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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계간평(연극)/이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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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49회 작성일 08-03-01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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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연극>



<서울노트>(히라타 오리자 작, 성기웅 번역, 박광정 연출)

<미스터 마우스>(다니엘 키즈 원작, 이현규 각본연출, 장소영 작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작, 김광보 연출, 김미혜 번역, 고연옥 윤색)



인간과 가족을 둘러싼 세 가지 세계관
이경숙|연극평론가


2006년의 한국은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흘러간다. 새로운 멜로가 영화계를 접수했다던 2005년의 파도도 잊혀진지 오래고, 2006년은 진화된 사극의 기폭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요란한 문구도 지겹다. ‘One Source Multi Use의 시대’라는 운운은 언론계와 문화계를 넘어 학계의 유행까지도 접수했고, 이에 뒤질 새라 소설과 만화, 영화, 연극, TV드라마, 뮤지컬계는 자기 매체 너머에서 어떤 Source를 얻어갈 수 있을까 호시탐탐 정당한 (혹은 정당하다고 믿고 싶은) 훔쳐보기를 감행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속도에 대한 인식과 연극계라는 전쟁통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 그 속의 열정들에 숨이 가쁘다. 덩달아 연극을 평한다는 사람들도 빠른 것이 곧 치열한 것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곳과 저곳, 여기와 거기를 알아야 하고 담아야 한다는 각성으로 분주하다. 그 외면할 수 없는 분주의 강박 속에서 2006년 한국 연극계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곳과 저곳, 여기와 거기에, 예전에도 존재했으며 현재에도 다루어지고 미래에도 간과될 수 없을 인간과 가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세 가지 극(劇)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간(人間)’이란 말이 서로에게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人)들 사이(間)의 공간과 그 속에 놓여있는 현존재를 의미한다고 했을 때, 그 시공간을 메우고 있는 여러 기제 중에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자리 잡고 있다. ‘가족’이 단순히 ‘제도’일 수만은 없는 이유 역시 그 제도적 형식이 존재할 수 있는 의식적 기반이 바로 ‘인간’이라는 큰 테제 위에 혹은 그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과 가족이라는 상충적이면서도 상보적인 관계망. 하나의 극이 인간과 가족에 대해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를 통해 우리는 그 극이 담고자 하는 1차적 주제 이외에도 그 극을 관통하고 있는 세계관을 읽어낼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효율적인 아이러니인가. 이제는 지루하고 남루하여 특별하지 않게 되어버린 가족과 인간이라는 소재를 통해 난해한 것처럼 보이는 극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가.


<서울노트>(히라타 오리자 작, 성기웅 번역, 박광정 연출, 극단 파크, 정보소극장, 2006.10.11~11.12)

히라타 오리자는 매우 큰 사람이다. 이는 <도쿄노트>(<서울노트>의 원제)를 통해 그가 기시다 쿠니오 희곡상을 받으며 큰 산처럼 등장했고, 9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적으로 공연된 이 작품의 작가이며, 90년대 일본 연극계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현대 일본 연극사의 필수 과목’처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드러난 현상을 차치하고 그의 작품을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은, ‘그는 크다’라는 이 이상하고도 평범한 명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그의 작품을 어떤 한 ‘대목’으로 이해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 사항 레벨쯤은 필요하다. 한 대목, 한 장면, 한 막으로는 그를 이해하기 힘들다.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이 연극 쇼케이스나 뮤지컬 갈라쇼 같은 형식을 통해 하이라이트로 공연된다면, 우리는 그 하이라이트를 선별할 수도 없겠지만 ‘그가 크다’라든지 ‘그의 작품이 좋다’라든지 하는 수다에 가까운 단편적인 이해조차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의 작품은 이런 ‘파편성’과 ‘조각성’에 기대어 있기도 하다. 파편과 조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이 작품을 구동하는 힘이 이 파편과 조각에 의한 것임은 언뜻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순은, 관습적인 기승전결을 무시하고 어떤 상황들을 그저 조용하게 제시함으로써, 다시 말해 완벽한 서사를 표방하는 드라마들과는 달리 극의 형식을 해체함으로써 완성되는 그의 극작 원리를 감안하면 좀 더 풀이하기 쉬워진다.

<서울노트>의 극적 파편과 조각들은 동시에 ‘일상적’이다.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극적일 것 같은 서울의 작은 미술관 휴게실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인다. 그들은 동시에 등장하였다가 함께 머물기도 하고 각자 무대 뒤편으로 설정되어 있는 전시실로 흩어지기도 한다. 화장실을 가기도 하고 아까 만났던 인물들이 다시 휴게실에서 조우하기도 한다. 편리하게 생각해 설명해 버리고 만다면, 다양한 행동을 보이는 이 인물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해 낼 수도 있다.

첫 번째 그룹은 5명으로 이루어져 있는 혈연-부부 관계의 그룹이다. 멀리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장녀(최선영 역)가 서울에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온다. 그녀에게는 남동생 두 명과 여동생 한명이 있는데 여동생이 막내이고 아직 미혼이다. 남자 형제 둘은 결혼을 했으며, 미술관에는 ‘차남의 아내’(김보영 역)가 장녀와 함께 먼저 도착해 있고, 다른 그룹원들은 시간 격차를 두고 미술관 휴게실에 모인다. 이 그룹의 다른 이름은 ‘가족’이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 이름붙이기가 어색할 정도로 그들은 각자 외롭고 고독하고 공허하다. “그래도 우린 남매잖아”를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슬프고 고단할 정도로 그들은 소통이 어렵고 관계도 엇나가며 서로를 가슴으로 위로하는 것도 버거워한다.

두 번째 그룹은 이 미술관에 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그림들을 기증하기 위해 온 상속녀(홍서영 역)와 그녀의 오랜 친구(성한경 역) 그리고 그녀의 변호사(황희재 역)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래 떨어져 남처럼 살아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 유산들이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잔함이 묻어나는 “아버지가 필요한 건 어릴 때였는데, 나한텐”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이 그림들은 다가온 아버지이면서 또한 기증이라는 과정을 통해 떠나보내야 하는 무엇들이다. 변호사는 이 모든 과정을 사무적으로 처리하고 그 과정을 표현하는 작가의 시선 역시 무채색에 가깝다. 이러한 떠나보냄의 과정이 우리의 삶이자 일상 자체이기 때문에 비난할 것도 특별히 이해할 것도 아닌 것처럼 그려질 뿐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상속녀의 오랜 친구는 전쟁에 참가할 지도 모른다. 상속녀는 아버지의 그림처럼 그를 떠나보내야 할지 혹은 붙잡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다. 그녀에게 이 친구와의 미래는 그녀 가족들의 관계처럼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그룹은 맞선을 본지 얼마 되지 않는 남녀이다. 여자(박윤경 역)는 그림을 좋아하고, 남자(한승도 역)는 그림을 싫어한다. 함께 왔지만, 그 둘은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 소통하기도 어렵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일지 모르는 그들에게 그림은 같은 것을 보면서도 그 어떤 비슷한 감정도 자아내기 어려운 대상일 뿐이다. 실연을 당한 사람들이 바다를 가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보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자기 자신이 있는 거예요, 틀림없이.”라고 설명하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또한그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고, <서울노트>의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관객들을 향한 말이다.

그림을 싫어하는 남자의 옛 과외 제자인 여대생(조경주 역)은 같은 시간 이 미술관에 친구와 함께 방문했다. 여대생은 우연히 만난 옛 과외 선생 남자에게 “그 후에. 아이가 생겼었어요.”라고 말한다. 남자와 그녀는 과거의 관계이자 ‘가족’으로 묶였을지도 모를 현재의 추억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와 함께 한 대화와 시간을 오롯이 기억해내지 못한다. 반면에 그녀에게 그는 “갈수록 미화되는 옛날의 추억”이면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인 오늘의 사람이다. 가족이 그렇듯, 삶이 그렇듯 누군가에겐 절실한 것이 타인에겐 잊혀진 것일 수 있다.

미술관 직원(최용민 역)은 이 모든 풍경을 대입한 듯한 몇 마디의 대사를 담담하게 남긴다. “망원경으로 우주를 본다고 해도 우주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라는 말처럼 시간도 가족도 삶도 관계도 소외될 수 있고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는, 늘 외롭고 상대적인 무형의 것이다. 17세기 네델란드의 화가 베르메르가 그림을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원리처럼 “3차원의 사물을 잘라내서 2차원”으로 소통해야 하는 인간은 “렌즈를 통해서 벽이나 종이에 상을 맺히게 하는 것” 이상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그것을 실체일 수 없다. 어쩌면 2차원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3차원적 관계 속에서 삶과 상처를 품어 안고 사는 인간과 가족이 소통한다는 것은, 대상의 실체와 그것을 그린 그림의 관계처럼 무리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그림을 통해 우리는 화가와 대상, 그리고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절망 속의 희망처럼 조금쯤은 알 것도 같다. 히라타 오리자는 그래서 이 무수한 2차원들의 절망과 소통 불가의 파편과 조각들을 통해 어쩌면 3차원이라는 전체 너머를 잠깐쯤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하다. ‘히라타 오리자가 크다’라고 함은 바로 이 파편을 전체로 향해가는 힘을 통해 닿을 수 없어 미끄러져만 가는 관계의 틈새를 메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간과 가족 사이의 절망적인 희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작가는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파편과 조각을 쌓아놓고, 절망너머 있을지도 모를 희망의 세계를 조용히 호소하는 작품 <서울노트>를 연기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배우들은 직설적이거나 생경하게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곤란함을 느낀다. 동시에 모호함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까지 짊어지게 된다. 관습적으로 양식화된 연기도 극의 성격이나 작가의 세계관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배제되어야 하며, 일상적이긴 하되 목적을 잃어버린 연기 역시 부적합하다. 특별하게 고안된 조명의 도움도 없고 감정의 진폭을 넓혀줄 음향의 배려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출은 무대 특유의 고양된 몰입을 강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극의 방점을 흐려놓을 만큼의 인위적 개성 역시 요구하지 않는다. 히라타 오리자의 ‘조용한 연극’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만큼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고 무대화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고충이 따랐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노트>의 희곡 텍스트는 희곡을 읽기만 해서는 쉽게 무대의 장면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복합적이고 동시적인 극적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한 무대 위에서 두 세 개의 그룹이 한꺼번에 자신들의 토픽을 이야기한다. 한 장면에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는 보통의 사실주의극과는 달리, 관객들은 서로 다른 소재의 이야기가 배우들의 입을 통해 동시에 제공되기 있기 때문에 어떤 그룹의 이야기를 선택해서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가져가지 못한 채 단 하나만을 선택해도 이 극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라는, 이 비일상적인 관극 체험은 그래서 신선하기도 하다.

사실 연극이 어떤 단일한 서사를 일괄된 기승전결 구도 위에서 펼쳐나가는 일은 삶의 문제들에 비해 단순한 것이다. 관객을 연극에 좀 더 집중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단일서사는 작가 본위의 편리한 장치일 수도 있다. 삶이 언제 단선적 서사로 진행되었던가. 그리고 그 삶의 사건이 한 순간에 하나씩 몰려온다는 법칙이 존재했던가.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히라타 오리자의 <서울노트>가 펼치고 있는 이러한 복잡하고 동시적인 연극적 형식은 인간의 삶 자체를 바라보는 히라타 오리자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으로도 그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질료와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의 합일로서 그의 미학적 성취는 어느 정도 그 답을 얻었다고 판단된다. 삶을 은유하고 싶다는 연극의 바람이 연극적 질서 안에서는 생경하다고 여겨지는 형식으로 달성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 역시 <서울노트>가 가지고 있는 재미이자 통찰이다.

박광정 연출의 아쉬움은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러한 재미와 통찰에 대해 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서울노트>는 장녀가 차남의 아내와 나누는 대화로 마무리된다. 차남의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자신 말고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그녀는 이것이 힘겹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던 모든 사람들과 아무 사이도 되지 않게 되어 버리는 상황이 주는 슬픔은 ‘형님’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던 장녀에게도 위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다짐으로 극의 문이 닫힐 즈음에 박광정은 관습적인 음악과 조명 처리법을 감행한다. 전체적인 조명이 페이드 아웃(fade out)되면서 두 여인의 얼굴 위로 노란 조명이 하이라이트(highlight)된다. 음향이 높아지는 조도만큼 볼륨을 키우면서 극은 암전을 맞는다. 이렇듯 공식이라고 치부될 만큼의 흔한 결말 처리법은 극 전반이 갖고 있던 ‘무인위의 일관성’을 깨버리고 자기 자신을 생경하게 노출시키는 부조화를 일으켜낸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극의 방점을 찍어줘야 한다는 강박이 이 극만이 갖고 있던 연극 형식의 특유한 세계관을 깨는 순간이다.


<미스터 마우스>(다니엘 키즈 원작, 이현규 각본․연출, 장소영 작곡, 파파프로덕션, 라이브극장)

<미스터 마우스(Mr. Mouse)>는 뮤지컬 장르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뮤지컬 장르의 세계관’이라는 말을 폄하적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모든 장르는 타장르와 비교될 수 없는 (혹은 되어서는 안 될) 자기 특유의 성격과 미학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그 매체가 갖고 있는 매체성에 부합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용과 음악을 동반하며 대중 미학적 효과를 얻어내고자 하는 극 장르로서의 뮤지컬은 그래서 다른 접근 자세로 이해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일단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는 ‘Dramatic Musical’을 표방하면서 시작된 작품으로 평할 수 있다. 다니엘 키즈의 SF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뮤지컬은 쉽고 재미있고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나 해야 옳다는 뮤지컬계의 편협한 주관에 반동하면서 <미스터 마우스>의 공연 작업이 출발했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소설을 거쳐 영화에서 인기를 확보하고 뮤지컬로도 제작된 경험이 있는, 게다가 ‘TV’라는 ‘무차별적 인지 확보 기계’를 통해서 방영된 바 있는 작품의 서사를 손에 쥐고 있는데다가, 그 서사의 설정이 독특하며 그 독특함 너머에 감동이 존재한다는, 이 파라다이스 같은 조건 속에서 <미스터 마우스> 기획팀이 느꼈을 기대와 희망은 충분히 이해된다. 우리 공연계에서 ‘확실한 서사 콘텐츠’만큼 기획자를 설레게 하는 존재는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미스터 마우스>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원작 소설 <Flower For Algernon>의 주인공은 서른 살을 넘긴 정박아인데 지능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는 두뇌수술의 실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된 세상의 모습은 환멸 그 자체일 뿐이다. 주인공은 수술 부작용으로 다시 정박아로 되돌아간다. 이 간단해 보이는 서사는 그러나 ‘장편’ 소설에서 다루어질 정도로 많은 서사 코드들을 지니고 있다. ‘699M'라는 일본판 드라마의 다운로드 양을 통해 알 수 있듯 풍성한 장치로 복잡하게 얽혀있고, 한국에서는 <안녕하세요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16회의 시리얼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수많은 에피소드들의 집합체이다. 다시 말해, 무대극으로 단시간에 처리되기에는 지나치게 긴 분량이다. 장편 소설이나 시리즈물로도 손색없을 이 양적 방대함을 뮤지컬이라는 장르 안으로 녹여 집약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뮤지컬에서는 이 서사의 뼈대에 여러 장치를 추가하고 있다. 주인공 서인후(정동현 역)가 수술을 기다리고 바라마지 않았던 이유는 어렸을 때 자신을 ‘짜짜루 자장면’ 집에 두고 떠나버린 가족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다. 수술의 성공으로 자신이 좋은 두뇌를 갖게 되었을 때, 그는 세상에 대한 환멸뿐만 아니라 자신을 시술하는 팀의 일원인 채연(백성혜 역)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부모가 어린 인후를 버린 이유가 정박아인 자신의 실수로 인해 어머니가 다리를 잃었던 데다가 여동생이 죽음을 맞은 점, 이에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이 컸기 때문임을 알게 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정박아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분노하기도 하고,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을 실험실의 쥐처럼 여기는 풍토에 분통이 터지기도 한다.

SF적 설정 위에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대사회적 비판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유사가족에 대한 애정, 사랑이라는 감정의 깨달음, 학문의 사회적 무능력 등이 오버 랩핑 되면서 극은 뒤엉킨다. 2시간 즈음의 무대 위에서, 욕심 많은 서사적 노출 사이사이에 노고를 깃들인 음악과 춤을 반영하면서 말이다. 아무 문제의식도 담아내지 못하는 뮤지컬이 문제라면,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는 과잉의 뮤지컬도 문제적이다. 어쩌면 이 원작과 서사적 코드들은 뮤지컬이라는 매체가 소화하기엔 양이 지극히 과다한 음식들과 같다. 음식 하나하나를 보아서는 나무랄 것이 없지만 전체를 보아서는 소박한 식탁의 공간이 버겁게 느껴질 만큼.

어쩌면 이보다 더 문제적인 것이 이러한 주제들을 펼쳐내는 방식에 있을지도 모른다. 히라타 오리자가 과거의 일본 연극들이 작가의 가치관을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강요하려고 한 것에 반기를 들고 주제를 연극 밑으로 너무 깊게 숨겨서 관객의 극 읽기를 지연시켰다면, <미스터 마우스>는 그것을 날 것 그대로 차려놨기 때문에 극적 여백을 잃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할 수 있는 주제적 장치를 동반한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다면 좀 더 서사적 포즈(pause)를 수반했어야 했다. 연극의 매체 화법과는 다른 뮤지컬 서사의 화법을 이해한다고 해도, <미스터 마우스>가 내보인 직설법은 발랄하되 여지가 없이 꽉 채워진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한 문제제기의 대사회적 메시지가 해소와 해결의 국면을 맞을 즈음에 극은 서둘러 매체의 문법에 설복한다. 모든 사람들은 화해를 하고 이해를 하며 후회를 한다. 인간을 실험용 쥐와 같이 다루던 강박사(박명훈 역)형의 인물들이 회개를 하고,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어떤 대상을 미워하지 않는다. 정박아로서의 인후를 무시하고 귀찮게 여기던 가족원은 인후를 너무나도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고 인후를 사랑하던 채연의 상처와 슬픔은 사랑을 나누면서 부각되었던 것만큼 언급되지 못하고 황급히 닫힌다. 널려져 나왔던 문제 제기들은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어떻게든 봉합 아닌 봉합을 이룬다. 작품 중반까지의 비판의 칼날이 인후의 죽음을 맞아 무뎌져 버린다.

OSMU시대에 매체에 걸맞은 각색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는 Source를 Multi Use하기 보다는 Multi Use에 적합한 Source가 무엇인지를 보는 감식안(鑑識眼)이 필요한 시기에 당도했다. <미스터 마우스>가 지금의 열정을 좀 더 큰 발전으로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선택된 서사에 매체 특유의 방점을 찍는 일일 듯하다. 비슷한 양념을 친 여러 개의 나물 반찬보다는 특색 있는 메인 메뉴에 소박한 밑반찬만을 곁들이 단순한 상차림이 더욱 입맛을 돋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뮤지컬이라는 매체로 발현되는 <미스터 마우스>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메인 메뉴는 무엇일지의 문제가 남는다. 설정 자체가 갖고 있는 특이성을 통해 일단 ‘과학에 대한 시선’이라는 장치는 포기될 수 없다. 여기에 그 과학과의 시너지 효과로 인간의 상처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매개로 역할하는 인후의 가족 이야기는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이 극에서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부분은 ‘가족 속의 인후’이다. 한 개인으로서 인후가 겪는 과학에의 상처 역시 중요한 서사적 요소지만, 인후가 가족 속의 일원으로 들어와 있을 때 그 상처의 정서적 파급력은 더욱 강대해진다. 관객들이 극의 후반에 어떤 정서적 미동을 느꼈다면 그것은 가족 속의 인후, 그리고 인후의 가족으로서의 그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미스터 마우스>가 보여줄 수 있는 가족에 대한 뮤지컬적 해석관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스터 마우스> 속의 가족은 따듯한 보금자리를 의미한다. 돌아가고 싶은 치유처로서의 가족 공간, 중국집 ‘짜짜루’의 가족들은 인후와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가슴을 나누었다. 그를 버린 아버지(신문성 역) 역시 상처 입을 만큼 상처 입은 사람이지만, 인후의 상처만큼은 자기 상처보다 크게 여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러한 가족과 과학에 대한 극명한 대비를 통해 서사의 명확성과 뮤지컬적 화해의 세계관이 좀 더 확보될 필요가 있다.

배우 앙상블의 탄탄함과 극의 주제 의식을 분명하게 짚어주는 뮤지컬 넘버들의 존재는 이러한 발전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인프라다. 서사적 방만성을 덮을 만큼 배우들의 연기는 상황 상황을 잘 조합해 표현해낸다. 특히 그리 많지 않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량과 분명한 딕션법을 체화하고 있는 배우 정동현의 움직임과 소리는 극을 구동하는 명쾌한 재능으로 연계 ․ 발현되었다. 일본 드라마로 만들어진 <엘저논에게 꽃다발을>에서 같은 역을 연기했던 유스케 산타마리아(ユ-スケ サンタマリア)의 연기가 거북했던 것은 장애를 연기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연기 자체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상기한다면, 바보에서 천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뮤지컬 배우 정동현의 연기는 극의 굴곡 많은 스펙트럼을 잘 다져진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소화시켰다는 측면에서 박수 받을 만하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작, 김광보 연출, 김미혜 번역, 고연옥 윤색, 극단 청우, 2006.10.17~19, 서강대 메리홀)

브레히트와 김광보가 만났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들이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고, 김광보의 연출 세계가 기존의 연극적 관습을 깨고 나아가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볼 때 이 둘의 만남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사실 고전으로 존재하면서도 언제나 수많은 연극적 발견과 자성의 보물들을 숨겨 놓은 브레히트의 세계에 새로운 실험을 갈망하는 김광보가 접근하게 되는 일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브레히트의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이 극단 청우와 좋은 궁합을 보일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연출가의 말대로, 극단 청우가 나름 일관되게 작업에 임해왔던 주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나 상황이 변화시키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인간과 인간 상호관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비극적인 종말 등이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에 강한 사회성을 띄고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인간과 인간 상호 간의 변화 모습, 혹은 ‘억척 어멈’이라는 한 인간의 비극이 전쟁 상황 속에서 피폐해져가는 가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발현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 주제 집약의 밀착도가 높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극단 청우의 메시지와 조화될 가능성이 컸다.

한국에 소개되어 여러 번의 번역극으로 공연되었다는 점에서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이 ‘새로운 작품’으로 이름 붙여지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들은 무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공연이 적어도 ‘신선하게’ 만들어 진 것이라는 예감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 관객은 무대를 바라보면서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들어서면서 관객석으로 안착된다. 이것은 일상적인 객석통로를 통해 극장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간에 혼란을 줄 수 있고, 이 혼란은 평소에 숨겨져 있던 무대의 이면을 생소하게 인식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무대의 배열은 브레히트가 연극을 통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게 하려던 정신을 충실하게 구현해 내는 결과를 얻는다.

무대를 지나와 안착된 관객들은 3면으로 무대를 둘러싸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이미 배우들은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관객석 바로 옆에 서서 그들을 노출시켜 놓은 상태이다. 관객들은 평소 자신들이 앉아서 연극을 바라보던 객석 저 편 깊숙한 곳까지 무대의 깊이로 활용하고 있는 이 신선한 착상 속에서 비로소 김광보가 설치해 놓은 이 연극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무대를 환각의 공간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의 인위적인 조명도 없고,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전주로서의 음악도 없다. 몇 개의 기둥이 세워져있는 단조로운 무대에 자신이 조명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조명 상자들이 노출되어 있다.

낯선 경험은 배우들의 연기 양식에서도 드러난다. 배우들은 각 인물에 몰입하려는 애씀보다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는 것 자체를 보여주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배우들은 배역을 담당한 것이지 그 배역 자체가 아니다. 배우들은 연기 공간의 앞에 나서서 앞으로 벌어질 장면에 대해 미리 정보를 주고 해설을 하고 이 막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연기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그들은 여유를 부리며 노래를 하고 갈등이 최고조에 오르는 순간에 극에 단절을 줌으로써 서사극이 노리는 ‘감정의 몰입과 이성적 해석 사이’의 거리를 확보한다.

이러한 진행은 가장 브레히트적이면서 그것을 완전히 체화했다는 측면에서 김광보적이기도 하다. 브레히트 서사극에 김광보가 복속되었다는 느낌보다는 김광보의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을 위해 브레히트가 그의 작품을 헌사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브레히트의 연극 정신과 김광보의 연출관 사이의 균열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브레히트를 배반하거나 외면하지 않으면서 또한 브레히트의 이름 안에 갇히지 않는 균형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연출가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김광보가 브레히트형 극 양식과의 친연성을 획득한 반면 몇몇 배우들의 연기는 이 극의 장치들과 부분적으로 엇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이 극의 중심축이 되는 억척어멈역의 문경희는 그 역할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극에 자연스럽게 ‘묻히지’ 않는다. 감정을 잔뜩 실어 대사를 처리하거나 눈물을 흘리고, 애처로움과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눈과 입 주변의 근육을 중심으로 표정 연기에 충실하려고 한 표현법은 다른 연극 무대에서는 훌륭한 인물 발현의 도구가 되어 줄지는 모르지만 이 극에서는 물의 기름과 같은 요소가 될 뿐이다. 극의 정신과 양식을 이해하고 기존과 다른 표현법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한 듯 보인다.

반면에 고전주의 연기법의 인위를 빼고 부담을 걷어낸 상태에서 연기한 승의열과 정규수, 김기천의 연기는 극 안에서 자유롭게 유동하고 있다. 굳이 개성을 연기해내려고 노력하지 않지만, 이들이 갖고 있는 연기적 자산이 발휘되는 순간들이 극 연기의 재미를 담보해주고 있다. 이러한 장점이 벙어리 딸 카트린을 맡은 홍미란의 연기에서도 엿보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은 이러한 서사극 양식이 필요로 하는 연기법의 활용과 무대 설치들을 통해 극의 주제와 형식을 일치시켜 나가는 힘에 있다. 전쟁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전쟁의 아픔만을 감정적으로 소모시켜 관객에게 순간의 파토스만을 제공하는 여느 전쟁 소재 연극과는 달리,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은 편리한 타협을 피하여 전쟁 자체를 바라보게 만든다. 다시 말해, 30년 종교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전쟁 소재를 배경화하지 않고 그것 자체에 대한 호소와 비판을 할 줄 안다. 그것은 전쟁의 이야기면서도 그 안의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균형을 이룬 세계관을 선사한다. 기존의 연극들이 전쟁 속 인간의 상처 만에 매복되는 오류를 범했다면, 브레히트의 이 연극은 그 상처를 제공한 원인처와 전쟁을 만들어 내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고발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김광보는 바로 이 지점, 고발을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지향되어야 할 요건들을 잊지 않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이성과 가슴을 동시에 움직여 울릴 수 있는 방법을 브레히트와 김광보는 알고 있다.



이경숙․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04년 LG아트센터 ‘오늘의 젊은 연극 시리즈’ 연극비평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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