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4호 번역소설(구니기타 돗포)/김영식
페이지 정보

본문
|번역소설|
구니기타 돗포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김영식|수필가
다마천(多摩川)의 후타고(二子) 다리를 건너 조금 가면 미조구치(溝口)라는 역참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의 중심가에 가메야(龜屋)라는 여관이 있다. 3월초의 흐린 하늘에 북풍이 강하게 불어, 그렇지 않아도 한적한 마을이 한층 더 음울하고 싸늘한 풍경을 보이고 있다.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남아있어, 늘어선 초가지붕의 남쪽 처마 끝으로 눈 녹은 물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고 있다. 땅에 찍힌 발자국에 고인 물에서도 차가운 느낌의 잔물결이 일고 있다. 날이 저물자마자 대부분의 점포는 문을 닫아버렸다. 어두운 거리가 적막에 잠겼다. 가메야는 여관이므로 아직 등불이 환히 비치고 있었으나, 오늘밤은 손님도 그리 없는 듯 안쪽도 조용하여 간간이 담뱃대로 화로 테두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돌연 대문을 열고 한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화로에 기대어 상념에 빠져있던 주인이 놀라 그쪽을 바라보기도 전에, 넓은 마당을 서너 걸음 크게 걸어와 주인 앞에 우뚝 선 남자는 서른 살이 조금 안 되게 보이고, 양복, 각반, 짚신을 갖춘 여행차림으로 도리우치모자를 쓰고 오른손에는 우산을 들고 왼쪽 옆구리에는 가방을 끼고 있었다.
“방 하나 주쇼.”
주인은 손님의 모습을 바라볼 뿐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때 안에서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6번 손님이 부르신다!”
주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어디 분이시지요?”
주인은 화로에 기댄 채로 물었다. 손님은 어깨를 치켜세우고 잠시 얼굴을 찡그렸으나 곧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저요? 저는 도쿄”
“그럼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하치오지(八王子)에 갑니다.”
손님은 그곳에 걸터앉아 각반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손님, 도쿄에서 하치오지로 가신다니 방향이 좀 이상하네요.”
주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손님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쳐다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한 어투로 말했다. 손님은 무슨 말인지 곧 알아차렸다.
“아뇨. 집은 도쿄이지만, 오늘 도쿄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오늘 느지막하게 가와사키(川崎)를 출발해서 이렇게 날이 저물어버렸군요. 발 씻을 물 좀 주시죠.”
“얘야, 어서 대야에 따신 물 좀 가져오너라. 오늘은 꽤 추웠죠? 하치오지 쪽은 훨씬 더 추울 겁니다.”
주인의 말에는 애교가 있어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극히 애교가 없었다. 나이는 육십 정도로, 비만한 체구에 두터운 솜옷을 입고 있으므로 어깨에서 곧바로 머리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고, 넙적하게 살진 얼굴에 처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왠지 성격이 까다로운 느낌이 들었지만 정직한 영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님이 발을 씻은 후 아직 발을 다 닦지도 않았는데, 주인이 외쳤다.
“7번으로 안내해드려라!”
주인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손님에게 인사말도 하지 않았고, 방으로 가는 손님의 뒷모습을 지켜보지도 않았다. 검은 고양이가 주방 쪽에서 걸어와 살며시 주인의 무릎 위로 올라가 웅크리고 앉았다. 주인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에, 오른손이 담배상자 쪽으로 움직여 그 굵은 손가락이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6번 손님 목욕 끝나시면 7번 손님 안내해드려라.”
무릎의 고양이가 깜짝 놀라 뛰어 내려갔다.
“바보! 네 놈에게 말한 게 아니야.”
고양이는 후다닥 주방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벽시계가 느리게 8시를 쳤다.
“할멈, 기치조(吉藏)가 졸린 것 같은데, 빨리 이불난로 넣어주고 재우지. 가엾게도…….”
주인 목소리가 졸린 듯했다.
“기치조는 여기서 복습하고 있어요.”
주방 쪽에서 난 소리는 할멈 같았다.
“그래? 기치조야, 그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복습하거라. 할멈, 빨리 난로 넣어주고.”
“지금 곧 넣어줄 거예요.”
부엌 쪽에서 하녀와 할멈이 얼굴을 마주보고 쿡쿡 웃었다. 문 쪽에서 하품 소리가 크게 났다.
“지가 졸린 거지.”
오십을 대여섯 넘은 듯한 작은 체구의 노모가 그을린 이불난로에 숯불을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입구의 문이 바람에 덜컹거리는가 싶더니 후드득 비가 몰아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문 꼭 닫아라.”하고 주인은 소리친 후 혀를 차면서, “또 내리는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연 바람이 아주 세지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 듯하였다.
초봄이라고 하지만, 차가운 진눈깨비가 섞인 바람이 광활한 무사시노(武藏野) 평야를 휩쓸고 와 밤새도록 어두운 미조구치 거리를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7번방에서는 12시가 넘도록 등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가메야에서 아직 잠들지 않은 자는, 이 방 한가운데에서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손님뿐이었다. 문밖은 비바람소리가 요란하고 창문은 계속 울고 있었다.
“이 모양으로는 내일 출발은 무리군요.”
한 사람이 상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는 6번방 손님이었다.
“뭐, 별로 용무도 없으니 내일 하루 정도 여기서 지내도 되죠.”
두 사람 다 붉은 얼굴에 코끝이 번들거렸다. 옆의 상 위에는 술병이 3개 놓여 있고, 잔에는 술이 남아 있었다. 둘 다 기분 좋은 듯 편한 자세로 앉아 화로를 가운데에 두고 담배를 피웠다. 6번 손님은 잠옷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담뱃재를 털고 다시 피우기를 반복했다. 둘의 대화 모습은 극히 솔직하긴 하지만, 오늘 저녁 처음 이 여인숙에서 만나, 어떤 계기로 두세 마디 칸막이 너머의 대화를 하다가, 외로웠든지 6번 손님이 건너와서 명함을 교환하자마자 술을 시키고 대화에 빠져들더니 언제부터인가 정중한 말과 반말을 섞어 사용하게 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7번 손님 명함에는 오오츠 벤지로(大津辨二郞)라고 쓰여 있었다. 직함 같은 것은 쓰여 있지 않았다. 6번 손님 명함에는 아키야마 마쓰노스케(秋山松之助)라 쓰여 있고, 여기에도 이름만 쓰여 있었다. 오늘밤에 도착한 양복차림의 남자가 오오츠이다. 마른 체형과 흰 얼굴은 상대방 아키야마와는 대조적이었다. 아키야마는 스물대여섯 살로, 둥글게 살이 붙은 붉은 얼굴로, 눈웃음을 치며 항상 웃는 표정이었다. 오오츠는 무명의 문학자이고 아키야마는 무명의 화가로 우연히도 같은 종류의 청년이 이 시골의 여인숙에서 만난 것이었다.
“이제 잘까? 욕도 많이 한 것 같군.”
미술론에서 문학론, 종교론까지 둘은 제멋대로 현세의 유명한 문학자와 화가를 신랄하게 비평하며 11시 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아직 괜찮아. 어차피 내일은 글렀으니까 밤새도록 떠들어도 상관없어.”
화가 아키야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몇시지?”
오오츠는 풀러놓았던 시계를 보았다.
“어, 벌써 11시가 넘었군.”
“어차피 철야네.”
아키야마는 태평이었다. 술잔을 내려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가 자고 싶다면 자도 좋네.”
“전혀 안 졸려. 자네가 피곤할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오늘 늦게 가와사키를 떠나 3리반 정도 길을 걸었을 뿐이니 아무렇지도 않지만.”
“뭐, 나도 아무렇지도 않아. 자네가 잔다면 이걸 빌려가서 읽어보려고 생각했네.”
아키야마는 10매 정도의 원고 같은 것을 들어보였다. 그 표지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건 정말 안 되네. 그러니까 자네 경우로 치자면 연필로 스케치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 남이 봐도 몰라볼 걸세.”
오오츠는 아키야마의 손에서 그 원고를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키야마는 한두 매를 펼쳐서 대충 읽어보았다.
“스케치도 스케치 나름의 재미가 있으니 좀 보고 싶네.”
“글쎄, 일단 돌려줘봐.”
오오츠는 아키야마의 손에서 원고를 빼앗아 여기저기를 들춰보고 있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밖의 비바람소리가 이때 새삼스럽게 두 사람의 귀로 들어왔다. 오오츠는 자기가 쓴 원고를 바라본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멍하게 있었다.
“오늘 같은 밤은 자네 소관일세.”
아키야마의 목소리는 오오츠의 귀에 들리지 않은 듯하였다. 대답도 없었다. 비바람소리를 듣고 있는지 원고를 보고 있는지, 혹은 백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카야마는 마음속으로 오오츠의 지금의 얼굴, 지금의 눈매는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자네가 이것을 읽는 것보다는 내가 내용을 말해주는 것이 좋을 듯하네. 어때, 자네 들어보겠나? 이 원고는 아주 대략만 써놓은 것이니 읽어도 모를 테니.”
꿈에서 깨어난 듯한 눈으로 오오츠는 아키야마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말해준다면 더욱더 좋지.”
아키야마가 오오츠의 눈을 보니, 오오츠의 눈은 약간 촉촉해져 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급적 상세하게 말해주지. 재미없으면 주저 없이 말해주게. 그 대신 나도 거리낌 없이 말하지. 왠지 내 쪽에서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기분이 되어 묘하군.”
아키야마는 화로에 숯을 넣고 철제 용기 안에 식은 술병을 넣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란 잊어서는 아니 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보게, 내 원고의 처음에 써넣은 것이 이 말이지.”
오오츠는 잠시 아키야마 앞에 그 원고를 내밀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이 말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생각하네. 그러면 자연히 이 글의 주제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그런데 자네도 대략 무슨 말인지 알 것이라고 생각하네만.…….”
“그런 말 하지 말게. 어서 말해보게. 나는 평범한 독자의 자세로 들을 테니. 실례지만 옆으로 누워 듣겠네.”
아키야마는 담배를 물고 옆으로 누웠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오오츠의 얼굴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부모나 자식, 또는 친구와 지인 그밖에 은혜를 입은 선생님과 선배 같은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 단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잊어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지. 그런데 그런 은혜와 사랑의 인연도 없고 의리도 없는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 솔직히 말해 잊어버렸다고 해서 인정이나 의리도 관계없지만, 이상하게 끝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내게는 있어. 아마 자네에게도 있을 걸.”
아키야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19세 때의 봄이라고 기억하는데, 몸이 좀 좋지 않아 잠시 요양할 생각으로 도쿄의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때의 일이었어. 오사카에서 세토나이(瀨戶內)를 오가는 기선을 타고 파도 잔잔한 봄날의 세토나이해(瀨戶內海)를 항해하였는데, 벌써 십여 년이 넘은 옛날 일이니 내가 그때 함께 탄 승객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선장은 어떤 남자였는지, 차를 나르는 급사 얼굴은 어떠했는지, 그런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아마 내게 차를 따라준 승객도 있던 것 같았고, 갑판 위에서 잡담을 나눈 사람도 있던 것 같으나, 아무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네.
그때는 건강이 좋지 않아 그다지 들뜬 마음도 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음에 틀림없었지. 갑판 위로 나와 장래의 꿈을 꾸거나 당시의 내 신세 등을 생각하고 있던 것은 기억나네. 물론 젊은이들의 습관으로 그런 모습은 이상할 것도 없지. 그곳에서 나는 봄날의 화창한 햇빛이 기름처럼 해면에 녹아들고 파도도 잔잔한 바다를, 배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물을 가르며 나아감에 따라, 안개에 쌓인 섬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좌우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지. 유채꽃과 보리의 파란 새싹이 어우러져 꼭 비단을 깐 듯한 섬들이 마치 안개 속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어. 잠시 후 배 오른쪽으로 작은 섬 하나가 나타났는데, 배와 섬의 거리가 가까워 나는 난간에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그 섬을 바라보고 있었지. 산기슭 여기저기에 키 작은 소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을 뿐, 밭도 없고 집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어. 썰물이 빠진 적막한 갯벌이 햇빛에 빛나고, 잔잔한 파도가 해안을 어루만지고 있는 듯 긴 해안선이 칼날처럼 번뜩거리고 있었지. 산 위 하늘 높이 종달새가 울고 있어 그 섬이 무인도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어. ‘논밭이 있는/섬인 걸 알 수 있네/높이 뜬 종달새 (田畑ある島と知れけりあげ雲雀)’ 이것은 내 부친이 지은 하이쿠인데 산 너머에는 틀림없이 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때 햇빛에 빛나는 갯벌에 사람이 하나 눈에 들어왔어. 분명 남자이고 아이는 아니었지. 뭔가 자꾸 주워서 망태인지 통 같은 것에 담고 있는 듯했어. 두세 걸음 걷고는 쭈그려 앉아 뭔가를 줍곤 했어. 나는 적막한 섬 그늘의 작은 해변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지. 배가 점차 멀어지자 그 사람은 검은 점처럼 보였어. 그러는 중에 해변과 산, 섬 전체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그 후 오늘까지 거의 10년 간, 나는 몇 번이나 그 섬 그늘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떠올랐는지 모르네. 그가 나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한 사람일세.
그 다음은 지금부터 5년쯤 전에 정월 초하루를 고향집에서 보내고 곧바로 규슈(九州)로 여행을 떠나, 구마모토(熊本)에서 오이타(大分)로 규슈를 횡단하던 때의 일이었네.
나는 아침 일찍 동생과 함께 짚신에 각반을 하고 기운차게 구마모토를 출발했어. 그날은 아직 해가 중천에 뜬 가운데 다테노(立野)라는 역참 마을까지 걸어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지. 다음날 아침 일찍 해가 뜨기도 전에 다테노를 떠나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던 아소산(阿蘇山)의 흰 연기를 쳐다보며, 서리를 밟고 다리를 건너 길을 잘못 들기도 하면서 이윽고 정오 때에 정상 가까이 올라, 분화구에 이른 것은 1시가 넘었을 거야. 구마모토 지방은 따뜻한데다가 바람 한 점 없이 맑게 갠 날이어서 겨울이지만 6000척의 고지도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어. 정상에는 분화구에서 분출되는 수증기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으나, 그 밖으로는 산에 눈은 거의 보이지 않고 단지 마른 풀이 하얗게 바람에 흔들리고, 타버린 흙이 붉고 검은 색을 띠고 절벽을 이루어 구(舊)분화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그 황량한 광경은 글과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이를 묘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네의 소관이라고 생각하네.
우리는 일단 분화구 주위까지 올라가 한동안 굉장히 큰 분화구를 들여다보고 사방의 대장관을 한껏 즐기고 있었으나, 과연 정상은 바람이 차서 견딜 수 없었어. 분화구에서 조금 내려가 아소신사 옆에 엽차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는 작은 산장이 있어, 그곳으로 피신하여 주먹밥을 먹고 기운을 다시 내서 분화구까지 올라갔어. 그때는 해가 벌써 많이 저물어 비고(肥後) 평야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붉게 타, 흡사 그곳에 보이는 구(舊)분화구의 절벽과 같은 색으로 물들었어. 군봉 사이로 원뿔형으로 높이 솟아오른 구쥬령(九重嶺) 기슭의 고원에 가득한 마른풀이 석양에 물들고, 공기가 물처럼 맑아 사람과 말이 지나는 것도 보일 듯하였지. 막막한 하늘과 땅, 게다가 발밑에는 굉장한 소리를 내며 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똑바로 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이내 꺾여 봉우리를 스쳐지나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어. 장엄하다 해야 하나,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우리는 묵연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시 석상처럼 서 있었지. 이때 천지의 끝없음, 불가사의한 인간존재에 대한 생각 등이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네.
그런데 가장 우리의 마음을 끈 것은 구쥬령(九重嶺)과 아소산 사이의 커다란 분지(盆地)였어. 그곳은 예로부터 세계 최대의 분화구 유적이라고 하는데 과연 구쥬령의 고원이 가파르게 파여 몇 리에 걸친 절벽이 그 분지 서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 눈앞에 확연히 보였어. 난타이산(男體山)의 분화구는 풍광이 아름답고 조용한 추젠지호(中禪寺湖)가 되었으나, 그 대분화구는 언제부터인가 오곡이 열리는 수천 정보(町步)의 전원으로 바뀌어 마을 여기저기의 나무숲과 보리밭이 저녁 해에 조용히 빛나고 있었지. 우리가 그날 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달콤한 잠을 자게 될 미야지(宮地)라는 역참 마을도 그 분지에 있는 것이라네.
아예 산 위의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분화구의 야경을 보자는 말도 둘 사이에서 나왔으나, 일정이 촉박하여 결국 산을 내려오기로 하고 미야지를 향해 내려갔지. 하산길은 등산길보다 훨씬 경사가 완만하여, 산 능선과 계곡의 마른풀 사이를 뱀처럼 굽어진 길을 서둘러 가니, 마을에 가까워짐에 따라 마른풀을 등에 진 말 몇 마리를 지나쳤어.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저곳의 능선 좁은 길에 낭랑한 방울 소리에 석양을 받으며 사람들과 말들이 산 밑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지. 말들은 모두 마른풀을 등에 지고 있었지. 산기슭은 바로 밑에 보이는데도 한참을 걸어도 마을이 나타나지 않아, 해가 저물기도 하여 우리는 걸음을 빨리 하다가 나중에는 뛰어갔네.
마을에 도착한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저녁 어둠이 으스름한 때였어. 마을의 저녁은 활기로 넘쳐 어른들은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기에 바쁘고,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담 그늘과 화덕의 불빛이 보이는 집 앞에 모여 웃고 떠들고 울고 하고 있었지. 이것은 어느 시골도 다를 바 없으나, 나는 황량한 아소산 초원에서 뛰어내려와 돌연 이 인간 세상에 던져진 그때만큼, 그런 광경에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네. 둘은 지친 발을 끌고 날이 저물어 길이 멀다고 느끼면서도 애틋한 심정으로 미야지를 그날 밤의 목표로 하여 걸었지.
마을 하나를 벗어나 숲과 밭 사이를 한동안 걷자 해는 완전히 저물어 둘의 그림자가 확연히 땅 위로 비치게 되었어. 뒤돌아서서 서쪽하늘을 쳐다보니 아소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 봉우리 오른쪽에 새로 나온 달이, 맑은 푸른색을 띤 물과 같은 빛으로 분지 일대의 마을을 제 세상인 양 비치고 있었지. 문득 뭔가 보이는 느낌에 하늘을 쳐다보자, 대낮에는 새하얗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달빛을 받아 회색으로 물들어 청색 유리 같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 참으로 굉장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였어. 길이보다는 너비가 더 긴 다리에 이르러, 그 난간에 기대어 지친 다리를 쉬면서 둘은 분연(噴煙)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마을 사람의 말소리를 듣고 있었네. 그러자 둘이 지금 걸어온 길 쪽에서 덜커덩거리는 빈 수레 소리가 숲으로 메아리쳐 허공에 울려 퍼지며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확연히 들리기 시작하였네.
잠시 후 낭랑하게 맑은 소리의 마부가(馬子唄)가 빈 수레 소리와 함께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 나는 분연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이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지.
사람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미야지는 좋은 곳이네 아소산 기슭’이라는 속요(俗謠)를 길게 끌며 부르는데, 우리가 서있는 다리까지 들려온 그 속요의 뜻과 비장한 음이 얼마나 나를 감동시켰던가. 스물너덧으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고삐를 잡아끌며 우리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 저녁달빛을 뒤로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옆얼굴도 명확히 보이지 않았으나 건장한 체구의 검은 윤곽이 지금도 내 눈에 또렷이 보이는 듯하네.
나는 멀어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후 다시 아소산의 연기를 쳐다보았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또 한 사람은 바로 그 청년이라네.
그 다음은 시고쿠(四國)의 미쓰가하마(三津ケ濱)에서 하룻밤을 묵고 기선(汽船)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네. 초여름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아침 일찍 여관을 나왔으나 기선은 오후에 온다고 하기에 항구의 해변과 마을을 거닐었지. 마쓰야마(松山)가 가까우므로 이 항구는 크게 번성하여, 특히 아침에는 어시장이 열렸는데, 어시장 근방은 매우 번잡하였어. 하늘은 말끔히 개여 아침햇살은 환히 빛나, 빛나는 것에는 반사를 주고, 색 있는 것에는 빛을 더하여 번잡의 광경을 더욱더 현란하게 하고 있었지. 외치는 자 부르는 자, 웃음소리 하하 한쪽에서 일어나면, 저쪽에 환호와 욕설이 섞여 일어나는 모습으로, 파는 자 사는 자, 남녀노소, 모두 뭐가 그리 바쁘고 재미있고 기쁘다는 것인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어. 노점이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파는 게 무어냐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먹고 있는 자는 대개 뱃사람들이었네. 도미와 광어와 장어, 문어가 그곳에 널려 있었지. 사람들이 설쳐대는 소매와 옷깃에 비린내가 풀풀 일어나 코를 찔렀지. 나는 외지 사람이라 그 지방에는 전혀 연고가 없으니 당연히 아는 사람이 없었지. 그곳에 있으니 왠지 그러한 광경이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세상의 모습이 한층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였어. 나는 거의 나 자신을 잊고 이 번잡 속을 하릴없이 거닐다가 비교적 조용한 어떤 길로 나왔다네.
그러자 곧 내 귀에 들어온 것은 비파(琵琶)소리였어. 저쪽 가게 앞에 한 비파승이 서있었네. 나이는 사십을 오륙 세 넘긴 듯하였고, 폭이 넓은 사각의 얼굴에 키가 작은 살찐 남자였네. 그 얼굴색, 그 눈빛은 마치 슬픈 듯한 비파음에 어울렸고, 그 흐느끼는 듯한 현의 소리에 따라, 노랫소리는 낮고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네.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도 이 스님을 돌아보지 않았고, 집안의 사람들도 아무도 이 비파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어. 아침 해는 환하고 속세는 바쁜 풍경이었네.
그러나 나는 가만히 이 비파승을 바라보며, 비파소리에 귀를 기울였네. 폭이 좁은 길의 처마 끝은 들쑥날쑥한, 바쁜 거리의 광경이 이 비파승, 비파소리와는 조화되지 않은 모습이면서도 어딘가에 깊은 인연이 있는 듯하게 느껴졌어. 오열하는 비파음이 거리를 떠돌다 장사꾼의 큰소리와 시끄럽게 깡깡 하는 대장간 소리에 섞여, 별도로 한 줄기의 맑은 샘물이 탁한 물결 사이를 흐르는 듯한 소리가 되어 들리는데, 기쁘고 들뜨고 재미있고 바쁘다는 듯한 얼굴을 한 거리의 사람들 마음속의 현(絃)이 자연의 곡조를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한 사람은 바로 그 비파승이었네.
여기까지 이야기한 오오츠는 원고를 밑에 놓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문밖 비바람소리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키야마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이제 그만 하지, 너무 밤이 깊었으니. 아직 몇 개 더 있지. 홋카이도 우타시나이(歌志內) 탄광의 광부, 대련만(大連灣)만의 청년어부, 반쇼천(番匠川)의 곱사등이 사공 등. 내가 하나하나 이 원고에 있는 것을 상세히 말하자면 밤이 샐 걸세. 어쨌든 내가 왜 이들을 잊을 수가 없는가 하는 것은 생각이 나기 때문이지. 왜 내게 생각나는 것인가. 나는 그것을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거지. 즉, 나는 끊임없이 지금의 인생 문제에 괴로워하면서 또 내 장래의 큰 꿈에 압박되어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는 불행한 남자라네. 그래서 나는 오늘 같은 밤에 혼자 밤늦게 등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인생의 고독을 느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심정이 되네. 그때 내 이기심의 뿔은 뚝 부러져버려, 왠지 사람이 그리워지네. 옛날 일과 친구가 생각나지. 그때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네. 아니, 그 사람들을 본 때의 주위 광경 속에 서있는 그 사람들이네. 아(我)와 타(他) 사이에 어떤 다름이 있겠는가. 모두는 이승에서 어느 하늘, 어느 땅 한구석에 자리 잡고 머나먼 행로를 걸어가, 서로 손잡고 무궁한 하늘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것이 가슴속 깊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 적이 있네. 그때는 실로 아(我)도 아니며 타(他)도 아닌, 단지 모두가 그립고 애틋하다네. 나는 그때만큼 마음의 평온을 느낀 적이 없다네. 그때만큼 자유를 느낀 적이 없네. 그때만큼 명리경쟁(名利競爭)의 속념이 사라지고 모든 것에 대한 동정이 깊어진 때가 없어. 나는 어쨌든 이 제목으로 내 마음껏 한번 써보려고 생각하네. 내게 동감하는 자 반드시 세상에 있으리라 믿네.”
그 후 두 해가 지났다. 오오츠는 어떤 일로 도호쿠(東北)의 어느 지방에 살고 있었다. 미조구치의 여관에서 처음 만난 아키야마와의 교제는 끊어졌다. 마침 오오츠가 미조구치에 묵었던 때와 같은 시기로, 비 오는 밤의 일이었다. 오오츠는 혼자 책상을 마주하고 명상에 빠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2년 전 아키야마에게 보여준 원고인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이 놓여 있고, 그 마지막 부분에 추가로 써놓은 것은 ‘가메야의 주인’이었다. 아키야마가 아니었다.
김영식
․1962년 부산 출생
․2002년 ≪리토피아≫ 수필 등단
․번역서 기러기[雁](모리오가이)
․‘일본문화연구’ 사이트 운영자(http://hobbian.netian.com)
추천20
- 이전글24호 신작특집/장이지 08.03.01
- 다음글24호 신작단편/배지영 0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