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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문화순책/함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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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64회 작성일 08-03-01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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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예쁘지만 불편한

―영화 <미인>과 원작소설 <몸>에 나타난 성담론 비판

함종호|영화평론가




“딩동∼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여자’가 ‘남자’의 집에 찾아온다. “짐은?”이라고 ‘남자’가 묻자, ‘여자’는 “이게 다야. 와서 짐 안 풀어?”라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온 짐은 사실 없었다. 그녀 자신이 그녀의 짐인 셈이다.

영화 <미인>은 그렇게 시작된다. <미인>은 ‘여자’(이지현 분)의 갑작스런 방문만큼이나 매우 도발적인(?) 영화로 비쳐진다. 여기서 도발적이라고 말한 것은, 본래 이 영화가 현 문화 공간에서 활발히 제기되고 있는 일련의 성담론, 몸담론과 같은 꽤 무거운 주제를 영화의 시작 장면부터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자’가 자신 스스로를 ‘짐’이라는 사물로 지칭하고, 구체화시키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것이 도발적인 것만큼 ‘여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성담론, 몸담론은 매우 갑작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 시작부터 ‘여자’가 자신을 사물화, 구체화시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영화의 시작 부분에 나타난 특징적인 장면 하나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쉽게 단정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영화의 전체 서사 구조를 이해한 후 이를 토대로 자신을 사물화시킨 ‘여자’의 태도를 규정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논의의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원작의 서사 구조와의 비교 분석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화 <미인>의 원작은 <몸>(명경, 1999)이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몸>의 작가가 영화 <미인>을 만든 여균동 감독이라는 점이다. <몸>의 작가 후기를 보면, 그는 먼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많은 흥미 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한 사람에 의해 원작과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그렇고, 원작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애초에 영화로 만들어질 것을 전제로 하여 씌어졌다는 것이 그렇다. 또한 여균동은 본격적인 소설 작가는 아닌데 그가 쓴 소설이 과연 얼마만큼의 작품성을 담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 작품은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들 작품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원작과 영화가 서로 같은 주제 의식을 띠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렇다면 장르를 달리하여 만들어진 이들 작품이 각기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될 것이다.

거칠게 말한다면, 문학과 영화의 장르적 차이는 우선 그것이 각각 문자 언어와 영상 언어를 중심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리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문자 언어는 영상 언어에 비해 더 추상적이며 관념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물의 공통속성을 뽑아 추상화된 개념으로 이루어진 문자 언어와는 달리 영상 언어는 이를 보다 구체적인 사물과 장면으로 시각화시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몸>에 사용된 언어적 특징을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 무슨 생각해?

-니 몸이 고파.

남자는 진심이었다. 지금의 이 욕망은 식욕과도 비슷했다. 그녀의 몸이 고팠다. 몸이 고프다는 말을 쓸 수는 없겠지만 이것보다 더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먹고 싶어?

-응.

-그럼 먹어.(pp.156~157.)


위 인용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남자’(오지호 분)의 “니 몸이 고파”라는 언술이다. 이는 언어의 일반적 속성인 추상성으로 인해 ‘배가 고프다’, ‘무엇인가가 부족하여 그것을 욕망한다’, ‘섹스하고 싶다’라는 뜻의 비속어적인 의미 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어떠한 해석 방법을 따른다 하더라도 이것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의미는 ‘부족함’, 즉 ‘결핍’으로 귀결된다. 언어에 내재해 있는 추상성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위의 진술은 결핍에서 야기되는 어떤 상실감 내지는 절망감의 표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진술에서는 비속어적인 의미인 ‘섹스하고 싶다’라는 극히 한정된 의미로만 쓰였고, ‘여자’도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상황은 ‘남자’와 ‘여자’가 사디즘적 성행위를 하는 데에 할애된다. 이것은 <몸>이라는 작품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근본 속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씌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언술이 다양한 의미를 낳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에 예술적 속성 가운데 하나인 긴장감이 놓인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몸>에서 사용된 언어가 이처럼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몸>의 문학성과 예술성은 크게 훼손되고 있다.

“니 몸이 고파”라는 언술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물론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앞선 설명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니 몸이 고파”, “그럼 먹어” 등의 언술과 맞물려 전개되는 영화 장면은 남녀의 거친 성행위 장면으로 이어진다. 문학적 진술에서도 영화적 진술에서도 “니 몸이 고파”와 관련된 일련의 언어 활동은 ‘섹스하고 싶다’는 식의 맹목적인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인>의 영화적 속성, 즉 영상 언어는 단순히 제한된 의미만을 전달하는 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앞선 설명에서처럼, “니 몸이 고파”, “그럼 먹어”가 실제 발화된 후 거친 성행위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는 관객의 다양한 사고를 차단하고, 급기야 관객으로 하여금 성행위 장면에만 몰입하도록 만든다. 이는 발화된 언어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에만 영상 언어가 기능하고 있음을 뜻한다. 영상 언어에도 은유와 환유와 같은 비유적 속성이 내재해 있음은 물론이다. 이를 얼마나 기능적으로 소화해내고 영상으로 처리할 수 있는가가 영상 언어가 지닌 아름다움, 즉 예술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그러나 <미인>의 경우 정작 중요한 장면에서는 이를 망각한 채 영상이 처리되고 있다. 이는 오직 성행위 장면을 구체적 영상으로 비추어 관객의 말초적인 감각만을 자극하는 데에 영상 언어가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몸>과 <미인>이 각기 장르를 달리하여 소설과 영화로 구현되고는 있지만 각 장르가 지닌 고유한 언어적 특징이 잘 활용되지 못하였다면 굳이 이를 장르를 달리하여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에는 이러한 가정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이들 작품은 단순히 장르적 차이만을 노려 기획된 것인지도 모른다. 즉 문자 언어에 비해 영상 언어가 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만약 이러한 우리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시각성이 강조된 영화 <미인>은 성(性)을 상품화하는 데에 급급해한 영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을 상품화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는 것이고, 시각의 자극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성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상 언어가 언어로서의 비유적 속성을 망각한 채, 제한된 장면과 상황을 보여주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일조하고 있다.

<미인>에서 성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요인 중 하나는 다분히 배우 이지현의 육감적인 전라(全裸)의 몸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인 ‘여자’의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배우의 몸을 보게 된다. 영화 속 인물인 ‘여자’의 몸을 감상한다는 것은, 영화 속 인물인 ‘여자’의 삶과 그 삶 속에서 그녀가 겪는 사랑, 갈등, 고민 등을 감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전라에는 그녀의 삶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즉 옷을 벗어 내던질 정도로 처절한 삶의 노력이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여인’의 몸을 통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몸담론의 실체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인 ‘여자’에게는 이러한 삶의 노력이 있지 않다. 더욱이 배우 이지현의 미성숙한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실제 배우 이지현과 영화 속 인물인 ‘여자’가 서로 동일시되어 전달되지 못하도록 한다. 배우 이지현의 전라의 몸매만을 감상하게 된다는 것은 영화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실제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만을 감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몸매가 우리의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하나의 시각적 대상으로만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예쁘지만 그녀를 보는 우리는 불편하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몸담론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만다. 단지 이것뿐인가. <미인>이 전하는 몸담론에 우리가 강한 의심을 품게 되는 이유가.

사실 우리가 <미인>의 몸담론에 강한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은 <미인>의 몸담론이 그 자체로 진정한 의미의 몸담론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일련의 몸담론은 이성(理性)에 의해 그간 억눌려 있던 몸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바 있듯이, 지각 주체와 지각 대상은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그는 이러한 사실을 오른팔로 왼팔을 만지는 상황을 가지고 논의한 바 있다. 이때 몸은 지각 주체이면서 동시에 지각 대상이 된다. 과거의 철학적 관념 아래에서는 실체로서의 몸은 지각 대상의 자리에만 있는 것이었지, 지각 주체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나’란 이성으로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나’이지 이성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으로서의 ‘나’는 아니다. 과거 이성중심주의 사고에서는 지각 주체로서의 ‘나’는 대상을 지각하는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에 지각 대상에 비해 보다 더 중심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었다. 이때 이성은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데에 필요한 기준이었으며, 이성은 주체가 대상보다 더 우월하다는 점을 나타내는 근거였다.

그러나 지각 주체와 지각 대상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메를로-퐁티의 지적에서처럼), 지각 주체가 지각 대상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로서의 이성은 오늘날 부정되었다. 그러므로 몸담론이란 이성의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치부되어왔던 몸의 가치를 복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각 주체와 지각 대상의 상생을 위함이다.

성담론과 관련시켜 몸담론을 적용한다면, 이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몸을 성적 주체의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몸이 지각하는 성적 쾌락은 더 이상 열등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성/몸의 이분법에서 그 어떠한 것에도 절대적인 우월의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 어떤 것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해방으로써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억압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지각하는 성적 쾌락은 그것만이 절대적인 것인 양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몸과 성의 해방이 아니라, 몸과 성의 또 다른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몸담론의 철학적 사유의 결과를 염두에 두고 <몸>과 <미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들 작품은 두 가지 점에서 몸담론의 철학적 사유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이들 작품에서 보여주는 몸담론의 모습은 주체와 대상의 양가적 의미를 모두 띠고 있는 몸이 아니라, 여전히 지각 대상으로서의 몸만이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이들 작품에서 보여주는 몸담론의 모습은 몸의 해방에 집착한 나머지 또 다른 몸의 억압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성담론의 양상 또한 그러하다. <몸>의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통해 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여자는 남자가 몸을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남자는 바로 여자의 몸으로 들어왔다. 1)마치 걸식증에 걸린 환자처럼 여자를 먹어대려 했다. 여자는 남자의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단지 욕망일 뿐이다. 운동일 뿐이다. 욕망과 운동, 섹스를 정의하자면 그렇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2)여자는 남자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었다. 만일 해주었다는 표현이 기분 나쁘다면 순응했다라고 하자. 무엇이 달라지는가. 남자가 여자의 몸을 구기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든 건 남자의 얼굴 표정을 보고 난 후였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에서 괴로움을 읽었다. 그러나 여자는 묻지 않았다. 다만 움직였을 뿐이다. 남자는 무엇을 증명하려 하는 것일까?


3)지금 남자는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 그것도 열심히. 여자는 그 사실만을 존경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이토록 갈망하고 있다면 그 속에도 중요한 진실이 숨어 있을 거라 믿었다. 여자는 자신의 몸이 어떤 의미가 되고 표적이 된다는 사실이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밑줄:인용자, pp.111~112.)


1)의 ‘여자를 먹어대려 했다’는 표현은 ‘섹스하려고만 했다’는 뜻의 비속어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남자’에게 ‘여자’는 성적 대상이라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성적 주체로서의 ‘여자’가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자’인 셈이다. ‘여자’는 ‘남자’의 성적 욕망에 의해 소비되는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2)에서 그녀가 ‘남자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고, 순응하’는 것은 ‘남자’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순응인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성적 대상으로만 비춰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가 자신 스스로를 성적 주체로 인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3)에서 ‘여자는 자신의 몸이 어떤 의미가 되고 표적이 된다는 사실이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았다’고 표현되고 있지만, 사실 ‘남자’에게 그녀의 몸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의미만이 전달될 뿐이다. 앞선 몸담론에 관한 논의를 참고한다면,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몸은 이성에 의해 억압된 상태로부터 해방된 몸이 결코 될 수 없다. ‘여자’의 몸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인 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회복된 몸, 그리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몸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영화 <미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여자’의 몸은 항상 ‘남자’의 시선에 의해 관찰된다. 또한 ‘남자’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에 포착된 ‘여자’의 몸은 관객들에게 하나의 대상으로만 비쳐진다. 시시때때로 전라로 등장하는 ‘여자’의 몸을 볼 때마다 우리의 시각은 강렬한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자’의 몸은 시각적 자극을 일으키는 대상으로만 인식될 뿐, ‘여자’의 몸에서 주체로서의 의미를 떠올리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특히 횡단보도를 건너 ‘남자’에게 다가오면서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며 “선물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녀조차도 자신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몸>과 <미인>의 경우 모두 성적 대상으로만 비춰지고 있는 ‘여자’의 몸은 몇몇 특정한 장면에서가 아닌 이 두 작품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몸>과 <미인> 각각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를 분석하고, 이들의 비교를 통해 보다 더 세밀한 고찰을 꾀해보도록 하자.

<몸>에서 ‘여자’와 ‘남자’의 첫 만남은 은행에서였다. 한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은행에 간 ‘남자’는 “날 듯이 가벼운 여자의 종아리와 조그만 발바닥에 붙었다 떨어졌다하며 미끄러져가는 샌들. 딸기무늬가 박혀진 샌들”(p.39.)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샌들의 주인공을 통째로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그는 인내했다. 종아리와 딸기샌들 안에 들어있는 조그맣고 하얀 발만 보기”로 한다. 그러다 ‘남자’가 은행문을 나서려다 ‘여자’를 돌아보며 “딸기가 먹고 싶”(p.40)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우리는 <몸>에 나타난 ‘남자’의 의식의 추이를 따라간 셈인데, 이를 통해 그의 페티시즘적 의식 작용과 함께 그가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남의 처음부터 ‘남자’는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이었으며, 이때 ‘여자’의 몸은 성적 대상 그 이상의 가치를 갖지 않는다. 여기에는 앞선 논의에서 반복해서 살펴보았던 ‘먹다’라는 언술 행위의 의미를 통해서 그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로는 ‘남자’의 직업과 ‘여자’의 직업을 빼놓을 수 없다. ‘남자’는 잡지에 인터뷰 기사를 기고하는 일을 한다. ‘여자’는 누드 모델 일을 하고 있다. ‘남자’는 인터뷰 인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 그러니까 비교적 주체적 입장에서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반면, ‘여자’는 화가 앞에서 화가가 원하는 포즈를 취해야 하는 다분히 수동적인,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들은 각자 일을 통해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남자’는 그가 인터뷰한 성악가의 죽음에 접한다. 그 성악가는 성대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남자’는 성악가가 자살한 원인을 잃어버린 목소리에 둔다. ‘남자’는 성악가에게 있어서 그의 실존의 근거는 바로 목소리이며, 이것의 부재가 곧 성악가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반면 ‘여자’는 자신의 벗은 몸을 그리는 화가의 입을 통해 성악가의 죽음을 접한다. 화가는 ‘여자’에게 “자네 벗은 알몸을 보고 있으려니 그 사람 생각이 났”(p.154)다고 말한다. ‘여자’에게 화가의 말은 죽음에 관한 하나의 화두가 된 셈이고, 그리하여 죽음에 관해 ‘여자’는 사유한다. 그리고는 이내 죽은 할머니의 알몸을 떠올리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남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부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성악가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목소리가 죽음을 불러일으켰듯이 자신에게 있어서 ‘여자’의 부재는 자신의 죽음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로 여기고 있다. 그는 늘 ‘여자’의 부재를 못 견뎌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가 있다. 항상 혼자이지만 어느 때는 그게 몸서리치게 두려울 때가 있다”(p.65.)라든가 “남자는 여자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본질적인 망설임이다”(p.84.)는 진술 등이 이를 증명한다. 반면 ‘여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할머니처럼 늙어버린다”(p.171.)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 타인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 머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 ‘여자’는 늙어버린 몸 때문에 타인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서 떠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이들은 죽음으로 치닫는다. ‘남자’는 ‘여자’의 부재를 견딜 수 없다. ‘남자’는 ‘여자’를 죽여서라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다는 욕망으로 충만해 있다. 그래서 ‘남자’는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몸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p.194.)을 원했기 때문에 죽음을 수용한다. “괜찮아, 그래, 우린 죽는 거야. 우린 이렇게 사랑하는 거야. 행복해”(p.197.)라는 무의미한 말들을 교환하면서.

그러나 그들의 사랑과 죽음은 맹목적인 것에 불과하다. 맹목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과 죽음에는 그 어떠한 개연성의 개입 여지도 없다. ‘남자’는 ‘여자’의 부재를 못견뎌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자’의 몸의 부재를 못견뎌한 것이다. ‘여자’가 외출할 때 ‘남자’가 “몸만 두고 가면 안돼?”(p.25.)라고 묻는다든가, “여자는 어느날 찾아왔고 언젠가는 몸 하나만 달랑 들고 떠날 것이다. 남는 게 없었다”(p.173.)라는 진술이 이를 증명한다. ‘남자’가 사랑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몸이라는 점에서 ‘남자’는 ‘여자’를 성적 대상의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각 대상으로만 존재해왔던, 그래서 지각 주체로서의 복원을 의미하는 몸담론의 차원에서 보면 결코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여자’ 또한 자신의 몸을 타인의 시선에 수동적으로 보이기만을 바라는 욕망의 도구로만 여기고 있다. ‘여자’는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의 인식 체계 내에서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몸담론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미인>은 <몸>과 비교할 때 보다 더 통속적인 서사 구조를 취하고 있다. <미인>에서의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치정을 둘러싼 삼각관계가 그 근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여자의 연인’이 가로놓여 있다.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여자의 연인’에게 질투와 혐오감을 동시에 갖게 된 ‘남자’는 급기야 ‘여자의 연인’을 죽이고 그녀와 함께 밀월여행을 떠난다. 밀월여행지에서 ‘남자’는 ‘여자’를 애무하다가 그녀 또한 죽인다. 이들 죽음은 <미인>의 전체 서사 구조 속에서 유기적으로 호응하지 못한다. ‘여자’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작 <몸>에서는 그래도 ‘성악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지닌 부재의식과의 관련성 속에서 비교적 죽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려 하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원작의 경우와 같은 이해의 코드가 생략된 채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의 죽음은 치정에 얽힌 비극적 결말로 구조화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들 작품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문제는 피상적으로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 그러니까 부재의식과의 관련성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듯 여겨지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것은 맹목적인 사랑의 집착, 성적 쾌락에의 경도라는 지점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이들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으로 지적된다. 더욱이 이들 작품은 겉으로는 몸담론과 성담론을 표방하고 있지만, 몸의 해방이라는 의미로서의 몸담론과 성의 해방이라는 의미로서의 성담론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주체성이 생략된 채 오로지 지각 대상으로 머물고 있는 몸을 보여주고 있으며, 맹목적인 성적 쾌락에만 경도되어 있는 인물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물로 구체화되어 성적 대상으로 비춰진 ‘여자’의 몸은 상품화되어 소비되고 있는 몸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에서는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반대로 이들 작품은 이러한 모습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우리의 몸은 상품화되고 소비되는 몸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다시금 푸코의 주장을 떠올리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성에 관한 금기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하는 성담론이 이와 동시에 성에 관한 또 다른 금기와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 말이다.



함종호․1970년 출생

․서울시립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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