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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특집/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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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48회 작성일 08-03-0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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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젊은 시의 지형도
젊은 시인들의 의식세계
―넓이에의 강요․1
김남석|문학평론가


1. 달라진 시인들
최근 시인들의 행보를 보면, 이전 세대와 크게 달랐다는 90년대 시인들과도 격차를 보이고 있다. 90년대 시인들은 소위 말하는 ‘신세대 작가’ 진영에 속했다. 신세대 작가에 대한 정의는 너무 다양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항이 합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성 중심/감성 중심, 
옳고 그름으로 판단/좋고 싫음으로 판단, 
논리적 심사숙고/감각적 판단에 따른 행동, 
미래의 득실이 기준/당장의 호오(好惡)가 기준, 
동질 지향 가치관/이질 지향 가치관,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다’/‘남과 다르게 살고 싶다’, 
자기 절제/자기표현, 
남이 창조한 가치에 동의/스스로 가치 창조, 
남에 대해 의식함/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려는 자기 지향성, 
억제된 감성/해방된 감성, 
보고 듣고 구경하던 정적 문화/직접 참여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동적 문화, 
소유에 대한 욕구/사용가치의 중시

위의 분류는 이전 세대/신세대(90년대)의 특징을 다소 도식적으로 가름한 것이다. 이 분류표를 제시한 사람은 정근원인데, 그는 90년대의 신세대를 영상 문화 세대로 지칭하며, 신세대의 특징에 대해 논의된 사항들을 보기 좋게 정리했다. 이러한 분류와 정리가 다소 도식적인 것은 사실이라고는 하나, 이러한 비교를 통해 그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90년대 신세대의 특징을 한눈에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문학적 신세대인 90년대 작가군에 대입할 경우, 상당한 가감을 요한다. 또한 작가군 중에서도 비교적 소설가군에 잘 들어맞고, 시인들에게는 덜 들어맞는 단점도 있다. 아울러 문학적 세대는 일반적 세대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신세대의 경향에 가까운 경우이다. 그럼에도 이 도표는 2000년대 이후 세대의 특징을 들여다보는 유효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2000년대 시인들에게 다소 늦게 그리고 다소 엉뚱하게 90년대 신세대 작가군이 구가했던 위의 특징들(‘/’의 오른쪽 특징)이 뚜렷하게 감지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참고삼아 말한다면, 문학은 언제나 ‘감성 중심’적인 특징이 있었고, ‘미래’를 기준으로 하기 보다는 ‘현재’를 중심으로 했으며, ‘타자’의 논리보다는 ‘자아’의 개성을 중시해 왔다. 문학은 어떠한 논리보다도 비논리적인 감성에 의존했고,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의 가난과 소외를 감수하는 선택이었으며, 고유한 문학작품과 작가는 모두 자아가 강하고 특이한 경우였다. 그러니 90년대 신세대의 특징은 대체적으로 ‘일반 사람/ 문학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위의 도표가 2000년대 이후 시인들에 대한 유효한 관찰 근거가 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것은 본론을 통해 검증해 나가겠지만, 서론에서 대체적인 윤곽만 가지고 말한다면, ‘전통 지향’, ‘관습 지향’, ‘타자 지향’에서 멀어지려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해서라도, 새로운 형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해지고 있다. 기존의 시가 의미와 형식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합의된 생각 위에 있었다면, 요즘의 시 중에는 의미와는 별도로 형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개성적인 생각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남들이 읽고 이해하는 것에 시의 최소 임무가 있다는 식의 생각도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남들이 읽지 않아도 ‘내’가 쓰고 발표하면 가치 있다는 생각이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2000년대 시단 전부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2000년대 시인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만의 특징도 아니다. 가령 문태준, 박성우, 손택수와 같은 젊은 시인들은 이러한 경향에서 빗겨 있으며, 이상과 같은 30년대의 시인은 오히려 2000년대 일군의 시인군과 더 유사성을 맺고 있다. 한 시인의 시와 시집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와 ‘이해될 수 있는 시’가 뒤섞여 있다. 나는 이러한 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검증을 해온 적도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 시대의 어떤 특징 시인들에 대한 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 시단에서 그 자리를 넓혀가는 어떤 경향과 사조에 대한 개괄적인 탐색이 되었으면 한다. 편의상 ‘젊은 시들’이라고 묶은 2000년대 전반기의 시들 속에서 새로운 징후와 그 징후의 밑자리를 훑어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나아가서는 어려운 시와 현란한 언어들을 구사하는 젊은 시인들의 의식 세계를 구경하려는 목적도 함께 담고 있다. 

2. 집약 구조/확산 구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드라마(희곡)의 구조는 세 부분의 결합으로 이해되었다. 처음, 중간, 끝. 처음은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오지 않는 상태에서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무엇인가가 와야 하는 요소이다. ‘처음’ 다음에 필연적으로 와야 하는 그 무엇이, 중간이며, ‘중간’은 그 앞과 그 뒤에 무엇인가를 필연적으로 동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끝’은 그 앞에는 무엇인가 와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오지 않는 요소여야 한다. 
이 평범한 이야기는 결국 부분이 전체를 위해 희생, 봉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부분이 자립적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구조를 통해 가감되고 절제되고 변형되어야 함을 뜻한다. 부분의 자립성이, 전체의 유기성(통일성)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까. 
하지만 2500년 드라마 역사에서 이러한 법칙은 절대적으로 통용되지는 못한다. 많은 작가, 연출가, 그리고 관객과 평론가들이 이러한 규칙에서 탈피한 작품들을 선호하기 시작한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연극도 어떤 의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 법칙을 어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체의 통일성도 중요하지만, 부분의 자립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며, 어떤 경우에는 전체의 구조와 의미망이 망실되는 한이 있더라도, 부분의 개성과 독자성을 살려야 한다는 의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흥미롭고, 각 장 별로 완성되어 있지만, 전체의 틀에서는 그 구조와 미학과 정서와 의미가 통일되지 않고 아예 상충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드라마도 적지 않게 탄생했다. 그 중에서는 지금까지 걸작이라고 말하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적 성향을 지칭하기 위해서 집약적 구조(전체의 통일성)/확산적 구조(부분의 자립성)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개념을 정립한 바 있다. 

2000년대 이후의 우리 시를 보면, 이러한 이분구조가 혼합되어 전개되는 느낌이다. 2000년대 이전의 시가 대체적으로 부분이 전체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며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전체라는 생각이 우세했다면, 2000년대를 통과하면서 이러한 생각은 변모한다. 부분이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설령 그 결과 전체와 부분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특정 부분이 지나치게 확대된다고 해도, 앞의 것과 뒤의 것이 관련 없다 해도, 부분의 자립성으로 그 미학이 성립될 수 있으며 이러한 미학을 구사하는 것은 이 시대 젊은 시인들의 보편적인 정서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발언이 제법 우세해졌다. 그리고 주제나 의미는 이러한 방식 속에서 찾아지면, 그만이고, 설령 찾아지지 않더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점차 팽배해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특정 영역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시인들 일단의 생각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젊은 시인들일수록 시어를 다듬고 문장을 깎고 문단을 덜어내고 구조를 맞추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회의적이며, 설령 이러한 작업을 중시하는 이들일지라도 그 방식이 예전과는 크게 다르고 그 비중이 격감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일반적으로 통용될 것으로 여겨진다. 연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집약적 구조가 아닌 확산적 구조에 대한 관심과 주장이 팽배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거북이가 사라졌어 거북이가 사라져서 나는 내 거북이를 찾아 나섰지 거북아 내 거북아 그러니까 구지가도 안 불렀는데 거북이들이 졸라 빠르게 기어오고 있어 졸라 빠르게 기는 건 내 거북이 아냐 필시 저것들은 거북 껍질을 뒤집어쓴 토기 일당일걸? 에고, 거북아 내 거북아 그러니까 내가 거북곱창 테이블에 앉아 질겅질겅 소창자를 씹고 있어 씹거나뱉거나말거나 토끼들아, 너희들 내 거북이 본 적 있니? 거북이는 바다 속에 거북이는 어항 속에 아이 참, 창자 뱃속에 든 것처럼 빤한 얘기라면 토끼들아, 차라리 하품이나 씹지 그러니 거북아 내 거북아 그러니까 거북하니? 속도 모르고 토끼들은 활명수를 내미는데 내 거북은 정화조 곳 비벼진 날개의 구더기요정 날마다 여치를 뜯어 먹고 입술이 푸릇푸릇한 내 거북은 전적으로 앵무새만의 킬러 내 거북은 바지를 먹어버린 엉덩이의 말랑말랑한 괄약근 내 거북은 질주! 질주밖에 모르는 저 미친 마알…… 오오, 예수의 잠자리에 사지가 찢긴 채 매달린 저 미친 말을 내 거북은 미친 듯이 사랑했다지 난생처음 사 랑이라고 발음하면서 내 거북은 얼마나 울었을까 그러니 이제 그만 뚝! 하고 머리를 내밀어라 거북아 내 거북아 그러니까 왜 이래 왜 이래 하면서 텔레비전에서 거북이 세 마리가 노래하고 있어 저렇게 노래 잘 하는 건 내 거북이 아냐 내 거북은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려서 점자처럼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르지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껴안고 뒹굴어야 온몸에 새겨지는 바로 그 쓰라린 노래 자자, 이래도 안 나오면 네 머리를 구워먹을 테야 거북아 내 거북아 그러니까 삐친 자지처럼 내 거북이 머리를 쭉 내밀고 있어 선인장을 껴안고 선인장 가시에 눈 찔린 채 너 지금 뭐하고 있니 언제나 선인장이 있어 선인장에게 죄를 묻고 마는 내 거북이, 불가사리처럼 내 안에 포복해 있는 붉은 네 그림자

무척 긴 시이다. 그러나 처음과 중간과 끝을 구별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일단 화제별로 이야기를 분해해보자. 거북이가 사라졌다→「구지가」를 불렀다→거북이가 오지 않고 토끼들이 왔다(고전설화 「토끼와 거북이」)→거북곱창에 있다→토끼들에게 거북이의 거처를 묻는다(고전설화 「토끼와 거북이」에서는 거북이가 토끼의 거처를 묻는다)→‘거북하냐’고 묻는다→거북이를 성적인 것과 연결시킨다→거북이를 예수의 어떤 부분과 연관시킨다(의미 파악 안 됨)→다시 「구지가」를 부른다→텔레비전에서 노래하는 거북이 이야기를 한다(텔레비전 프로그램인가 싶다)→잠자리에서의 행위가 거북의 머리를 상징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섹스 중일 수 있다)→거북이가 자신(화자)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의 토막 속에서 거북이는 많은 연상 작용들과 교류한다. 이것은 일종의 환유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이것이 환유냐 연상 작용이냐 혹은 에피소드의 취합이냐가 아니라, 이러한 구조가 과연 전통적인 구조의 대체물이 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비단 이 시만의 문제가 아니고, 김민정만의 문제가 아니며, 젊은 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위의 시(구조)가 구조적으로 처음/중간/끝을 맞물리게 하고 그 사이의 요소들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기존의 문학 문법(시 문법 포함)에 대항할 논리를 갖추고 있는가? 거북에 관련된 기억과 정보와 연상들을 무작위로 끌어 모은 구조로는, 진정한 확산구조라고도 할 수 없다. 확산구조는 부분의 자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화자가 거북이를 토끼라고 부르는 이유가 납득이 되는가? 예수의 어떤 부분과 거북의 특성이 연결되어 하나의 부분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보다 정치하고 완성도 높은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점검되어야 할 사항이겠지만, 김민정의 경우를 통해 본 젊은 시인들이 사용하는 시 어법 체계는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안일하게 내세운, 그리고 확대시켜 온 확산구조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완전한 자립성을 갖추지 못하고 부분이라는 명의로 전체의 틈새에 마구 둥지를 튼 모습이 그러하다. 이것은 처음/중간/끝의 유기성을 강조하고, 절제와 수련을 중시하며, 간결미와 체계성을 미덕으로 여겨 온 전통적 미학에 대한 반기 혹은 대항 의식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이러한 확산구조의 본질적인 의도가 무엇인가이다. 젊은 시인들일수록 시의 메시지, 전언, 주제, 의도, 의미, 세계관, 작가의식에 대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본질일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의도를 묻는 것은 그 자체로 자체 모순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사항은 확산 구조의 시를 건축하면서 부분을 구획하거나 전체를 설계변경하거나 특정 현상을 강조하는 이유 정도는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던 간에, 확산적 구조의 작품(시)을 쓰려는 이들이 견지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자 작가의식일 것이다. 
위의 시를 환유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구지가」, 토끼(「토끼와 거북이」, 거북곱창, 속이 ‘거북하다’는 물음, 섹스 그리고 그 외의 자질구레한 부분들을 묶는 것은 ‘거북’이다. 그런데 이 거북은 의미상의 기호로서의 거북이 아니다. 예를 들어 ‘거북하다’의 서술어와 동물 ‘거북’은 그야말로 어떠한 의미상의 동질성도 없다. ‘거북곱창’의 상호 역시 ‘거북’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만, 동물 거북이와는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북과 관련된 소재(삽화)로 취합한다. 
이러한 연결 방식은 의미의 유사성과 통일성에 기초하는 은유가 아니라, 의미의 연접성 내지는 인접성에 근거하는 환유의 방식을 도용했기 때문이다. “사과는 길어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식으로 나가는 어법이자 의식인 셈이다. 역시 문제는 이러한 어법과 의식이 과연 시로서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가이다. 가장 큰 장점은 기발함일 것이다. 화자가 거북곱창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거북이가 나와서 노래를 하고 있고 그 거북이 노래를 들으니 토끼 생각이 나고 토끼 생각은 곧 섹스를 연상시킨다는 이상한 논리는 기발한 논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의미는? 그 시를 읽고 우리가 찾아야 할 마음의 깊이는?
실제 문단에서 김민정과 같이 극단적인 경우는 쉽게 찾기 어렵지만, 젊은 시가 환유적 기교를 활용하여 시상을 전개하는 것을 목격하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러한 환유는 시어와 시어, 문장과 문장, 연과 연, 그리고 의미 단락과 의미 단락을 연결하는 간편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부분과 부분을 연결하는 것에 고심하고, 전체를 이루는 부분의 역할을 숙고하는 측면에서 보면, 환유에 의한 간편한 시상 전개 방식은 시의 책무를 상당 부분 망각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그 긍정적인 기능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이러한 문제가 긴요하지 않은 부분을 비약시킨다거나 장광설을 늘어놓아 주제 의식을 흐리는 부차적인 폐해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환유에 의한 시상의 전개가 재기 넘치는 발랄함을 선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재기의 밑바닥에 시를 쓰는 진정성 역시 잠재되어야 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할 것이다. 

3. 조각의 시어/소조의 문장
이민하의 시는 젊은 시인들이 시어를 조직하는 방법의 한 단면을 명료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는 나를 애인이라 불러요 거미줄 쳐진 내 몸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그를 거미라 불러요 아흔 개의 다리로 옭아매는 그를 무심하게 키워요 그는 나를 불구라 불러요 팔레트에 물감만 뒤섞는 손을 망치로 탁 탁 두들겨 화병 속에 꽂아 두어요 나는 그를 마부馬夫라 불러요 그의 허리를 감고 창가로 달리면 그는 시커먼 망토로 창문을 불 질러 버려요 그는 나를 피아노라 불러요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 이어지고 끊어지는 나의 숨결을 아주 좋아해요 새파랗게 비가 오는 날엔 그와 나의 몸에서 우수수 피아노 건반들이 떨어져 내려요
그는 나를 ■라 불러요 나는 그를 □라 불러요 내 몸에서 반음들을 빼먹으며 그는 나를 사랑해라고 불러요 나는 그를 몰라라 불러요 그는 나를 영원히라 불러요 나는 그를 못살아라 불러요 그는 나를 ø라 불러요 나는 그를 ∽라 불러요 그는 나를 영안실의 국화라 불러요 나는 그를 그래라 불러요 그는 나를 ⇦라 불러요 나는 그를 라 불러요 그는 나를 부르기 위해 종일 좇아다녀요 나는 그를 버리기 위해 종일 좇아다녀요 서로의 모습은 볼 수 없어요

이 시는 기본적으로 반복과 대칭을 사용했다. “그는 나를 **라 불러요”와 “나는 그를 **라 불러요”를 교대로,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에 들어가는 시어가 바뀌고, ‘**’라고 부르는 이유 혹은 정황을 설명하는 시구(문장)가 들어가고 있다. 다소 변화가 있지만, 이러한 시어와 시구와 문장의 패턴은 시 전체에서 활용된다. 
과거의 시는 시(어)의 절제(節制)를 높이 여겼다. 시는 단어와 문장의 경제적인 활용을 중시하는 장르였다. 불필요한 것을 줄이고 반복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 가장 작은 그리고 가장 적은 시어로 가장 큰 효과를 유도하는 장르였다. 그래서 시어를 조탁하고 시구를 압축하고 문장을 간결하게 하는 시 창작 방법이 대세였다. 전통적인 시들인 이러한 미덕을 염두에 쓰고 지어졌으며, 실제로 이러한 창작법은 감상하는 이들을 감탄시키는 놀라운 정서적 환기를 가져왔다.
그런데 위의 시는, 아니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어를 늘리고, 상황을 길게 기술하고, 어찌 보면 비슷한 시어를 확대 재생산하여 시의 품과 길이와 정보를 확대 팽창시키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에 그러한 시가 없었다거나 현재에는 짧은 시를 무조건 도외시한다거나 좋은 시가 되려면 반드시 반복, 대칭, 확대재생산의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형도나 이성복도 시어의 운율을 맞추고 전체 구조를 조율하기 위해서 반복과 변주를 사용했다. 그 이전의 백석이나 소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유별나게 느껴지는 것은 문장을 붙여나가면서 시를 짓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의 시인들은 문장을 깎아 나가면서 마치 조각을 하듯 시를 만들어내었다. 수많은 시어의 바다에서 정수가 되는 시어를 찾기 위해서 시어를 배제해 나갔다면, 젊은 시인들은 간략한 상황일수도 있는 어떤 정황을 일부로 길게 그리고 시어들을 마구 붙여서 서술한다는 점이다. 
위의 시에서도 그러한 혐의가 발견된다. 화자는 영안실에 있는 것 같고, 화자가 그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정황 자체가 모호해서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화자는 지금 자신과 멀리 떨어진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화자와 그는 거미와 거미집처럼 살았고, 비 오는 날의 피아노 치는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자는 과거의 추억 혹은 사랑에 대한 어떤 연상을 서술하기보다는 단편적으로 끊어내어, 위에서 말한 대칭과 반복의 구조 속에 삽입시켰다. 또한 시의 후반부에는 그들이 서로 나누었던 혹은 나누고 있는 대화들을 분절시켜 역시 대칭과 반복의 구조 속에 흩으러 뜨려 놓았다. 그 중에는 해석 불가능인 기호와 상징도 있다. 피아노 건반이나 화살표와 같은 것들은 정의하기 어려운 시어들이다. 
결국 화자는 그와의 추억 혹은 사랑(부제목을 참조하면 ‘관계’)을 다양한 추억과 단어와 기호와 문자로 반복 변주하며 표현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움과 원망 그러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갖게 되는 관계를 그리게 되는데, 일부로 늘리고 일부로 시어들을 확대재생하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시였다면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이 상황을 기술하는 편에 훨씬 큰 역할을 두었겠지만, 젊은 시인들은 시어의 뜯어 붙이기 즉 진흙을 붙여 그릇을 만들듯, 시어를 뜯어 붙여 하나의 소조 작품을 만드는 방식을 즐겨 택한다. 

4. 구심적 구성/원심적 구성
소조의 문장을 사용하여 시를 만들게 되면, 필연적으로 소재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원심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시어들이 의미의 중심을 향해 일관되게 정렬되는 구심적 구조와는 차이를 견지하게 된다. 

나는 Ⅹ이다
탄생 격파 유사 인접 와류 파동 사랑 조정 이해 단절 횡단 분류 변증법 잡종 증상 현상 사물 통증 여백 분단 기원 기계 파열 순환 불멸 텍스트

환유 : 한 번의 생략을 위하여
탄생―인계철선에 발이 걸려 먼지처럼 흩어진 남자의 흩어진 나날들 누혜는 눈이 없어요 155마일을 걸었을 뿐이에요
격파―사인은 알 수 없어요 파열음에 불과한 물리 현상이 있었다는 보고는 사실인가요 얼굴에서 땀이 흘러요 복더위에요
유사―흘러내리는 그대의 얼굴 상처는 왜 자꾸 덧나는가 염증은 왜 지독한 슬픔으로 바뀌는가 화농은 왜 차가워지는가
인접―나는 쌍칼이다 한 팔이 잘려도 다른 팔로 칼을 휘두를 수 있다 한 손의 여백을 다른 손이 침범한다 완벽에 가까운 투명으로 나부끼는
(중략)
파열―찢어지는 아픔을 아시나요 이산가족들이 흔히 겪지요 엄마의 고통이지요 아들의 아픔이기도 하구요 우리 엄마는 마조히스트예요
순환―미스터 Ⅹ가 걸어와요 프로페서 Ⅹ가 걸어와요 ⅩⅩ가 걸어와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오 나의 사랑스런 피조물이라고 경탄해요
불멸―이승을 휘덮은 그물의 매듭마다 그대의 눈 삼라만상 속의 그대 나의 이미지는 그대의 몸 어디에 남아 있나 어떤 눈이 날 쳐다보나
텍스트―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는 돈키호테 이 도시의 모든 술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한 밤의 보헤미안의 모든 잡종의 계보가 여기 있다

이 시의 제목은 ‘끈―이론 게임’이다. 부제가 재미있는데, “26차원 우주에서 미지수 Ⅹ에 어울리는 명사는‘이 그것이다. 초끈이론은 과거 아인슈타인이 만들다가 완성하지 못한 이론이다. 우주를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할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인데, 이 이론에서 우주는 입자가 아닌 매우 작은 진동하는 끈으로 이루어졌다고 간주된다. 이 끈이론이 옳다면 우주는 10~11차원으로 계산되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26차원이라는 견해도 성립될 수 있다. 
이 이론은 매우 어렵고 가정이 심하기 때문에, 그 과정과 결론을 명확하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다만 끈 이론으로 정의되는 차원은 서로 꼬여 있고, 원자보다도 작은 상태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정도만 확인할 따름이다. 이 정도 지식으로 위의 시를 풀어보자. 어차피 위의 부제가 이 시 전체를 해석하는 길잡이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시인은 머리말 격으로 “나는 Ⅹ이다”는 전제를 달고, 단어(명사)들을 나열했다. 탄생부터 텍스트에 이르는 26개의 단어는 본문에 해당하는 ‘환유 : 한 번의 생략을 위하여’에서 차례로 설명된다. 그런데 위에서 예로 든, 8가지 명사를 볼 때, 시인의 설명을 우리는 설명으로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탄생’과 그 설명(“인계철선에 발이 걸려 먼지처럼 흩어진 남자의~”) 사이에는 자의적인 관계만 성립되고 있고, 다음 설명 대상인 ‘격파’와 그 다음 설명 대상인 ‘유사’가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따지면 왜 26개의 단어인지, 그것이 과연 미지수에 해당하는 것인지, 이러한 단어의 설명들을 다 읽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아니, 전혀 알 수 없도록 처음부터 조직된 시이다. 우리가 이러한 시를 읽으면서, 이러한 단어와 설명과 조직과 제목을 읽으면서 해독을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끈 이론 속의 세계를 뜻한다고만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젊은 시인들의 시 속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며, 점차 증가일로에 있다는 점이다. 시인들은 제시된 단어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 정서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나열하고 단어의 외피를 풍성하게 하는 작업에 익숙하다. 아니 거부감 없이, 시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거대한 조직이 되고 그래서 그 안에서 시어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시의 외형이 늘어나면서 중심이 비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할까.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중요한 속성인 의미 부재 혹은 텅 빈 중심을 상기시킨다. 젊은 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는 중요한 일이 아니며, 이 글의 논점도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처럼 의미의 산포와 그 중심 부재를 주장하고 싶다면, 그 이전에 자신의 시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군의 시인에서 시작한 움직임이 더욱 거세게 시단을 몰아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움직임 자체에 대한 반성과 토론이 곁들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늘어난 외형은 의미의 중심을 지운다는 점에서 소조형 글쓰기에 해당하며, 결과적으로는 시의 원심적 성향을 보여준다. 시는 바깥으로, 부피상의 확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요즘 시들이 과거의 시보다 ‘줄글’이 많아지고, 이야기를 길게 함축하게 되며, 어떤 의미에선 병렬적인 나열이 강해지는 것도 결국은 시의 구조 자체가 구심적이 아니라, 원심적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5. 선조성/다성성
시는 대개 선조적인 문자의 흐름을 타고 시상을 전개하기 마련이었다. 앞과 뒤가 연결되고, 부분과 부분이 긴밀한 연관성에 의해 묶여졌는데, 요즘 시는 이러한 시의 일반적 관례를 어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글자와 의미의 선조적인 진행을 방해하는 장치를 일부로 매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늘의 뜨거운 꼭지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을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2005년 시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여장남자 시코쿠」의 일부이다. 솔직히, 나는 이 시의 문맥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겠다. 많은 그럴듯한 해석이 있는 줄로 알지만, 그것이 이 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나의 생각이다. 다만 이 시는 나에게 재미있는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시 읽기의 선조성(線條性)을 방해하는 어떤 장치나 형식적 규제이다. 
인용된 대목에서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최대한 세 개이다. 도마뱀을 관찰하는 시선이 하나이고, 괄호 안의 지문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음성이 다른 하나이고, 도마뱀의 것으로 보이는 울림이 마지막 하나이다. 
이 시에서 ‘나’라고 지칭되는 인물은 여장남자인 것 같다. 이 ‘나’가 도마뱀을 관찰하고 있으며, 늙은 여인과 개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그대에 대한 찬사나 질투를 늘어놓고 있다. 
반면 괄호 안의 지문은 도마뱀의 음성으로 여겨진다. 3연의 괄호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8연의 괄호는 시적 화자가 도마뱀이라는 인상을 준다. 다시 ‘꼬리가 자라고’라는 구절은 꼬리를 잘 분리시키는 도마뱀의 속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2연, 8연, 10연의 괄호 안의 목소리가 같은 인물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으며, 만일 그렇다면 3연은 ‘내 손’은 잘린 꼬리를 말하는 지도 모른다. 
정리하면 시적 화자는 여장남자로 보이는데, 그 여장남자의 목소리에 괄호가 생겨나면서(괄호는 시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부호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다른 목소리가 틈입한다. 그 목소리는 도마뱀의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3연의 목소리와 8연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것일 수 있다(그렇다면 3개의 목소리가 된다).
황병승은 자신의 시에 괄호를 설치하면서까지 타자의 목소리를 섞으려 했다. 단일한 정서와 감각을 지닌 서정적 자아가, 마음의 흥취와 시정을 선조적인 형태로 집약시키려는 기존의 시와 고의적으로 변별하려 한 셈이다. 도마뱀의 목소리를 넣는 것은, 도마뱀을 보고 있었던 자의 입장에서 보면 ‘역지사지’의 시점이 도입되는 효과를 낳는다. 
이 시의 의미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지만, 시인은 단일한 서정적 화자가 아닌 다성성의 화자를 등장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시상이 흩어지고 선조적인 흐름이 파괴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괄호의 병기와 시점 혼란을 통해, 시상의 혼종적 양상을 추구했다. 
과거의 시가 도도한 내적 정서의 흐름을 으뜸으로 쳤다면, 지금의 젊은 시는 분열과 병치의 양상을 내심 중요한 미덕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시 안에 마치 여러 개의 시점과 목소리가 존재하는 듯 한 인상을 주고, 단일한 주제나 소재로 묶이는 것을 거부하는 듯 한 인상을 준다. 

6. 통합적 욕망/분열적 사유
근대까지 시는 인성 도야의 기틀이었고,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었으며, 세상과 타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식견의 총화였다. 그러다 보니 시인이 된다는 것은 완성된 인격체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세상을 걱정하는 지사의 풍모를 따르는 것이며, 흥취와 미학을 통합한 예술인의 자세를 갖추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학관은 근대 이전으로 가면 더욱 철저했으며, 근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시인의 길은 지사와 예술가와 성숙한 철인을 아우르는 통합적 욕망의 길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시관에서 탄생한 시 역시 통합적 사유가 강했다. 사물을 생각하는 힘, 주변을 돌아보는 힘, 세상을 보고 질서를 바로잡고 미래와 마음의 안식을 이끄는 힘이 시 안에 있기를 바랐으며, 그러한 힘들로 인해 시는 자기 통합의 의지가 강한 장르가 되고자 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흩어진 생각의 중심을 건설하고 여러 개로 나뉜 자아의 페스소나를 모으며 자아의 안정된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내’ 안의 ‘나’를 찾아 그것을 ‘나’로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시는 흩어진 그리고 닳아빠진 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은 여행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최근 시를 보면, 이러한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1973년의 나가 슬몃 2000년의 내 귓불을 어루만진다 미처 펴지지 않은 손가락에 흠칫 놀란 2000년의 나는 1995년의 나한테로 도망 온다 1995년의 나는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중이다 도시의 모든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눈보라가 몰아쳐 나온다 1980년의 나는 1995년의 나를 다독거리지 않는다 1995년의 나가 1980년의 나를 쏘아본다 눈빛이 쨍그랑 깨진다
1980년의 내 구멍 난 양말 틈으로 자라목처럼 삐져나온 엄지발가락 1998년의 나가 1980년의 나의 조금만 발가락을 핥는다 꺄르르 햇빛처럼 1980년의 나가 부서진다 2001년의 나가 자취방으로 기어들어온다 술에 취해 1988년의 나가 슬몃 다가간다 2001년의 나와 살을 섞는다 저항 없이 꽃잎들이 들이친다 살얼음을 깨 쌀 씻는 소리 들린다 싸르락싸르락싸르락
2005년의 내 손등이 얼어 터진다 영문도 모른 채 배가 불러온 2005년의 나는 2000년 전 나의 알을 조산(早産)한다 알껍질을 깨자 생기다 만 나들의 팔다리가 흩어진다 2005년의 나는 팔다리를 수습해 제 몸에 묻는다 2040년의 나가 얼굴의 모든 주름으로 2005년의 나를 비웃는다 2005년의 나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난다 몸에선 조금씩 무덤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이 시는 시적 자아의 여러 분신이 등장한다. 가령 1973년의 나, 1995년의 나, 2001년과 2005년의 나, 그리고 2040년의 나 등이 그것이다. 시인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1973년의 나’는 태어난 시점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고, ‘2005년의 나’는 시가 집필되던 시점을 가리키는 것 같으며, ‘1995년의 나’는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이 시에서 추억되는 공간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 같은 이유로 보면 ‘2040의 나’는 황혼 무렵에 도달했을 미래의 자신을 미리 상정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시는 태어난 해, 활동하는 해 사이의 괴리감을, 몇 년 전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상상을 가미해서, 한 시점 한 지면 한 자아에 몰아넣은 경우이다. 
그러다 보니 이 시는 자아 분열 증세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시적 화자는 과거를 생각하다가 슬쩍 놀라고,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고, 그런 자신의 한 부분을 냉정하게 대하며, 때로는 서로 위안삼아 장난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시를 통해 자아를 성숙시키거나, 성숙되지 못한 자아에 대해 반성하던 기존의 시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젊은 시들은 자아의 분산 상태를 굳이 통합해야 할 당위성을 피력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내적 분열 상태를 인정하고 그러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시로 표출시킨다. 총체적 사유나 자기 통합적 욕망 대신에, 주체 분열의 문제를 심상하게 여긴다고 할까.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진솔한 시 정신의 발로로도 볼 수 있다. 시가 전인적 교양과 생각의 도구라고 할 때, 시는 내가 아닌 나의 바깥 세상에 작용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시를 통해 나는 스스로 완성되고, 완성된 나는 다시 세상의 질서를 바라잡고 지식으로 교화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 시를 읽는 이들이 사유와 감각의 중심을 확인하고, 시의 질서와 힘으로 복귀하려는 욕망을 품도록 종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젊은 시들은 분열을 통합하려는 욕망을 애초에 포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자아 분열이 당연한 현상이며, 이러한 분열 상태를 노래하는 것이 시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시가 ‘자아’이라는 출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아의 경계 안에서 맴도는 부작용도 낳게 된다. 그러한 시를 읽는 사람들도 내면의 혼란을 일단 확인하는 것에 위안을 찾아야 한다. 시의 정화와 교화의 힘은 사라지고 대신 자신을 투시하는 솔직한 시선만 남게 되는 셈이다. 
분열의 양상을 보인 시가 비단 2000년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예를 들지만 이상의 경우에 우리는 주체의 분열 양상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외면적인 자유를 획득한 90년대 이후의 시에서도 이러한 분열 양상은 심심치 않게 확인된다. 
그럼에도 이 시를 비롯한 많은 젊은 시에서 분열 양상이 주목되는 것은,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의 분열상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이상은 거울 속의 자신이 참 딱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김경주는 ‘슬몃’ 다가갈 뿐이다. 감정 역시 ‘슬몃’ 품어본다고 할까.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내 안의 또 다른 자기, 알 수 없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분신은, 연민 혹은 매혹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과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다. 이것이 가장 큰 변별점이다. 또한 자아 분열의 징후가 빈번하게 그리고 두루 나타나고 있다는 점 역시 젊은 시의 변별점 가운데 하나이다.

7. 노래하기/보여주기
시는 시인의 발언이자 신념 체계이다. 시의 내용이 사실 그대로는 아니지만, 시어를 구사하고 시의 체제를 따른다는 것은 시인의 생각을 정립하여 세상을 향해 발언하는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소설도 그런 측면에서는 유사하지만, 허구라는 꾸며진 이야기 위에서 소설가가 발언한다는 점에서 시와 다르다. 비교해서 말하면, 시는 시인의 신념과 진심이 담겨 있는 언어와 정서와 미학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소설은 시인이 꾸며낸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소설가의 관점이 갈무리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시인의 발언을 드러내는 장치라면, 소설은 소설가의 발언을 숨기는 장치이다. 

네온램프로 장식된 ‘club Rainbow' 앞에서 토토가 도로시의 구두에 흰 거품을 토하며 쓰러진다 도로시는 아픈 토토를 안고 따뜻할 것 같은 네온램프의 ’R'을 만진다. 손끝에 전해오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차가움 때문에 도로시는 소스라친다. 음악에 맞추어 헤드뱅잉을 하는 소년들, 긴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소녀들, 아무도 나에게 말 붙이지 마!라는 표정들이다. 공연을 마친 ‘club Rainbow'의 전속 밴드 베이스 연주자가 무대에서 내려온다. 기타의 코드를 뽑고 있는 그에게 도로시가 다가간다. 이곳에서 나가는 문은 어디 있나요? 토토는 도로시 품에서 헥헥거리고 있다. 문이라고? 이곳엔 문이 없어. 지금, 여기를 즐기는 것뿐. 나의 토토는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여기를 즐기라니. 도로시의 눈물방울이 베이스 기타에 씌어진 ‘club Rainbow'의 ’c'에 떨어진다. ‘c'가 도로시의 눈물방울로 볼록해져 ’c'로 변하자 주위는 꽁꽁 언 겨울의 오피스타운이다. 목도리를 한껏 추켜올리고 퇴근하는 사람들, 적당한 피곤으로 절이고 알맞은 고통으로 간을 한 참치캔 같은 얼굴들을 달고 총총히 사라진다. 그들의 등 뒤로 ‘club Rainbow'의 공연 안내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이 시에는 ‘시적 화자’라는 용어보다 '주인공‘이라는 용어가 더욱 어울린다. 주인공은 도로시인데, 시인은 도로시의 모습을 통해, 혹은 도로시의 말을 통해, 시적 화자가 전달해야 할 정서의 어떤 측면을 대신 전달하도록 만든다. 마치 소설 작품의 한 부분을 보는 듯, 이 시의 구성과 기술은 허구적이고 작위적이다. 
과거에도 이야기 위주의 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를 보면 기막힌 애화들이 시 속에 엄연히 비집고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시의 어떤 구성 요소로 활용되고 있지, 시적 화자의 기능을 전적으로 양도받은 상태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시인은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 틈입해서, 신비한 마을의 전설과 실화를 옮겨주고 있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그 이야기를 옮겨주는 음성(전달자)의 신비한 감촉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조성되는 허구적 상황은 전달하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무화시키고 있다. 이야기 자체의 매력을 시의 장점으로 만드는데, 만일 그렇다면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시도 그러하다. 시적 화자는 집으로 가야 하는 도로시의 운명을 낯선 곳(club Rainbow)으로 이주시킨 다음, 그녀의 행적을 관찰하고 있다. 도로시로 하여금 시(詩)의 주인공이 되어 마음껏 이야기를 끌고 가도록 허락한 셈이다. 
도로시는 토토가 아픈 것을 보고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문제는 방법이다. 공연을 마친 연주자에게 물으니, 이곳에는 문이 없다고 한다. 문이 없다는 표현은 젊은 시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자신이 놓인 곳을 탈출하고 싶지만, 그 방법이 막연하다는 뜻이리라. 시적 화자는 도로시의 당혹스러운 상황을 묘사한 이후에, 곧 어딘지 알 수 없는 도시의 한 풍경을 묘사한다. 도로시가 있는 곳이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시를 읽는 이가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야 할 도시의 일각일 수 있다. 
유형진의 이 시가 한국 시사에 드물지 않게 등장했던 이야기 시와 다른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인의 입장에서 노래하기보다는 서술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묘사하고 서술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전자에 의한 필연적인 결말이지만, 시적 화자의 자취를 가급적 없앴다는 점이다. 젊은 시에서 이렇게 건조한 방식으로 이야기 시를 구축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에 가깝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시적 화자의 입장이나 자취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시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조합하여 하나의 플롯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 플롯을 해석하는 문제는 다시 시를 읽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는데, 그 때 독자에게 아쉬운 것이 시적 자아의 입김이다. 
위의 시를 보면, 시인은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누구나 알 수 있는) 도로시를 주인공을 삼았다. 시인의 처지가 도로시와 같다는 뜻일 게다. 도로시는 폭풍에 날려간 집을 타고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떨어진 이방인이다. 도로시가 당도한 곳은 도로시에게 낯선 곳이고, 도로시는 집으로의 귀환을 꿈꾸게 된다. 시인은 귀환을 열망하는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지 않고 도로시를 등장시켰다. 
지금의 도로시가 된 시인은 이상한 나라에서도 갈 곳이 없다. 도로시는 토토를 따라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게 되어 있는데, 토토는 병들었고 죽어가고 있다. 그녀가 소원하는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인데, 돌아오는 대답은 ‘이곳을 즐기’라는 구호뿐이다. 
시인은 시적 화자로 시의 문면에 나타나 자신은 지금 낯선 곳에 있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고 이곳에 있어야 할 당위성을 찾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로시를 등장시키고 죽어가는 토토와 문 없는 방과 차가운 도시 풍경을 전달할 뿐이다. 독자가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시인의 전언을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로 제공된 문자를 해독하여 그 의미를 유추하는 셈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간접 제시 방식이 쓰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바람직하다고도, 또 우려스럽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시의 한 방법 중에서 말하기가 아닌 보여주기에 충실한 시작법이며, 기존의 방식에 변화를 가하기 위한 새로운 유행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객관적․간접적 시작법이 언어에 대한 감각과 운율에 대한 존중을 앗아갔다는 점이다. 시를 읽는 이유가 문자 정보를 해독하여 하나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시를 읽는 이유는 문자의 질서와 압축 상황 그리고 소리의 질서를 구경하는 행위이다. 음성적으로 볼 때 글자들은 말과 호흡의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도록 정돈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려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묘사된 시어의 나열이라고 할지라도, 좋은 시가 된다고 장담하기는 힘들 것이다. 

8. 비극적/희극적
2000년대 시인들의 중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가 위트, 재치, 기지, 그리고 웃음이다. 어느 시대에나 정조가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은 맞서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희극적인 것이 문학에서 비교적 열등하고 소수이며 가벼운 것으로 취급되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의 정조를 불필요하게 어둡게, 그리고 무겁고, 우울하게, 그래서 슬프게,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 

0. 기지(기지(基地))
정복이네는 우리 집보다 해발 30미터가 더 높은 곳에 살았다 조그만 둥지에서 4남 1녀가 엄마와 눈 없는 곰들과 살았다 곰들에게 눈알을 붙여주면서 바글바글 살았다 가끔 수금하러 아버지가 다녀갔다

1. 독수리
큰 형이 눈뜬 곰을 다 잡아먹었다 혼자 대학을 나온 형은 졸업하자마자 둥지를 떠나 고시원에 들어갔다 형은 잡은 집을 나와서 더 작은 집에 들어갔다 그렇게 십년을 보냈다 새끼 곰들이 다 클 만한 세월이었다

2. 콘돌
둘째 형은 이름난 싸움꾼이었다 십대 일로 싸워 이겼다는 무용담이 어깨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곤 했다 형은 곰들이 눈을 뜨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둘째형 큰집에 살러 가느라 집을 비우면 작은집에서 살던 아버지가 찾아왔다

3. 백조
누나는 자주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곰같이 살아! 나는 그렇게 안 살아! 눈알을 박아넣는 엄마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나 손은 미싱을 돌리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누나는 술잔을 집었다

4. 제비
정복이는 꼬마 웨이터였다 누나와 이름 모르는 아저씨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소식을 주워 날랐다 봄날은 오지 않고 박꽃도 피지 않았으며 곰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그냥, 정복이만 바빴다

5. 올빼미
하루는 아버지가 작은집에서 뚱뚱한 아이를 데려왔다 인사해라, 네 셋째 형이다 새로 생긴 형은 말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 가지도 않았다 그저 밤중에 앉아서 눈뜬 곰들과 노는 게 전부였다 연탄가스를 마셨다고 했다

6. 불새
우리는 정복이네보다 해발 30미터가 낮은 곳에 살았다 길이 점점 좁아졌으므로 그 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차는 우리 집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불타는 곰발바닥들을 버려두고, 그렇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위의 시의 제목은 「독수리 오형제」이다. 시인은 제목에 대한 설명으로 “사실 독수리 오형제는 독수리들도 아니고, 오형제도 아니다. 다섯 조류가 모인 의남매다. 다섯이 모이면 불새로 변해서 싸운다”는 문구를 추가하고 있다. 이 시의 제명이나 추가 문구는 재미있다. 그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흥미로운 작명법이고 관찰이며 또한 용기 있는 도전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다른 장르도 아닌 시에서 위와 같은 장난은 경박한 짓으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이러한 장난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그들이 어릴 때 보았던 텔레비전 드라마, 만화 영화, 대중문화, 소문, 가십, 음담패설, 공식화하기 어려운 농담들을 거리낌 없이 시 안에, 발언 안에, 그들이 생각하는 세계관 안에 녹여내고 있다. 오히려 그러한 지적을 하는 것 자체가 약간 시대에 뒤떨어지고, 센스가 없으며, 세상을 불필요하게 무겁게 만드는 처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것은 그 이전의 시가 보여주었던 상황과 비교하면 더욱 일목요연해진다. 기형도는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고 노래했다. 병악한 아버지, 그 아버지로 인해 가중되는 불안, 그리고 누이의 신경질. 이 위험한 가계는 우울과 어두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젊은 시인에게 위험한 가계는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중략)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되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로 처리된다. 
아버지의 쓰러짐을 우울하게 보는 시선과 아버지의 쓰러짐을 우스꽝스러운 은퇴로 여기는 시선은 15년 정도의 격차를 지닌다. 거듭 말하지만 15년이 절대적 지표가 될 수 없으며, 웃음은 권혁웅 혹은 2000년대 젊은 시인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장정일과 같은 시인들은 15년 이전에도 상당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알았다. 문제는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이 견지하는 의식적 전환이다. 젊은 시인들은 시를 우습게, 즐겁게, 유쾌하게, 그리고 가볍고 대중적으로 쓰는 일에 능숙하고 또 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시와는 달리 시의 정조가 우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젊은 시들에 탄력을 주고, 새로운 시적 풍조를 열어준다. 
그럼에도 역 기능은 무시할 수는 없다. 인용된 시는 웃음과 유쾌함을 통해 가난과 유년 시절의 참담함을 잃지 않으면서, 시가 지향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많은 젊은 시들이 과연 그러한 의도를 지닌 채 창작되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채 발표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재치가 아니고, 오의(奧義)를 내재한 유머가 아니라면, 이러한 작업은 다시 점검되어야 한다. 기지와 웃음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지만, 기지와 웃음을 얻는 대가로 시적 명상과 인생에 대한 성찰을 잃는다면 이것 역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젊은 시들이 한껏 맞서야 할 장벽이 아닐 수 없다. 

9. 넓이에의 강요 혹은 욕망
시 문학은 대대로 자기 응시의 문학이었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보고, 집단을 보고, 타자를 보고, 결국에는 자신을 보았다. 우주의 질서를 찾는 경우에도,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사를 돌보고, 변하지 않는 자연의 고고함과 섭리를 보고 인간세의 욕망을 돌보았다. 북적거리면서 사는 세상을 보면서도 결국 시인이라는 존재들은, 내면이라는 자신만의 정서와 욕망과 감각 그리고 명상과 깨달음이 모인 곳으로 발길을 돌리는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관은 다소 고리타분할 수 있다. 현대로 오면서 시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면서, 과거의 시가 가지고 있는 형식적 양식적 그리고 관습적 의식 세계마저 벗어버리고자 했다. 그 추세는 근래로 오면 올수록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아니 많은 이들의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달라진 시인들의 위상을 보면서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시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할 내면이다. 시인은 겸손한 존재이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발로 자연을 걸어, 숨겨진 진리를 찾는 자들이지만, 그 진리를 말할 때는 자신의 언어와 감성으로 풀어놓아야 한다. 그래서 결국 시는 내면으로의 회귀 그리고 감성으로의 자발적인 망명을 포기할 수 없는 장르이다.

2000년대 시인들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최근 주목받는 시인들의 작품을 일부로 문면으로 끌어들였다. 2000년대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2005년 언저리가 대부분이고, 젊은 시인들이라고 했지만, 그 대부분은 새로운 경향의 시를 앞세운 현재 시단의 아방가르드 시인들이 주축이었다.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시를 통해 확인되는 몇 가지 사항을 먼저 정리하겠다.
그들의 시는 대부분 구조적이기보다는 반구조적이다. 그들은 부분이 전체를 위해 봉사하고 부분과 부분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관계 맺는 시를 거부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들의 시는 응축적이기보다는 환유적이다. 세상과 자연과 인간의 원형을 시의 구조로 본받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주변과 물상을 이어 붙이듯 시 안으로 끌어들인다. 전체적인 구조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언어와 이미지와 감각을 덜어내고 다듬어서 초점화된 하나의 정서와 의미로 귀결시키기보다는, 다성적인 목소리와 유사한 소재 혹은 삽화들의 묶음으로 시의 얼굴을 다양하게 만드는 데에 특색을 드러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도 과거의 시와는 많이 다르다. 과거의 시들은 내면의 자아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분열되고 천변만화하는 여러 개의 자아들을 하나의 자아로 통합시키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시로 올수록 자아의 분열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줄어들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과거에 이러한 시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오면서 이러한 시적 경향이 일반화되었고, 하나의 유행처럼 그 가치를 분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번져나간다는 점이 다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는 점점 길고 점점 복잡하지고 있다. 깎고 다듬어서 시의 질량을 줄이고, 줄어든 질량만큼 큰 압축을 꾀하는 과거의 시 작법과 궤도를 달리한다고나 할까. 시어는 경제적이기보다는 호화로워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세상을 담는 양식이기보다는, 최대한 많은 언어로 복잡한 이야기의 갈래와 의미의 층위를 두루 담는 양식이기를 꿈꾼다. 그러다보니 시는 자기응시의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요즘 젊은 시는 확산적이고, 자기 증식적이고, 연속적이고, 혼종적이다. 그래서 몹시 혼란하다. 시가 결국 돌아가야 하는 내면으로의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내면으로 들어가 세상에 임하는 시인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돌아보고 반추하기보다, 세상 바깥의 물상들을 언어로 포착하는 것에 더욱 큰 역점을 둔다. 세상은 넓고 화려하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많은 신기한 것들이 있고, 시인의 의식 세계를 침범하는 많은 문화적 현상이 있다. 문제는 그러한 외부적 요인들을 일일이 시가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는 그러한 외부적 현상과 물상들을 수집하는 도구이기보다, 그러한 혼란을 내면에서 걸러내고 정리한 결과여야 하지 않을까.
시인이라는 의식의 거름 장치 없이 시가 창작된다면, 시집 몇 권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의 시가 동어 반복적이고, 자기 증식적이며, 한 편의 시로 말해져야 할 것이 한 권 분량의 시집으로 말해지는 것도 동일한 이유라고 본다. 젊은 시가 우려스러운 것은 시인들이 ‘세상의 넓이’를 ‘시의 넓이’로 환원하여 받아들이려고 하고, 이러한 욕망을 거꾸로 적용하여 ‘시의 넓이’가 곧 ‘세상의 넓이’라고 맹신하고 그 넓이만으로 시 의식을 측정하려는 전도된 인식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넓이에의 (자발적인) 강요’는 한편으로는 미덕이지만, ‘깊이에의 천착’을 가로막는다는 대단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시를 사랑하는 이가 어떤 시집을 열었을 때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더욱 복잡한 언어로 늘어놓고, 이미 알고 있는 사물의 질서를 깨달음 없는 범안(凡眼)으로 재반복하고 있으며, 읽고 나서 읽는 감촉을 음미하거나 시간의 우물 속에서 저장될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시를 잘 썼다고, 그러한 시를 계속 써야 한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나의 시관이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요즘 젊은 시는 넓이에의 강요를 못이기는 순간 소모품이 되고 만다. 그때 그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과 단편적인 정보들을, 때로는 웃음이나 금기시되는 생각들을, 기발한 착상이나 재기발랄한 감각들을, 시를 통해 확인하고 넘어갈 뿐, 세상과 사물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기억할 만한 깨달음이나 명상의 화두 혹은 언어의 미감 등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재치는 시가 아니며, 놀이도 시가 아니며, 현학이나 발견 혹은 혼자만의 독백도 시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다. 시는 자신을 통해 자신 바깥을 보고, 자신의 바깥을 돌아 내면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열 때만, 그 통로를 열 정도로 깊이 있는 숙고를 내놓을 수 있을 때에만 시가 된다. 아니 좋은 시가 된다.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비평의 교향악 등
․부경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추천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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