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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계간평(소설)/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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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소설>
∙김애란 「침이 고인다」
∙김윤영 「모성의 재발견」
∙김이은 「쇼맨」
∙이기호 「국기게양대 로망스」
1. ‘미적 전복과 삶의 혁신’을 숙고하며
지난 10월 계간 ≪실천문학≫이 주관한 문학 심포지엄은 ‘한국문학과 전복적 상상력’이란 주제를 갖고 최근 젊은 문학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의 마당을 열었다. 발제자와 토론자들 사이에 열띤 대화가 오고갔는데, 그 논의의 핵심은 젊은 문학의 전복적 상상력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 전복적 상상력이 어떠한 미적 갱신의 가능성의 동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시대가 달랐을 뿐이지, 어느 시대이나 새로운 세대들에 의한 미적 전복성은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다. 문제는 그 미적 전복이 동시대의 미적 질서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으며, 그 극복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한 미적 가치로 파악되는가, 하는 문제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논자들마다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었는데, 무엇보다 논쟁적 쟁점은 ‘미적 전복과 삶의 혁신’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현재 우리의 젊은 문학에서 목도되는 것은 이전의 문학 전통으로부터 놓여나 새로운 미적 실험을 보이는 노력은 가열차지만, 미적 쇄신과 아울러 삶의 혁신이란 과제를 방기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미적 전복이 곧 삶의 전복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하지만 미적 전복이 관행화된 삶에 어떤 미적 충격을 줌으로써 그 관행화된 삶 자체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혁신과 무관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나는 김애란, 김윤영, 김이은, 이기호의 소설 들에서 ‘미적 전복과 삶의 혁신’이란 문제를 숙고해본다. 우리 시대의 창작과 비평이 함께 숙고해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 이들 소설을 흥미롭게 읽는다.
2. 이별의 형식과 강요된 삶의 형식을 벗어나기
김애란의 소설은 빨리 읽힌다. 소설의 가독성을 배가시켜 준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그저 가독성만 배가시키며 자투리 시간을 소비시켜 주는 것으로 자족시킨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의 소설은 김애란 세대, 곧 20대 중후반이 현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쓰여지는 것이기에, 그가 현실을 대하는 태도의 진정성이 그의 소설 갈피에 배어 있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문학사상≫, 2006년 11월호)에서 이러한 면을 읽을 수 있다.
「침이 고인다」의 서사 얼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기업형 입시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여성과 그 여성의 후배는 동거를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처지에 있으나, 함께 살며 서로의 삶 속에서 자그마한 위안을 받으며 산다. 그런데 그들의 동거는 한시적이다. 후배는 선배의 삶의 편린들을 닮아가려고 하는데, 선배는 후배의 그러한 모습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선배는 누군가의 삶이 자신의 삶 깊숙이 관여해 들어오는 것 자체를 생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선배는 타자와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는 데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학원의 생활에서도 그렇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의 형식과 내용을 거부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타자의 형식과 내용에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배는 어떠한가. 후배는 선배와 달리 타자와 관계를 맺는 삶을 은연중 원한다. 여기에는 후배의 어린 시절 아픈 상처가 각인돼 있기 때문인데, 어린 시절 그는 도서관으로 데리고 간 어머니로부터 껌 한통을 건네받아 그 껌을 씹으면서 어머니를 기다렸으나, 끝내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그는 도서관에서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도서관의 서고 속에서 어머니를 애타게 찾아보았으나, 서고의 미로 속에서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이후 후배는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데서 엄습해 들어오는 이별의 상처와 그 상처를 견디는 껌의 달콤 쌉싸래한 맛을 생체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입안 가득 침이 고이게 씹는 과정 속에서 달콤 쌉싸래한 맛이었다가 차츰 그 맛이 사라지고 아무런 맛도 남지 않는 껌은 이별을 구체적인 생의 감각으로 강하게 환기시킨다.
「침이 고인다」는 이렇게 서로 다른 관계에 익숙한 두 인물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숱한 관계들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여기서 후배가 선배를 떠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선배가 헤어지기를 원한다는 심리를 간파한 후배는 선배의 집을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선배의 집에서 나갔다. 후배가 없는 빈 곳에 언젠가 그가 남겨준 반쪽짜리 껌의 존재를 선배는 기억한다. 선배는 그 껌을 씹으며, 입안 가득 고이는 침과 함께 감각되는 맛 속에서 다시 홀로 남는다. 어쩌면 선배가 후배를 헤어지게 한 주체가 아니라 후배가 선배로부터 멀어진 주체로서 그 이별의 주체적 위치가 전도된 것일지 모른다. 하여 그들은 또 다시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미어졌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지리한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아가야 할 것이다. 타자들에게 연민을 품고 어떤 느슨한 관계를 맺되, 그 관계는 해체되고, 또 다시 홀로 남는다. 그러다가 느슨한 관계를 맺고, 또 다시 헤어진다. 이렇게 우리들의 ‘지금, 이곳’의 삶의 관계는 작가 김애란에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풀어져 있고, 풀어져 있는 것 같지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삶의 양상이 김윤영의 「모성의 재발견」(≪한국문학≫, 2006년 가을호)에서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하진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신도시 대단지 아파트 속에서 일상으로 치부되는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분야의 온갖 일들 속에서 자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잘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 자체를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이 동네가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어쩌다 하진이 한마디를 하면, 주변사람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하진을 나무라곤 했다.”(82쪽) 아파트 단지에 내면화된 일상에 부정적 태도를 조금이라도 취하는 개별자를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진은 가족을 훌쩍 떠나간다. 아파트 단지와 가족이 자연스레 강요하는 삶의 형식에 길들여진 가족으로부터 그녀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가족-아파트를 떠난 것이다.
그때, 하진은 섬광처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기만과 환상, 신뢰와 배반의 그 끝…….집도 지키고 아이와 내 인생도 다 지키는 삶이란 다른 사람에게 가능해도 자신에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차라리 집과 아이를 내주고 내 인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내가 진짜 미쳐버리기 전에 내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자는 것을…….
하진은 놓았던 가방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화장대로 돌아가 서랍에서 몇 가지를 꺼내 넣고 가방의 지퍼를 완전히 닫은 후 집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92~93쪽)
이렇게 하진은 가족과 아파트의 삶에서 자신을 해방시킨다. 얼핏 보면, 김윤영의 이 소설은 한 중산층 여성의 여성성을 발견하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은 하진이 가출할 당시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종래의 아파트가 아니라 다른 곳, 즉 중산층의 도시적 욕망이 들끓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곳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하진의 욕망과 그 실존적 결단이 다소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진의 선택이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과 맞물리면서 갱신의 삶을 모색하려는 결단에 주목할 때 하진의 여성성은 모성성의 맥락과 함께 고려해야 할 성질의 문제다.
3. 일상의 비루한 사연들에 대한 풍자와 연민
김이은의 「쇼맨」(≪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은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음울한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돈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의 윤리적 부재를 적나라하게 마주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슬픔을 맛본다. 돈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하는, 돈이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부정해도 되는, 돈이 우리 사회의 절대자이며 곧 신이라는 돈의 무소불위의 위력 앞에 인간의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을 마주대한다. P는 강남의 유흥업소에서 이른바 쇼맨으로 불리며 돈을 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통해 P는 어머니에게 통닭집을 채려주고, 형을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보내고, 만성우울증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해주는 등 집안의 생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유흥업소에서 P가 온몸을 내던져, 온갖 수모를 감내하면서 벌어들인 돈의 힘을 빌린 것이다. P에게 돈은 절대적인 것이다. 돈을 위해서는 염치도 부끄러움도 무시한다. P의 이러한 삶은 P의 어머니의 통닭집과 같은 동네에서 미용업을 하고 있는 미용실 사장과 그 직원 앞에서 쇼맨을 보여야 하는 상황에서 가감 없이 보여진다. 미용실 사장에게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머니의 통닭집 위신을 세운 P는, 하필 미용실 사장 앞에서 자신의 온갖 재주를 보여주고 돈을 벌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P는 그 상황을 부정할 수 없다. P는 쇼맨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미용실 사장에게 대했던 그 뻔뻔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쇼맨으로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돈을 지닌 손님에게 최대한 굴종적 태도를 보여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유흥업소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쇼맨으로서의 P의 숙명이다.
어쩌면 우리는 P와 유사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돈으로부터 놓여나길 원하는 삶을 위해 돈을 악착같이 벌어야 하는, 이 아이러니컬한 삶의 형식이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불모성을 이룬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P는 알몸으로 돈이 흩뿌려 있는 테이블 위를 뒹군다. P가 빨리 이 룸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이 마지막 쇼를 무사히 끝내야 한다. 땀투성이인 알몸에 돈을 붙여야 한다. 테이블 위를 뒹굴면서 말이다. 바로 이 장면은 돈을 물신화하는 우리들의 삶을 향한 자기풍자적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P처럼 자본주의를 향해 한바탕 쇼를 벌이는 쇼맨이기 때문이다.
탑에서 무사히 내려가려면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탑에 올라앉은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도시의 꼭대기, 이곳에서 바닥으로 안착할 수 있다. 쇼맨은 입었던 쫄쫄이 옷을 천천히, 다시 벗는다. 바지를 벗고 팬티까지 내린다. 신겨 있던 한쪽 털신도 마저 벗는다. 이제 유리창엔 쇼맨의 알몸이 어릿하게 스며든다. 눈이 침침하고 아프다. 인공 눈물을 넣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간다. 그리고 느린 동작으로 뒹군다. 지폐들은 벗은 알몸에 붙었다, 떨어진다. 다시 붙고, 떨어졌다, 다시 돌고. 천천히 돌고, 뒹굴어 쇼맨은 원장의 눈앞까지 굴러간다. 그리고 몸을 세운다. 굽어 있던 등허리를 세워 원장 앞, 바닥에 발들 딛는다. 우뚝 선다. 축 늘어진 쇼맨의 성기가, 두 개의 만두가 원장의 얼굴을 가린다. 통유리에 쇼맨의 알몸이, 원장의 머리통이 한꺼번에 비친다. 까만 머리통 때문에 가랑이 사이는 시꺼멓게 비어버린 것같이 보인다. 그 사이로 빗줄기가 가늘게 흘러내린다.(236쪽)
김이은의 「쇼맨」이 삶의 신산스러움을 작품의 밑자리에 하면서 후기자본주의의 삶의 형식에 붙들린 자의 자기풍자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 이기호의 「국기게양대 로망스」(≪작가세계≫, 2006년 가을호)에서는 국기게양대와 연루된 사연들에 대한 연민의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기게양대와 사연들이 맺는 관계다. 세 명의 남자들이 등장하며, 각기 자신들이 선호하는 국기게양대가 있다. 시봉은 국기게양대에 걸려 있는 국기를 떼어다 팔 목적으로 국기게양대를 오른다. 시봉에게 국기게양대는 돈을 벌게 해주는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있는데, 그는 시봉보다 국기게양대를 훨씬 잘 오른다. 국기게양대뿐만 아니라 교회의 첨탑, 가로수 등 하늘로 솟아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잘 오른다. 특히 국기게양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른다. 뭐 특별한 이유가 없이 오르는 셈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인 넥타이 사내가 있다. 그는 빚보증을 잘 못하여 가출을 한 아내를 국기게양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이 세 남자는 각기 서로 다른 목적과 사연들로 국기게양대에 올라 있다. 여기서 국기게양대가 표상하고 있는, 한 국가의 정치체(政治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그 어떤 엄숙함은 철저히 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권을 표상하고 국민으로 호명해내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 국기가 펄럭이는 국기게양대의 특권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국기게양대는 이 세 남자의 일상의 사연들 속에 자연스레 배치된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고, 세 남자의 각기 서로 다른 목적과 용도 속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세 남자는 나란히 옆에 있는 세 개의 국기게양대에 올라 있는 상태에서 공통의 행위를 한다. 국기게양대에 온몸을 밀착시킨 채 국기게양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이 행위를 국기게양대에 대한 사랑이라고 간주한다. 말하자면, 이 우스꽝스럽고 천진난만한 행위는 각기 서로 다른 일상의 사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그 사연들에 연루된 타자들과 자신의 삶을 성찰해보는 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넥타이 사내는 원기둥에서 들려오는 어떤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면서,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려왔다. 시봉도 그랬다. 왼편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낮게 들려왔다.
“입을 맞추고 싶으면 맞춰도 되고요, 허리를 움직이고 싶으면, 움직여도 됩니다. 각자 자기만의 사랑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왼편 남자의 지시에 얌전히 따르던 넥타이 사내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저기, 이거 혹시 불법 아닌가요?”
“아이, 아저씨 말하고 눈 뜨면 안 되는데…….”
“아니, 그래도 좀…….”
“무슨 불법이요?”
“저, 그러니까 뭐 국보법 같은 거…….”
“그런 거 생각하면 사랑 못 하십니다.”
“그건 그렇지만…… 전 자꾸 국가와 뭘 하는 거 같아서…….”
“그러니까 눈을 뜨지 마시라는 거예요. 눈 감으면 국가도 싹, 사라진다니깐요,”
“예…….”
“그렇게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천천히, 참을성 갖고.”
이들 세 남자는 이렇게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기호의 소설의 특장(特長)에서 읽을 수 있듯, 「국기게양대 로망스」에서도 국가라는 근대적 엄숙성은 근대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근대의 내부에서 서로 연민을 갖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조롱되고 있으며, 심지어 내파(內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기호의 소설을 관심 깊게 읽어보아야 할 이유다.
4. 젊은 문학, 그 산문정신의 치열성을 기대하며
젊은 문학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미적 지평을 갱신하려는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고무되어야 할 것이며,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비평은 이럴 때일수록 예각적 성찰의 태도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혹시, 젊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서사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주류 매체의 비평적 애정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적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냉철한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가능성이 있는 젊은 작가들의 미학을 터무니없는 비평의 언어로 과포장하거나, 정작 그 가능성이 농후한 젊은 작가들인데도 그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비평의 거만함과 태만함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김애란, 김윤영, 김이은, 이기호 등은 우리 시대의 비평이 냉철한 비평정신으로써 만나야 할 귀중한 작가들이다. 나는 그들 나름대로 지닌 산문정신의 치열성이 더욱 갈고 다듬어질 것을 믿는다. 그들은 현실의 지평에서 민첩성을 띤 발걸음으로 그들의 시각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삶의 진실을 탐구할 것이다.
고명철․1970년 제주출생
․저서 <'쓰다'의 정치학> 등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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