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4호 신작시/김원경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83회 작성일 08-03-01 01:03

본문

김원경
항해일지


자정 넘어 지직거리는 텔레비전 속
방어진 앞바다의 파도가 출렁거렸다
멀리 금빛 펄 마스카라를 한 등대 불빛
창틀에서 끔뻑 눈인사를 했다
뭉텅뭉텅 토막 난 시간들은
탐조등을 켜고 하나 둘 바다로 뛰어들어
검은 커튼을 열어 젖혔다
거대한 심해어가 밀물처럼 올라와
유언 같은 말을 속삭였지만
말 뼈다귀들은 어느새 무너져
수초처럼 순식간에 이 방을 빠져나갔다
환풍기 밖으로 비명소리가 잘려나갔다
물살에 몸 실은 폐선들은 일제히 붉은 깃을 세워
마지막 항해를 꿈꿔보지만
달아날수록 밧줄은 단단히 목을 졸랐다
이곳의 지도는 이미 이 세계를 덮을 만큼 켜져 있어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
올라오는 태양의 목을 분질러
날마다 화형시켜도
화재경보기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환절기


위독한 계절이 이 마을에 찾아 들었다
집집마다 어린 개들은 입을 막고 짖어댔고
모든 것은 태풍전야처럼 어둡고 스산했다
담벼락 밑 납작하게 엎드린 호박이
링거를 맞고 누웠다 아산병원 중환자실,
줄기마다 통점이 부풀어
그는 자주 몸을 들썩거렸다
바람의 지문이 초인종을 누르듯
어떤 예고도 없이 스치고 지나간 뒤
곪은 상처는 옆구리에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태양을 집어 삼켜버린 검포도처럼
쭈글쭈글 생이 그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의 발을 꽉 물고 좀체 놓아주지 않던
이 땅에서 이제 그만 떠나고 싶은 것이었을까
제아무리 둥근 태생이어도
평생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던 그가
짊어진 태양을 내려놓은 후,
울음의 온도는 급격히 올라갔다
저물녘의 바람처럼 내 머리를 빗겨주던 손은
이제 오지 말라고 손사래 치며
유리창에 걸린 달빛처럼
힘없이 시들고 있었다
혹성 같은 침묵이 아득히 길어지자
불안은 겹겹의 주름을 접고
밤마다 시처럼 앓아야 하는 위독한 계절
한동안 이 마을은 암전으로 캄캄할 것이다



김원경․
1980년 울산 출생
․2005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추천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