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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신작시/이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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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인
물방울요일
내 앞의 어르신은 내복을 벗은 후 저울 위로 올라가 흰 수염을 달아보고 겨드랑이의 털을 달아보고 돋보기를 달아보고 기침소리를 달아보고 어느새 몸에 파묻힌 고무줄 자국까지를 달아보고 천천히 욕조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의 고요가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노인을 따라가지 못한 파란색 일회용 면도기를 주웠다. 나와 파란색 일회용 면도기는 곧이어 노인을 따라갔다.
물방울방울요일
목욕탕 텔레비전에서는 오래된 영화가 뽀글뽀글 끓어오르고 나는 알몸으로 마른 수건에 앉아서 발톱을 깎다 달걀을 잘 까먹는 큰 아이와 알까기가 서툰 작은 아이의 투정과 음료수 캔 뚜껑을 따는 아이들 아버지와 일요일 통풍구로 어렵게 들어온 햇살을 보다가 새 모이처럼 조용히 조금 흩어진 소금알맹이를 보다가 내 뒤편의 거울 속에서도 상영되는 그 오래된 영화를 보다가 면도기를 든 이발사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달걀껍질을 까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작은 바위덩어리 같고 그때 내 새끼발톱을 마지막으로 깎자고 하여 깎던 순간, 탁 하고 떨어져 나온 발톱이 튀어서 몇 걸음마였을까, 계란 까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와 아이들 아버지 곁으로 날아갔다, 뭉툭하고 둥근 고무를 덧씌운 목발이 그곳에서 한줄기 햇살을 환하게 받고 있었다.
이기인․
인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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