에 우주 하나
나는 소식을 전해준다
오늘은 꽃들이 꼿꼿이 서서 열반에 들더군
3. 風經
언덕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을 읽고 있습니다
홀연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이 저 멀리서 오길래
유심히도 쳐다 보았습니다
바람의 갈피에는 시베리아 출판이라고 써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본 문장은 꽤나 난해했습니다
北歐의 동토에 자생하는 형이상학적 바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조금 가볍고 유쾌한 바람은 없나 싶어
나무 그늘 아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마침 햇살을 피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있습니다
나는 눈을 박고 술술 읽어댑니다
이 바람은 여행을 많이 한 늙은 바람이었습니다
온통 구수한 얘깃거리 투성이었습니다
그 중 한 토막은 이렇습니다
나는 많은 섬을 돌아 다녔다 그린란드 수마트라
뉴질랜드 북도 루손 아일랜드 혼슈 크레타
민다나오 테즈메니아 엘즈미어 아틀란티스 무어
이 대목에서 이 바람은 도대체 몇 살일까 궁금했습니다
갑자기 까르르거리며 어린 바람들이 한꺼번에 몰아쳤습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가득 채워진 바람들이었습니다
이천이백육년 출판 제목 바람을 읽어주는 꽃
첫 페이지는 한 사람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삽화였습니다
4. 眞空 - 無邊界에 서다
아마 이럴 때가 있을 것이다
어느 가을 촉촉이 젖은 오후에 노란 은행나무 아래를 걷다
불현듯 잊었던 고향집이 떠오른다
주렁주렁 매달린 은행을 따려고 가지를 쳐대면
어느덧 수북이 쌓이는 은행잎에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물들고
툇문을 열고 나오신 젊은 어머니
소쿠리에 은행알 담는 고운 손가락이 그립다
이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이 나는 순간 지금 당신이 살게 된 것이다
당신은 점멸하는 기억 속에 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얼마나 짧게 피고 지는 나날인가
구름터널
비가 내린다 늘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
나무에선 열매 대신 눈물 구슬만한 빗방울이 맺힌다
빗방울을 베어 먹으면 낙엽 냄새가 난다
지층을 꿰뚫고 흘러내린 탓이다
언제부턴가 살내음을 맡으면 나무뿌리 냄새가 풍겼다
따사로운 햇살의 추억을 간직했던 이주민은 곧바로 치매에 걸리고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영안실에 안치되고선 구름 속에 묻힌다
가끔은 사상 최악이라는 태풍이 몰려왔지만 터널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출구가 어딘가로 바뀌었을 거라는 추측만 무성한 채
갈 길이 막막해질 때면
탑처럼 쌓인 積雲을 향해 기도를 올리거나
굴뚝으로 인공 구름을 만들어 공양을 올린다
그러나 새들은 언제나 낮게 날고
저 출구의 소실점을 향해 치달리는 영혼은 너무나 축축하다
아무도 터널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발밑에서 경적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은 환청일거라고 비웃었지만
다들 구름에 갇힌 나무처럼 하얗게 질린 지 오래다
윤의섭
․경기도 시흥 출생
․1996년 계간《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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