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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초점/이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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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사이*
이가림|시인
“원시시대, 태고의 문을 열기 시작한 세계에서 인간이 잠으로부터 깨어날 때, 시는 그와 함께 깨어 태어났다. 그를 눈부시게 만들고 도취시키는 수많은 경이적인 것들 앞에서, 그의 최초의 말은 송가(頌歌)일 수밖에 없었다. (……)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내면서, 숨을 쉬듯이 자연스럽게 노래 불렀다.” 빅토르 위고는 <크롬웰> 서문(1827)에서 시의 신화적 기원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마자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마치 숨쉬듯이 노래를 불렀는데, 바로 그 원초적 노래가 시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앙리 브레몽도 「순수시」(1925)라는 글에서 “시인은 여러 음악가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시와 음악, 그것은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와 음악이 원초적인 근원에서 출발하는 장르로서 지극히 긴밀한 관련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듯 시와 노래가 애초부터 하나의 뿌리에서부터 나온 장르라서 그랬는지, 우리 고전문학의 경우, ‘시’(詩)라는 용어 대신에 흔히 ‘시가’(詩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조윤제는 <한국문학사>에서 ‘시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향가․장가(長歌)․경기체가(景幾體歌), 시조를 ‘詩’라 하여야 될 것인가, ‘歌’라 하여야 될 것인가? 옛날에는 이것을 다들 ‘歌’라고 불러 한시와 구별하였다. ‘歌’는 순 우리말로 말하면 ‘노래’인데 사실 우리나라에는 ‘노래’라는 말은 있어도 ‘詩’라는 말이 없었으니, 그것을 한자로 직역하여 적는다면 ‘歌’로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모두 ‘歌’라 불러왔고, 또 그렇게 적어왔으나, 그러나 향가․시조 등은 육자백이․수심가(愁心 歌)․산염불(山念佛)․유산가(遊山歌) 등과는 달라 이것을 ‘歌’라 한다면 그것은 ‘詩’라 하여야 마땅할 것도 같다. 대체로 한국시는 본래 노래하는 데서부터 발달하여 왔다. 장가(長歌)는 물론이고 시조도 그랬고, 어느 의미에 있어 향가, 경기체가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에 대해서 엄격히 말하면 시라고 말하기가 조금 힘든다 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늘에 있어서도 옛날과 같이 ‘歌’라 하여 버리는 것도 조금 안심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시라 할 수도 없고 歌라 할 수도 없어서 두 말을 한데 합해서 ‘시가’(詩歌)라고 하게 된 것이다.”
우리 고전시의 여러 형식이라 할 수 있는 향가․여요(麗謠)․시조․가사(歌辭)․악장(樂章)․잡가(雜歌) 등이 “시라 할 수도 없고 歌라 할 수 도 없는” 두 말을 한데 합친 ‘시가’라 불리는 것은 시와 노래의 발생학적 기원을 절묘하게 잘 나타내는 용어로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시와 노래의 근원적 상관성을 추적하는 학문적 접근에 있지 않다. 노래의 날개 위에 시를 실었을 때, 다시 말해서 시와 노래가 만났을 때, 어떤 새롭고 놀라운 예술적 감동이 산출될 수 있는가, 또는 이 두 장르 사이의 결혼이 조화롭고 성공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앞으로 개발해 나가야 할 방향은 어떤 길이 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짚어보는 게 훨씬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쓰여질 때부터 자수율(字數律)을 비롯하여 리듬, 운 등을 잘 살려 쓴 시는 그 자체로 노랫말로서의 조건을 갖춘 것이므로 작곡하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곡으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쓴 자유로운 구문의 시일지라도, 시 텍스트 내부에 흐르고 있는 내재율(內在律) 또는 호흡율(呼吸律 rythme respiratoire)에 절묘하게 호응하는 노래를 얼마든지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자진 월북한 시인으로 잘못 간주되어 남북 양쪽의 문단사에서 실종되었던 정지용의 경우, 1988년 해금을 계기로 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향수」라는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일반 대중들에게 전파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 전문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로 시작되는 「고향」과는 달리, 「향수」는 노래로 만들기에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시행의 길이도 만만치 않거니와 상당한 수준의 시읽기 능력을 갖춘 독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감각적 이미지 구사를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작곡하기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도 다행히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는 노래로 만들어져 불림으로써, 정지용 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좋은 예로 기억할 만하다.
사실상 노래의 형식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구절이나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절묘한 언어구사의 맛은 시를 애호하는 일정한 독자들에게만 향유되어지는 데 그쳤을 것이다.
이렇듯 시의 음악화가 좋은 시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순기능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다. 예컨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록 리듬의 대중가요로 만들어 노래 부름으로써 3류 유행가사로 전락시킨 경우가 이에 속할 것이다. 「진달래꽃」이 반드시 가곡의 형식에 담겨져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달래꽃」이라는 시의 빛깔과 향기에 딱 어울리는 작곡이 이루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진달래꽃」이라는 ‘시’가 그야말로 ‘노래가사’로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와 아름다움이 더욱 감동적으로 증폭되기는커녕, 오히려 현저하게 축소되었다는 뜻이다.
프랑스 샹송의 경우, 당대 일급 시인들의 시 텍스트를 그대로 노랫말로 사용하여 작곡한 예가 많은데, 대부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른바 ‘문학적 샹송’의 범주에 들어가는 샹송들이 일반 대중들의 호응과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도 노랫말(파롤)로서의 시 텍스트가 불러일으키는 감동적 울림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여행에의 초대」와 「저녁의 하모니」를 비롯해서, 베를렌느의 「가을의 노래」와 「하늘은 지붕 위에」,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등은 샹송이나 가곡으로 만들어짐으로써 많은 독자들이 두고두고 암송하는 시편들이 되었다.
특히 자크 프레베르의 「고엽」이나 「바르바라」 같은 작품은 그 자체로 대중적인 흡인력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시이지만, 샹송으로 만들어져 이브 몽땅에 의해 불려짐으로써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력을 얻게 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느를 이어받는 20세기 최대의 음유시인으로 칭송되는 조르주 브라상스는 그 자신이 지은 시를 직접 작곡하여 노래하는 샹송가수이다. 196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수여하는 시부문 그랑프리까지 수상한 바 있는 그는 “쓰는 것은 나의 행복이고 노래하는 것은 나의 불행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쓰기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프랑스의 유명한 시집 전문 출판사인 세게르스에서 펴낸 「오늘의 세계시인총서」 속에 브라상스의 시집이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그의 시인으로서의 평가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저 유명한 「해변의 묘지」의 시인 폴 발레리와 마찬가지로 지중해 연안의 작은 항구도시 세트에서 태어난 그는 발레리보다 훨씬 친숙한 시인, 샹송가수의 이름으로 프랑스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샹송으로 불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기에, 노랫말로서 잘 어울리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작품을 단순히 샹송용 가사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시는 하나같이 서민 감정을 대변하는 소탈한 민중시인의 빼어난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954년 디스크 대상을 그에게 안겨준 샹송의 시 「무덤 파는 인부」(Le fossoyeur)는 브라상스적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
신이 알겠지만 난 악한 자가 아니며
난 결코 타인의 죽음을 빌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면
난 나의 비탈에서 굶어 죽을 거다
난 가련한 무덤 파는 인부
2.
주검의 등 뒤에서 벌어먹고 살면서
난 회한도 없다고 살아있는 자들은 믿는다
하지만 그건 나를 괴롭힌다
난 마지못해 주검을 매장할 뿐
난 가련한 무덤 파는 인부
3.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중얼거려 봐도 헛일
난 그걸 자연스럽게 볼 수는 없다
아무리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은
죽음을 있는 대로 보아 넘기는 일
난 가련한 무덤 파는 인부
4.
나의 감정의 고삐를 풀어놓을수록
친구들은 날 놀리기만 한다
그들은 말한다 “여보게 어쩌다 자네도
슬픈 표정을 다 짓는군”
난 가련한 무덤 파는 인부
5.
보지도 알지도 못한, 선량한 주검이여 안녕!
어쩌다 땅속에서 신을 보거든
그에게 나의 고통을 말해주구려
마지막 삽질은 괴로웠노라고
난 가련한 무덤 파는 인부
―조르주 브라상스 「무덤 파는 인부」
비참하기 짝이 없는 한 가련한 무덤 파는 인부의 운명을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소연하듯 풀어나가는 브라상스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뜨거운 인간적 연대감정에 젖게 한다. 이러한 시를 ‘노랫말’로 사용해서 샹송으로 작곡하여 노래 불렀을 때,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의 효과, 감동의 진폭이 배가되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시로 쓴 것을 노랫말로 사용하여 곡을 붙임으로써 여느 시인의 작품보다 훨씬 더 애절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예가 있다. 한때 「빨치산의 노래」로 알려지기도 했던 「부용산」이라는 시가 바로 그것이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은 1947년 순천 사범학교에 재직하던 박기동이 시를 짓고, 월북한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인 노래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의 죽음을 애도해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어린 제자의 죽음을 슬퍼해 지은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박기동은 이 시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나는 1947년 무렵에 순천 사범학교에 봉직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집은 벌교에 있었다. 나는 그 때 기차 통근을 하면서 순천에 왔다 갔다 했다. 별교로 출가한 나의 누이동생 영애라는 애가 그 무렵에 폐결핵으로 순천 도립병원에 입원하고 있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별교가 시가이기 때문에 별교의 뒷산인 부용산에다 묻었다. 그 애를 묻고 부용산 오리 길을 비틀거리고 내려오면서 한편의 짤막한 시를 지었다. 그것이 나의 운명과 결부된 ‘부용산’ 이란 시였다.”
―박기동 <부용산>, 삶과 꿈, 2002, p.224
이 시가 쓰여진 배경까지를 알고 「부용산」노래를 들으면 더욱 애절한 감동에 젖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배경을 모른다 해도 애상조의 곡조뿐만 아니라 노랫말, 즉 시 자체가 보여주는 안타깝고 허무한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아련한 비극성에 감동하게 된다.
이렇듯 가사로서의 시, 또는 시로서의 가사가 조화롭게 음악과 만났을 때, 시도 살고 음악도 사는 동반상승의 역동적 승화가 일어나게 된다. 폴 베를렌느가 「시법」(Art poétique)이란 시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음악을!” 택하라고 주장한 것은, 소리의 암시적 환기작용을 통해 절묘한 상징적 효과를 추구하고자 한 그 나름의 독창적 시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가 음악 자체가 될 수도 없고, 또한 음악이 시 자체가 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시가 음악의 모자람을 메워주고 음악이 시의 모자람을 메워주는 상호보완적 상생을 이룰 때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가림
․1943년 만주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빙하기>
․인하대 프랑스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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