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4호 계간평(시)/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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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황학주 「젓가락, 내 마음은」
∙이문재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김정환 「傍點-사랑노래․10」
∙홍성식 「자본주의」
∙진은영 「거기,」
∙허수경 「과거의 사람」
∙이태선 「古鏡」
∙이순현 「형은 스스로 집행한다-횔덜린의 집」
∙전기철 「낡은 지구본」
∙채 은 「엘레지」
1.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고요하다. 그리고 간절하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 어두운 부엌으로 간다. 물을 마신 후 바라본 창밖의 어둠. 빛을 빨아먹고 부풀어 오르는 큰 어둠 속에서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말라 있었다.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마른 것에 가 있었다
고아원이 밤의 굴뚝을 울려대는
새 울음소리 뒤로 옮겨가고 없는 밤에
나는 시름해진 꿈들을
곧잘 눈에 잘 띄는 선반에 올려놓곤 하던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이런 날 내 마음은
물배급차를 끌고 다닌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던 아이의
희미한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면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그 길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
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
고맙다고 하던 아이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처럼 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평선에 해 빠질 동안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른 발들이 병실을 옮기는 긴 허방 붉디붉어도
우리는 무비나 에이즈,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옮겨 심은 나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
―황학주 「젓가락, 내 마음은」(≪문예중앙≫ 2006, 가을) 전문
밤의 고아원으로 간다. 새가 운다. 새 울음소리를 듣다가 고아원을 떠올린다. ‘나’는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잃어버린 것, 사라진 것,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갈증이 난다. 시인은 고아원과 물배급차를 시에 불러들인다. 타들어가는 가뭄, 젓가락처럼 마른 원장을 목마름이 매개한다. 아프리카의 죽어가는 아이들은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으며 생명을 보전한다. 시인은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던 날을, 떨어진 별을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옛날을 기억한다. 그날 밤에도, 오늘밤에도 말라붙은 아이들이 죽어간다. 갈라 터진 논바닥에 이는 먼지처럼 과거는 괴멸된다. 피할 수 없는 가뭄이 시작되었다. 시인의 과거와 아프리카의 현재가 고아원에서 만난다. 아프리카의 고아원에서 시인은 죽어가는 아이들을 본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고맙다고 하던 아이”의 다리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 같다. 가뭄에 말라죽은 고사목과 죽어 가는 아이가 병치된다. 잎을 떨군 나무와 뼈만 남은 아이들. 식물이 된 아이들. 시인은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지평선 너머로 훨훨 날아가는 새, 힘차게 뛰어가는 영양. 마른 젓가락 같은 아이들은 에이즈 환자이다. 가난에서, 굶주림에서, 천형 같은 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들. 죽음을 앞둔 아이들. 시인은 그 ‘나무-아이들’을 옮겨 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옮겨 심은 아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고 예견한다.
내가 본 것은 죽음이다. 우리가 식탁에 올려놓은 젓가락은 그 아이들의 뼈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시인의 과거도, 아프리카의 현재도 빠르게 잊혀질 것 같다. 어느 귀신이 지금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을까. 어느 귀신이 과거를 움켜쥐고 우리를 소멸로 내몰까. 이 갈증을 씻을 수 있을까.
투르니에는 <짧은 글, 긴 침묵>에서 인도에서 “가장 아름답고 열광적이고 눈물나도록 감동적이며 고함치고 싶도록 가슴을 뜨겁게 하는” 광경을 본다. 그는 “낡은 액체 운반용 탱크트럭”을 주시한다. 차가 빈민가에서 멈추자 “누더기 옷을 입은 일단의 어린아이들이 탱크트럭 뒤로 얌전하게 모여들었다. 운전사가 차에서 내려 커다란 수도꼭지를 틀면 한 아이가 내미는 작은 주발에 쌀죽이 쏟아져 담겼고 그걸 받은 아이는 발꿈치를 모두어 깔고 앉아서 갈색의 코를 그 속으로 처박는”다. 그는 트럭운전사를 부러워하면서 열광적인 변신을 꿈꾼다. “즉 나는 탱크트럭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 개가 넘는 인심 좋은 젖꼭지를 가진 엄청나게 큰 암퇘지처럼 굶주린 인도 어린이들에게 실컷 빨아먹도록 배를 맡겨놓고 싶은 것이었다.” ‘양성전위’를 통해서 “그 아이들에게 먹힐 수 있게 되”기를 시인과 나는 소망한다. 내가 어둠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결핍과 먹힘과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이 시는 열어놓는다.
2. 돈을 받지 않는 어린 창녀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황학주의 아프리카를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했던 ‘현실’은 어떻게 사라졌는가. 과연 사라지기는 했는가. 있는데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없는데도 있다고 우기는 망상 아닌가.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이산가족 찾기와 연결되면서 이문재의 시는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낡은 명사를 던져놓는다. 전쟁이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온 나라가 대대적으로 함께 찾았고, 울고불고, 소모되었다. 이 시의 이산가족은 만나지 못한다. “아빠랑 싸우고 싶은데 아빠를 만날 수가 없다./엄마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데 엄마와 마주칠 시간이 없다.” 나는 가출한 여학생,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집 밖이었다.”
아빠는 고시원에 계시고
엄마는 아마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찬찬찬,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컵라면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텔레비전이었고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방과 후 학원이었다.
그렇다고 이 할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아빠는 몇 년째 고시원에 계시고
엄마는 몇 년째 노래방에서 울고 싶어라, 탬버린
아빠 같은 아저씨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불편해지지 않았다.
돈을 받지 않는 어린 창녀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엄마 같은 아줌마 핸드백을 뒤지고 나서도
나는 꿈 없는 깊은 잠을 잤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훔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하지 않는 것이다.
컵라면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요리하는 것이다.
이틀 동안 굶는 것이다.
이다음에 커서, 테러리스트가 되어
비행기를 납치하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다음에 커서, 그때까지 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인도를 하나 사서 작은 나라를 만드는
꿈을 꿀 때 나는 힘이 생긴다.
아빠랑 싸우고 싶은데 아빠를 만날 수가 없다.
엄마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데 엄마와 마주칠 시간이 없다.
또 늦었다.
얼른 학교에 가야 한다. 가서 눈 좀 붙여야 한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집 밖이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이 할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이문재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작가세계≫ 2006, 가을) 전문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돈이 없어서 가족이 해체되었을 수도 있다. “아빠는 고시원에 계시고/엄마는 아마 노래방에서 탬버림을 찬찬찬” 흔들며 돈을 벌기 위해 애쓴다. 화자 ‘나’는 가출 소녀이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컵라면, 텔레비전, 방과 후 학원이었다. “그렇다고 이 할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아빠 같은 아저씨”와 원조교제를 한다. 죄책감은 없다. “나는 불편해하지 않”는다. ‘나’는 돈을 받지 않는 어린 창녀이다. 그렇다고 아빠 같은 아저씨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김기덕의 영화 <사마리아>를 떠올린다. 그건 어쩌면 그 아저씨를 구원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돈이 없을 때면 아저씨와 섹스를 하기도 하고, “엄마 같은 아줌마 핸드백을 뒤지”기도 한다. 그때에도 아무런 감정 없이 “나는 꿈 없는 깊은 잠을 잤다.” 절도도 원조교제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서 힘을 얻는”데, 그 대상은 이렇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워하지 않기, 컵라면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요리하기, 이틀 동안 굶기, 커서 테러리스트가 되어 비행기 납치하는 상상하기, 커서 무인도를 사고 거기다 작은 나라를 만드는 꿈꾸기. 이다음에 커서 할 일들을 ‘꿈꾸면’ ‘나’는 힘이 생긴다. 이것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때까지 클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 죽든 죽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또 늦었다./얼른 학교에 가야 한다. 가서 눈 좀 붙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각하지 않고 등교하는 것. 왜냐구, 학교에 가서 자야 하니깐.
불량소녀가 된 시인의 냉랭한 목소리. 이것은 현실이고, 이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현재의 현실을 읽으면서 두려워진다.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달라질 것이 없다는 시인의 비정한 선언. 이것은 분노에 찬 고발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소녀의 팔 할과 우리에게 남겨진 이 할에는 미래가 없다. ‘나’에게는 아직 미래를 꿈꾸는 기쁨과 힘이 있지만, 그것이 실현될 리는 만무하다. 세상을 향해 테러하고 싶어 하는 ‘나’를, 섹스 후에도 기꺼이 돈을 받지 않는 어린 창녀인 ‘나’를 당신들은 어떻게 부를 것이냐고 묻는 시인은 흥분하지 않는다. 미래와 희망을, 전망과 사랑을, 현실과 서정시를 말하기가 두렵다.
3. 도시 풍경은 하나같이 간절하더군
시인은 거인이다. 도시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위에서 시인은 ‘사랑노래’를 부른다.
해가 뜨는 고층건물들이 흡사
거인신화로 물드는 동쪽에서
노을 지는 강변 동네 바다 속 붉은
서쪽까지 위에서 보면
도시 풍경은 하나같이 간절하더군
엉금엉금 기는 성냥갑만 한
자동차 안에 앉은 키 얌전한
개비 개비들 그 밖에 땅에 가깝게
허리 부서진 연탄재들
정지한 시간의 잔해들 간절하더군
가로등 켜지는 밤으로 이어지는
행렬 그래서 더욱 간절하더군
눈 쌓이면 자진해서 더 풍요로워지고
비 오면 어쩔 수 없이
자진해서 헐벗는 광경이 간절하더군
해가 뜨는 동쪽에서 세상을
씻어내는 한 명의 청소부와
해가 지면 서쪽 고층건물이 토해내는
수만 명 월급쟁이들이
간절한 문장을 만들고 방점도 찍더군
―김정환 「傍點-사랑노래․10」(≪시작≫ 2006, 가을) 전문
일출이다. 동쪽의 해가 도시에 햇빛을 쏟아붓는다. 건물 뒤에서 해가 떠오른다. 고층건물들이 거인 같다. 시인은 하늘에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해의 위치에서 본 발밑의 서울. 일몰이다. “노을 지는 강변 동네”에서 서쪽 바다로 돌아가는 해를 쳐다본다. 도시의 거주민들. 교통 체증에 갇힌 자동차 안의 그들을 시인은 “개비 개비들”로 표현한다. 토막들에 불과하다. “허리 부서진 연탄재들”처럼 그들은 소비되고 폐기된다. “정지한 시간의 잔해들”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밤이 이어진다. “가로등 켜지는 밤으로 이어지는/행렬”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시인은 하늘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간절하게’ 서울을 바라본다. 계절이 바뀌어도 우리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 변할 수 없다. “눈 쌓이면 자진해서 더 풍요로워지고/비 오면 어쩔 수 없이/자진해서 헐벗는 광경이 간절하”다. 계절은 변화하지만 변하지 않는 일상을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는 ‘자진해서’ 계절의 변화를 축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도시 너머의 농촌으로, 산 속의 절로, 뭉뚱그려져 추상이 된 사람 없는 풍경 속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시인은 떠나지 않는다. 도시를 내려다보며, 도시 너머의 허공으로 휘발되지 않으려 안간힘쓴다. 간절한 소망으로 굽어 살핀다. “해가 뜨는 동쪽에서 세상을/씻어내는 한 명의 청소부”는 시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시인이라면, 시인은 그의 언어로 간절한 우리들의 삶을 치유해줄 아름다운 사랑노래를 부르는 자일까. 아니라면, 그는 묵묵히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일까. 누구일까. 시인은 시선을 집중시킨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간절하게 생을 살아가는 “수만 명 월급쟁이”들을 지켜본다. “간절한 문장을 만들고” 있는 우리들에게서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우리들이 그려내는, 우리의 생이 기술하는 “간절한 문장”을 읽으며, 그것에 방점을 찍는 시인의 큰 눈에 새겨진 글자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세계를 기록하는 우리들 각각의 문자들이 이루는 텍스트는 과연 무엇일까. 사라진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다시 우뚝 솟아나는 이데올로기, 사랑. 그리고 사랑의 터전 자본주의 대도시.
4. 여전히
아직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자본주의, 미제국주의, 분단…… 무엇이 우리를 규정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알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당신은 아는가. 답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해방시킬 것인지를 나는 물어보고 싶다. 답은 ‘여전히’ 알기 어렵다. 아니 답은 알지만 그 답을 실행시킬 장치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더욱 큰 문제는 그 답을 시가 어떻게 실행시키느냐에 있다. 자본주의의 시인 여러분 각성합시다, 그리고 고발합니다, “생은 이미 결정돼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행복하다”고 믿는 것은 죄악입니다. 이것이 현실인가.
생은 이미 결정돼 있다
세상은 여전히 행복하다
인형처럼 차려입은 저 남매
아버지 벤츠 타고
깔깔거리며 할아버지 저택에 간다
저 오빠 자라서
가난뱅이 호령하는 검사가 되고
저 누이 크면
고고한 학식 교수가 되겠지
지저분한 입성의 저 남매
취한 아버지에게 매 맞고
집 나간 엄마 그리워 운다
저 오라비 자라면
패악질하는 깡패가 되고
저 여동생 소녀가 되면
역전의 싸구려 창녀 되겠지.
―홍성식 「자본주의」(≪시와사람≫ 2006, 가을) 전문
어렵지 않은 이 시는 문학적인 장치의 효용을 거부한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에 불과할 뿐이다. 당위는 시의 외부에서 시의 내부를 규정한다. 그것은 현실이고, 현실은 시 이전의 어떤 절박함을 호소하고, 독자는 시인의 언술을 읽고 깨우치고 분격하면 된다. 최소한의 소통 장치를 통해서 우리는 없는 듯 보이나 너무나도 분명한 계급의 세습을 배운다. 이것은 일종의 지식이다. 지식을 계몽하고 호소하는 목적은 문학적 장치들을 물 위의 기름방울처럼 배척한다. 이러한 양상은 멀리 계몽기의 애국 가사에서, 가까이는 80년대의 민중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학과 사회, 문학과 역사, 문학과 현실은 ‘여전히’ 이념적 성향에 의해 아주 상이한 관계 양상을 펼쳐 보인다.
부잣집 남매들은 “인형처럼 차려입”고 “벤츠 타고/깔깔거리며 할아버지 저택에 간다.” 자라서 가난한 자들 위에 군림하는 검사와 고고한 학식 교수가 될 부자 남매. “지저분한 입성”의 남매는 때리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가출한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다가 울다가 커서는 폭력 조직의 똘마니가 되거나 집창촌의 싸구려 창녀가 될 것이다. 변화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이들의 생은 “이미 결정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를 읽는 나는? 시를 쓰는 당신은?
두려운 것은 예정된 자본주의의 미래가 아니다. 결정되어 있는 시이다. 1910년대의 계몽 가사와 1980년대의 민중시․노동시의 비등하는 수사는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식을 재생산한다. 자본주의가 계급의 분단을 공고히 유지시킨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시인의 인식과 시의 형식을 규정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언어는 실재인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거기에 ‘여전히’ 있는가.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실재는 추상화되고, 지시하는 언어와 지시된 대상은 미끄러져 다만 재현될 수 있을 뿐인가. 이 시에 사용된 비유 ‘인형처럼’과 수식어 ‘고고한’, ‘지저분한’, ‘싸구려’ 등은 실재인가, 시인이 관습에 기대 사용하는 주관의 언어인가. 정해진, 주어진, 결정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시는 전형에 호소한다.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단성적 세계를 읽었다.
5. 어느 몸에 대한 상념
이제 이런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현실인가?
자꾸 밀어내도 빠르게 들어온다
회전문, 자의식, 컴컴한 창문 여러 개 달린
너의 셋집에서 날아오는 냄새
비가 잿빛 가지 사이에
투명한 낚싯바늘을 드리운다
나의 고무장화가 거꾸로 매달린다
거기, 뒤집힌 조끼 주머니 속에서 쏟아지는
먼지로 뒤엉킨 토막 난 털실, 노란 종이뭉치들
거기, 구겨진 여백 위로 얼룩을 만들며
검은 빗물이 번진다
거기, 슬픔에 대한 오랜 환대
거기, 낡은 악의에 대한 새하얗게 빳빳한 환멸
어 거기, 만지면
젖은 별과 썩어가는 멜론 냄새가 뒤섞이는
어두운 탑의 꼭대기로 나를 천천히 오르게 했던
어느 몸에 대한 상념
마르고 텅 빈 바닥에 닿으려고 펼친 팔 아래
창백한 손가락이 흔들린다 거기,
거기에
―진은영 「거기,」(≪문학과사회≫ 2006, 가을) 전문
‘나’를 지나간 한 육체를 시인은 생각한다. 밀어내려 해도 “빠르게 들어”오는 추억에 자의식과 회전문이 따라붙는다. 과거에 ‘너’를 사랑했다. 과거의 “너의 셋집에서 날아오는 냄새”를 킁킁 맡으며 시인은 불안에 빠진다. 과거에 포박당한 모두가 그러하듯이 시인은 곤두서 괴로워한다. 비가 내린다. “잿빛 가지 사이에/투명한 낚싯바늘을 드리”운 비에 시인은 걸려들었다. 낚아 채여 과거로 빨려든다. 물면 낚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거라는 미끼를, 피할 수 없는 그것을 덥석 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간다. “나의 고무장화가 거꾸로 매달린다.” 거기, 과거의 그날 그곳에서 ‘나’의 조끼 주머니는 뒤집혀 노란 종이뭉치들과 “먼지로 뒤엉킨 토막 난 털실”을 쏟아낸다. 구겨진 종이의 “여백 위로 얼룩을 만들며/검은 빗물이 번”지는 곳은 거기. 그곳에서 시인은 “슬픔에 대한 오랜 환대”와 “낡은 악의에 대한 새하얗게 빳빳한 환멸”에 젖는다. 결국 시인이 찾아낸 것은 사랑했던 어느 몸이다. 사랑했던 그 몸에 대한 상념에 젖는 자기 자신이다. 현재의 시인이다. 과거에 붙들려서 “젖은 별과 썩어가는 멜론 냄새가 뒤섞이는/어두운 탑의 꼭대기로 나를 천천히 오르게 했던” 그날의 그 몸을 만지기 위해 시인은 “마르고 텅 빈 바닥”으로 팔을 펼친다. ‘나’의 창백한 손가락이 오늘 흔들린다, ‘거기, 거기에’ 시인이 있다.
과거로 돌아가는 일, 과거를 기술하는 일은 언어에 의해 표상되는 이상한 폐허의 발굴이다. 모든 적의의 근원을 살펴봐야 한다. 그곳에 당신이 있다. 어떤 일은, 어떤 과거는 지우고 싶어진다. 어떤 사람은, 어떤 치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의 시작 지점에 ‘나’가 있다.
나는 마음의 회전문을 닫아건다. 내가 버린 사람, 나를 버린 사람들을 떠올린다. 영원한 사랑의 유효성과 시효를 생각한다. 아무것도 믿지 않기로 한다. 단절된 과거를, 과거의 사람들을 천천히, 오랫동안, 깊게 지운다. 퇴근길의 버스 정류장으로 총총 걸어가면서 나는 데쟈뷔를 떠올린다. 분노와 증오와 집착을 곱씹는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저무는 해와 밀도 옅은 저녁의 어둠 속에서 흩어지는 과거를 바라본다. 사라졌다. 편하다. 더 이상 내게는 남은 것이 없다. 너무 편하다. 바이바이 인사도 필요없다.
과거도, 현재도 섬망이다. ‘나’라는 사물이, ‘나’라는 덩어리가, ‘나’라는 명사가 섬망의 결과물이다. 나는 곧 찢어질 것이다. 후르륵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 불꽃이다. 나로부터 시작된 이 현실을 그대는 빨아들여라. 나를 가져라. 피는 부족하지 않다. 나는 잘 반죽된 콜타르에 불과하다. 마음껏 유린해도 좋다. 당신과 나는 있었는가? “거기, 거기에”.
6. 불안한 사랑의 안경을 쓴 나날이여 안녕
세월아 네월아 시정의 아픈 사내가 시정의 아픈 여자를 데리고 여자는 아가를 누런 아가를 데리고 하염없이 염없이 고구마를 튀겨 파는데//섬섬 바리시고네여 도 닦듯 하염없이 튀김 기름 꿇는 열반 속에 환한 수련 열듯 고구마는 솟아오르고/누런 아가는 양털 보풀이는 싸묵눈길을 간다네 마징가나 은하철도 기름 열반 속 고구마 꽃잎에 뚝뚝 떨어지는 기름처럼 눈발은 잠 속을 녹아//세월아 네월아 하염없이 염없이 네 가면 병 낫더냐 나을 병 없이도 아픈 시정들이/꺼먹꺼먹 튀겨내는 세월 네월아/아마 너라고 기름 열반을 바랐겠냐마는……
―「세월아 네월아」(<혼자가는 먼 집>) 전문
물큰한 눈물이 묻어날 것 같은 허수경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과거의 어느 날이었다. 비애로 가득 찬 시 때문에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거리를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떠도는 인생의 슬픔과 아픔과 상실과 상처를 따스하게 덮어주었던 시인의 시를 다시 읽고 싶다. 도시를 떠돌고 있는 시인에게 몸은 아픔과 정처 없음과 상처를 감내 못하는 마음이 들어가 쉴 집이 아니었다. 가난한 젋은 부부가 아기를 데리고 고구마튀김을 팔고 있는 광경을 시인은 봤다. 시인은 “튀김 기름 끓는 열반 속에 환한 수련 열듯” 떠오르는 고구마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미화시키지 않았다. 가난과 더 나아질 가망이 없다는 절망을, 시인은 비관적으로 인식했지만, 만연된 절망을 따뜻하게 바라보려고 했다. 불치병처럼 시인은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습관이자 본능이었다. 그 따뜻함으로 고통과 절망을 감싸안으며 시인은 고구마를 튀겨내는 젊은 부부에게서 열반의 표정을 포착했다. “기름 열반”으로 나를 인도했던 예전의 시와 오늘 내가 읽은 시의 차이를 나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있지만 찾을 수 없고, 없지만 분명한 차이 앞에서 나는 “미래를 들여다보면 죽음이 있었고/과거를 돌이켜보면 탄생이 있었다”고 하는 시인의 절망 아닌 절망을, 경쾌한 절망을 공유한다.
다 익은 과일을 들고 다 익었는데도
또 익고 있는 과일을 들고 잠에 빠진 사람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과거의 사람인 듯
현재를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는 사람인 듯
다 익은 과일 그런데 또 익어가는 과일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저렇게 육즙을 녹이고 그러다 아주 다 녹은 육즙의 시간이 지나면
씨앗만 남을까
미래를 들여다보면 죽음이 있었고
과거를 돌이켜보면 탄생이 있었다
현재는 빛의 24시간 희고도 검은 사각의 방이 되어
자동차를 달리게 한다
붕붕거리며 자동차가 달릴 때
익어가는 과일을 들고 과거의 사람은
또 익어가는 불멸을 잠으로 살고 있다
그대여 안녕, 불안한 사랑의 안경을 쓴 나날이여 안녕
―허수경 「과거의 사람」(≪문학과사회≫ 2006, 가을) 전문
과거의 그 사람을 ‘나’는 사랑했다. 다 익었는데도 다시 익어 썩어갈 과일을 들고 ‘나’는 꿈을 꾼다. 꿈속의 그 사람은 “과거의 사람인 듯”하다. 그는 “현재를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는”다. 사랑했던 그 사람은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시인은 묻는다. 다 익었으나 다시 익어가는 과일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썩어 문드러질 것임을 시인은 재차 확인한다. ‘나’의 사랑 역시 “저렇게 육즙을 녹이고 그러다 아주 다 녹은 육즙의 시간이 지나면/씨앗만 남을까”라고 묻는 시인에게 우리는 자명한 답을 들려줄 수 있다. 그 사람을 사랑하던 ‘나’의 육체와 사랑했던 그 사람의 육체가 썩어 문드러진다 해도 그 사랑의 씨앗은 남을 것이라고 희망하고, 이미 남겨졌다고 확인하려 하는 것일까.
현재는 빛으로 가득 차 있고, ‘나’는 자동차를 운전하며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희고도 검은 사각의 방”에 갇혀 시인은 갈 바를 모르고 헤맨다. 현재의 ‘나’가 현실을 살아갈 때, 과거의 사람은 익어가는 과일을 들고 천천히 썩어갈 것인데, 시인은 그 사람을 생각하다가 그 사람이 ‘나’와는 다르게 “익어가는 불멸을 잠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했던 그 사람을 생각하는 ‘나’에게 과거의 사람과 과거의 사랑은 불멸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다시 한 번 각인된다. 그것을 인정한 후에야 시인은 가볍게 “그대여 안녕”이라고 작별한다. 과거와 결별하고 시인은 ‘현재의 빛’으로 스며든다. 사랑은 갔지만 아직 사랑을 끝내지 못한 시인이 차창 밖에서 멀어지는 과거를 향해 살풋 웃으며 “안녕” 한다. “불안한 사랑의 안경”을 시인은 끝내 벗지 않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벗어 던지고 진정으로 멋지게 과거를 폐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시인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시인은 죽음의 미래와 탄생하는 과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7. 눈 속의 입 입 속의 눈
이미지는 현실인가.
계속 밤이 온다
묵은 땔감 속 쥐들 이빨 뾰족하다
귀신들 시끄럽게 살찌는 소리
칼과 낫, 길 끝 선반에 걸려 늙는 소리
방문 닫힌 집 흰 꽃 집집이 지고
어미 소가 무덤을 차며 운다
눈 속의 입 입 속의 눈
혼백 우는 소리 길들 잠잠하다
허공에 목 매달린 고목 한 그루
기둥의 온도계 온도가 얼어 있다
―이태선 「古鏡」(시집 <눈사람이 눈사람이 되는 동안>) 전문
이태선의 시는 건조하다. 짧은 이 시에서 시인은 찾아볼 수 없다. 일곱 장면으로 구성된 시에서 시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은 7행뿐이다. 낮이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시인의 눈은 예리하다. 이미지의 절편(切片)들로 시가 이루어진다. 묵은 땔감 속에 숨어 사는 쥐들의 뾰족한 이빨. 귀신들만 살찔 것 같은 고요. 칼과 낫이 선반에서 늙어가는 소리, 녹스는 소리, 어둠과 습기가 금속을 부식시키는 소리, 가득하다. 집들의 방문은 닫혔고, 마당마다 흰꽃 분분히 흩날린다. 무덤 곁에서 주인 잃은 소가 운다. 죽어 떠나지 못하는 자들의 우는 소리 가득한 길. 고요와 통곡을 흡수하는 어둠에 밑동을 베어 먹힌 고목 한 그루. 죽음이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을 비추는 오래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
시인은 이미지로 말한다. 의미와 현실은 시의 재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이미지만으로도 의미는 구축된다. 이미지는 의미를 배척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재현해내는 과거를 나는 소름끼치는 사실로 인지한다.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인의 눈이 말을 한다. 과거를 말하려는 시인의 입은 눈이다. 오래된 거울 속의 과거를 바라보는 시인이 이미지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킨다. 거울 속의 이미지들은 그려진 영상이 아니다. 그것은 미만(彌滿)한 오늘의 죽음을 우리에게 인지시키는 사실이다.
8. 밀실로 올라가며 사다리를 삭제해버린
여기 스스로를 처벌하는 시인이 있다. 그는 “뾰족지붕 아래 밀실”에 유폐되었다. 횔덜린이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밖을 내다본다. 이순현은 횔덜린의 방으로 다가간다.
유폐되어 있다 그는
뾰족지붕 아래 밀실
물샐 틈 없는 생각들이 방수처리해둔
A의 꼭대기
가운데를 받치고 있는 ―는
형을 집행하듯
결정적인 순간에 밑이 빠진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를 받치고 있던
A의 가로받침대
푹, 꺼진다
까마득한 아래가 나를 물고 늘어진다
끝없이 추락하는 발버둥의 끝에서
별똥별처럼 스스로 점화된다
점점 과열되는
필라멘트
끊어진다
바닥이 난폭하게 받쳐준다
다 식어버린 똥오줌들
생의 폭죽으로 폭발한다
A의 급경사면으로 모래 달빛이 흘러내린다
밀실로 올라가며 사다리를 삭제해버린
그는 달빛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어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늙은 목수는 지붕을 뜯어 고치느라
종일 뚝딱뚝딱 망치질을 한다
망치소리는 허공의 보이지 않는 벽을 들이받고
피멍든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바깥을 겹겹이 동여매고 있는 담쟁이들이
A를 견인해간다
결정적인 순간이 잠복하고 있는 곳을 찾아
―이순현 「형은 스스로 집행한다-횔덜린의 집」(≪현대시학≫ 2006, 9) 전문
지붕을 영어 대문자 ‘A’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지붕의 가운데를 받치고 있는 대들보가 보인다. ‘A’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가 지붕의 대들보가 된다. ‘―’가 “형을 집행하듯/결정적인 순간에 밑이 빠진다.” 시인은 대들보를 빼내어 지붕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형의 집행이라고 여긴다. 횔덜린이 자신을 처형한다.
들여 쓴 2연의 주체는 이순현이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시인을 “받치고 있던/A의 가로받침대”가 “푹, 꺼진다.” ‘나’는 지금 추락한다. “까마득한 아래가 나를 물고 늘어진다.” 끝없이 추락하면서 ‘나’는 ‘별똥별처럼’ 스스로를 점화시킨다. 빛이 퍼진다. ‘나’는 ‘필라멘트처럼’ 점점 뜨거워진다. 툭 끊어지는 순간 “바닥이 난폭하게 받쳐준다.” ‘나’는 추락했다. 나는 죽어 간다.
3연에서 시인은 다시 횔덜린의 집으로 옮겨 간다. “A의 급경사면” 즉, 지붕에 달빛이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시인은 “밀실로 올라가며 사다리를 삭제해버린” 횔덜린을 상상한다. 서른 이후에 정신을 놓고 여생을 미치광이로 살았던 횔덜린, 스스로를 광기에 가두어 처형해버린 횔덜린은 “달빛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어”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무너진 지붕을 수리하는 늙은 목수가 “종일 뚝딱뚝딱 망치질을 한다.” 망치소리가 허공에 부딪친다. 메아리가 돌아온다. 허공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듯하다. 무너지는 집과 수리되는 집이 있다. 시인은 자신을 무너뜨린다. 무너진 ‘나’를 수리하지 않는다. 오래된 집 외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들이 “A를 견인해간다.” 사라진 시인의 집, 죽은 횔덜린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기 위해 ‘잠복’한 상태이다. 그러니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처형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 이순현은 횔덜린에 자신을 의탁한다. 무너지는 ‘A'를 본다. 천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지붕 아래 밀실로 올라가며 사다리를 삭제해버린 시인. 스스로를 처형하는 시인. 다시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기 위해 ‘나’를 유폐시키는 시인. 실재로 치환되는 기호들의 세계가 아름답고 신비하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인다. 횔덜린이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밖을 내다본다.
9. 바늘 꽂을 곳조차 없는
왜 그렇게 결근이 잦느냐고 나무라는 사장에게 항변한다. 나는 매일 출근하여 착실하게 손도장을 찍고 있습니다. 내 부러진 손톱자국이 칸칸에 박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셨나요. 지구본에 적힌 사무실에 컥컥거리는 내 흔적들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당신의 지구본은 낡았다. 날마다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고 전쟁으로 없어지기도 하는 것을 모르는가. 어느 정치가가 아직도 전쟁을 일으키고 있어 사무실이 섬처럼 떠다니나요. 전쟁으로 바늘 꽂을 곳조차 없는 대륙에서 사무실이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은가. 당신의 지구본은 20세기의 유물이다. 사무실은 한없이 움직이는데 당신은 어디로 출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전기철 「낡은 지구본」(≪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 9~10) 전문
나는 ‘20세기’에 붙들렸다.
이 시의 화자인 사무원은 자주 결근한다. 사장이 나무란다. ‘나’는 항변한다. “나는 매일 출근하여 착실하게 손도장을 찍고 있습니다.” 적반하장이다. “내 부러진 손톱자국이 칸칸에 박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셨나요.” 화자는 무엇 때문에 결근하고, 사장은 무슨 이유로 화자의 항변을 듣기만 하는가. 알 수가 없다. ‘나’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놓는다. “사무실에 컥컥거리는 내 흔적들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결근하는 화자와 나무라는 사장의 관계가 설정되었지만, 이 시에는 사장의 말이 없다. 기업을 소유한 사장은 사라지고, 고용된 사람의 목소리만 가득하다. 일방적인 화자의 무례할 정도의 단언으로 채워져 있다. 오늘의 정국을 풍자하는 듯한 고압적 발화가 그렇다고 폭력적이지는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장은 아직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사장은 무엇인가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2인칭 ‘당신’을 사용한다. 성인 남자들 사이에서 ‘당신’은 시비를 걸 때, 잘잘못을 따질 때, 싸우면서 상대방을 낮춰 부를 때 사용된다. 이제 화자 ‘나’는 사장 ‘당신’에게 따져 묻는다. “당신의 지구본은 낡았다. 날마다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고 전쟁으로 없어지기도 하는 것을 모르는가.” 사장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나’는 다시 묻는다. “어느 정치가가 아직도 전쟁을 일으키고 있어 사무실이 섬처럼 떠다니나요.” 여기서 미국과 한국이 전쟁과 사무실로 대치된다. 한국의 권력자와 나날의 직장으로 다시 전환된다. 전쟁 때문에 삶은 “바늘 꽂을 곳조차 없는 대륙” 같다. 사무실은 요동한다. 화자는 단언한다. ‘당신은 낡았다.’ ‘우리’의 삶은 “한없이 움직이는데 당신은 어디로 출근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며 묻는, 따지는, 경고하는 화자의 강경한 어조를 힘주어 읽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20세기와 21세기를, 현실의 정치와 건강한 민주주의를, 오지 않을 미래와 복사되는 과거를 분별할 수가 없다. 여전히 20세기의 정신이 21세기의 몸과 더불어 산다. 시인이 우리에게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10. 흘러가더라 흘러, 가더라
내가 읽는 마지막 시에는 뽕짝이 흐른다. 엘레지의 여왕은 이미자이고, 엘레지는 비가이고, 엘레지는 지금 흘러간다. 저 멀리로 주야장천 흘러가더라.
沃度丁幾 바르신다 외할머니 손톱 하나하나 알뜰하게 바르신다 매화가 핀다 매화가 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외할머니 옷고름 씹어가며 沃度丁幾 바르신다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 다방구하다 무르팍 깨지면 호호 발라주시던 沃度丁幾 손톱마다 살뜰하게 바르신다 녹실녹실 무른 손톱 손톱마다 沃度丁幾 빠알간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고 새파란 풀잎은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흘러, 가더라 어제도 오늘도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 안동연쇄 처마 아래 죙일토록 앉아 두 볼 발그레지도록 외할머니 얄궂게도 沃度丁幾 바르신다
―채은 「엘레지」(≪리토피아≫ 2006, 가을) 전문
외할머니가 옥도정기를 바른다. 외용약 요오드팅크, 빨간약, 아까징끼, 그리고 옥도정기. 시인은 명사 ‘옥도정기’에서 시를 시작한다. 외할머니가 약을 발라주던 어린시절을 시인은 찬연히 바라본다. 매니큐어처럼 손톱 하나하나에 옥도정기 ‘알뜰하게’ 바르시는 외할머니. “매화가 핀다 매화가 진다.” 봄이 와서 외할머니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고 노래한다. 옛 노래 「봄날은 간다」의 가사와, 가사의 정조와, 시인의 빛나는 감각이 청승을 가장하고 시로 바뀐다. 외할머니는 왜 옥도정기를 “옷고름 씹어가며” 발랐을까. 외할머니의 삶은 고단했을까. 어떤 외로움과 기다림이 그녀의 삶을 빨갛게 물들였는지, 연분홍 치마를 봄바람에 휘날리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시인의 깨진 무르팍에 호호 발라주시던 옥도정기를 “손톱마다 살뜰하게 바르”는 외할머니. 물러진 손톱마다 “옥도정기 빠알간 꽃이 피”자 시인은 노래 「봄날은 간다」에 맞춰 할머니와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운다. 엘레지를 부른다. 지나간 청춘을 돌이켜보지만 흘러간 것들은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기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에 외할머니와 ‘나’는 운다, 눈물 고인 눈으로 나지막이 읊조린다. 엘레지가 들려온다. “새파란 풀잎은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가 들려온다. 시인은 옛날이, 외할머니의 생이, 자신의 청춘이 “흘러, 가더라”고 꺾으며 노래한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데, 외할머니는 흘러가셨고, ‘나’의 청춘도 흘러가버렸고, “어제도 오늘도 뜬구름”만 가득한데, ‘나’의 인생은 어디로 갈 것인가. 걸어갈 ‘신작로길’ 위에서 시인은 스며든 엘레지 때문에 멈춰 서서 뒤돌아본다. 저기, 안동연쇄점 “처마 아래 죙일토록 앉아 두 볼 발그레지도록 외할머니”가 “옥도정기를 바르”고 있다.
노래 「봄날은 간다」보다 더 청승맞은 시. 일부러 청승 떠는 시. 시인이 시와 노래의 경계를 소멸시키는 광경. 텍스트들이 잡종(hybrid)으로 변양되는 순간. 그때를 ‘엘레지(elegy)’로 적시는 시인. 흘러간 것들을 위해 시인이 부르는 ‘만가’가 상처를 아물게 한다, 옥도정기처럼, 옥도정기처럼.
11. 독자와 평론가
나는 일 년 동안 시를 읽으면서 독자였고, 평자였다. 평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었지만 시인들의 피나는 창작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겸연한 자리였기에 나는 행복했다.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시간에 다시 평을 하고, 다른 시인들을 읽게 된다면 이태준의 다음 구절을 명심하고 싶다. 거울로 삼기 위해 인용한다.
소수의 그 독자,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어든지 아름다운 것을 지어 달라’는 그 독자를 향하여 우리는 붓을 들 것이다. 그 외의 독자는 천이든 만이든 우리에겐 우상일 것뿐이다.
내가 불안을 갖는 평자는 작품을 가능성이 무한한 감성으로 느끼려 하지 않고 다만 고정된 개념만으로 정리하는 평자다. (중략)
평자들이 소설에 대한 준비 지식으로 읽은 이론을 하물며 작자들이 안 읽을 리 없다. 그만 교양은 작자에게도 있으려니 여겨 마땅하거늘 너희가 어디서 이런 방법론이나 이론을 보았겠느냐는 듯이 사뭇 소설작법식으로 덤비는 評家가 더러 있다. 나는 우리 작가들에게 말한다. 평가에게서 비로소 작법이나 방법론을 배워가지고 소설을 쓰려는 그 따위 게으르고 무지한 자라면 빨리 작가의 위치에서 물러가야 할 것이다.
―이태준, <무서록>
장석원․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저서 <아나키스트> <김수영 시의 수사학> 등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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