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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외국문화탐방(앙리 메쇼닉)/김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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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학탐방|
번역은 언어활동 이론을 총체적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이다
원고:앙리 메쇼닉
번역:김다은|소설가
번역의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문제는 번역이 언어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간과하고서 텍스트를 번역한다면, 실상 우리가 보여주는 것은 번역대상 텍스트와 번역자의 의도 사이에 개입된 랑그의 재현일 뿐이다. 언어학적 기호의 불연속성 속에서 시 한편을 번역한다면, 우리는 그 시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한 랑그에서 다른 랑그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이는 번역을 통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언어활동이론은 문학이론에 종속되며, 모든 번역은 언어활동 이론에 종속되고, 모든 언어활동 이론은 리듬의 이론에 종속되고, 불연속성은 연속성에 종속되므로, 모든 언어활동 이론은 번역의 이론과 실천에 종속되는데, 이는 번역이 언어활동 이론에 종속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번역이 언어활동과 사회의 재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마치 사회가 언어활동의 재현에 종속되며 언어활동의 재현에 의해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역할은 언어활동의 공통 표상인 기호의 재현으로서의 메시지 전달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번역이란 진정한 문화혁명의 목적이 된다.
나는 언어활동 이론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즉 언어, 시, 문학, 예술, 윤리학, 정치학간의 관계를 성찰하여 사회의 시학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작업은 필연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해되지 못 할 위험, 내지는 확신을 수반하는데, 이는 고정관념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정착되어, 오늘날 학문의 현주소, 인문학과 철학의 현주소, 대학의 현주소가 대변해 주듯이, 이러한 작업들을 서로 개별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활동 이론은 오히려 연속성과 이러한 활동의 상호작용에 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때로 나는 말이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쉽게 풀어 쓰라는 주문을 받는다. 이는 성찰의 작업이 항상 어떠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 하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가 일반 대중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고정관념의 정착이 불러오는 모든 전통적 형식주의의 사회적 효과이며, 이러한 전통적 형식주의는 기대 영역을 생각할 수 있는 영역으로 규정한다. 고정관념과 다른 것, 고정관념과 대치되는 것은 모두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어, 즉시 거부되거나 묵과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 사고란 확립된 질서를 뒤엎고 세상을 바꾸려는 광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고의 시라 할 것이다.
번역의 문제란 없다. 번역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던 알지 못하고 있던, 번역행위에 개입되는 언어활동이론의 문제가 있을 따름이다. 번역행위의 결과는 언어활동 이론에 따라 가변적인 산물이므로, 모든 번역은, 번역 대상물에서 남는 것을 보여주기도 전에, 언어활동의 재현과 문학 또는 시라 불리는 것의 재현을 먼저 보여준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언어활동이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떤 결과를 목표하느냐, 즉 언어를 언어학적 의미에서, 즉 기표와 기의간의 불연속성 속에서, 기호의 차원으로 간주하느냐, 랑그의 차원에서, 단어를 단위로, 의미만을 중시(기호는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므로) 하느냐를 보아야 한다.
기호는 특히 불연속성 속에서만 존재하므로, 언어활동에서도 존재하지만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간과되고 있는 어떤 것, 즉 연속적인 것, 리듬, 운율, 발화행위나 의미작용인 모든 것을 알아내고, 암시할 수 있는 개념이나 방법을 갖추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것은 단어의 의미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듯, 문학적 또는 철학적이라는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연속성의 범주에 속하며, 언술 체계로서 사고를 창조하므로, 이들 텍스트에서 랑그나 기호만을 간주하면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번역불가능이라는 통상적인 개념이 발생하는데, 이는 인류학적 요소와 시적 요소를 혼동하는 막연한 개념이며, 본질적으로 기호에 의해 결정되는 개념이다. 번역불가능성이란 기호를 시에 끼워 맞추는 행위이다. 이는 따라서 이론적인 개념인 동시에 경험의 문제이다. 그러나 경험론이란 이론의 산물, 또는 이론 부족의 산물이다. 번역에서는 바로 랑그의 이데올로기, 랑그에서 다른 랑그로의 전이 이데올로기만을 가르치고 있고, 그 문화적 효과로서 자연스러움의 이데올로기만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인식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복잡한 문화의 문제, 즉 언어사상의 역사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형식주의 언어학이나 해석학, 문헌학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가령 고대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키케로가 말한 <vis verbi, vis verborum>가 Freund의 라틴어 사전이나 벨르레트르Belles-Lettres 출판사 사전에서, 최고의 권위자들의 손에 의해, <단어의 힘, 단어들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의미, 단어들의 의미>로 번역된 것은, 오늘날 해석학자들에 의해 얼마나 언어의 의미가 손실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힘이란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며, 화용론과 행동주의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론 Peri hermeneias(De interpretatione라고도 함)'에서 직역하면 <목소리 안에 있는 것들>이라는 뜻의 <ta en t phon>의 기준이 되는 번역은 <단어들>이다. 따라서 모든 고전 작품은 재번역 대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번역 작품이 노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활동에 대한 생각이 노화하기 때문이다. 킹 제임스 역 성경, 갈랑(Galland)이 번역한 '천일야화'나 네르발이 번역한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번역 걸작들은 원작만큼이나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이렇듯 번역은 언어활동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번역의 또 다른 나쁜 전통이기도 한 특정한 것을 못 듣는 습성은 번역이 통상적으로 받게 되는 사회학적 멸시를 역설적으로 뒤집을 만한 어떤 것을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번역은 언어활동이론의 실험의 장이기 때문이다. 대작들의 재번역 역사는 보고 듣는 관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렇듯 번역이란 문학과 언어활동 이론을 실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번역은,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기호에 집착한다는 것과, 곧 변화시킬 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언어활동 이론의 총체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번역은 언어활동 이론과 문학이론을 총체적으로 문제 삼는다. 번역은 언어활동 이론과 문학이론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번역은, 원전 문학작품의 창작보다 하위의 개념으로 간주되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의사소통, 정보전달 수단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번역은 실험적 시학이며, 동일한 텍스트의 연이은 재번역물들의 검토를 통한 언어 전략의 가장 좋은 관측초소이다.
번역에 관한 가장 오래된 관점은 번역자들의 경험론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것으로, 그 상징적 대표주자는 성경 번역자인 성히에로니무스이다. 키케로에서 발레리 바르보에 이르기까지, 랑그의 영역 내에서 산출될 효과를 기대하는 관점이다. 번역은 한 랑그에서 다른 랑그로의 전이로 간주된다. 번역은 비교문법(<비교문체론>)과 개별적 문체의 차원에서 분석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번역통역사 양성 학교에서의 번역 교육의 근거가 되고 있고, 여기서 경험과 양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주요 가르침으로는 충실성의 추구와 텍스트 앞에서 번역자의 사라짐이다. 번역물의 투명성은 텍스트가 번역된 것임을 잊게 해주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문학 자체를 변화시킬 만큼 위대한 문학 텍스트일 경우, 번역물의 힘은, 원전이 영속적인 것에 반해 생명력을 잃는다는 점에서 취약점을 드러낸다. 번역물의 취약점은 문학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랑그에 대한 성찰에 머물러 있다는데 있다. 문학의 특수성을 간과한 이러한 관점은 문학의 특수성이 산출한 실제와 소통할 수 없다.
19세기 초 독일 해석학은 번역을 이해의 현상학으로 파악하고,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번역과 동일한 언어 내에서의 이해에 대한 구분을 없애는 새로운 번역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후에 현상학에 의해 더욱 확대되게 된다. 종국에는 이해 불능에 이르게 된다는 이 번역 불가능성의 핵심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번역하고 있다는 것, 본원의 번역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우리의 본질을 통째로 변화된 진실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것>(하이데거)이다. 우언법(迂言法)과 번역에 주석을 삽입하는 작업은 하이데거의 진실의 교리의 직접적인 효과이다. 여기서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의 '바벨 이후Après Babel(1975)'가 번역자의 심리와 의사소통 불가능성의 신학으로 발전되고, 미셸 세르의 (Michel Serres)의 '헤르메스Hermès(1968~1974)'가 기호학, 상호기호학과 언어학을 파악함으로써 의미와 역사의 신화로 발전된다. 전통적 경험론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번역의 현상학도 기호와 어원주의(어원학기원-본질-진실)만을 중요시하며, 번역의 현상학은 이성과 보편적 조화의 지배 하에 언어를 정보의 차원으로 축소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냉전의 맥락에서 시도된 자동번역은 번역의 언어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 응용 절충주의는 생성문법에서 현대 화용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설을 서로 결합해서 이들의 발전을 뒤따랐다. 미국 행동주의의 자극/반응 이론은 번역의 이론과 실천에 그 흔적을 남겼다(미국 성경학자 나이다의 경우). 이와 같은 번역의 언어학은 형식(직역주의로 간주되는 <형식적 등가>)과 의미(<역동적 등가>)라는 기호의 이원론적 구분을 통한 랑그의 개념화에 머문다. 번역의 언어학은 결코 언어나 문학의 전반적인 이론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최근의 관점은 시학의 관점으로서, 역사와 기능, 언어와 문학의 분리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관점이며, 따라서 번역행위와 번역물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이렇듯 서구세계의 번역은, 초기에는 경전(성경) 및 종교세계와 연관된 것이었기에, 단어만을 단위로 삼고, 언어를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축어적 번역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와 비종교적 텍스트의 번역은 단어의 비신성화를 가져왔고, 단위가 문장으로 바뀌었으나, <불충실한 문장들>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아직 텍스트를 단위로 삼지는 못하였다. 특수성 연구의 문헌학적 측면에서, 낭만주의는 정확성에 대한 새로운 추구를 가져왔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번역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조금씩 랑그에서 담화 차원으로 넘어가고, 텍스트를 단위로 삼게 된다. 연극뿐만 아니라 문학 전반의 구술성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문학 텍스트의 번역은 운율, 리듬, 의미작용을 통해 문학 텍스트로서, 개별화의 한 형태로서, 형태-주체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을 발견한다. 전통 이론에서 추구하는 번역의 투명성과 충실성은 무지함을 도덕적으로 합리화하는 구실이어서 번역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다. 추구해야 하는 등가란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차이를 잊으면서 랑그에서 랑그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상이성을 특수성과 역사성의 차원에서 고려하면서 텍스트에서 텍스트로 대체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병합(annexion) 에서 탈자기중심주의(décentrement)로, 동일화로 인한 축소에서 타자성의 인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번역이 인정받기 위한 여정만을 지속한 것은 아니다. 번역은 탈식민지화의 세계적 확산과 관련한 20세기 문화간의 관계의 변화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번역은 보편적인(보편화와 보편적인 것 간의 혼동) 것으로 간주되는 동일성의 배타적 숭배에서 다원성과 이타성의 새로운 의미로 나아갔거나 나아가고 있다. 금세기의 양대 변화의 만남은 언어에서는 랑그에서 담화로의 전이 문화와 정치에서는 동일성에서 이타성으로의 전이 특히 문학 부문에서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며, 문학계와 학계의 기존 관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이론과 실천에 있어 현재 변화의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 이는 또한 번역행위의 윤리학과 정치학이기도 하다.
따라서 번역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언어활동이론임을 증명한다. 이는 곧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즉 소위 이론이라고 하는 것과 실천이라고 하는 것 간의 분리 불가능성, 즉 실천이 반성이나 숙고에 입각한 것이 아닐 때는 더 이상 실천이 아닌, 습득된 비법의 어눌한 사용에 불과한 것이며, 실천이 반성에 입각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언어활동의 전반적인 이론을 전제한다는 것이며, 또 역으로 실천을 반영하지 않는 번역 이론은 담화 차원에 적용한 응용언어학, 즉 비성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번역행위가 언어 이론을 수반하고, 언어 이론에 의해 이끌어지면, 전통적으로 또 사회학적으로 간주되듯이 더 이상 수준 낮은 활동은 아니며, 실험적 시학이라는 언어활동의 전반적 이론에서 중요하고도 유일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왜냐하면 번역의 역사, 즉 동일한 대작의 연이은 번역본의 대조, 다양한 번역전략과 시간과 장소에 따른 번역 기술 변화의 검토, 이 모든 역사는 번역 대상 또는 재번역 대상 텍스트라는 불변요소와 이를 토대로 한 변이형, 즉 연속적 번역본이(각각의 번역본은 우선 언어활동의 개념과 문학적인 것의 개념을 드러낸다) 동시에 존재하는 언어행위의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문학 자체는 이러한 특성을 갖지 못 한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무언가를 손본다는 것은 아류작을 만든다는 것이고, 따라서 애초부터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 즉 이러한 중대한 역할과 동시에 번역행위에 사용되는 언어활동 이론의 명시화는 번역 행위가 행위의 대립, 단절, 의식, 변화 지점까지 나아갈 때, 즉 기호와 시간의 대립 지점까지 나아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리듬과 기호의 대립이며, 연속성과 불연속성간의 대립이며, 언어활동, 랑그, 언술, 문학적인 것과 시적인 것에 대한 고정관념과 비성찰에 대항한 대립이다.
오늘날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랑그를 통한, 기호의 이원론, 즉 의미와 형식이라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의 이원론과 단어를 단위로 한, 또는 기껏해야 랑그의 마지막 단위인 문장을 단위로 한 표현성의 가교에 따른 언어사상이다. 담화는 소쉬르가 <전통적 구분(어휘, 형태론, 통사론)>이라 부른 것, 즉 언어의 개념을 통해서만 고찰된다.
기호의 내적 이원론에는 리듬의 지배적 개념화의 내적 이원론이 대응하는데, 이는 강세와 약세의 교대로서, 이것이 규칙적이든 불규칙적이든, 코드화되어 있든 아니든, 산문과 운문의 차이를 이룬다. 이와 같은 차이는, 프랑스식으로 말하자면, 리듬을 운율화하고, 산문을 리듬의 부재로 간주하게까지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리듬의 재현은 기호의 재현인바, 리듬은 기호의 리듬이며, 기호는 리듬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정관념적 합의에 따라, 상호간에 확인되며 강화되는 두 개의 이원론이다. 특히 사물들의 본질 언어활동의 사물들-과 그들의 재현을 혼동하면서. 재현을 재현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재현의 사물들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이 두 보편적인 개념은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의 보편개념에 해당하게 되는데, 즉 언어활동에 대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공통된 비전이다. 문체의 개념이 기호가 문학적인 것과 시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것일 뿐이므로 리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번역 행위가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해이다. 그러나 가장 미약한 시적 이해이다. 이는 전통적인 기의와 리듬의 개념을 파괴하는 언술을 랑그의 차원으로, 연속성을 불연속성의 차원으로 축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행위가 이루어지는 문화적 세계와의 대립은 기호와 리듬의 공통 개념의 비보편성이 아니라 재현의 특성을 강조한다. 본질의 특성이 아니라.
시적 행위와 번역행위라는 동일한 경험은 리듬이란 전통적인 이분적 교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파롤의 움직임의 배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활동의 총체적 재현의 관점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경험론이 비성찰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즉 몰리에르의 작품 속에 나오는, 무슈 주르뎅의 철학 교수의 확신이 세운 시와 산문의 이분법.
일반 번역이 번역행위와 번역대상물을 기호를 향해 달려가게 하고 듣지도 번역하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져다 놓음으로써, 어떤 이들에게는 추상적인 고찰로 인한 우회로 비춰질 수 있다. 게다가, 일반 번역은 듣지 못하는 것을 번역하지 않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
기호에 따른 번역, 즉 일반 번역은 따라서 <소멸시키는 것effaante>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연속성과 연속성의 의미에 따른 리듬을 소멸시키고, 자신의 소멸을 소멸시킨다. 시적 문제가 소멸시키는 것의 소멸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서구 문화 전체가 기본 텍스트(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성경이나 신약성서 등 번역서를 통해서만 많이 읽힌다는 의미에서)를 번역하는 근거가 되며, 서구 사회는 그리스적이든 성서에서 유래한 것이든 그 기원의 소멸에 근거한다는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러한 성경 텍스트들이 <대법전으로써의 역할을 넘어, 리듬을 위한 기술적 이론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들 성경 텍스트들은 모든 운율법을 무시하므로, 운문과 산문의 구분을 하지 않는 범운율연구에 따라 주도될 뿐 아니라, 성경 인류학에는 시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말하여진 것과 노래된 것 간의 구분만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범운율연구는 단계의 분리악상와 9단계의 결합악상 (구약시편, 욥기와 잠언의 경우 각각 12개와 9개 단계)과 선율(mlodique), 휴지(pausale), 의미(smantique) 등의 세 가지 가치로 구성된다. 성경구절의 유일한 구성요소인 이와 같은 선율은 뒤늦게야 문서로 기록되었으므로, 신학문헌학적으로 거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일부 악센트의 명칭이 필연적으로 문서화된 기록 이전에 존재했을 매우 오래된, 즉 손의 움직임으로 성가대 지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신학사상적 논쟁은 일단락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번역과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간접적으로 리듬의 지위와 리듬과 번역행위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가장 명백하면서도 가장 진부한 따라서 성경의 특성과는 무관한 경우가 그룹 악상accent de groupe의 이동이다. 쉼표를 다른 곳에 찍으면 의미가 바뀐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성경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아마 이사야서 40장 3절의 사막에서 말하는 목소리의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 강한 휴지는 <사막> 다음에서는 통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한 목소리가 소리친다. Une voix crie//사막에서 dans le dsert/아도나이의 문을 여시오. ouvrez le chemin d'Adona///>
정동(情動)을 표현하는데 있어 결합 악센트들은 분리 악센트만큼 중요하다. 이는 시편 22편 2절의 <mon dieu mon dieu>, eli li 구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단 하나의 그룹에서, 두 번째 eli에 강세를 두어 어조를 올림으로서 경계를 표시했으며, 한숨에 읽어 내린다. 의미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정동적 느낌은 더 강하다.
홉킨즈Gerard Manley Hopkins도 '글 속의 말의 기록record of speech in writing'의 한 서한에서 지적했듯이, 리듬을 ‘말의 움직임의 조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의미의 몸짓, 따라서 위치의 리듬연구나 의미론을 전제한다. 의미의 몸짓은 종종 간과되는데, 그것을 번역하지 않으면, 번역은 말을 잃게 된다.
리듬이란, 글 속에 나타난 말의 움직임을 조직하는 것이므로, 강도를 나타내는 악센트의 연속이 아니다(더 이상 아니거나,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것은 연속적인 구성체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모든 통사효과를 포함한다.
그러나 글속에 나타난 말의 움직임을 조직하는데 있어, 연속으로서의 리듬은 휴지의 리듬, 그룹의 리듬, 위치의 리듬, 통사 리듬, 반복의 리듬만은 아니며, 운율의 리듬이기도 하며, 단어들의 의미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낭송의 이야기이다.
이렇듯 번역이론은 리듬에 대한, 즉 연속성의 개념화에 대한 성찰을 전제하는데, 이는 기호와 시, 불연속성과 연속성의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대립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이론의 역할은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실천의 역할은 이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론의 정치와 이론의 시학적, 인류학적 필요성은 병합(annexion)에서 탈자기중심주의(dcentrement)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것이 번역이론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김다은․
추계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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